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호익 교수 / 대전신학대학교
1. 비선 실세 최순실 사태와 박근혜 대통령의 사과
| | | ▲ 허호익 교수 |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25일 사과문을 통해 “최순실 씨는 과거 제가 어려움을 겪을 때 도와준 인연으로 지난 대선 때 주로 연설이나 홍보 등의 분야에서 저의 선거운동이 국민들에게 어떻게 전달됐는지에 대해 개인적인 의견이나 소감을 전달해주는 역할을 하였다”고 밝혔다. 박태통령이 공조직을 통해 날고 기는 전문가들의 자문을 받지 않고, 비선 실세 최순실의 최종 의견을 의존한 것이 드러난 것이다. 이러한 국기문란은 수렴청정의 왕조국가에나 있을 일이라는 비판과 함께 대한민국이 사교(邪敎)에 의존하는 신정국가가 되었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국민의당 박지원 위원장은 “미르재단, 케이스포츠 재단도 연결시키면 ‘미륵’이라고 한다”며 “그 미륵은 최순실 씨의 선친인 최태민씨 가 스스로를 미륵이라고 했다”고 말하고 “지금 상황은 박근혜 대통령이 최태민과 최순실의 ‘사교’(邪敎, 사이비 종교)에 씌여서 이런 일을 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1) 최태민 옹호한 박근혜 대통령이 그의 ‘영적 후계자' 최순실에게 홀린 것이 아니냐는 제목의 신문보도가 나오는 지경이다. 여권에서조차 “황당하지만, 최순실이 교주여야 이 모든 상황이 설명된다”는 한탄이 나온다.2)마침내 10월 27일자 「노컷뉴스」에는 “대한민국, 사이비 종교가 통치하나?”라는 제목의 기사가 게재되었다.3) 박 대통령이 지난 40년 동안 영세교 교주 최태민과 그의 딸 최순실 만을 절대 신뢰하여 온 배경에는 이러한 ‘사교적(邪敎的) 예속 관계’가 있지 않는가 하는 여러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따라서 최태민과 박근혜, 그리고 최순실과 박근혜 사이의 특수한 사교적 의존 관계가 실재하는지, 그 흔적이 있는 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2. 여러 종교를 두루 이용한 영세교 교주 최태민
1912년 황해도에서 태어난 최태민은 1942~45년 황해도경의 순사였다. 해방 뒤 남쪽에 둥지를 튼 그는 이름을 ‘상훈’으로 바꾸고 강원도, 대전, 인천에서 경찰로 복무했다. 그 후 육군과 해병대에서 ‘비공식 문관’으로 일했다. 1951년 이름을 봉수로 바꾸고, 대한비누공업협회 이사장, 대한행정신문사 부사장 등을 지냈다. 1954년엔 김아무개 씨와 결혼했다가, 김 씨가 그를 여자 문제로 고소하자 부산 금화사로 도피하여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면서 이름을 ‘퇴운’으로 바꿨다. 1년여 뒤 김 씨와의 문제가 잠잠해지자 산에서 내려와 부산에서 전 부인 임아무개 씨와 다시 결합했다. <월간조선>(2007년 7월호)은 별도의 자료를 인용해 최태민이 6명의 부인으로부터 모두 3남 6녀를 둔 가계도를 제시한 바 있다. 임 씨 부인 사이에 태어난 5녀가 최순실이다. 경남 양산에서 개운중학교를 설립해 교장에 취임한 최태민은 2년 만에 그만두고, 이후 몇 가지 일에 종사하였다. 1965년엔 천일창고라는 회사의 회장으로 있다가 유가증권 위조혐의로 서울지검이 그를 입건하자 도피했다. 도피 중이던 그는 1969년 초 철저히 신분을 속이고 공해남(孔亥男)이란 가명으로 서울 중림동 성당에서 영세를 받기도 했다.4) 1973년경에는 영세교 교주 행세를 하였다. 2년 남짓 만에 교주 노릇을 그만 두고 1975년 4월에 신학교육을 받지도 않고 목사 안수를 받은 후 ‘대한구국기도단’의 총재가 되었으니 여러 종교를 두루 이용한 사이비 종교인인 것이 분명하다. 1970년대 들어 최태민은 서울과 대전 일대에서 난치병을 치료한다는 등 사이비 종교 행각을 벌였다. 1973년 5월 13일자 <대전일보> 4면에는 ‘영세계(靈世界)에서 알리는 말씀’이라는 이상한 내용의 5단 8cm의 광고가 실렸다. 