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412
2월25일[사순 제1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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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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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D4pGS36er5g (김태광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집전)
**《서울주보》**
http://pf.kakao.com/_xhGxjBxb/98824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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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도 성령과 함께 광야로 들어갑시다!>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후, 성령으로 가득 차 돌아오신 예수님께서는, 성령에 이끌려, 거칠고 황량한 유다 광야로 들어가십니다. 사순절을 시작한 우리도, 스승 예수님을 따라 깊고, 황량한 광야, 조금은 외롭고 쓸쓸하고, 춥고 배고픈 광야로 들어가야겠습니다.
이번 사순절, 광야로 들어갈 때는, 다른 해처럼 준비 없이 들어가지 말아야겠습니다. 예수님처럼 성령으로 가득 차고, 성령에 이끌려, 성령과 함께 광야로 들어가야겠습니다.
우리들 생애 안에서 수없이 반복되어 온 사순절이 많은 경우 실패로 끝난 이유는, 주님 없이, 성령 없이, 내 힘만 믿고, 나 홀로 광야로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광야 생활이라는 것,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한낮에는 피할 곳도 변변치 않은데, 엄청난 더위를 온몸으로 견뎌내야 합니다. 밤이 되면 기온은 또 얼마나 내려가는지 모릅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백 퍼센트 인간 조건을 그대로 지니셨던 예수님께서 느끼셨던 허기와 갈증은 또 얼마나 극심했을까요? 어쩌면 그분께서는 언젠가 겪게 될 골고타 언덕에서의 극심한 십자가 죽음의 고통을 광야에서 미리 맛보셨던 것입니다.
올해도 우리의 광야인 이번 사순시기, 여느 해처럼 갖은 고통과 시련, 세찬 모래바람과 극한 체험으로 가득하겠지만, 성령과 함께라면 큰 문제 없을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여행길에 밀착 동반하신다면, 광야 생활 결코 외롭거나 두렵지 않을 것입니다.
다시 맞이한 사순시기 우리 앞에 펼쳐질 광야는 어디일까요? 나와 너무나도 다른 그, 정말이지 백번 죽었다 깨어나도 용납이 안 되는 그가 득실거리는 우리의 공동체가 광야입니다.
평생토록 혼신의 힘을 다해 한번 벗어나 보려고 그토록 발버둥쳐 봤지만, 그 지독한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반복되는 내 악습과 결함이 광야입니다. 게으름과 나태함, 갖은 유혹 거리로 가득 찬 내 부끄럽고 참혹한 매일의 일상이 광야입니다. 바로 그 광야에서 주님과 함께, 성령과 함께 새출발하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40일간 단식해 오신 예수님께서 악마로부터 유혹받으시는 장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신성을 지니신 하느님이기도 하셨지만, 다른 한편으로 우리와 똑같은 육체 조건을 지니셨던 인간이셨습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느끼는 고통과 배고픔을 똑같이 겪으셨던 참 인간이셨습니다.
휴가지에서 40일은 눈깜짝할 사이에 지나가겠지만, 단식하면서 보내는 40일은 정말 지옥 같은 나날입니다. 허기가 져서 거의 탈진상태에 도달한 예수님 앞에 악마가 나타납니다. 갖은 감언이설과 달콤한 유혹거리를 미끼로 내세우며 예수님을 현혹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유혹들을 의연히 이겨내십니다. 허탈해진 악마는 힘을 잃고 떠나갑니다.
예수님께서 악마의 유혹 앞에 끝까지 굴하지 않을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일까 묵상해봅니다. 아버지께 대한 항구한 충실성과 철저한 순명, 아버지를 향한 지속적 신뢰와 끊임없는 자아포기, 그 결과가 유혹의 극복이란 결실을 가져왔으리라 저는 믿습니다.
우리는 부족하지만 아버지와 연결된 끈을 끝까지 놓지 않음으로 인해 우리는 강합니다. 우리는 나약하지만 아버지 현존 안에 뿌리내림으로 인해 우리는 강합니다.
세상 유혹 앞에 설 때마다 예수께서도 유혹을 받으셨음을 기억합시다. 아버지께 대한 간절한 기도를 통해 그 모든 유혹들을 물리치셨음을 기억합시다. 우리가 걸어가는, 사순절이라는 광야 여정에는 악마로부터의 유혹도 많겠지만, 든든하신 우리 주님께서 언제나 동행하고 계심을 잊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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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3y7Mkf6q7Q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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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혹을 이기는 법: 말씀의 검을 갈아놓으라>
인터넷에서 어떤 가톨릭 신자의 이런 근심 거리를 읽게 되었습니다. 한 젊은 여자가 누군가를 도와주러 지방에 가게 됐는데 일이 끝나고 주인 사모가 사례를 못해서 미안하다며 다른 분에게 무당 집 복 비를 건네주며 그 자매를 꼭 데려가서 점을 보게 해주라고 했습니다. 영문도 모르고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식사하러 가는가 했더니 무당 집이었습니다. 자매는 기분 좋게 하루 휴무를 풀로 도와주고는 기분 완전히 잡치고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집안 모든 식구가 성당을 다니고 자신은 여유가 없어서 계속 못 갔는데 최근 들어 어떻게든 다녀야겠다고 맘먹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무당이 자매에게 “신내림을 받아서 무당 할래?”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무당은 신내림을 받지 않으면 그 자매의 앞날에 재수 없는 일들이 많을 것이라 겁을 주었습니다. 지금 하는 일을 무시하고 절에 들어가든지 아니면 무당이 되어야지 안 그러고 성당이나 교회를 가면 반드시 병신이 된다고 했습니다. 지금 사랑하는 사람과 권태기인데 그 사람과도 끝장이 난다고 으름장을 놓았다는 것입니다. 분명 무시할 수 있는 말이었지만, 그 생각이 계속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인터넷에 어떻게 하면 그런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는 지를 물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이라 충고하시겠습니까? 대부분은 ‘기도’하라고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맞습니다. 우리는 기도의 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기도를 어떻게 하는 것인지가 더 중요할 수도 있습니다. 저도 한 자매가 무당이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저는 안 되면 되지 않느냐고 했지만, 그렇게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몸도 아프고 가족이 큰 재난을 당하게 된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요즘 누가 무당이 되고 싶겠느냐며, 그러나 자신은 어쩔 수 없다며 무당이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탄은 말로 예수님을 유혹합니다. 그런데 예수님도 하느님 말씀으로 사탄의 유혹을 이기십니다. 다시 말해 유혹에 빠지는 이유는 말싸움에 졌기 때문이고 유혹을 이기는 이유는 그 말을 이길 엄청난 힘의 말씀을 지녔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뱀의 말을 이길 힘 있는 말이 없었습니다. 그저 “하느님은 따 먹지 말라고 했는데...”라며 말을 흐렸습니다. 말씀에 힘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기도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단호하게 끊을 수 있는 힘이 말에 더해져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는 유혹의 달콤한 말을 이길 수 없습니다. 이 힘, 곧 성령을 말씀에 더하는 시간이 기도입니다. 기도는 하느님의 말씀이 그 어떤 말보다도 믿을 만하고 진리라는 확신을 주어 하느님의 말씀이 모든 다른 말을 이기게 합니다. 만약 기도하지 않으면 유혹을 이겨낼 수 없게 됩니다.
