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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현재 과거사 청산작업을 통해 그동안 국민들을 분노하게했던 적폐들을 하나씩 청산한다는점은 좋지만 일상생활속에서 특히 고용의 질이나 취업시장은 그다지 좋아지는것같지는 않네요
당장 결과가 나오는건 아니니 기다려보고 그때 비판을 해도 늦지 않겠죠
저는 정치를 모르지만 간간히 뉴스를 보면 장관들이나 대법원장 검찰총장 이런 고위직 공직자들 임명도 국회동의를 다 거치고 가결이니 부결이니 이러니 뭔가를 제대로 이뤄내기가 힘들어 보이네요
별건 아니고 문득 예전에 제 아버님이 해주신 얘기가 생각나서 글 남겨봅니다
정치인들은 겉으로는 으르렁대며 싸워도 밤에는 은밀히 만나서 빅딜도 한다고...
구미가 당기면 정계개편도 결정한다고...
그래서 정치인들은 매의 눈으로 감시하고 꼼꼼히 공약을 보라고 아버님이 저한테 그러시더군요
그러시면서 예전에 3당 합당사건에 대해서 얘기해주셨는데 흥미롭더라구요
지금은 제1야당이 되버린 자유한국당 즉 자한당의 역사를 알아갈수 있었네요
민주자유당☞신한국당☞한나라당☞새누리당☞자유한국당 이렇게 이어져오더라구요
그냥 가볍게 읽어보시라고 자유게시판에 남겨봅니다
※3당 합당(민자당 합당)
1990년 1월 22일 발표되어, 그해 2월 당시 여당인 민주정의당과 야당인 통일민주당과 신민주공화당이 야합한 사건. 이로 인해 지금까지도 국내 보수 세력에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본류당 격인 민주자유당이 만들어진다.
3당 합당의 결과, 13대 총선을 통해 만들어진 여소야대 정국은 순식간에 여대야소로 뒤바뀌었고, 김대중의 평화민주당은 유일한 원내 야당으로 남는다.
그리고 그동안 호남 VS PK VS TK VS 충청도의 4자 구도로 이어져 왔던 지역 정치 구도가 순식간에 호남 VS 非호남으로 단순화되면서 지역적으로 호남이 고립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1]
2. 배경[편집]
1987년 12월 16일 치뤄진 제13대 대통령 선거는 민주화 투쟁의 선봉장에 섰던 양김(김대중 & 김영삼)의 분열로 의해, 군사 독재 정권의 후신인 민주정의당의 노태우가 어부지리격으로 대통령에 당선되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낮은 지지기반 속에서 시작한 노태우 정권은 이듬해 1988년 4월 26일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125석, 평화민주당 70석, 통일민주당 59석, 신민주공화당 35석, 한겨레민주당 1석[2], 무소속 9석이라는, 국내 헌정 사상 처음으로 집권 여당이 과반수 획득에 실패하는 여소야대 국회를 불러오고 만다. 그리고 이러한 여소야대 상황과 강해진 민주화 분위기 속에서 정치사회권도 자연스레 많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당장 제도권 정치인 국회 운영에서도 항상 과반수를 차지하던 제1당 그러니까 집권당이 독식하던 국회 부의장과 상임위원장을 정당 의석수대로 배분하는 관례가 처음 만들어지고 모든 법률/예산 심사와 국회 통과가 여야 4개 정당의 협상으로 처리된다. 4개 정당이 의석을 절묘하게 나눠가진 결과 어떤 정치세력도 혼자선 아무 것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한국 정치의 고질적인 병폐인 집권당의 날치기와 이를 막기 위한 야당의 국회점거농성, 일명 국회공성전이 유일하게 없던 때가 바로 이 시절이었다. 각자의 원칙과 주장을 목청높여 외치면서도, 서로 대화하고 타협하면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민주주의 정치 본연의 모습이 살아난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여소야대는 한국정치에 매우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5.18 민주화운동, 언론통폐합, 제5공화국의 권력형 비리 등 과거 군사정권의 어두운 면을 파헤치는 국회 청문회가 TV생중계가 되면서 전국민의 폭발적인 관심을 끌었다.[3]
곧바로 전두환 일가와 측근들의 비리에 대한 검찰 수사로 수십여명이 구속되거나, 정계에서 강제 퇴출되었으며, 전두환은 백담사로 사실상 귀양을 떠나야 했다. 이와 함께 사회 각 분야에 민주화 분위기가 몰아치면서 국민성금으로 한겨레신문이 창간되었으며, KBS와 MBC는 그동안 독재정권의 나팔수 역할을 해온 것을 반성하는 프로그램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간 억눌려있던 노동자들이 경제 성장에 기여한 자신들의 정당한 대가를 요구하면서 전투적 노동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으며, 전교조가 탄생했고, 프로야구 선수들은 선수 노조 결성을 시도했으며, 1989년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약칭 경실련)이 등장하면서 시민운동이 태동했다.