그 전문은 다음과 같다. “영세계 주인이신 조물주께서 보내신 칙사님이 이 고장에 오시어 수천 년 간 이루지 못하며 바라고 바라든 불교에서의 깨침과 기독교에서의 성령강림, 천도교에서의 인내천 이 모두를 조물주께서 주신 조화로서 즉각 실천시킨다 하오니 모두 참석하시와 칙사님의 조화를 직접 보시라 합니다. 일시 : 5월 13일 오후 4시 장소 : 대전시 대흥동 현대예식장 또한 모든 종교 지도자께서는 영세계 법칙을 전수받아 만인에게 참된 공헌을 하기를 바랍니다.”5) 광고 하단에는 특히 “난치의 병으로 고통 받으시는 분께 현대의학으로 해결치 못하여 고통을 당하고 계시는 난치병자와 모든 재난에서 고민하시는 분은 즉시 오시어 상의하시라”는 말도는 덧붙였다. 그리고 ‘칙사님의 임시숙소’는 ‘대전시 대사동 케이블카 200m 지점 감나무 집’이라고 적었다. 이 광고에는 칙사란 표현은 세 차례 등장한다. 최태민은 이른바 ‘영세계(靈世界) 교리’를 전하는 ‘칙사(勅使)’로 활동했으며 이를 신문광고를 통해 알렸다는 것이다. 칙사의 사전적 의미가 ‘임금의 명령을 전달하는 사신’이라는 점에서 그는 ‘영세계 교리’를 전하는 메신저로서 자신을 규정한 것으로 보인다. 칙사 최태민이 말하는 영세계 교리란 불교에서의 깨침과 기독교에서의 성령강림, 천도교에서의 인내천을 조화시킨 영혼합일법이었다.6) 박정희 정권의 중앙정보부와 전두환의 합동수사본부를 거치며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수사자료’에 의하면, 70년대 들어 최태민은 서울과 대전 일대에서 난치병을 치료한다는 등 사이비 종교 행각을 벌였다. 불교, 기독교, 천도교를 종합했다는 교리를 내세웠고, ‘원자경’이라는 가명을 쓰면서 ‘칙사’ 또는 ‘태자마마’라는 호칭을 자처했다.7) 스스로 단군, 미륵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1973년 7월 유사한 메시지를 담은 전단이 대전 시내에 뿌려졌다. “찾으시라! 들으시라! 대한민국은 세계 주인국이 될 운세를 맞이했다는 칙사님의 권능과 실증의 말씀…”로 시작되는 ‘영세계에서 알리는 말씀’이라는 제목한 것이었다. 요약하면 “한국은 현재 후진국인데, 조물주가 세계주인국으로 이미 정해 놓았다. 그 사명을 칙사(勅使)님이 받아 이 땅 위에 오신 것이다.”는 내용이었다.8) 자신을 조물주의 사자(使者)로 신격화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당시 최태민은 1973년 7월에서 대전시 선화 1동 동사무소 앞으로 숙소를 옮기고 ‘영세교 칙사관’이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병을 고치기 위해 찾아드는 사람들에게 색색의 둥근 원을 벽에도붙여 놓고 자무자비조화불이란 주문을 외우며 그 원을 집중적으로 응시하도록 했다. 일종의 최면술에 가까 왔다고 한다.9) “특이한 것은 방금 전까지 ‘아파 죽겠다’고 소리치던 환자들이 이 의례를 거치고 나면 다 나은 듯이 웃음을 짓는다는 사실이다. 무당들도 ‘원자경’ 교주 앞에서는 꼼짝도 하지 못하고 벌벌 기었다. 뿐만 아니라 원자경 교주를 만나고 난 후 무당들이 신기(神氣)가 떨어져 그 업을 작파하는 경우도 생겨났다. 소문을 듣고 찾아온 다른 무당들도 그 앞에 엎드려 절부터 했다. 이로써 그는 신통력 있는 도사로 확고한 위상을 굳히게 된다.”10) 이러한 반응에 고무된 최태민은 그해 11월에는 활동 무대를 서울 서대문구 대현동 대현빌딩 3층으로 옮긴다. 바로 이화여대 앞에서 ‘영세교’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16평 정도 크기의 영세교 본부에는 그의 신통력을 추종하는 신도들이 몰려들자, 74년 5월에는 동대문구로, 그해 8월에는 다시 북아현동으로 본부를 옮겼다. 이 때 추종자가 한 300여명 정도였다고 한다.11) 당시 국제종교문제연구소 소장이었던 탁명환이 문제의 감나무집을 수소문하여 찾아보았다. 보문산 꼴짜기 대사동에 위치한 그곳에서 최태민 ‘칙사님’을 만났다. 그는 자신을 ‘원자경’이라고 소개했다. 자신의 영특함은 둥근 원에서 출발한다며, 자신의 숙소 벽면에 그려진 둥근 원을 똑바로 응시하면서 ‘나무자비조화불’이라는 주문을 계속 외웠다고 한다. 그렇게 하면 만병을 통치할 수 있고 도통의 경지에 이른다는 주장이었다. 그것이 그가 말하는 ‘영세계원리였다.12) 그런데 근래에 박근혜 대통령이 공식 석상에서 목에 걸고 나오는 목걸이가 바로 최태민이 주술적으로 사용한 둥근 원을 본뜬 것이라고 주장이 있다. 