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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경훈목사의 설교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마경훈목사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 /시편 125:1-5
(설교자; 마경훈목사, 비전교회)
https://www.youtube.com/watch?v=WMBRaxjUOu0&t=135s
저는 20대 초반에 신학교 1학년을 마치고 군에 입대하여 수도방위사 30경비단에 배치되었습니다. 주 임무는 청와대 경비였습니다. 3개월 씩 부대생활과 북악산에서의 OP 생활이 반복되었습니다. OP에서는 제가 몇몇 믿는 병사들을 모아놓고 예배를 인도했습니다. 설교도 제가 했습니다. 3개월간 그렇게 예배를 드리다가 CP로 내려가면 큰 식당에서 부대 내 믿는 모든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예배를 드리는데, 저는 그 예배가 얼마나 기다려졌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 예배가 얼마나 감격스러운 예배였는지 모릅니다.
본문이 기록될 당시 시인과 유대인들은 정말 감격스러운 예배를 드렸을 것입니다. 성경학자들은 시편 125편을 바벨론 포로에서 예루살렘에 되돌아온 유대인 중에서 누군가가 썼을 것으로 봅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 백성들에게 끌려가서 살다가 70년 만에 귀환하였습니다. 아마도 일제치하에서 해방된 우리 국민들보다 더 감격스러운 순간이었을 것 같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하나님을 예배할 때의 감격이 얼마나 대단했겠습니까? 그때 그들은 하나님만 의지하기로 결심을 한 것 같습니다. 시편 125편에는 그들의 그런 결심이 실려 있습니다.
본시는 1절에서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이라고 시작합니다. 시인은 여호와를 의지하는 사람을 2절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3절에서는 ‘의인’으로, 4절에서는 ‘선한 자들과 마음이 정직한 자들’로, 5절에서는 ‘이스라엘’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신약적인 개념으로는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입니다. 우리는 의인입니다.
유대인들은 바벨론에 포로가 되기 전에 하나님을 버리고 의지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의지했습니다. 렘 2:13입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유대인들이 바벨론에 의하여 망하고 포로 되기 직전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두 가지 악을 행했습니다. 하나는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웅덩이를 팠는데, 그 웅덩이는 물을 저축할 수 없는 터진 웅덩이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바벨론에 밀리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애굽에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들은 군사력을 의지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망하고 바벨론에 포로가 되었습니다.
신앙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자기 의나 자기 능력이나 자기가 가진 어떤 것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외에 어떤 것, 어떤 능력도 의지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의지합니다. 다윗은 오직 하나님만 의지했습니다. 시 20:7입니다.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다윗은 군사력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을 기뻐하셨고 다윗과 함께 하셨고 다윗에게 힘과 능력이 되어주셨습니다.
알바트로스라는 새가 있습니다. 이 새는 새 중에서 가장 오래 사는 새입니다. 평균 40-50년 살고 길게는 80년도 삽니다. 이 새는 아주 오래 날고, 멀리 납니다. 하루에 약 800㎞ 정도를 날 수 있습니다. 하루에 서울에서 부산을 왕복하는 것이죠. 두 달도 안 되는 기간에 지구를 일주하고, 날개를 퍼덕이지 않는 활공만으로 6일을 비행할 수 있습니다. 잘 믿겨지지 않는 것은 비행에 익숙해진 어린 알바트로스는 여행을 떠나는데, 번식할 준비가 될 때까지 육지에 착륙하지 않는답니다. 그 기간이 10년에 이르는 경우도 있답니다. 설마? 이 새가 멀리 날고 오래 날 수 있는 비결이 뭘까요? 이 새가 하늘의 힘을 타기 때문입니다. 이 새의 날개 길이는 3미터 정도 됩니다. 발견된 가장 큰 새의 양 날개를 편 길이가 약 3.4m나 된답니다. 제 키의 두 배는 되네요. 이 새는 날 때의 에너지의 10%는 자기의 힘이고 나머지 90%는 바람의 힘이랍니다. 바람의 힘으로 나니 힘이 들지 않아요. 그래서 오래 날 수 있고, 멀리 날 수 있고, 에너지 소비가 적으니까 오래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자 이름이 신천옹입니다. 믿을 信, 하늘 天, 늙은이 翁자를 습니다. 하늘을 믿고 나는 새입니다.