영화 ‘위대한 개츠비’(2013)의 간단한 줄거리입니다. 닉은 엄청난 부자인 친구 탐에게 초대 받아 함께 머물게 됩니다. 탐의 아내 데이지는 개츠비의 옛 연인이었습니다. 개츠비는 가난했지만, 주류 밀수로 큰 돈을 벌어 빼앗겼던 연인을 찾기 위해 데이지의 집 앞에 커다란 저택을 구입하고 매일 데이지가 오기를 기다리며 파티를 열었습니다. 그리고 순진하기만 한 개츠비는 데이지를 만나고 그녀의 사랑을 얻습니다. 탐도 자기 아내의 불륜을 조금씩 눈치챕니다. 그러다 데이지가 탐의 내연녀를 차로 치는 사고를 냅니다.
순진한 개츠비는 이것을 자신이 다 뒤집어씁니다. 그러자 데이지는 개츠비를 버리고 이러한 상황에서 빠져나가 다시 탐에게 가려고 합니다. 이를 눈치챈 닉은 개츠비를 위해 데이지를 그만 믿으라고 말합니다. 평생 데이지의 사랑만을 믿으며 살아온 개츠비는 데이지의 실수로 죽은 아내의 남편에게 총을 맞아 사망합니다. 그러면서도 마지막까지 데이지의 이름을 부릅니다.
개츠비는 정말 위대한 사랑을 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닉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자기 생각과 자기 사랑만이 옳다고 여겼습니다. 데이지는 개츠비를 이용했습니다. 그러나 개츠비는 닉보다 데이지를 더 사랑했습니다. 개츠비가 살 수 있는 길은 닉의 말을 더 믿을 수 있을 정도로 닉과 시간을 보내며 그를 더 알아가는 시간을 가졌어야 합니다. 우리에겐 이것이 기도와 같습니다.
저도 주님께서 저를 사제로 불러주시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제 안에는 유혹이 끼여들었습니다. 저는 제가 결혼해서 자녀를 많이 낳아 사제도 만들고 수녀도 만들면 더 주님께 나을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 말이 저에게 유혹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주님의 부르심을 거부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성당에서 기도할 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난 널 원한다!”
이 말씀이 얼마나 강력하던지 더는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원하시는 지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도하기 전에는 그 말씀에 힘이 없었습니다. 마치 천사의 말을 성모 마리아께서 성령으로 잉태하셔서 말씀이 인간이 되게 하셨듯이, 기도를 거친 말을 말씀이 되어 우리를 지배하게 됩니다. 그러니 말씀 묵상을 많이 해야 합니다. 그 무기가 많을수록 유혹에 빠지지 않습니다. 유혹을 이길 한 마디의 말씀이 없어서 우리가 죄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광야로 나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 광야에서 말씀의 무기를 가져 모든 유혹을 물리칩시다. 그러면 그리스도처럼 나도 누군가를 위한 사람이 되고 그만큼 사랑을 받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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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벌써 3년이 지났습니다. 중국에서 시작되었던 코로나 19 바이러스는 강력한 힘으로 전 세계를 떨게 만들었습니다. 저 역시도 코로나 팬데믹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의욕적으로 준비했던 홍보와 강의는 저의 원의와는 상관없이 모두 취소되었습니다. 교회도 문을 닫았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비 오는 날 저녁 바티칸 광장에서 홀로 기도하였습니다. 물질 만능주의에 푹 빠져서 하느님을 멀리했던 우리들의 삶을 반성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코로나 팬데믹이 종식될 수 있기를 기도하였습니다. 저의 모친도 2020년 9월 10일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습니다. 안타깝게도 저는 한국에 가지 못하고, 뉴욕에 머물면서 어머니를 위해서 기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은 ‘With Corona'라는 말을 할 정도로 코로나는 우리의 일상이 되었습니다. 백신이 개발되었고, 치료약도 나왔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코로나에 한 번씩은 걸렸기에 면역력도 생겼기 때문입니다.
코로나 초창기에 한국은 다양한 방법으로 대처했습니다. '드라이브 스루우(Drive Through)'라는 신속하고 안전한 검사를 개발했습니다.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자발적으로 코로나 확진지역으로 찾아가서 헌신적으로 환자들을 돌보았습니다. 한국은 ‘검사(Test), 추적(Trace), 치료(Treat)'라는 방식으로 코로나의 확산을 막아내는 모범을 보여 주었습니다. 손 씻기와 마스크 착용은 우리의 일상이 되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을 조심할 필요는 있지만 그것을 두려워하거나 무서워 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인류는 이전에도 많은 ’역병‘을 이겨냈기 때문입니다. 코로나 팬데믹은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음을 알려주었습니다. 우리의 삶이 지나치게 바쁘고 분주했다는 것도 알려주었습니다. 사람들이 움직이지 않으니, 오염되었던 대기가 깨끗해 졌습니다. 사람들이 움직이지 않으니 자연은 생기를 되찾았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이 다시 오는 것을 바라지는 않지만 설사 다시 찾아온다고 해도 우리는 다시 이겨낼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마치 코로나 바이러스처럼 우리에게 찾아오는 ‘유혹’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유혹은 무증상으로 찾아오기도 하고, 유혹은 달콤한 과일처럼 찾아오기도 하고, 유혹은 사막의 신기루처럼 찾아오기도 합니다. 마치 나방이 불 속으로 날아들 듯이 우리는 유혹이라는 강렬한 불 속으로 뛰어들기도 합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인류에게 첫 번째로 찾아왔던 유혹을 전해 줍니다. 그것은 ‘교만’입니다. 하느님과 같아 질 것이라는 교만은 인류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원죄’라고 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못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이웃의 공로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박수칠 때 떠날 줄을 모릅니다. 교만한 사람은 차별과 편견으로 가난하고, 병든 사람을 무시하고, 외면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교만의 위험성을 잘 아셨기에 언제나 ‘겸손’을 말씀하셨습니다. 가장 겸손한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제자들에게도 겸손을 말씀하셨습니다. 발을 씻어주시면서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40일 동안 단식하셨던 예수님께 찾아온 3가지 유혹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재물에 대한 유혹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를 지나가는 것이 더 쉽다고 하셨습니다. 재물을 창고에 가득 쌓아 놓은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재물에 대한 유혹은 너무도 달콤하기에 우리는 스스로 그 유혹을 찾아가기도 합니다. 재물과 하느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거룩함을 먼저 찾아야 합니다. 두 번째는 위선에 대한 유혹입니다. 거짓은 또 다른 거짓을 잉태하기 마련입니다. 동생을 죽이는 죄를 범했던 카인은 하느님께서 ‘네 동생 아벨은 어디에 있느냐?’라고 물었을 때 ‘제가 동생을 지키는 사람입니까?’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변명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시험하면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바리사이들의 위선과 가식도 비난하셨습니다. 세 번째는 권력에 대한 유혹입니다. 완장을 차면 사람이 변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개구리가 올챙이 적 생각 못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다 시킨다는 말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섬겨야 할 분은 오직 하느님이시라고 이야기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교만, 재물, 위선, 권력’에 대한 유혹을 이겨내면 좋겠습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성경에 이렇게도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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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2월26일 [사순 제1주일]
재의 수요일로부터 시작된 사순절은 파스카를 향해 정향 되어 있다. 이 사순절의 긴 여정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생명이라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여정이다. 40이란 숫자는 성경에서 볼 때, 하느님과의 만남에 앞서 갖게 되는 특별한 긴장의 시기이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 백성의 40년간 광야에서 헤맨 것(신명 8,2-4), 모세가 산 위에서 보낸 40주야(탈출 34,28; 신명 9,9), 엘리야가 호렙산을 향해 밤낮으로 걸어간 40일(1열왕 19,8)을 볼 수 있다. 이것은 하느님께 다다르는 길이 누구에게도 쉽지 않다는 것이다. 침묵 속에서 자신의 주위와 자신의 마음을 비워야 한다. 이것이 사순절 동안 우리를 내적 순례를 통해 우리의 과월절 양(1코린 5,7)이신 그리스도와의 기쁜 만남으로 초대하는 것이다.