청담동의 ‘베켓’이라는 곳에서 최순실이 구매해서 공급한다는 것이다.13) 3. 최태민의 ‘육영수 여사 현몽’과 박근혜와의 만남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재일 한국인 문세광에 의해 육영수 여사가 피살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박근혜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녀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얼마나 방바닥을 긁으며 서러워했는지 손톱이 다 닳을 지경”14)이었다고 회고 하였다. 이즈음 각계 각층에서 박근혜를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한 전화와 편지들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최태민이 1975년 2말경 박근혜에게 보내 3통의 편지가 유독 당시 23세의 박근혜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그는 “육 여사가 나타나 근혜를 도와주라”는 현몽이 있었다는 내용의 서신을 발송하였다. <김형욱 회고록>은 편지 내용을 이렇게 전한다. “‘어머니는 돌아가신 게 아니라 너의 시대를 열어 주기 위해 길을 비켜 주었다는 걸 네가 왜 모르느냐. 너를 한국, 나아가 아시아의 지도자로 키우기 위해 자리만 옮겼을 뿐이다. 어머니 목소리가 듣고 싶을 때 나를 통하면 항상 들을 수 있다.’ 그리고 최태민은 육 여사가 꿈에 나타나 ‘내 딸이 우매해 아무 것도 모르고 슬퍼만 한다’면서 ‘이런 뜻을 전해 달라’고 했다는 편지를 썼다는 것이다.”15) 이른바 ‘육영수 여사의 현몽(죽은 이가 꿈에 나타남)’이다. 최태민은 이를 부인했다. 그는 인터뷰에서 “‘현몽’ 등의 말이 대학 교육을 받은 박(근혜) 이사장에게 먹혀들 것 같아요?”라며 “‘현몽’이나 정식으로 접견 신청 내용 따위는 쓰지 않았다. ‘위로 말씀을 전하며 기회 있으면 한번 만나주시길 바랍니다’는 말로 끝맺었다”고 말했다. 박근혜도 현몽설을 부인했다.16)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최태민은 영세교 교주로서 자신의 영적세계를 알려주는 칙사(勅使)라고 자처하였기 때문에 육 여사의 현몽을 이용하여 박근혜에게 접근하였고, 이 현몽에 박근혜가 특별한 관심을 보여 준 것은 이후의 그들의 행보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영세교의 사이비 교주 최태민이 시민들을 현혹했던 현몽의 수법이 1970년대 홍보전단에서 확인됐다. 전단은 최태민이 1973년 5월 13일 ‘영세계 교리’를 선포하고 두 달 뒤인 7월 제작된 것으로 ‘조물주의 성자와 선택된 인재를 찾아 모시고자 한다’고 홍보하였다. 그는 전단에 자신이 찾는 사람들의 6가지 부류를 제시했다. ‘조물주의 역군으로서 인류를 위해 앞장서실 분’ ‘태몽을 받고 출생하신 분’ ‘현몽을 받고 계시는 분’ ‘기도를 게을리 하지 않고 계시는 분’ ‘신앙 없이 방황하시는 분’ ‘신이 들렸거나 신이 쏠려있는 분’은 칙사관(勅使館)을 찾아오거나 상담을 받으라고 하였다. 전단에는 태몽(胎夢)이나 현몽(現夢) 경험자들을 초청하는 내용이 포함돼 있어 꿈을 이용해 박근혜 당시 큰 영애에게 접근했던 것이 최씨의 전형적인 수법이었음을 보여준다.17) 최태민은 이러한 현몽과 더불어 자신이 육영수 여사 영혼에 빙의됐다고 주장하며 박근혜에게 접근한 것이다.18) 현몽이라는 것은 사이비 교주가 자신의 영적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해 자주 사용하는 수법이다. 이를 통해 교주가 특정인을 영적 상황을 본인 보다 잘 아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어 교주를 맹종하도록 만든다. 