이 새와 비교 되는 새가 있습니다. 벌새입니다. 벌새는 참새보다 작습니다. 약 6cm 정도의 크기입니다. 제 새끼손가락보다 약간 작으니 얼마나 작은 새입니까? 벌새는 날개 짓을 1초에 80번 정도합니다. 벌새는 알바트로스처럼 바람을 타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기 힘으로만 납니다. 그러니 벌새는 멀리 날 수도 없고, 오래 날 수도 없습니다. 전깃줄에 앉았다가, 울타리에 앉았다가, 땅 바닥에 앉았다가 10미터를 못 날아갑니다.
유대인들은 벌새처럼 자기 힘으로만 살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헛된 것들을 의지하며 살려고 발버둥 쳤습니다. 그런데 고난이 복이었습니다. 바벨론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은 어려움을 당한 후에야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사는 것이 지혜로운 삶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여러분! 내 힘으로 살려고 하면 오래 못 갑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살아야 오래 갑니다.
시 28:7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이시니 내 마음이 그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그를 찬송하리로다” 시인은 하나님을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그의 힘과 방패가 되셨습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살펴보겠습니다.
1. 요동하지 않습니다.
1절입니다.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 시온 산은 640-770m 높이의 산악으로 되어 있고, 산꼭대기는 성곽에 둘러싸인 도시입니다. 성벽의 평균 높이는 17m이고, 성곽의 둘레는 4km입니다. 오늘 날은 성곽 안에 구 도시가 있고 성곽 밖에 신도시가 건설되어 있습니다. 시온산은 다윗성이라고 부릅니다. 그 이유는 3,000년 전에 다윗이 왕이 되어 그 곳을 중심으로 왕위를 견고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시온산은 시온성이라는 이름이 붙여지기 전에도 그 자리에 있었고, 약 3천 전, 다윗 시대에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현재도 있습니다. 시온산은 그동안 수많은 사건들, 수많은 굴곡이 있었지만 여전히 그 자리에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시온산은 많이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겉모습만 그런 것입니다. 산에 있는 나무들이 흔들리면 산이 흔들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산은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듯이 시온산은 요동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요동하지 않습니다.
신앙인은 에수 그리스도라는 반석 틈에 서있기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출애굽기 33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모세에게 보여주셨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간 사이에 아론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놓고 경배했습니다. 그 일로 하나님이 진노하셨는데 모세의 중보기도로 용서 받았습니다. 모세는 회막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때에 구름 기둥이 내려 회막 문에 서며 여호와께서 모세와 친구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원하건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하나님의 얼굴을 보여주실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는 살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싶다는 모세를 반석 틈에 세우셨습니다. 출 33:22입니다.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하나님의 영광이 지나갈 때에 하나님이 손으로 모세를 덮어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손을 거두니 모세는 하나님의 얼굴은 보지 못하고 등만 보았습니다.
이와 비슷한 사건이 열왕기상 19장에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엘리야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때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셨습니다. 바람 후에 지진이 있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셨습니다. 왕상 19:12입니다.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하나님은 엘리야 앞에 불이 지나가게 하셨으나 불 가운데도 계시지 않으셨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세미한 소리로 엘리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우리의 영원한 반석이십니다. 우리의 인생에 바람이 불고, 지진이 일어나고, 불이 붙어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한 우리는 요동하지 않습니다. 믿음의 배짱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은 사자굴에 들어가는 상황 속에서도 담대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했기 때문에 요동하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풀무불에 들어가야 하는 상황에서도 담대했습니다. 그들도 하나님을 의지했기 때문에 믿음의 배짱이 생겨 요동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염려는 흔들의자와 같다.”라는 글을 읽었습니다. 흔들의자에 앉아서 흔들어 보세요. 아무리 오래 흔들어도 앞으로 가지 않고 제자리입니다. “염려는 흔들의자와 같다.”라는 말은 아무리 염려해도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저는 이 비유를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에게 적용해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은 흔들의자가 흔들리는 것처럼 많은 문제와 사건과 사고가 발생해도 언제나 믿음의 자리에 있습니다. 늘 그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요동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혹시 지금 여러분이 처한 상황 때문에 두렵습니까? 불안합니까? 여러분의 신앙이 흔들립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반석 되시는 주님 안에 거하십시오. 태풍이 불어도, 지진이 일어나도, 불 같은 시험이 있어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요동하지 않고 견고하게 섭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2. 하나님이 책임지십니다.
2절입니다. “산들이 예루살렘을 두름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두르시리로다” 지정학적으로 예루살렘은 사방으로 산들이 두르고 있는 천해의 요새입니다. 산들이 예루살렘을 두르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을 두르십니다. 지키십니다. 보호하십니다.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책임지십니다.