복음: 마태 4,1-11: 예수께서는 40일을 단식하시고 유혹을 받으셨다.
오늘 복음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고통스러운 40일간의 체험에 우리의 깊은 관심과 믿음의 눈을 돌리는 것이 좋겠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셨을 때 비둘기 모양으로(3,16) 내려오셨던 성령께서 그분을 광야로 인도하시어 유혹을 받게 하신다. 그런데 이 유혹은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3, 17)라는 말씀 후에 나오는 것으로 메시아적 유혹이다. 사탄은 두 번이나 이것을 확인하려고 한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3.5절)이라고 하지 않는가?
당시의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의 명예와 품위를 다시 세우기 위해 무력도 불사하는 강력한 메시아를 꿈꾸고 있었다. 아마 야훼의 종의 노래에서 언급한 고통받는 메시아를 기다리던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예수께서 죽음을 예고하셨을 때 베드로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마태 16,22) 그때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16,23) 이것은 광야의 유혹 장면을 연상케 하고 있다. 베드로가 사탄으로 불리게 된 것은 그리스도를 십자가의 길에서 벗어나게 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 유혹 사화는 그리스도의 일생 전체를 압축시켜 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십자가 위에까지 계속된 유혹이었다.(마태 27,42 참조)
예수님의 유혹은 오랜 단식 후에 빵을 얻는 것과 같은 단순하고 순수한 일로부터 우상을 숭배하도록 종용하는 본격적인 충동적 권유에까지 이르고 있다. 이러한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 자신을 내세우고 자신의 명예를 추구하려고 애쓰는 사람 누구에게나 던지는 유혹적인 발언이다. 인간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특히 사탄이 권력과 부라고 하는 매력적인 것으로 나타날 때는 완전히 사탄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교묘한 유혹을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확고한 신뢰와 일치로써 이기신다. 그 말씀은 당신이 하시는 모든 결정의 근원적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정확히 세 번 성경에(4.7.10절)라는 표현을 하시면서 당신의 결정은 이미 하느님의 구원계획 안에 있음을 뜻하고자 한다. 즉 하느님의 말씀은 그분께서 인간들에게 베풀어주시는 빵보다도 더 값진 것이다. 이것은 생명을 위한 말씀이기 때문이다. 인간과 하느님의 관계가 물질적 차원만 있다면 그것은 이미 우상숭배를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메시아사상의 참된 의미에 대한 유혹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아마 지금도 하느님의 나라가 인간들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빵을, 그것을 필요로 하는 형제들과 나눌 수 있도록 마음을 회개하는 데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즉 자신을 나누는 것을 알지 못하고, 배고픔을 없애기 위해 돌을 빵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을 때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창세기는 인간 창조와 범죄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하느님의 말씀과 뜻에 충실하지 못한 인간의 모습, 그래서 죄를 범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하느님의 말씀에 끝까지 충실했던 예수님의 모습을 그리게 하고 있다. 여기서 구원이냐 파멸이냐에 대한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창세 3,3 참조) 사탄은 인간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의심하도록 하여 그 말씀을 어기도록 하는 데 성공한다. “너희는 결코 죽지 않는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 너희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께서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창세 3,4-5) 정말 그들은 그 열매를 먹은 후 눈이 밝아졌다. 그러나 그들은 단지 그들이 알몸인 것(7절)을 알게 되었을 뿐이다. 그 이상의 것이 주어지지 않았다. 그들이 꿈꾸었던 하느님과 같이 되려는 것은 사탄의 말을 들어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지 못했다. 그들의 행동은 죄를 낳게 되었고, 모든 세상을 파멸로 이끌었다.
바오로 사도께서도 원조들과 예수 그리스도 사이의 대립적인 상태를 강하게 묘사하고 있다.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이가 죄인이 되었듯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이가 의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로마 5,19). 이제 하느님의 말씀에 절대 복종하며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신 그리스도를 따라 그분이 회복시켜주신 하느님의 모습을 닮음을 부지런히 이루어 가는 것이 사순절을 잘 지내는 것이다.
예수께서 유혹을 받으신 장면을 다시 묵상해 본다면, 그 유혹은 예수님께 십자가 위에 돌아가시기까지 계속 괴롭혔던 유혹이었다. 바로 그 유혹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데도 끊임없이 우리를 따라다닐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하느님의 ‘말씀’에 확고하게 근거하고 신뢰하며 그 유혹을 이기셨듯이 우리도 하느님 앞에 온전히 서 있으려 노력한다면 우리도 능히 그 유혹을 이겨나갈 수 있을 것이며, 주님께서는 그에 합당한 힘을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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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유혹>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유혹을 받으신 이야기는 실제로 있었던 일을 기록한 이야기겠지만, 신앙인들이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만나는 유혹들을 상징하는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께서는 모든 점에서 형제들과 같아지셔야 했습니다. 자비로울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충실한 대사제가 되시어, 백성의 죄를 속죄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분께서는 고난을 겪으시면서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이들을 도와주실 수가 있습니다."(히브 2,17-18)
우리가 유혹을 받는 일 자체는 죄도 아니고, 부끄러운 일도 아닙니다. 예수님도 마귀에게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물리치지 못하고 유혹에 넘어가면 그때부터 죄가 됩니다. 마귀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도 유혹하는 존재이고, 예수님의 신앙인들을 늘 유혹하는 존재입니다. 특히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려고 노력하는 충실한 신앙인들은 더욱 심하게 유혹합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유혹이 다가왔을 때 그것을 어떻게 물리치느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마르 9,29)
이 말씀은 마귀를 물리치는 방법에 대한 말씀이지만, 온갖 유혹을 물리치는 방법에도 적용되는 ‘원리’입니다. 유혹을 받을 때 기도하지 않으면 누구나 ‘백전백패’입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마태 4,3)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 4,4)
마귀의 첫 번째 유혹은, ‘몸의 편안함’을(육적인 것을) 추구하라는 유혹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돌들’일까? 여기서 ‘돌들’은 ‘생명력 없음’을 상징하고, ‘돌들로 만든 빵’은 ‘썩어 없어질 양식’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라는 말씀은, 살기 위해서는 빵도 필요하지만, 빵이 인생의 목표가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육신만을 배부르게 하는 ‘썩어 없어질 양식’으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인생의 목표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어야 합니다. ‘빵’은 분명히 생존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지만,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을 방해하는 걸림돌이(유혹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라는 말씀은, ‘말씀대로 사는’ 충실한 신앙생활을 통해서만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이 없다고 걱정하는 제자들에게,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의 누룩을 조심하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16,6) 이 말씀은, 현세적인 복만 추구하는, 즉 빵만 추구하는 세속의 사고방식에
물들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가르침입니다.