이를 계기로 나중엔 교주에게 예속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신천지도 포교 과정에서 꿈을 가장하여 영적 우월성을 확보하여 전도하고 통제하는 수법을 가르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단들이 꿈을 이용하여 상대방에 대한 영적 우월성을 확보하고 이를 계기로 주종관계의 영적 통제를 획책하는 사례는 허다하게 발견된다. 어쨌든 최태민의 ‘육영수 현몽’에 감동을 받은 박근혜는 1975년 3월 6일 최태민을 청와대로 불러 대화를 나눴다. 육여사 사후 박근혜는 최태민 뿐 아니라 많은 목사, 스님, 수녀들을 청와대에 초청하여 “남한테 그토록 존경받았던 어머니가 왜 그렇게 돌아가셔야 하느냐”라고 물었다. 초청을 받은 종교인들은 듣기 좋은 말로 “천당이나 극락에 갔다는 얘기만 했다”고 한다.19) 그런데 최태민의 대답은 그들과 전적으로 달랐다. 박근혜에게 육영수 여사의 역할을 대신하여야 한다는 새로운 꿈과 희망을 제시한 것이다. “천당에 갔는지 지옥에 갔는지 누가 어떻게 알겠는가. 어머니는 바로 당신한테 후광을 주고자 잠시 자리를 비켜 앉았다. 이제 어머니 대신 당신이 나서야 한다”고 하였다. 나라를 위한 외부 활동을 해야 한다고 3시간 넘게 설득하였고 박근혜는 상당한 감동을 받고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으로 짐작된다.20) 4. 사이비 목사 최태민과 대한구국기도단 그해 4월 10일 최태민 교주는 ‘영세교’의 간판을 내리고 ‘대한구국선교단’의 간판을 내걸었다. 이즈음 최태민은 목사로 등장한다. 안수에 필요한 신학교육을 받은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대한예수교장로회 종합총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고 주장한다. 최태민 교주에게 목사 안수를 준 사람은 조현종 목사이다.21) 돈을 주고 목사직을 샀다는 것이 교계의 중론이다.22) 그리고 4월 29일에는 스스로 대한구국선교단의 총재로 취임한다. 1975년 5월 어느 날 각 교계신문에 ‘대한구국기독회’에 관한 기사에 최태민 목사의 사진을 실린 것을 보고 1년 전에 그를 만난 적이 있는 현대종교연구소장 탁명환은 다시 그를 방문하였다. 탁명환은 영세교의 원자경 교주가 최태민 목사로 변신한 것에 놀랐다. 그와 대화 끝에 “최총재의 목사직은 온당치 않으니 가짜 목사의 탈을 벗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최태민을 수행하던 다른 목사 2명이 “탁 소장! 말조심하십시오. 지금 이분이 누구라고 함부로 말이라면 다하는 거요. 그런식으로 말하면 탁소장 신상에 좋지 않아요”라고 발끈했다.23) 그 무렵인 1973년 5월 한경직 목사 주도로 세계적인 대부흥사 빌리 그레엄 목사를 초청하여 여의도 광장에서 전국의 기독교인들이 참여한 대형 전도 집회가 있었다. 이듬해 1974년 8월에는 CCC 총재 김준곤 목사님 주도로 ‘엑스포 74’를 여의도 광장에서 개최하였다. 이 두 집회에 기독교인들 수 백만 명이 모였다. 최태민은 자신이 교주로 있는 영세교의 교세로서는 박근혜를 설득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기독교의 교세를 이용할 의도로 목사가 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실제로 최태민은 1973년 7월에 제작한 전단에서 “가진(갖은) 서러움과 모욕을 당하면서 살아온 이 민족의 한이 이제 세계 주인국이라는 찬란한 엄연한 현실이 우리 민족 앞에 놓여졌습니다.… 세계종교사상 유래 없는 인파가 모인 서울 5·16광장에서 부흥사 빌리 그래엄 박사는 대한민국을 영적 종주국이라고 했다”고 주장했다.24) 1975년 5월에는 위의 두 대형 전도 집회에서 보여준 기독교인들의 동원력을 이용하여 박근혜 영애가 참석한다는 빌미로 임진강에서 2000명의 기독교인들을 동원하여 구국기도회를 개최하였다. 말이 기도회이지 실제로는 ‘반공과 안보’를 전면에 세운 궐기 대회였다. 그 자리에 참석한 박근혜에게 즉석 제안에서 명예 총제로 추대하였다.25) 최태민은 이 집회를 갖기 전에 박근혜에게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 기독교 목사들이 모두 반대하는 건 아닙니다. 그게 궁금하면 5월 13일 임진강가로 나와 보십시오. 