학생운동과 재야에선 금기시되던 통일 논의에 불씨를 당기면서 1989년 한 해에만 문익환 목사, 전대협 대표 임수경, 정의구현사제단 문규현 신부 등 여러 건의 무단 방북 사건이 일어났다. 즉, 군사 독재 정권 시절 억압에 의해서 감춰져 있던 사회 각 분야의 모순들이 일제히 터져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노태우 대통령과 민정당 그리고 보수 언론 등 기존의 주류 기득권 세력들은 이런 상황을 매우 불만스럽게 보았다. 정점에 선 독재자를 중심으로 군대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던 모습에 익숙하던 사람들에게, 여론을 살피고 야당과 타협하면서 한 발자국씩 전진하는 모습을 거추장스럽고, 비효율적이며, 유약한 것처럼 여긴 것이다.[4]
사회 곳곳에서 분출되는 다양한 목소리는 각 분야에서 군대식으로 조직되있던 기존 질서를 흔들기 시작했으며, 이것을 자신들의 기득권에 대한 중대한 위협으로 보기 시작했다.
그래서 당시 보수 언론을 중심으로 대통령의 위엄이 사라졌다, 정부가 사회 불만 세력에게 질질 끌려다닌다, 국회가 경제 발목을 잡고 있다, 공권력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 등의 이야기가 계속 나왔으며, 노태우는 물태우라는 조롱섞인 별명으로 불리기 시작한다.
노태우와 민정당은 이런 현실을 위기 상황이라고 판단하고, 한 방에 판을 바꿀만한 해결책을 연구하기 시작한다. 그것이 바로 합당을 통한 정계 대개편이었다.
사실 1992년 차기 총선과 대선까지 지역 대립에 기초한 4당 구도가 계속 갈 거라고 본 사람은 드물었다. 4당 체제에 만족하는 정치인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위의 문단에서 노태우 대통령과 민정당의 불만과 위기 의식에 대해 길게 서술하였지만, 나머지 야 3당도 상황이 순탄한건 아니었다.
우선 김대중의 평화민주당은 제1야당으로 정국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지만, 호남과 수도권 호남표 + 개혁 성향의 20~30대 야당표 + 비판적 지지의 진보표만으로는 다가오는 총선과 대선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한계점을 명확히 깨닫고 있었다. 13대 대선 결과는 4자필승론이 그저 희망사항일 뿐이었단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김영삼의 통일민주당은 제2야당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고, 총선에서 평민당에 뒤진 것이 온건 이미지 때문에 고정 야당표를 놓쳐서라고 판단해서 한동안은 강경한 대여선명투쟁을 외쳤다. 13대 대선에서 노태우는 올림픽 이후 국민투표로 재신임을 묻겠다는 파격적인 공약(중간평가)을 내걸었는데 김영삼과 통일민주당은 강경한 대여선명투쟁의 일환으로 중간 평가 즉각 실시를 끝까지 외쳤다. 그러나 민정당이 이에 대해 오락가락한 태도를 보여주는 가운데 오히려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과 김대중의 평화민주당이 중간 평가에 반대하여 투쟁에 큰 성과가 나지 못했다. 이에 김영삼은 유신 본당이라 자처하던 김종필에게 접근해서 통일민주당과 신민주공화당의 합당 냄새를 피우는 등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평생을 권력의 핵심부에서 보내던 김종필과 신민주공화당은 말년의 야당 생활이 달갑지가 않았다. 거기에 3공, 4공을 거치며 내각제가 옳다는 신념을 가지게 돼 내각제를 외치고 있었지만, 확고부동한 직선제 지지 여론을 넘을 수가 없었다.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면서 수백만 명이 거리로 뛰쳐나온지 불과 2~3년 정도 지난 시점이라 이때까지는 직선제가 곧 민주주의고, 내각제는 그들만의 야합이란 인식이 국민들 사이에서 팽배했다.