또 ‘빵의 기적’ 후에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고 한 군중에게는,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 6,27)
예수님은 우리에게 ‘썩어 없어질 양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소? ‘그분께서는 너를 위해 당신 천사들에게 명령하시리라.’, ‘행여 네 발이 돌에 차일세라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쳐 주리라.’"(마태 4,6) “성경에 이렇게도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마태 4,7)
마귀의 두 번째 유혹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사람들이 했던 말에 곧바로 연결됩니다. “다른 이들은 구원하였으면서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군.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시면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 그러면 우리가 믿을 터인데. 하느님을 신뢰한다고 하니, 하느님께서 저자가 마음에 드시면 지금 구해내 보시라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으니 말이야."(마태 27,42-43)
이 말은 예수님을 유혹하는 말이기도 하고,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이기도 하고, 하느님께 반역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는 “하느님을 의심하지 마라.”입니다. 십자가, 고난, 시련, 고통, 무엇이라고 표현하든지 간에 그런 일들은 그 자체로 심각한 유혹이 됩니다.
참기 힘들다는 점도 큰 유혹이 되지만, 그런 일을 왜 겪어야 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는 점이 가장 큰 유혹입니다. 그런 일을 겪을 때, 왜 겪어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도, 그래도 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다고 믿는 것, 바로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런 일을 겪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기도’입니다. <사실 기도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당신이 땅에 엎드려 나에게 경배하면 저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마태 4,9) “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마태 4,10)
마귀의 세 번째 유혹은, 예수님의 형제들이 했던 말에 연결됩니다. “이곳을 떠나 유다로 가서, 하시는 일들을 제자들도 보게 하십시오. 널리 알려지기를 바라면서 남몰래 일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런 일들을 할 바에는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십시오."(요한 7,3-4)
세속의 헛된 명성만 찾는 것은 마귀에게 굴복하는 것과 같습니다. 문제는 그런 유혹이 유혹인 줄도 모르게 다가온다는 점입니다. 유혹을 물리치려면 우선 먼저 유혹을 유혹으로 알아보아야 하는데, 그것을 알아보는 방법도 역시 ‘기도’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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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청주교구 정용진 요셉 신부님]
해마다 사순 첫 주일에는 예수님께서 유혹을 겪으신 이야기를 듣습니다. 오늘 복음은 제1독서의 아담과 달리 유혹에 맞서 싸워 이기신 새 아담 예수님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새 아담이실 뿐만 아니라 새 이스라엘이시기도 합니다. 광야에서 하느님의 이끄심대로 살기를 거부하였던 이스라엘 백성과 달리 그분께서는 온 삶을 하느님 손에 맡기셨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적어도 세 번 유혹을 받았습니다(탈출 16장; 17장; 32장).
예수님께서 맞닥뜨린 첫 번째 유혹은 돌을 빵이 되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구약 성경에는 ‘먹는 것’과 관련된 단어가 무려 901번 나옵니다. 하느님께서는 먹을 것이 없다고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늘에서 비가 내리듯 빵을 내려 주십니다. 중요한 것은 만나와 함께 하느님의 말씀도 내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만나를, 곧 재화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또 날마다 주어지는 하느님의 섭리를 얼마나 신뢰하는가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일용할 양식에 만족하지 못하고 쌓아 놓기를 원합니다. 하느님을 끝까지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주님의 기도는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청하도록 요청합니다.
예수님께서 겪으신 두 번째 유혹은 우리가 하느님을 두고 겪는 가장 위험한 생각일지도 모릅니다. 악마는 예수님께 하느님께서 지켜 주실 테니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이 지체된다고 여길 때 그분에 대한 믿음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낍니다. 그러면서 ‘하느님께서는 정말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신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면 우리가 겪는 고통에 응답하시어 기적을 보여 주셔야 하지 않는가?’라고 의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하느님을 신뢰하셨습니다. 십자가 위 가장 고통스러운 죽음의 순간에도 당신을 살리시는 기적을 보여 달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는 하느님의 계획과 뜻을 우리의 요구대로 바꾸어 기적을 행해 달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유혹과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힘과 용기를, 빛과 희망을 주시기를 청하기 위함입니다.
마지막으로 악마는 “땅에 엎드려 나에게 경배하면 저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다.”라고 하며 예수님을 유혹합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도 여러 번 유혹을 겪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말씀으로 모든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과 하느님에 대한 오롯한 믿음으로 언제나 악마와 맞서 싸우셨습니다.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가지고 있는 힘과 능력으로 군림할 것인가 봉사할 것인가? 하느님을 섬길 것인가 거짓 신을 섬길 것인가? 하느님을 닮을 것인가 악마를 닮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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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주보》 생명의 말씀
[서울대교구 하성용 유스티노 신부님(사회사목국 부국장)]
<하느님처럼 되고 싶으십니까?>
여러분은 무엇이 원죄라고 생각하십니까? 많은 신자들은 오늘 제1독서의 내용이 원죄라고 생각합니다. 일견 맞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원죄의 전부는 아닙니다. 만약 하느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신 나무 열매를 먹은 것이 원죄의 전부라고 한다면 솔직히 하느님께 실망할 것 같습니다.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해 목숨까지 내어
놓으신 분이 우리 하느님 아니신가요? 그런데 세상에 나무 열매가 하나만 남아 있는 것도 아니고. 아주 소중한 것도 아닌데 고작 한 번 먹었다고 해서 하느님께서 영원한 벌을 내리셨다고 저는 믿고 싶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신 나무 열매는 상징입니다. 본질은 나무 열매에 있지 않고 하느님처럼 되고 싶은 모든 마음에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살던 아담과 하와는 아쉬울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어겼습니다.
다 마음대로 할 수 있는데 딱 하나 그럴 수 없던 나무 열매까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다면 하느님처럼 볼 수 있다고 두 사람은 생각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과 악마의 대화에서 우리는 원죄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확연히 알 수 있습니다.
악마는 예수님음 세 번 유혹합니다. 한 번은 먹음 것으로. 다른 한 번은 목숨으로, 마지막으로는 권력으로 그분을 유혹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세 번의 유혹을 다 이겨내십니다. 예수님이니까 배고프지 않고. 목숨이 소중하지 않고. 권력을 싫어하셔서가 아닙니다. 온전한 인성을 취하신 예수님이기에 배고픔도 느끼시고, 하나뿐인 목숨도 소중하고, 권력이 주는 달콤함을 아십니다.