놀라운 일이 있을 것입니다”26)라고 하였다. 당시에는 박정희의 유신체제에 대해 비판하는 기독교인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23세의 박근혜는 임진각 집회에서 난생 처음으로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최태민은 박근혜에게 구국선교단이 나중에 큰 일을 하기 위해 필요한 조직이라고 설득하였다. ‘육여사의 현몽’의 실현 가능성을 보여 주기 위해 구국기도회의 이용한 것이다. 그리고 박근혜로 하여금 자신을 전적으로 의지하도록 심정적으로 꽁꽁 묶어 두려는 것이 이 두 번째 사업, 즉 ‘임진강 집회’의 목적이었다는 것이 <월간 조선>의 평가이다.27) 6월 21일에는 배재고등학교에서 ‘대한구국십자군’ 창군식을 거행하였다. 박근혜 명예총재가 격려사를 하였다. 창설 취지문은 ‘구국과 멸공’을 위해 구국십자군을 창설한다고 밝히고 있다. 최태민과 박근혜의 주도로 구국연합기도회 등 수차례의 구국행사들이 이어졌고 관내 기관장과 공무원들이 총출동하여 들러리를 섰다. 이러한 구국 집회들이 박근혜로 하여금 최태민 목사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추종하는 실제적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이즈음 박근혜 자신도 목사가 되기 위해 장로회신학대학교에 기독교교육대학원 한 학기를 다닐 정도였다. 당시 학장이었던 이종성 박사는 “박 전 대통령 서거 2년 후로 기억한다”며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을 통해 (입학) 의사를 타진해 왔다”고 밝혔다.28) 육영수 여사가 서거한 후 청와대 제2부속실에서는 어머니가 죽으면 딸이 그 역할을 대신한 여러 예가 실재로 있는 것을 검토하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건의하였다, 그래서 ‘퍼스트레이디 역할은 큰 영애가 한다’고 발표하였다. 박근혜 스스로도 퍼스트레이디 역할에 충실하려고 노력하였다. 시간이 갈수록 자신감도 갖게 되었다. 그렇다고 스스로 대통령이 될 꿈을 꾼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대통령일 될 수도 있다는 “대망의 불씨를 피워 넣은 사람이 최태민이라는 분석이 많다.”29) 실제로 박근혜를 사람들은 육영수 여사 이상으로 대우했다. 그는 박근혜에게 ‘육여사의 뒤를 이을 지도자’가 될 것이라고 꾀어서 부추긴 것이다. “그 고리로 박근혜를 포로처럼 잡은 것이다. 최태민씨는 처음부터 이 모두를 계산속에 넣어 두고 일을 실행한 사람이다.”는 것이 「월간 조선」의 또 다른 평가이다.30) 이후 박근혜는 대한구국선교단 행사에 자주 모습을 드러냈고, 1976년 구국선교단은 ‘구국봉사단’으로 이름을 바꾼다. 이즈음 최태민과 관련하여 각종 이권개입, 횡령, 사기, 융자 알선 등 권력형 비리와 여러 여성들과의 스켄들에 관한 의혹이 쏟아져 나왔다.31) 정보 당국에서도 문제의 심각성을 느끼고 이를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하였다. 정부에 보관 중인 한 수사기록에는 최태민에 대해 “75년 4월 29일 박근혜의 후원으로 자신의 심복 및 사이비 종교인을 중심으로 대한구국선교단을 만들고 최태민을 총재, 박근혜를 명예총재로 하여 구국 선교를 빙자해 매사에 박근혜의 명의를 팔아서 이권 개입 및 불투명한 거액금품 징수로 이권단체화하면서 치부한자”라고 하였다.32) 5. 최태민의 비리와 박정희 대통령의 친국 1977년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직접 딸 박근혜와 최태민 그리고 최태민의 비리를 조사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등을 한 자리에 불러 ‘친국(親鞫)’을 하기도 했다. 당시 수사 자료에는 최태민의 비리 혐의가 44건이나 적시돼 있었다. 그러나 ‘친국’ 사건 당시 박근혜는 아버지에게 울면서 최태민의 결백을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33) 박근혜는 최태민에 대해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힘들었을 때 흔들리지 않고 바로설 수 있도록 도와준 고마운 분”이라고 말한다. 