마 6:26입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주님은 먹는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조류학자들에 의하면 완전히 구분되는 새의 종(種)이 약 일만 종이랍니다. 지구상에 서식하는 모든 새의 수는 1천억에서 4천억 마리로 어림잡습니다. 편차가 큰 이유는 지구상의 새를 정확하게 계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인간들이 이 많은 새에게 모이를 주어야 한다면 일 년 농사한 곡식을 다 풀어도 부족합니다. 그러나 새들은 인간들의 도움 없이 잘 먹고 삽니다. 새들은 농사를 짓지 않고, 곡식을 거두어 창고에 저장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내일 양식을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누가 새들을 먹이실까요? 예수님은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공중의 새들을 먹이신다면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들의 먹고 사는 문제를 소홀히 여기시겠습니까?
눅 12:24입니다.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예수님께서 비유하신 새는 까마귀입니다. 그때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청중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강조하시려고 그들에게 까마귀를 예로 드신 것입니다. 레위기 11장을 보면 까마귀는 선민 이스라엘 자손이 먹을 수 없는 가증한 새입니다. 하나님은 율법에서 가증히 여기는 까마귀조차 먹이십니다. 그런즉 성도님들은 어떤 문제든지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하라는 메시지입니다.
마 6:28입니다.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의복을 위해 염려하는 자들에게 들의 백합화를 예로 들어 설명하셨습니다. 백합화라고 번역한 이 꽃은 이스라엘의 들판에 흔히 자생하는 아네모네입니다. 이 꽃은 흔한 들풀에 불과하지만 솔로몬의 왕복보다 더 화려하고 곱습니다. 들풀은 수명이 길지 못하여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고 말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들풀조차도 소홀히 여기지 않으시고 최상의 옷을 입혀주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 된 성도들이야 얼마나 더 귀하게 보살펴 주시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무든 염려를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을 책임져주십니다.
유대인 랍비 아키바의 이야기 중 하나입니다. 여우가 강을 따라 걷는데 물고기들이 어딘가 바쁘게 움직이는 것을 보고 물었습니다. “너희들은 뭐가 그리 바쁘냐?” 물고기들이 대답했습니다. “어부들이 그물을 들고 쫓아와서 그래.” 배가 고픈 여우는 꾀를 내어 물고기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부가 그렇게 무섭다면 육지로 올라오지 않을래? 내가 아주 안전한 곳을 알고 있거든” 그러자 물고기가 비웃으며 말했습니다. “어리석은 여우 녀석 같으니. 물고기에게 물속보다 더 안전한 곳이 있겠니?” 여러분!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책임져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품보다 안전한 곳은 없습니다.
3. 성결한 삶을 삽니다.
3절입니다. “악인의 규가 의인들의 땅에서는 그 권세를 누리지 못하리니 이는 의인들로 하여금 죄악에 손을 대지 아니하게 함이로다” 악인의 규는 악인의 권세입니다. 악인의 권세가 의인들의 땅에서는 권세를 누리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의인들이 죄악에 손을 대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삽니다. 코람데오의 삶입니다. 코람데오는 ‘하나님 앞에서’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살기 때문에 죄악에 손을 대지 않습니다. 성결한 삶을 삽니다. 그렇기 때문에 악인이 권세로 의인을 심판하지 못합니다.
요셉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늘 하나님을 의식하는 코람데오 정신으로 살았습니다. 그가 왕의 친위대장인 보디발의 집에서 총무 일을 할 때, 보디발의 아내가 그를 유혹했습니다. 요셉 영화를 보면 보디발 아내가 요셉을 유혹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부인이 굉장한 미인이었습니다. 그 미인이 모든 하인들을 몰아내고, 그 넓은 집에 두 사람만 남게 되자 핑크 빛 잠옷을 입고 요셉에게 접근했습니다. “요셉, 이 집에 아무도 없어. 나하고 요셉 둘뿐이야. 우리 연애하자.”, “하나님께서 보고 계십니다.” 보디발 부인이 자기 치마를 벗어서 우상의 머리에 씌우고는 “이제 보지 못하니 연애하자.”라고 했습니다. 그 여자는 우상을 섬기니 그 우상이 하나님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때 요셉은 “당신이 섬기는 우상은 보지 못하지만 나의 하나님은 보십니다.” 하고는 밖으로 뛰어나갔습니다. 그때 악인의 권세가 요셉을 공격했습니다. 보디발의 아내는 요셉이 자기를 겁탈하려고 했다고 누명을 씌웠습니다. 그 일로 요셉은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셔서 요셉이 애굽의 총리자리에 올라가는 발판을 제공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요셉처럼 성결한 삶을 삽니다.