하지만 이 모든 유혹의 전제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이라는 데에 있다는 것을 예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시기에 당신 자신을 굳이 증명하실 필요는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그것을 중명하기 위해서 하느님의 권능을 동원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우리의 부모님께서 우리를 향한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굳이 무언가를 해야 합니까? 그분들의 삶을 보면 충분히 알 수 있는데 말입니다. 우리의 부모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굳이 위험한 상황을 만들 필요가 있습니까?
하느님처럼 되고 싶은 원죄의 본질은 이떠한 이유로든
하느님의 사랑과 믿음을 시험해 보고 싶은 데에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사랑과 믿음을 화인하기 위해서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의 목숨을 위태롭게 만드는 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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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희성 가브리엘 신부님]
<십자가의 가난과 무능력과 약함>
예수님의 선택이 나의 선택이 되어야….
1.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에 광야에서 유혹을 받은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오늘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공생활 동안 받으신 유혹들을 하나의 이야기 안에 담은 것으로 보아야 그 뜻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2. 첫 번째 유혹은 돌을 빵으로 만들어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40일 동안 굶었더니 배가 너무 고파 돌을 빵으로 만들고 싶어졌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유혹은 빵으로 사람들을 보살피려는 유혹입니다. ‘모세가 하느님께서 내려주시는 만나를 통해 백성의 배고픔을 해결한 것처럼 가난한 이들에게 먹을 빵을 줘야 하지 않는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예수님에게 가난한 이들의 배고픔을 해결해 주고 싶은 유혹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신명기의 말씀을 기억하십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으로 산다.”
3. 두 번째 유혹은 하느님께서 도와주시는지 볼 수 있게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는 유혹입니다. 이 유혹은 예수님 생애의 마지막에도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계실 때 군중이 예수님께 메시아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믿어주겠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증명하기 위해 하느님을 이용하지 않으시고 무능력을 선택하십니다.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4. 세 번째 유혹은 악마에게 경배하면 세상의 권력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힘을 빌려 하느님의 일을 하려는 유혹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왕이 되셨다면 모든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따르는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예수님은 사라지고 권력만 남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강함이 아니라 하느님의 약함을 선택하십니다. “악마가 아니라 하느님을 섬겨라.”
5.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요구하는 풍요와 능력과 힘이 아니라, 십자가의 가난과 십자가의 무능력과 십자가의 약함을 선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유혹은 우리가 받는 유혹이기도 합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물질적인 풍요와 능력과 힘에 마음이 끌릴 때가 많습니다. 사순시기 예수님의 선택이 나의 선택이 될 수 있도록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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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김효식 이냐시오 데 로욜라 신부님]
<“우리는 어디에 마음을 두고 있습니까?”>
살다 보면 내려놓아야 하건만 본인이 투자한 시간과 비용이 너무 아깝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성과를 기대하고, 드러내고 싶어 안달을 부리고 싶지요. 보다 잘해 나가는 자신의 존재를 입증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 누가 알아봐 줄까요? 오히려 자신에게 다가와 사랑이 담긴 조그만 충고를 해 줄 때 감사하게 생각할 줄 모르고, 이리저리 감정이 뒤흔들리며 상대의 눈에 보일 정도로 굉장히 예민해져 있습니다.
상대가 이를 눈치 못 챌까요? 다 알아챕니다. 이를 보면 아시겠지만, 주님에게서 받는 영적인 성장이 아니라 세속에서 보이는 능력 존중에 심히 기울어진 마음을 본인 스스로가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성향은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악마의 유혹에 쉽게 흔들릴 사람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악마는 예수님에게 다가가 세속의 권위, 명예, 돈, 모든 것을 다 줄 테니 자기에게 다가오라고 꼬십니다. 만약, 주님을 향한 굳은 믿음을 다지기에 앞서 눈에 보이는 것에 신경을 쓰고 있다면 마음이 불안정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결국, 하느님을 시험하게 만드는 악마의 질문에 스스로가 농락당하고 죄를 범할 수밖에 없게 되는 상황이 그려지겠지요.
독서에서 ‘아담이 죄를 지어 이 세상에 죽음이 들어왔다.’ 고 하지요. 그렇다면 아담이 없었다면 죄는 이 세상에 없었을까요? 아닙니다. 아담은 예수 그리스도를 강조하기 위한 하나의 전형적인 인물일 뿐입니다. 아담은 원인 제공만 했을 뿐이요, 모든 사람이 죄를 짓고 살아갑니다. 죄를 짓지 않는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인간은 인간을 창조한 죄 없으신 하느님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위해 오히려 자신을 낮추어 다가오십니다. 낮추어 다가오시는 주님을 향해 우리는 어떻게 다가서야 할까요?
특별히 오늘 예수님께서는 악마의 유혹에 성경 말씀으로 잘 대처해 나가는 상황을 보여 주십니다. 이는 주 하느님의 말씀이 삶을 살아가는 데 참으로 중요하지 않을 수 없음을 명시하시는 것입니다. 헛된 것에 마음을 뺏겨 곤란한 상황을 만들어 나가지 마십시오.
주 하느님의 말씀은 삶의 잘못된 점을 살피고 삶의 올바른 방향성을 잡아 나아가기를 바라시는 주님의 사랑을 생각하게 이끕니다. 이것이 낮추어 다가오시는 주님을 향한 우리의 올바른 태도라 여겨집니다. 말씀은 삶의 힘입니다. 이러한 중요한 핵심을 내어 주신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며, 오늘도 말씀 안에 담긴 사랑의 영양분을 잘 받아 모시고 살아가길 바랍니다.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을 섬기며, 그분의 이름으로만 맹세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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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김선우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님]
<정말 중요한 것>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사람들 한가운데가 아닌 ‘광야’로 이끄십니다. 광야는 쓸쓸하고 참으로 외로운 곳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러한 장소에서 사탄에게 유혹을 받습니다. 사탄은 하와에게 했던 것처럼 예수님 홀로 계시는 그 순간에 유혹을 감행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본질적인 부분을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유혹의 주체와 대상은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유혹이라는 것은 글자 자체만 놓고 봐서는 외부에서 시작되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실상은 내부에서의 ‘자기동의’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받은 유혹은 달리 말하면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교부들은 유혹에서 죄로 연결되는 과정을 ‘제안-대화-동의-죄에 빠짐’의 단계로 설명합니다. 이에 따르면 사탄의 제안에 스스로 동의하기까지의 모든 과정이 유혹이 됩니다. 우리는 ‘칠죄종’을 압니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에 의해 최종 확정된 칠죄종은 ‘교만, 인색, 질투, 분노, 음욕, 탐욕, 나태’ 인데, 인간에게 필연적으로 쫓아오는 이런 유혹들이 없기를 바라는 것보다 사탄의 제안에 스스로 동의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사탄에게 제안도 받으셨고 사탄과 대화도 나누셨지만 결코 동의하지는 않으심으로써 당신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셨습니다.