각종 의혹에 대해선 “의혹은 많이 제기됐지만 실체가 없었다. 한 가지라도 사실이었다면 내가 국회의원이 될 수 있었겠나”라며 일축한 바 있다.34)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이 1977년 9월 20일 특명을 내려 최태민을 구속하는 대신 “첫째 최태민의 거세 할 것, 둘째 최태민으로 하여금 청와대 주변을 얼씬 거리지 말게 할 것, 셋째 구국여성봉사단을 제외한 모든 관련단체 해산 할 것” 등을 지시했다고 한다.35) 실제로 거세가 이루어 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를 계기로 1978년 2월 22일 ‘구국봉사단’을 사단법인 ‘새마음봉사단’으로 개편하고 박근혜가 총재로 취임한다.36)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 한 후 제일 먼저 박근혜를 찾아 온 이가 최태민이라고 알려져 있다.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 ‘죽으면 따라 죽을 것처럼 아부하던 인사’들이 박정희 대통령을 비판하는 것을 보고 박근혜는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는 것을 여러 번 토로하였다. 그러나 최태민과 그의 딸 최순실은 달랐다. 시종일관 박대통령을 옹호하였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안 계신 마당에 마음의 의지처가 필요하기 마련이었는데, 아버지에게 수많은 해택을 입었던 무수한 사람들의 배신 속에서 그 둘의 의리는 박근혜에게는 당연히 돋보일 수밖에 없었다.37) 이를 계기를 박근혜의 마음에는 최태민과 최순실만 믿고 의지한 대상이라는 것이 더욱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한 김재규는 항소이유보충서에서 “구국여성봉사단이라는 단체가 얼마나 많은 부정을 저질러왔고 국민들의 원성이 되어왔는지 잘 알려져 있지 않다”며 최태민과 박 대통령의 관계를 ‘10·26 혁명’의 계기로 꼽기도 했다. 박정희의 죽음 이후 최태민은 전두환이 지휘하는 합수부의 수사를 받았다. 당시 보안사 대공처장 이학봉은 <신동아> 2007년 6월호 인터뷰에서 최태민 목사를 “강원도로 보내 활동하지 못하도록 했다. 조용하게 자숙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강원도에 그리 오래 두지는 않았다. 구체적 비리 혐의는 기억나는 것이 없고 그가 기업체로부터 돈을 뜯어낸 것으로 확인된 게 얼마가 되는 지… 별로 없었던 것 같다”고 하였다. 박근혜는 1982년부터 어머니 이름을 딴 육영재단 이사장으로 활동했고 최태민과 그 딸인 최순실 그리고 사위 정윤회도 재단 일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다. 최태민의 영적 후계자로 알려진 5녀 최순실은 1986년에는 육영재단 부설 원장으로 취임하였다. 이 때부터 육영재단의 어린이회관에선 최태민과 최순실의 전횡이 또 다시 불거졌다. <여성중앙> 1987년 10월호에 따르면 최태민 목사에게 우선 보고해야 이사장인 박근혜의 결재를 받을 수 있으며, 최순실도 회관운영에 개입했다고 한다. 그 무렵 재단 잡지사 기자들의 파업과 직원들의 농성도 모두 외부 세력이라고 표현된 최태민과 최순실 부녀의 간섭이 원인이었다. 6. 근령과 지만 남매가 노태우 대통령에게 보내 탄원서 이 문제가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것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차녀 박근령과 아들 박지만이 1990년 8월 노태우 당시 대통령 내외에게 보낸 탄원서이다. 그 내용인즉 '언니 박근혜가 남자에게 최면이라도 걸린듯 빠져서 정신을 못차리고 있으니 구해달라'는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최씨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언니인 박근혜의 청원(최태민씨를 옹호하는 부탁 말씀)을 단호히 거절해 주시는 방법 외에는 뾰족한 묘안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 주셔야만 최씨도 다스릴 수 있다고 사료되며 우리 언니도 최씨에 대한 잘못된 인식과 환상에서 깨어날 수 있을 것이옵니다. 