이 때문에 정치권에선 온갖 종류의 정계 개편 시나리오가 떠돌아 다니고 있었고, 언론에서도 수시로 기사화하고 있었다. 3당 합당을 아무런 조짐이 없다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묘사하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로는 1989년 들어서 정계 개편과 관련해서 정말로 많은 언론 보도가 있었다. 구글링만 해봐도 과거 기사들을 손쉽게 찾을 수 있다.
물밑에선 정말 경천동지할 시나리오들이 논의되었고, 그 중에 한가닥 현실화된 것이 민주정의당 + 통일민주당 + 신민주공화당의 3당 합당인 것이다.[5] 1989년 12월에는 박준규 민정당 대표가 노태우 대통령 탈당, 민정당 해체, 양당제 정계 개편을 공개적으로 주장하다가, 당 내분으로 사퇴하는 소동까지 일어났을 정도다.
그리고 불과 한 달 뒤에...
총선이 여소야대로 끝나고 난뒤 정권 핵심부에서 나온 첫 번째 방안은 민주정의당(129석)[6]과 신민주공화당(35석)의 합당이었다.
이러면 164석으로 국회 과반수를 훨씬 뛰어넘는 숫자이며, 두 당 모두 군사 독재 정권 출신으로 정치 노선이나 정책상에 큰 차이가 없어[7] 합당 후에도 별다른 잡음이 나오지 않고, TK와 충청권을 중심으로 보수층을 확실하게 끌어모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거기에 권력의 단맛을 아는 김종필과 신민주공화당 정치인들이 합당에 적극적일 것이란 점도 충분히 예상가능했다. 실제 김종필은 합당 제안을 듣자마자 무조건 OK를 외쳤다고 한다.
그러나 합당에 반발해서 김대중과 김영삼이 다시 손을 잡고 평화민주당과 통일민주당을 합쳐 거대한 단일 야당을 만들 위험성이 있었으며, 박정희 & 전두환의 피를 이어받은 두 당이 합치면 그 당시 국민들이 염증을 내는 군바리 색채가 오히려 강화돼서 다음 선거에서 잘못하면 중도표를 모두 잃을 수 있다는 단점이 있었다. 이 때문에 민주정의당 + 신민주공화당 시나리오는 유야무야 그냥 묻혔다.
그러나 시간이 계속 흐르면서 여소야대에 시달리던 노태우 정권 핵심부에선 더 이상은 안 된다는 분위기가 형성되었고, 1989년에 봄을 기점으로 보수대연합을 명분으로 하는 정계개편론이 불거진다.
이때 노태우 정권은 김대중이 이끌던 평화민주당과의 합당을 구상했다.
이 합당이 성공하면 무엇보다도 망국적인 지역감정을 해소하는 국민대통합이란 걸출한 명분을 내걸 수 있고, 일거에 군사 독재 정권의 색채를 지울 수 있다는 장점이 있으며, 의석수도 199석으로 단독 개헌선인 200석에 단 1석 모자라는 초거대 여당을 만들 수 있었다.
물론 실제로 이루어졌다면 평민당 내에서 뚜렷하게 진보적 목소리를 내고 있던 재야 출신들은 당연히 이탈했을 것이지만, 당시의 평민당은 자유주의 기조의 야당으로 호남에 기반한 당 주류 세력들은 진보 좌파성향과 거리가 있는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더구나, 당시 평민당과 김대중 총재는 제1야당으로 책임감 있는 정치 세력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미지와 다르게 상당히 온건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김대중은 공개적으로 평민당은 '온건 중도 정당'[8]이라면서 급진적인 학생 운동, 전투적인 노동 운동과 선을 그었다.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강하던 시절에는 독재정권에 반하는 좌우 세력들이 모두 대동단결하여 소위 범민주세력을 형성해서 민주 vs 반민주(독재) 구도를 형성했지만 실제로 군사정권 시기 범민주진영의 다수는 반공주의, 민족주의, 사회적으론 진보적이나 경제적으로는 시장경제를 신뢰하는 자유주의자들이었으며 이는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극복하려는 좌파(사회주의, 사민주의 등 포함) 세력과는 확연히 구분된다.[9]
여튼 이런 친정부적인 스탠스를 보여준 평민당은 노태우와의 영수 회담을 통해서 중간평가 공약 철회를 주장하였으며, 민정당은 우물쭈물거리는데 제1야당인 평민당이 대놓고 중간평가를 실시할 경우 정국이 혼란 속에 빠질 것이라는 주장을 하며 오히려 중간평가를 하면 안된다는 논리를 폈다.
