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광수 야고보 신부
대림 제1주간 수요일
이사야 25,6-10ㄱ 마태오 15,29-37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시어 거기에 자리를 잡고 앉으셨을 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다가왔다.
그 중에는 절름거리는 사람, 눈먼 이들, 다른 불구자와 말 못하는 이들이 있었다.
하늘나라란 무엇인가? 이런 병으로 고생하는 이들이 모두 치유되어
건강한 모습으로 하느님과 함께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그런 하늘 나라는 죽음 다음에 들어가는 나라가 아니라 이미 여기에서 맛볼 수 있고
체험될 수 있는 나라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13)
라고 말씀하신 대로 이런 병자들을 고쳐주러 오셨기 때문이다..
오늘날 예수님은 이런 병자들을 누구를 통해서 어떻게 고쳐주시는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하고 물으셨다.
제자들이 "빵 일곱 개가 있고 물고기도 조금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자 예수님은 그것을 손에 드시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제자들이 군중에게 나누어 준 빵은 무슨 빵인가?
예수님은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요한 6,51)라고 말씀하셨다.
살아있는 빵이란 무엇인가?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요한 6,68)
라고 베드로가 말한 대로 빵은 "생명의 말씀"이다.
오늘날 우리가 병든 이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할 빵은 바로 "생명의 말씀"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병든 것은 아모스 예언자가
"양식이 없어 굶주리는 것이 아니고 물이 없어 목마른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
굶주리는 것이다."(아모8,11)라고 말씀하신 대로
생명의 빵인 영원 생명을 주는 말씀을 먹지 못한 데에서 생긴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그리스도인은 "하늘 나라의 교육을 받은 율법학자는 마치
자기 곳간에서 새 것도 꺼내고 낡은 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마태 13,52)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생명의 말씀을 먹고 그것을 자기 곳간에서 나누어 주는 사람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란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거기에서 생명을 얻고 거기에서 병을 치유 받고
거기에서 배불리 먹고 그것을 나누어 주는 사람이다.
하늘 나라는 이 생명의 빵을 먹고 살아가는 사람들 안에서 체험되고 건설되는 나라이다.
오늘 우리는 우리 주위 사람들에게 이 생명의 말씀을 나누어 주라고 불리움을 받고 파견되는 사람이다.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먹은 사람만이 생명의 빵을 병든 이웃에게 나누어 줄 수 있을 것이다.
성 바오로회 유광수 야고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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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대림 제1주간 수요일
이사야 25,6-10ㄱ 마태오 15,29-37
‘주님의 기도’는 기도하는 법을 알려 달라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
기도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이 기도를 바칠 때 먼저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라고 청합니다
(루카 11장 참조). 그렇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대림 시기 동안 하느님 나라가 오기를 청하며
동시에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를 기다립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우리가 기대하는 미래가 이미 시작되었음을 알려 줍니다.
우선 이사야 예언자는 산 위에 마련된 기름진 음식과 잘 익은 술로 베푸시는 성대한 잔치로
하느님께서 당신의 나라를 준비하신다고 선포합니다.
이사야는 그 나라가 아직 오지 않았지만 성대한 잔치가 열릴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물론 이 비범한 잔치를 베푸시는 분께서는 ‘만물의 주님’이시며 잔치는 ‘모든 민족들’에게 열려
있습니다. 이 잔치에서 하느님께서는 마침내 죽음을 영원히 없애시고 당신 백성의 눈물을
닦아 내시어 구원을 이루실 분으로 제시되십니다.
이사야가 묘사한 하느님 나라에는 은총과 기쁨이 충만합니다. 다만 우리가 그 성대한 잔치에
앉기까지는 시간이 걸립니다. 하느님 나라의 성대한 잔치에 초대받았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기에
희망을 간직하고 있지만, 이에 합당한 우리만의 준비를 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이 이를 잘 설명합니다. 갈릴래아 호수로 가신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시어 자리를
잡으십니다. 그러자 많은 군중이 다리저는 이들과 눈먼 이들과 다른 불구자들과
말못하는 이들을 데려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모두 고쳐 주시고, 제자들이 가지고 있던 빵
일곱 개와 약간의 물고기로 굶주린 백성을 모두 배불리 먹이십니다.
하느님 나라가 오기를 청하며 예수님을 기다리는 일은, 주님과 함께 치유하고 용서하며
섬기는 일에 동참함으로써 완성됩니다. 우리 주변에 어려운 이웃들을 주님 앞에 데려오고
가진 것이 부족하더라도 함께 나누는 것이 우리가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해야 할 일입니다.
서울대교구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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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
대림 제1주간 수요일
이사야 25,6-10ㄱ 마태오 15,29-37
흐트러뜨리지 마라!
사람들은 참 이상합니다. 혼자서 살 수 없기에 모이지만, 막상 모여서는
이런 저런 이유로 갈라지고 흩어지니 말입니다.
이렇게 흩어지면 또 다시 모이려고 애를 쓸 것입니다.
어찌보면 모였다 흩어지고, 흩어졌다 다시 모이는 과정의 반복이
바로 삶의 본질적인 모습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모였다 흩어질 때 서로에게 많은 상처를 남길 수 있기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기왕 모였다면, 흩어져야 할 이유보다는 애초에 모였을 때의 첫마음을 떠올리며
모임을 새롭게 일구어 가는 지혜로운 모습을 지녔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연스럽게 모인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모여 치유를 받고 새로운 삶을 시작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모임이 지닌 신비한 힘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이 모임도 배고픔이라는 인간적인 한계 앞에서는 무기력하게 느껴집니다.
적어도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말입니다.
모두가 굶주릴 수는 없으니 최선의 방법은 각자 굶주린 배를 채우도록 흩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흩어져야 하는 절박한 상황보다 모여서 함께 하는 삶의 가치를 더 중요하게 보셨습니다.
이제 다른 방법을 택합니다. 가진 것을 나누는 방법이죠.
예수님께서는 얼마 안되는 것이지만 나눌 것이 있기에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비록 육신의 치유로 새 삶을 살게 되었지만
이미 며칠 동안의 굶주림을 원망하며 떠나갔을 사람들이 여전히 당신과 함께 있기에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또다른 기적이 이루어집니다. 모두가 배불리 먹고도 음식이 남았습니다.
함께 하는 삶의 의미를 온 몸으로 체험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십니다.
흩어진 사람들을 당신의 품 안에 하나로 모아들이기 위해 오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모여, 예수님 안에,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여 있는 이들이 교회입니다.
그러기에 교회는 갈라진 세상에 하나됨의 기쁨을 전하는 주님의 도구입니다.
그러나 과연 주님의 도구로서 제대로 사명을 수행하고 있는지 묻게 됩니다.
겉모습은 온전할지라도 속으로는 서로 갈라지고 흩어져 싸우고 있지는 않는지
반성하게 됩니다.
갈라진 세상에 모범으로 다가가기는 커녕 오히려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교회 안에
세상의 온갖 부조리를 담고 있지는 않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무늬만 교회, 이름만 교회가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의 주님의 교회로 거듭나도록,
작은 교회로서 내가 먼저 다른 이들과 갈라서려는 마음을 씻어내고,
인간적으로 흩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를 찾기보다는 당신 안에 모으시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귀를 기울이고 기쁘게 응답하는 대림시기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에서 참조
가톨릭 사랑방 catholics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