진정코 저희 언니는 최씨에게 철저히 속은 죄 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철저하게 속고 있는 언니가 너무도 불쌍합니다! 대통령의 유족이라는 신분 때문에 어디에 하소연 할 곳도 없고 또 함부로 구원을 청할 곳도 없었습니다.”38) 이들 남매는 탄원서에서 “최태민이 아버님 재직시 아버님의 눈을 속이고 누나(박 대통령)의 비호 아래 치부했다는 소문이 있는데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자신의 축재 행위가 폭로될까 봐 누나를 방패막이로 삼고 있다”고 주장했다. 최태민이 박 대통령을 앞세워 육영재단을 통해 여전히 부정축재를 하는 등 전횡을 저지른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리고 "이번 기회에 언니가 구출되지 못하면 언니와 저희들은 영원히 최태민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의 장난에 희생되고 말 것"이라도 하였다. 이러한 분란은 1990년 11월 15일 박근혜가 여동생 박근령에게 이사장직을 물려 줄때까지 계속되었다. 박근혜는 1991년 중앙일보와 인터뷰에서 “(최태민이) 우리 사회를 걱정하는 사람으로 느껴서 그분과 같이 일하게 됐다”고 해명한 바 있다. “내가 누구에게 조종을 받는다는 것은 내 인격에 대한 모독”이라고 반박하기도 했다.39) 2007년 7월 20일 당시 알렉산더 버시바우 주한 미국대사가 본국에 보낸 외교 전문에서 “최태민 목사는 인격 형성기에 박근혜의 심신을 완전히 지배했다.”고 보고한 것이 다시 주목 받고 있다. 이 보고서가 해킹된 뒤 폭로전문 사이트인 ‘위키리크스’에 실렸다. 버시바우 전 대사는 “박근혜 (후보)가 자신의 과거에 대해 설명해야 할 상황에 놓였다”며, “35년 전 최태민 목사와의 관계도 그에 포함된다”고 썼다. “또 최태민의 자녀들이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는 소문이 만연하다”라고 했다. 그리고 “카리스마 넘치는 최태민 목사는 인격 형성기에 박근혜 (후보)의 심신을 완전히 지배했다”고 했으며, “‘한국의 라스푸틴’이라고 불렸던 최태민(씨)가 육영수 여사의 서거 후 퍼스트레이디로 있던 박근혜 (후보)를 지배했다는 설에 대해서도 설명해야 한다”고 덧붙였다.40) 라스푸틴은 시베리아의 사이비 사제로서 제정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아들 알렉세이의 혈우병을 치유해 준다고 접근하여 황후를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통제한 후 황제마저 장악하고 농락하였던 자이다. 당시 극심한 신경쇠약에 시달리는 알렉산드라 황후는 라스푸틴 없이는 하루도 견디지 못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자 라스푸틴은 이를 이용하여 니콜라이 2세를 사실상 허수아비로 만들며 폭정을 일삼았다. 그 결과 로마노프 왕가는 몰락하고 마지막 짜르 니콜라이 2세의 모든 가족이 몰살당했다. 그리고 이 와중에 러시아는 공산화되었다. 최태민은 서울 역삼동 자택에서 칩거하다가 1994년 노환으로 만 81세의 나이로 죽었다. 이 때부터 최순실이 최태민의 영적 후계자가 되었다. 그리고 1998년 박근혜 대통령이 다시 정치에 입문했을 때에도 최순실이 곁에서 보좌했다. 최순실은 아버지의 비서를 지낸 정윤회와 1995년 재혼하였다. 