당시 평화민주당 원내총무(지금의 원내대표)였던 김원기가 훗날 회고한 바에 따르면, 김대중 총재를 비롯한 평민당 수뇌부는 아무리 노태우 정권이 5공의 연장선에 있다 해도 국민들의 직접 투표로 선출된 만큼 중간평가는 애초부터 말이 안 된다고 판단했었다.
더불어 1989년 10월에는 12.12 군사반란과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역사적 진실 규명과 피해자에 대한 보상, 의문사 진상규명, 5공 비리에 대한 사법 처리, 방송민주화 등 수많은 과제들이 산적해 있는데도 불구하고 전두환의 국회 증언 단 한 가지만을 조건으로 5공 청산 완료에 합의해 주었다.
그 증언이라는 것도, 사실 전두환은 사전에 서면통보된 질문에 대한 답변만 하고, 개별적인 질의응답은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1989년 12월 31일 국회 본회의에 나온 것이며 전국에 TV로 생중계되는 가운데 정작 질문에 대한 답변은 하지 않고 두리뭉술하게 변명조의 연설만 하면서 야당 의원들이 명패를 던지면서 야유를 하는 소동이 일어나는 등 만족스럽지 못한 것이었다.
이런 일관된 김대중의 온건 행보를 보고 노태우 정권의 핵심부는 충분히 합당도 가능할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노태우 정권의 핵심이었던 박철언 정무장관이 김원기 원내총무를 통해서 합당을 처음 제안했고, 이후에도 여러차례 제안이 들어갔다.
1989년 겨울 청와대 영수회담에서 노태우 대통령이 직접 김대중 총재에게 다시 제의하기도 했다. 당시 합당의 조건으로 신당의 총재직은 물론이거니와 5.18 민주화운동 진상규명에 대한 전권을 주는 방안까지 나왔을 정도로 노태우 정권은 합당을 통한 정계 개편에 사활을 걸고 있었다.
그러나 김대중은 계속되는 노태우의 합당 제안에 “국민이 만든 여소야대가 불편하다고 마음대로 바꾸려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민주주의를 크게 후퇴시키는 일이고 정치 윤리를 망치는 일이다”, "끝까지 야당으로 국민의 심판을 받고 싶지, 합당을 통해서 정권을 잡고 싶지 않다"라면서 거절해버렸다.
한편 제2야당으로 전락해 숙명의 라이벌인 김대중과의 대권 경쟁에서 밀렸다고 생각했던 김영삼은 초기엔 김종필과의 연대를 구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대중과 평민당이 점점 부각되면서 노태우 정권에 대한 대립각과 선명성을 부각하던 김영삼의 전략은 실패로 돌아간데다, 1989년 말 동해시 보궐선거에서 가신인 서석재 의원이 신민주공화당 이홍섭 후보를 매수하려 한 혐의를 받아 궁지에 몰리고 말았다.
그래서 김영삼은 노태우 측으로부터 합당 제의가 오자 회심의 승부수로 이를 수락했고, 원래부터 민정당과 비슷한 성향이었던 김종필 역시 합류하여 1990년 1월 새해 벽두에 기자회견을 통해 이를 공개하게 되었다.
3당 합당으로 만들어진 당의 이름을 민주자유당이라고 했는데, 이는 비슷하게 보수대연합으로 만들어진 일본의 자유민주당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고 추정된다. 참고로 이 이름은 김영삼이 제안했다고 알려져 있다.[10]
이들은 합당 당시 개헌 가능 의석수인 200석을 훨씬 넘겼으므로 "내각제 개헌"을 비밀리에 약속했고, 각서까지 만들어 두었다.
하지만 현실은 시궁창
당 총재는 노태우 대통령이 맡았고, 대통령을 대신하여 당 운영을 책임지는 대표 최고위원은 김영삼이 맡았다. 그리고 김종필과 민정당의 대표였던 박태준은 최고위원을 맡았다.
이로써 노태우 정권은 일단 표면적으로는 절대 다수의 의석을 확보한 여당을 갖게 되었고, 합당을 거부한 김대중의 평화민주당만이 유일한 야당으로 남게 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된다.
그리고 지역주의 구도도 호남 VS PK VS TK VS 충청도의 4자 구도에서 호남 VS 非호남 양자 구도로 변하게 된다. ㅂ
첫댓글 최저임금 7530 전년대비 16.4퍼센트 올림. 피부로 안 와닿나요?
