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깨어있으라 기도하라 예루살렘 멸망 예고(21,25~28 ; 34-36) 예수님의 종말론적 설교에서 고대 사회의 전쟁 형태를 엿보게 된다. 고.중세 시대의 전쟁 영화를 보면 성을 포위하거나 벌판에서 진영을 만들어 화끈하게 한 판 붙는다. 산위의 마을 곁에 온달산성이 있다. 바보온달과 평강공주의 러브 스토리로 등장하는 역사의 주무대이기도 하다. 우리 가족들에게는 가까운 소풍이나 엠마오의 코스가 되기도 한다. 고구려군은 신라군을 저지하고 산성을 사수하려 했으나 신라군의 공략에 마침내 무너져서 전설적인 온달 장군은 최후를 맞았고 고구려는 한강 이북으로 후퇴하게 된다. 복원된 산성은 무척 높아서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 아니며 출입을 막으면 꼼짝없이 고립될 수밖에 없어 보인다. 그러나 고대인들의 전쟁에서 그것은 비겁한 일이다. 성주를 무릎 꿇리지 않으면 승리라고 볼 수 없었다. 장수가 성문을 열고 나와서 항복을 하고 화친을 맺던지 아니면 결사항전을 하며 스스로 최후를 맞아야 해야 존경받는 장수가 된다. 이순신, 징키스칸, 나폴레옹 모두 당대의 장수들은 전쟁의 맨 앞장에 서서 지휘했다. 장수끼리 맞붙어 이긴 장수가 적군을 접수하는 것도 고대 이래 오랜 전쟁의 도덕이다. 자기 부하 군사들의 생명을 보호하고 희생을 줄이기 위한 맞장으로 겨루는 싸움은 참으로 인간적인 ‘장수의 도리’이며 ‘전쟁의 도’이다. 전쟁의 장수들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종로와 서울 주먹을 평정한 김두환과 맨주먹 대결 시대 두목들도 모두 그렇게 서로를 접수하고 물러서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현대 세계에는 조폭 깡패들은 물론 국가 간의 전쟁도 모두 너무나 비겁한 몰골들 뿐이다. 사령관은 전쟁터와 상관없는 안전가옥 지하 벙커에서 보고받고 흥정하고 명령만 내리고 무력한 병사들만 총알받이로 죽어 가게 만든다. 장수들의 자녀는 아예 군대에도 가지 않는다. 조폭들 또한 그러하다. 그래서 양아치라고 부르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기도 한다. 왜 전쟁터의 군졸이나 깡패들은 두목과 장수의 패배를 자신들의 패배로 받아들였을까? 그의 죽음을 보면서 다음 차례가 자신들이라는 사태의 양상을 예측하기 때문이다. 환란을 당한 세대들은 직관적으로 민초적 영감으로 자신들에게 다가올 삶과 죽음의 길을 보는 능력을 가진 것이다. “적군이 포위하는 것을 보거든... 종말이 다가온 줄로 알라.” 전쟁을 비유하는 예수님의 종말론적 가르침은 지금 내 앞에 생명의 길이 무엇이며 내가 살기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신다. 유한한 삶은 이후의 삶에 대한 대안을 가지라는 것이다. 웅크리고 두려워하면 길이 보이지 않는다.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 자신 앞에 주어진 비전을 발견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신앙이란 현실의 삶을 인도하는 이정표임과 동시에 영생에 대한 대안의 삶이다. 종말이란 죽음과 같아서 삶과 짝을 이룬다. 늘 깨어 살지 않으면 죽음이 다가와도 죽음인줄 모르고 종말이 와도 종말인 줄을 알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르치셨다. “그런 일이 일어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라.” 어디 종말 뿐이랴? 귀인이 행운을 들고 나를 찾아와도 귀인을 알아보지 못할지니,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을에 육화 강생하셔도 내 곁에 태어나셔도 그것을 결코 알아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더욱 깨어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신앙은 생명의 길을 볼 수 있는 눈을 뜨게 하며 기도는 나를 깨어있게 하는 자기 능력이다. |
첫댓글 항상깨어있으라....!!
항상깨어있으라....!!
_()_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