결국 우리 신앙인에게 중요한 것은 유혹 없는 삶을 바랄 것이 아니라 사탄과 홀로 맞서야 하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예수님처럼 늘 꾸준히 기도로서 수행정진 하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은총의 사순시기를 시작하는 시점에서, 기도를 통해 어떤 유혹에도 굴하지 않는 참 신앙인의 모습을 만들어 갈 것을 다짐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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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방효익 바오로 신부님]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받으셨지만, 죄는 짓지 않으신”(히브 64,15)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단호한 결단이 필요함을 일깨워주십니다. 또한 유혹은 우리 내면이 아니라 곁에 있다가 게으름에 빠져들 때, 그리고 자유의지를 남용할 때 외부로부터 즉시, 소리 없이 다가옵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면 유혹이 우리 안으로 들어오더라도 쉽게 물리칠 수 있습니다. 또한 악이 세상을 지배할 수는 있을지라도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을 지배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어김으로써 아담과 하와가 선과 악을 구별하는 지식을 얻었는지 모르지만, 이제껏 자유롭게 살던 삶에서 자신들이 초라한 존재(알몸)인 것을 알고 부끄러움을 느끼게 됩니다.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욕망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안전하고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지혜를 잃어버렸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어긴 인간(아담과 하와)이 결국 자기들의 나약성을 부끄럽게 여길 뿐만 아니라 서로에게 자신을 감춰야 하는 처지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느님을 피하여 숨어들기 시작했고, 그래도 하느님께서는 “너 어디 있느냐?” 부르시면서 찾아 헤매십니다.(창세 3,8-9)
간교한 유혹자는 창조적 본성을 거스르면서(창세 3,19) 땀을 흘리지 않고도 쉽게 살 수 있다고 꼬드깁니다. 빵(물질)으로 자기 마음을 다 채울 수 있다고 믿는다면(실용적 자본주의) 결국 권력을 빌려서라도 억지로, 혼자 다 차지하게 되는 데까지 갈 것입니다. 유혹자는 언제든지 뽑을 수 있는 칼을 늘 뒤에 감추고 있는 전제군주적 권력을 추구하자고 꼬드깁니다. 인기에 영합하고 명예에 집착하고, 권력을 휘두르는데 심취하게 된다면 다른 이들은 어떻게 되든 말든 늘 자기중심적으로 결정하고 행동하지만, 결국은 허무함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유혹자는 하느님의 힘을 마술적 권력으로 대체하려는 것이며, 인권을 말살하라고 꼬드깁니다. 거기에 넘어간다면, 끝내는 비굴함과 비참함을 맛볼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한다면 하느님과 함께 가장 높이 올라갈 것입니다.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모든 것을 채워주실 분이시기 때문입니다.(1코린 8,6)
사순절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범을 따라 40일(주일을 빼고) 동안 특별히 우리의 믿음의 정도를 확인하고, 온전히 인간이시며 온전히 하느님이신 그리스도를 잘 섬기고 있는지 확인하라는 은총의 때입니다. 우리가 빵(물질)에만 온전히 의존하기 때문에 허둥대고, 명예와 인기에 매달리기 때문에 때로는 비굴해지고, 세속 권력에 연연하기 때문에 추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아닌지 자신에게 물어보라고 합니다. 이번 사순절 동안 냉담자들을 위해 특별히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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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람들>
2023. 02. 26 사순 제1주일
마태오 4,1-11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시어,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그분께서는 사십 일을 밤낮으로 단식하신 뒤라 시장하셨다. 그런데 유혹자가 그분께 다가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그러자 악마는 예수님을 데리고 거룩한 도성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운 다음, 그분께 말하였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소? ‘그분께서는 너를 위해 당신 천사들에게 명령하시리라.’ ‘행여 네 발이 돌에 차일세라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쳐 주리라.’”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르셨다. “성경에 이렇게도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악마는 다시 그분을 매우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보여 주며, “당신이 땅에 엎드려 나에게 경배하면 저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 하고 말하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그러자 악마는 그분을 떠나가고, 천사들이 다가와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
<사람들>
굶주린 사람들을
밥으로 유혹하는 사람들
밥에 게걸들려
자신의 존엄을 팽개치는 사람들
하느님처럼 밥이 되어
모든 이를 살리는 사람들
제가 마치 하느님인양
거들먹거리는 사람들
하느님을 팔아서
제 몫 챙기는 사람들
오직 하느님만을
믿고 바라고 사랑하는 사람들
한 줌 제 가진 것에 취해
오만불손하게 날뛰는 사람들
가진 자들에게 빌붙어
헛되이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
생명 평화 사랑 정의의
하느님만을 섬기며 사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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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유혹을 물리치는 길>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 안에 머무는 동안 악마의 유혹을 받으셨고 그 유혹을 물리침으로써 우리에게 악의 유혹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이 시간 유혹에 관해 묵상하는 가운데 악을 지배할 수 있는 주님의 힘과 능력을 입으시길 기원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아무 근심 걱정이 없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어떤 유혹도 없이 평온한 상태로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다면 모두가 행복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근심 걱정이 없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도 악의 유혹을 받으셨고, 더군다나 악의 세력이 뜻을 이루지 못하자 “다음 기회를 노리며”(루카4,13) 그분에게서 물러갔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도 이러한 어려움이 생겼는데 하물며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유혹이 있고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놓겠습니까? 그러므로 근심 걱정이 없기를 바랄 것이 아니라 어떠한 유혹과 시련도 이겨낼 힘을 키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실 근심과 곤란이 없으면 자만하는 마음, 남을 업신여기는 마음, 사치한 마음이 생기는 법입니다. 따라서 근심과 곤란으로서 마음의 회초리를 삼아 살아갈 수 있는 삶의 지혜를 갖추어야 하겠습니다.
아우구스띠노 성인은 “이 지상의 순례 생활에는 유혹이 없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진보는 유혹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유혹당하지 않고는 아무도 자신을 완전히 알지 못합니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유혹을 받지 않을 만큼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오히려 거룩하고 완전하게 살려는 사람일수록 더 큰 유혹을 받게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악의 세력은 거룩함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유혹에서 지면 보통 사람이고, 이기면 그야말로 큰 사람이 됩니다. 여러분 모두가 큰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유혹은 달콤하고 매력적이기 때문에 끊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유혹은 언제나 그야말로 ‘유혹적’입니다. 그래서 단호한 결단이 필요합니다. 유혹자와 자주 접하게 되면 유혹에 둔감하게 되고 결국은 넘어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대한 굳건한 믿음과 충성심’으로 유혹의 기회를 끊어버려야 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겪은 첫째 유혹은 생계 문제입니다. 먹고 사는 문제입니다. (쓰리고의 문제입니다. 먹고, 마시고 즐기고)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도와주려면 무엇보다도 돈이 필요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돈이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누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성녀 마더 데레사 수녀님의 말씀대로 “사람들이 기아로 죽어가는 것은 하느님께서 그들을 돌보시지 않아서가 아니라 바로 여러분과 내가 너그럽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손안에 있는 그 사랑을 나누어 주는 도구가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분명, 빵이 중요하지만, 빵보다 사랑이 중요합니다. 물질적인 것 위에 영적인 것이 있습니다.