오래 전일입니다. 추석날 밤 고개 넘어 큰 집에 다니러가는 아버지와 아들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불신자였고 아들은 믿는 아이였습니다. 길가는 도중인데 무밭을 보고 아버지가 아들에게 “얘야, 목이 말라 안 되겠다. 무 한 개 뽑아 먹어야겠다. 너 여기서 누가 오는지 잘 보고 있어라.”하고 무밭에 들어가 무를 뽑으려고 하는데, 갑자기 아들이 “아버지. 누가 봅니다.”라고 소리쳤습니다. 아버지는 놀라서 빨리 밭에서 나와서 보니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아버지가 “이놈아. 보기는 누가 본다고 그래. 남자가 간이 커야지. 똑똑히 지켜!”라고 말하고 다시 무밭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아까 뽑으려다가 뽑지 못한 그 무를 다시 뽑으려고 하는데, 이번에도 아들이 “아버지. 누가 봅니다.”라고 소리쳤습니다. 아버지는 무밭에서 급히 나와 사방을 둘러봤지만 아무도 없었습니다. 화가 난 아버지가 소리쳤습니다. “이놈아! 누가 본다고 그래? 아무도 없잖아.” 아들이 대답했습니다. “하늘에 달과 별이 보고 있습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똑똑히 지켜.” 아버지가 다시 무밭으로 들어가서 아까 그 무를 뽑으려고 하는데, 아들이 다시 소리쳤습니다. “아버지. 정말입니다. 누가 보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헐레벌떡 나와서 사방을 살펴보고 아들에게 “자꾸 누가 본다고 그래?”라고 말했습니다. 아들은 “하나님이 다 내려다보고 계십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이 아이는 어린 아이지만 코람데오,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성결한 삶을 살게 됩니다.
4. 하나님이 선대하십니다.
4절입니다. “여호와여 선한 자들과 마음이 정직한 자들에게 선대하소서” 여기서 선대하신다는 표현을 영어 성경에 보니까 “Do good”이라고 합니다. 선하게 대해 주신다. 착하게 대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을 선대하십니다. 다른 말로하면 하나님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의 편이 되어주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할 때, 애굽사람들은 심판하셨고 유대인들은 선대하셨습니다. 애굽지역에 3일 밤낮으로 흑암이 가득할 때, 유대인들의 지역에는 빛을 주셨습니다. 유월절에 애굽의 장자들이 죽을 때, 하나님은 유대인들의 장자들은 보호해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만났을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선대하셔서 홍해를 갈라주시고 마른 땅처럼 건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선대하셨습니다. 그런데 애굽 군대는 심판하셨습니다. 그들을 홍해에 수장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을 선대하십니다. 어떤 분이 어릴 적 체육대회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같은 반에 아주 달리기를 잘 해서 운동회가 열리면 계주 대표를 하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달리기를 하면 늘 그 아이가 1등을 했습니다. 그 아이와 키가 비슷해서 한 조가 되는 아이가 있었는데, 그 아이는 완전 거북이였습니다. 운동회 했다 하면 계주대표는 1등해서 많은 선물을 받는데, 거북이는 그냥 침만 흘렸습니다. 그런데 어느 해 운동회에서 한 번은 이 구도가 뒤집혔습니다. 거북이가 1등을 하고 계주선수가 꼴찌를 했습니다. 사탕을 얼굴로 찾아 먹고, 그 다음엔 뒷걸음질 치며 뛰고, 그 다음엔 줄넘기하며 달립니다. 거기까지는 단연 계주대표가 1등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장애코스를 종이에 적힌 사람과 결승선까지 뛰어야 하는데, 일찌감치 뛰어간 계주대표가 종이를 집어보니 거기에 ‘할머니’라고 적혀 있었고, 한참 뒤에 도착한 거북이는 ‘체육선생님’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거북이가 체육선생님 손잡고 뛰는데 너무 느리니 선생님이 안 되겠는지 거북이를 어깨에 메고 쏜살 같이 뛰어가서 1등을 하였습니다. 거북이는 완전 신나서 방방 뛰는데 계주대표는 할머니 손잡고 겨우 들어왔는데, 3등도 못해서 연필도 못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손을 잡고 가는 인생을 삽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좀 부족한 면이 있어도 괜찮습니다. 실력이 부족해도, 능력이 부족해도 하나님이 안고 뛰시기 때문에 괜찮습니다.
다윗과 사울의 싸움을 보세요. 사울은 왕이요 절대 권력자였습니다. 다윗은 사울을 이길 수 없어서 사울에게 늘 쫓겨 다녔습니다. 거기다가 다윗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코람데오의 삶을 살다보니 사울을 죽일 기회가 와도 죽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권세를 잡고 있는 사울의 편이 아니라 사울에게 쫓기는 연약한 다윗을 선대해주셨습니다. 대상 11:9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다윗을 선대하시니 다윗은 점점 강성해져갔고, 사울은 졸지에 망하고 말았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버리면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무서운 심판자가 되십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의지하면 하나님은 그 사람을 선대하십니다.