박근혜때 매년 약 500원 정도씩 올랐습니다. 문재인 지금 바로 약 1000원 올랐고 2020년까지 1만원 공약 달성한다는데 이게 피부에 안와닿으면 뭘 더 어떻게해야하나요?
세월호 유가족에게 정부차원으로 사과표명하고 5.18행사때 유가족을 아버지의 마음으로 안아주고 공정위 김상조가 지금 재벌개혁할려고 칼빼들었고 부동산대책으로 투기구역 묶어놨죠 사법개혁 준비중이고 통신요금 25프로할인 통신사 반대에도 밀어붙였죠 등등 얼마나 많아요?
암요 고위공직자 임명할때 동의 거쳐야죠. 적합한 인물인지 아닌지 검증을 해야하는 것이지만 다만 정당의 이해관계에 따라 말도 안되는 이유로 부결한다면 그 국회의원은 물론이거니와 정당에 대한 지지철회를 투표권을 행사하므로써 국민 무서운줄 알게 해야하는거죠. 동의없이 그냥 밀어붙이는게 독재이고 우리나라는 자유민주주의죠.
네 썩은 적폐세력이 그동안 10년동안 정권을 잡았으니 제대로 해주길 바랍니다
문재인정부가 들어선지 5개월 된거같은데 원전 건설하는거 시끄럽고 코리아페싱으로 시끄럽고 의욕은 앞써나 성과는 그다지네요 그래도 그네보단 나으니 아직 지지율 높은거죠
수꼴10년 정권이 나라를 망쳤으니 회복해야죠
코리아패싱 언론조작이고? 탈원전정책은 공약사항 아닌가요
겨우 5개월이고 입법부를 자처하는 국회 야당은
새정부힘빼기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성과를 뽑아주길 기대하는게 너무성급한거같은데요
정권이 바뀐지 반년도 안됐는데 벌써부터 이런식으로 이야기 하시는거는 조금 성급한게 아니란 생각을 하구요 쿠테타 일으켜서 정권잡은 독재정권 아닌이상은 느끼기 힘든게 당연한 겁니다 정부에서 내놓는 정책들의 방향을 좀 보시는게 좋을듯 해요 쉬운해고 못하게하고 성과연봉제 폐지하고 이런부분들이 당사자들 입장에서는 크게 와닿거든요 지금현재 북한미사일 위기로 국제적으로 위기 국면인데 비판보다는 대한민국을 위해 정부를 응원하고 한 목소리를 내는게 현상황을 극복하는데 더 도움이 될거라 봅니다 제개인적인 생각으로 분명히 좋은 나라로 바뀌어 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ㅎㅎ맞습니다
제가 기대가 커서 그런가 봅니다ㅋ
문재인 지지하지만 정권 바뀐다고 세상은 쉽게 바뀔거 같지 않습니다
글쓴이가 정신이 나갓나
자유한국당 홍준표가 됐다고 눈감고 상상 한번
해보세요
자살 검토한다고 말하는 한때 대선후보 지금은 당대표분이 대통령됬다면? 아마 경기 안 좋아지는게 팍팍 느껴지실텐데 ㅎㅎ... 쉬운해고.비정규직3년 아마 실현되겠죠
북한에 퍼주지나 말았으면...
글 ㅈㄴ 기네
요약좀
대법원장 바뀐지 일주일도 안지났다
야당 발목잡기가 큼 입법이 안되면 행정도 마비
대통령한명 바뀌었을 뿐입니다. 님이 계속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총선때도 힘을 실어줘야 법안들이 통과가 되겠죠? 솔직히 님이 쓴글 애매하게 물타기 하는 글로 느껴지는데요. 더이상 속지 않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민주당 외엔 대안이 없습니다.
자유게시판입니다
저도 적폐는 싫고 제 스스로 아직 와닿지 않아서 그랬을뿐입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물타기한다고 매도하지마시죠
당신 생각이 다 옳은겁니까?
@이게나라냐 누가 내생각이 다 옳다고 했나요? 님말대로 자유게시판입니다. 님글에 대한 제생각을 말했을 뿐입니다. 참
무서워서 글도 못쓰겠네.
@그랑따랑 애매하고 물타기한다고 나를 비하해놓고 변명합니까?
@이게나라냐 반응 대박이네요. 그게 비하에요? 아니면 아니라고 하면되는거지 어이가 없네요. 정치글쓰고 그런글도 못받아들이겠으면 글을 쓰지 마세요. 더 말해봤자 서로 피곤하니 고만합시다. 수고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