두 번째 유혹은 명성(명예)에 대한 유혹입니다. 악마는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운 다음 성경의 ‘천사들이 너를 보호하고 받쳐 주리라.’하는 말씀을 들먹이며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여기에서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루카4,9) 하고 말하였습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도 살수 있다는 것은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하느님의 능력인 기적을 남용하라’는 요구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하신 말씀이 성경에 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남의 눈에 띄고 인정받으며 찬사를 받고 싶어 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에도 있습니다. 일상에서 남몰래 십자가를 지기를 싫어합니다. 그러므로 생색내기의 유혹에서 벗어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세 번째 유혹은 권력에 대한 유혹입니다. 사탄을 경배하면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라는 성경말씀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사실 상대방을 더 많이 지배하고픈 마음,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면 불의와 타협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 순교자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많은 성인 성녀들이 하느님을 따르기 위해 세상의 부귀영화를 버렸습니다.
박해 시절에 그들이 세상과 타협했다면 목숨을 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느님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래서 모두를 얻었습니다. 우리도 지상의 조그마한 유익함 때문에 하느님을 버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정치에 발을 디뎠던 분이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정치를 하려니 “얼굴에 철판을 깔아야 하고,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해야 하며 소신이 없어야 하더라.” 만약 우리가 불의와 타협한다면 그것이 사탄을 경배하는 일이 됩니다.
유혹에 넘어가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자만해서 그렇습니다. 이사야서 47,10에서는 “네가 실컷 나쁜 짓을 하면서도 ‘나를 감시할 눈이 없다.’하고 자신만만이구나. 너는 지혜로운 체, 세상일을 다 아는 체하며 ‘이 세상에 나 밖에 없다.’고 하다가 제 꾀에 넘어가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뱃속까지 환히 들여 다 보시는 하느님께서 보고 계신 데 하느님을 의식하지 못한 탓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자기 욕심에 끌려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사람이 자기 욕심에 끌려서 유혹을 당하고 함정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가져 옵니다.”(야고 1,14-15) 더 많이 소유하고 지배하고자 하는 욕심이 우리를 병들게 합니다.
그러나 유혹을 물리치는 길을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고난을 겪으시면서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이들을 도와주실 수가 있습니다.”(히브2,18)
그러나 그 길을 따르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부, 권력, 명예의 3가지 유혹을 보았는데 결국 예수님께서는 모든 유혹을 하느님의 말씀을 통하여 물리쳤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느님의 말씀으로 무장하는 것입니다.
에페소서 6장 10절, 17절을 보면 “주님 안에서 그분의 강한 힘을 받아 굳세어지십시오. 악마의 간계에 맞설 수 있도록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히 무장하십시오.”
“구원의 투구를 받아쓰고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말씀으로 충만하고, 성령의 칼로 무장되어, 괘락과 욕망을 향한 유혹을 물리치고, 진리를 떠나지 않는 승리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모든 유혹을 극복하기 위해서 성경을 읽으십시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어떤 피조물도 감추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 그분 눈에는 모든 것이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 이러한 하느님께 우리는 셈을 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히브4,12)
따라서 말씀에 나를 비추어 새 삶을 살 수 있는 은총을 간구합시다. 하느님의 말씀과 함께하면 유혹은 은총입니다. 자신을 확실히 볼 수 있는 기회이고 죄가 많은 곳에 은총도 풍성하게 내렸으니 말입니다.
유혹이 없기를 기대하지 말고 유혹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쌓기를 희망합니다.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사시는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2독서 보면,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이가 죄인이 되었듯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이가 의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로마5,18)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유혹에 넘어감으로써 이 세상과 인류에게 죄와 죽음을 돌아오게 하였다면, 새 아담이신 예수님께서는 유혹을 이겨냄으로써 온 세상을 구원의 길로 이끄시는 사명을 시작하셨습니다.
주님의 도움으로 유혹을 이겨내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유혹을 이겨내게 하는 도구로 쓰임 받으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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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탄의 네 가지 말)
서양의 속담에 마귀는 네 가지 말로 사람을 죄에 떨어지게 한답니다.
첫째. ‘누구나 다 하는 일인데 뭘’
둘째. ‘대수롭지 않은데 뭘’(이까짓 일이야).
셋째. ‘딱 이번 한번 만이야!’
네 번째. 아직 앞날이 많으니까.
유혹은 이렇게 평범하게 생각하는 가운데 다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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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지금 능숙한 모든 일은 처음부터 잘했던 것이 아닐 것입니다. 처음에는 다 버벅거렸고, 실수투성이였습니다. 그러나 반복과 연습을 통해 능숙하게 또 ‘잘한다’라는 말을 들을 정도까지 된 것입니다. 태어나자마자 걷는 아이가 있을까요? 말은 어떻습니까? 또 글 쓰는 것 역시 처음부터 잘할 수 없습니다. 원래 잘했다는 생각을 갖고 계신 분은 펜을 잡는 손을 바꿔서 써보십시오. 아마 글 쓰는 것이 아니라, 글을 그리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번에는 앞으로 걷지 말고, 뒤로 걸어보십시오. 평상시에는 너무나 쉬웠던 걷기가 뒤로 걸을 때는 그렇게 쉽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반복과 연습을 통해 지금의 나를 만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를 깨닫는다면, 포기와 좌절이 얼마나 잘못된 감정인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왜 나는 운이 없을까? 왜 나는 잘하지 못할까?’ 등의 말은 모두 반복과 연습의 부족에서 나오는 말일 뿐입니다.
수천 번 수만 번의 실수 끝에 지금의 내가 된 것입니다. 수천수만 번 넘어진 뒤에 지금 잘 걸을 수 있게 되었고, 수천수만 번 글씨를 적다 보니 능숙하게 글을 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어렸을 때는 포기하지도 좌절하지도 않았는데, 커서는 왜 이렇게 쉽게 포기하고 좌절할까요? 바로 남과의 비교 때문입니다. 어렸을 때는 비교 대상이 없습니다. 오로지 ‘나’입니다. 하지만 학교에 입학하면서 비교 대상이 보입니다. 그들보다 늦은 ‘나’를 바라보며, 자기를 평가절하하기 시작합니다. 포기하고 좌절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남과 비교하면서 하지 못하는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나만의 것을 성장시키는 우리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도 포기하지 않고 반복과 연습이라는 노력을 계속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십니다. 광야에서 사십일을 밤낮으로 단식한 뒤였습니다. 배고픔과 피곤함이 가득한 상태였습니다. 이렇게 어렵고 힘든 상태에서 악마는 유혹합니다. 첫 번째 유혹은 지금 당장 필요한 것, 즉 배고픔을 해결할 수 있도록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유혹합니다. 두 번째 유혹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힘을 보이라는 유혹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유혹은 악마에게 경배하면 세상의 모든 나라와 영광을 주시겠다는 유혹이었지요.