5. 평강이 있습니다.
5절입니다. “자기의 굽은 길로 치우치는 자들은 여호와께서 죄를 범하는 자들과 함께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스라엘에게는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스라엘에게는 평강이 있습니다. 평강은 총체적인 평화와 번영과 복지를 의미하지만 강조점은 하나님과 화평이고 그 다음이 내적인 평안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에게 평안을 주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은 돈이 많아도, 권력을 잡아도, 엄청난 일을 이루어도 내면에 평안이 없습니다.
지용수 목사님께서 한국을 대표하는 유명한 부자를 15분 정도 만났습니다. 지금은 돌아가셨습니다만 그 분이 일본에 암 수술하러 가기 직전에 만났습니다. 아마도 이병철씨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병철씨는 돈이 많아서 돈병철이라고 불렸습니다. 목사님은 그분을 위해서 기도해 드리고 간단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목사님께서 평소에 늘 묻고 싶었던 질문이 있어서 질문 했어요. “회장님! 평안하세요?” 목사님은 그분의 대답을 평생 잊을 수 없답니다. 회장님이 목사님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평안이라뇨? 요즘은 아침에 눈을 뜨면 초조하고 불안하오. 요즘 아침에 눈을 뜨면 아주 초조하고 불안하오” 목사님은 그때 그 분이 하나도 부럽지 않더랍니다. 너무 불쌍하게 보이더랍니다. 겉으로는 말 못했지만 속으로 그랬답니다. ‘내가 낫다. 훨씬 낫다.’
주님은 우리가 평안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요한복음 20장에 보면 부활하신 주님이 두려움으로 평강을 잃어버린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주님이 그들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을까요? 첫 번째 말씀과 두 번째 말씀이 동일한 말씀이었습니다. 요 20:19입니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신 후에 못자국난 손과 창자국난 옆구리를 보여주시고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요 20:21입니다.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주님께서 자신의 못자국난 손과 창자국난 옆구리를 보여주시며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두 번이나 축복하신 것은 십자가를 통해서 참된 평강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으니 십자가를 붙잡고 평안을 누리라는 말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을 의지하므로 평강을 누리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은 평강을 원하십니까? 제가 평강을 원하는 여러분에게 제시하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롬 14:17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너무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행복해서 “천국의 맛이야!”라고 말하는데, 천국은 먹는 것과 마시는 것으로 경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은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우리가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린다면 천국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의와 평강과 희락은 어디서 옵니까? 성령 안에서 옵니다. 성령충만한 사람이 평강을 누립니다. 그러므로 성령충만한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며 하나님을 의지하기에 평강을 누리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 은 어떤 사람입니까? 1. 요동하지 않습니다. 2. 하나님이 책임지십니다. 3. 성결한 삶을 삽니다. 4. 하나님이 선대하십니다. 5. 평강이 있습니다.
이야기 하나 하고 마무리 하겠습니다. 김삼환목사님이 어느 교회에서 선교사 파송식이 있어서 설교하러 가셨답니다. 그런데 그 선교사님이 부부가 같이 서 있어야 하는데 혼자였습니다. 목사님이 왜 사모님이 안 오셨나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사모님이 소아마비래요. 소아마비는 대체로 장애를 이해할 수 있는 비슷한 사람끼리 만나거든요. 그런데 그 분은 아주 훌륭한 사람을 남편으로 맞이했어요. 남편은 하이델베르크에서 박사를 받으신 분이에요. 세계적인 명문학교에서 공부를 하셨습니다. 키가 185cm는 됩니다. 인물도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분이 아내로 인하여 너무나 행복해 하는 겁니다. 놀라운 것은 본인만 그런 것이 아니라 부모님도 그렇게 좋아하더랍니다. 신랑 부모님이 보통 사람 같았으면 가만히 두겠습니까? “야 이놈아! 집에서 나가라. 꼴 보기도 싫다. 네가 인간이냐, 내가 너를 어떻게 공부시켰는데...” 보통 사람 같으면 그렇게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부모님이 그렇게 기뻐하더랍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생각해봤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을 자격이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능력이 있습니까? 우리는 너무나 부족하고 너무나 연약한데,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독생자를 보내주셨고,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희생제물이 되어주셨습니다. 그런 대가를 지불하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다른 것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첫댓글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