박근혜는 최순실과 정윤회의 도움을 받아 1998년 정계에 입문하였고 이후 제19대까지 5선 국회의원을 지냈다. 2012년 제19대 총선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후 새누리당의 대통령 선거 후보로 선출되어 2012년 12월 19일 실시된 제18대 대선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영세교 교주이자 자칭 칙사(勅使)였던 최태민이 주장한 1975년도의 ‘육여사 현몽’이 마침내 이루어진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으로서는 최태민과 그의 영적 후계자 최순실을 절대의존할 수 밖에 없는 ‘체험적 신앙’이 더욱 확고하여진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두 동생과도 절연한 채 최태민 모녀를 의지하였다. 그래서 그의 동생 박지만은 “피보다 진한 물이 있다”고 하였고, “누나가 최순실 · 정윤회 이야기만 나오면 최면이 걸린다”고 토로했다.41) < 계 속 > ============== 1) “미르+K=‘미륵’…박 대통령, 최태민·최순실 사교(私敎) 씌여”, <노컷뉴스> 2016. 10. 26. 2) “최태민 옹호한 朴 '영적 후계자' 최순실에도 홀렸나”, <한국일보> 2016. 10. 28. 3) 대한민국, 사이비 종교가 통치하나? <노컷뉴스> 2016. 10. 27. 4) “이름 7개, 부인 6명, 승려 목사 ‘최태민 미스터리’”, <한겨레> 2012. 7. 17. 5) “박근혜-최태민 20년 커넥션”, <월간 중앙> 1993년 11월호, 209. 6) “이름 7개, 부인 6명, 승려 목사 ‘최태민 미스터리’”, <한겨레> 2012. 7. 17. 7) 위의 글. 8) “박근혜-최태민 20년 커넥션”, 210. 9) “최순실이라는 종교에 빠진 박근혜”, <딴지일보> 2016. 10. 25. 10) “박근혜-최태민 20년 커넥션”, 210. 11) 위의 글, 211. 12) 위의 글, 210. 13) “최순실이라는 종교에 빠진 박근혜”, <딴지일보> 2016. 10. 25. 14) “박근혜-최태민 20년 커넥션”, 197. 15) “박근혜-최태민 20년 커넥션”, 198. 16) “이름 7개, 부인 6명, 승려 목사 ‘최태민 미스터리’”, <한겨레> 2012. 7. 17. 17) 신상목, “최태민, ‘현몽’으로 사람들 현혹… 朴 대통령도 ‘맹신’”, <국민일보> 2016. 10. 28. 18) “박지만 폭탄발언, 혼령 ‘접신설’ 뒷받침하나 ‘오싹’, <CBS뉴스> 2016. 10. 27. 19) “박근혜-최태민 20년 커넥션”, 198. 20) 위의 글. 21) 위의 글, 211. 22) “‘최태민, 목사 아니다’ 한국교회언론회 논평, ‘목사’호칭 중지 촉구”, <문화뉴스> 2016. 10. 25. 23) “박근혜-최태민 20년 커넥션”, 226. 24) 신상목, “최태민, ‘현몽’으로 사람들 현혹… 朴 대통령도 ‘맹신’”, <국민일보> 2016. 10. 28. 25) 1976년 12월 10일에는 ‘구국봉사단’으로, 1979년 5월 1일에는 ‘새마음봉사단’으로 각각 개명되었다. 26) “박근혜-최태민 20년 커넥션”, 199. 27) 위의 글. 28) “박근혜 전 대표, 장신대 다닌 적 있다”, 「뉴스파워」 2007. 4. 21 29) “박근혜-최태민 20년 커넥션”, 214. 30) 위의 글, 215. 31) “이름 7개, 부인 6명, 승려 목사 ‘최태민 미스터리’”, <한겨레> 2012. 7. 17. 32) “박근혜-최태민 20년 커넥션”, 203. 33) “박지만, 박근령1990년 ‘누나(언니)를 최태민에서 구해주세요’ 노태우에 탄원서”, <경향신문> 2016. 10. 6. 34) “박근혜 후보 인터뷰”, <중앙일보> 2007. 6. 17. 35) “박근혜-최태민 20년 커넥션”, 223. 36) “이름 7개, 부인 6명, 승려 목사 ‘최태민 미스터리’”, <한겨레> 2012. 7. 17. 37) “박근혜-최태민 20년 커넥션”, 217. 38) “‘언니를 구해달라’ 박근령·지만 남매가 쓴 편지”, <위키트리>(보도자료), 2016. 10. 25. “대통령 각하 내외께 드리는 호소문”이라는 A4용지 12매 분량의 문서이다. 39) “박근혜와 최순실, 과연 누가 대통령인가”, <미디어투데이> 2016. 9. 20. 40) “‘최태민은 한국의 라스푸틴’ 2007년 미 대사관 외교전문”, <중앙일보> 2016. 10. 27. 41) “박관천 박지만, ‘누나가 최순실·정윤회 이야기만 나오면 최면 걸려’ 토로했다”, <동아일보> 2016. 10. 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