이 모든 유혹은 오로지 성경 말씀으로만 이겨내십니다. 그 어떤 것과 비교하지 않고 하느님 말씀에만 집중하니 그 유혹을 거뜬하게 이겨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준비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직접 모범으로 보여주셨습니다. 바로 광야에서의 사십일의 시간, 어쩌면 우리 삶 안에서 체험하는 반복과 연습의 시간이 아닐까요?
하느님 말씀에 집중하면서, 늘 그 뜻에 맞춰 살 수 있는 반복과 연습의 시간을 가져야겠습니다. 우리 역시 주님처럼 멋지게 악마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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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광야로 가자, 하늘을 보자.>
사순 제1주일은 똑같이 사탄의 유혹을 받은 인류의 조상과 주님을 얘기합니다. 그런데 창세기는 인류의 조상이 유혹을 받아 하느님처럼 되려다가 죄를 지었다고 전하는 데 반해 복음은 유혹을 받으신 주님께서 하느님의 아들답게, 사탄과 그 유혹을 물리치고 죄에 대해 승리하셨음을 대조적으로 전합니다.
이런 대조를 보면서 주님께서는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셨지만, 죄는 짓지 않았다는 히브리서의 말씀이 떠올리며 우리도 인류의 조상처럼 하느님이 되려고 하지 말고, 주님처럼 하느님의 아들이 되자는 묵상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인류의 조상은 하느님처럼 눈이 열리는 유혹에 넘어간 데 비해 복음의 주님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이라는 유혹을 연달아 받으셨지만 그 유혹에는 넘어가지 않고 하느님의 아들다운 선택을 하셨는데 우리도 진정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주님과 같은 선택을 해야 한다는 묵상을 또한 했습니다.
우리가 진정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그리고 눈이 열려야 한다면 육의 눈이 아니라 영의 눈이 열려 빵이 아니라 말씀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실 빵을 보는 것은 눈이 열릴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가 욕망하는 것이고 저절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니 보려고 애쓸 필요도 없고 눈앞에 있어 눈을 돌릴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빵을 보고도 그 너머의 말씀을 보려면 너머의 것을 보려는 의지와 볼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데 보려는 의지는 내가 지녀야 하지만 볼 수 있는 능력은 주어져야 합니다.
성령이 주어져야 하고 주님처럼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만 합니다. 주님처럼 유혹을 받기 전에 요르단강에서 세례와 성령을 받고는 성령의 인도로 유혹밖에는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 가서 단련까지 받아야 합니다.
사탄과 유혹으로 단련되는 기간이 40일입니다. 이 기간을 덜 채우면 안 됩니다. 덜 채우면 덜 단단해집니다.
그래서 이 기간엔 천사의 시중을 받으라고 사탄이 유혹해도 천사마저 시중을 들지 않고 그 시중을 받으려고도 하지 않으십니다.
마지막으로 사탄은 산꼭대기에서 세상 영광을 보여주며 자기를 경배하면 그것을 주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림없는 일입니다. 주님은 산꼭대기에서 세상을 내려다보지 않으시고 하느님 나라를 올려다보시며 하느님께 경배합니다.
산꼭대기까지 가서 세상을 내려다볼 일이 뭐 있습니까? 세상 영광을 소유하려면 세상 가운데로 돌진할 것이지 세상을 떠나 뭣 하러 산꼭대기까지 애써 올라갑니까?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주님처럼 세상을 떠나 광야로 가고, 산꼭대기를 오르더라도 세상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보도록 합시다. 사탄의 유혹이 있을 때마다 오히려 유혹을 주신 하느님을 보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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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시어,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마태4,1)
<광야의 의미!>
오늘 복음(마태4,1-11)은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시어, 사십 일을 밤낮으로 단식하시면서 '대피정'을 하십니다. 예수님의 본격적인 드러남이신 예수님공생활의 시작을 앞두고...
그곳 광야에서 대피정을 하실 때, 세 번에 걸쳐 악마의 유혹을 받으십니다. 그리고 이 유혹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물리치십니다. 하느님이신 분이 유혹을 받으시고 이를 물리치십니다. 이 또한 우리를 위한 '하느님 사랑'입니다. 많은 유혹에 노출되어 있는 우리들도 예수님처럼 '말씀의 힘으로' 유혹들을 물리쳐야 한다는 모범을 보여주신 사랑입니다.
'광야의 의미'에 대해 묵상해 보았습니다. 요즘 묵주기도 바치면서 산책할 때 유튜브로 듣는 생활성가가 있는데, '광야를 지나며'(장진숙/노래해주리) 라는 생활성가입니다. 이 노랫말 안에 광야의 의미가 잘 드러나 있어 함께 공유해 봅니다.
<광야를 지나며>
왜 나를 깊은 어둠 속에 홀로 두시는지
어두운 밤은 왜 그리 길었는지
나를 고독하게 나를 낮아지게
세상 어디도 기댈 곳이 없게 하셨네
광야, 광야에 서 있네
주님만 내 도움이 되시고
주님만 내 빛이 되시는
주님만 내 친구 되시는 광야
주님 손 놓고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곳
광야, 광야
주님께서 나를 사용하시려, 나를 더 정결케 하시려
나를 택하여 보내신 그곳 광야
성령이 내 영을 다시 태어나게 하는 곳
광야, 광야에 서 있네
내 자아가 산산히 깨지고
높아지려 했던 내 꿈도 주님 앞에 내어 놓고
오직 주님 뜻만 이루어지기를
나를 통해 주님만 드러나시길
광야를 지나며..
오늘 복음과 노랫말 안에 드러나 있듯이, 광야(고통)는 주님께서 주신 선물이며, 주님을 만나는 곳이고, 다시 태어나게 하는 곳임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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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p6zCNvgGt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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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십 일을 밤낮으로 단식하신 뒤라 시장하셨다."(마태 4, 2)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광야가 있습니다.
광야에서
온몸으로
부딪히고
온삶으로
멍이 들며
깨닫습니다.
삶을 일깨우는
광야입니다.
공생활이
시작되는
광야입니다.
광야의 방향은
언제나
하느님이십니다.
욕망의 굴레에서
점점 작아지는
우리자신을
처절하게
만납니다.
유혹 앞에
어찌할 수 없는
우리들을
보게 됩니다.
유혹에 붙들려
있기를 바라지
않으시는 우리의
하느님이 우리를
이끄십니다.
생명의 길은
유혹의 길이
아닙니다.
빵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나누는 것입니다.
욕망의 질주를
멈추게 하는 것은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욕망의 높이는
욕망의 추락입니다.
치유되지 않은
그릇된 욕망은
하느님까지
시험합니다.
우리 영혼을
지탱하시는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겸손한 사랑이
바로 신앙입니다.
누군가를
다스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자신을
다스리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광야도
하느님의 손이
뻗치는 하느님의
영역입니다.
오히려 광야에서
더 깊어지는
믿음입니다.
하느님만으로
충분하고
충분합니다.
광야에
나오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살아있는 신앙
치열한 삶은
여기서
시작됩니다.
광야에서
가장 뜨거운
하느님 사랑을
만납니다.
모든 여정이
사랑임을
배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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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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