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언어를 디자인해야 하는가?
피가 부족하며 빈혈이듯 언어가 부족하면 단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 빈곤 현상 즉 빈어증이 온다. 빈어증을 방치하면 몰입하지 못해 읽지 못하고 포기하고 만다. 우리말은 한자를 모르면 어휘력이 한심해진다. 모국어 실력이 곧 외국어 실력이듯 모국어를 많이 알아야 하고 한자를 많이 알아야 한다. 숙고하는 것이 손전등이라면 행동하는 것은 전조등이다. 工高에 다니면서 일기에 한자를 썼단다. 親舊를 만나 앞으로 어찌 살아갈지 未來를 構想하면서 서로의 友情을 나눴다. 만날 때마다 各自의 꿈을 토대로 어떤 일을 하면서 살지, 그 일이 나에게 주는 意味가 뭔지 곰곰이 생각하면서 複雜한 心情을 整理해보는 時間을 가졌다. 그가 쓸 수 있는 단어를 모두 한자로 써보니 단어의 뜻이 더 명료해졌단다. 여기서 어휘력 개념 창조 능력에 밑거름이 되었단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정확한 단어가 없으면 제 입장에서 쉽게 단정해버린다. 아마추어와 프로의 차이는 동원할 수 있는 언어의 차이다. 언어가 빈약하니 생각도 미천하고, 생각이 미천하니 남다르게 행동할 가능성의 폭도 좁다. 남과 뭔가 다른 사람은 긍정의 언어를 쓴다. 긍정의 언어를 쓰면 긍정적인 내가 되고, 부정의 언어를 쓰면 매사에 부정적인 내가 된다. 열정과 도전의 언어를 사용하면 열정적으로 도전하는 내가 되지만, 좌절과 절망의 언어를 쓰면 절망의 늪에서 나오지 못한다. 나라는 존재의 집을 어떤 언어로 지을 것인가? 어느 집에 머무느냐에 따라 내 생각과 행동은 물론 삶까지 바뀐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언어가 바뀌지 않으면 사고도 바뀌지 않는다.
언어의 틈새를 메우려는 노력이 전개될 때 언어의 격이 높아진다. 언어는 누가 사용하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의 모습으로 재탄생한다. 꼰대는. 입력장치는 고장 났는데 출력장치만 살아 있는 사람이다. 꼰대의 언어는 늘 진부하고 과거형이다. 리더의 언어는 늘 새로운 미래형이다. 같은 언어도 어제와 다른 방식, 새로운 용법으로 사용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리더는 새로운 언어를 배우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언어를 배우고 습득하는 데 투자한 시간과 에너지만큼 그의 언어의 격도 업그레이드된다.
교육을 온실 속에서 화초를 재배하듯 속성으로 목표를 달성하는 과정으로 이해하면 그것은 사육에 가깝다, 사육의 목적은 좋은 대학에 입학해서 좋은 기업에 취업한 후, 남들의 기대에 부응하며 사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가 생각하는 교육은 야생에서 자라는 잡초처럼 시련과 역경 속에서 삶의 목적과 의미를 찾아가는 경험이자 과정이다. 저자는 이런 교육 개념을 재개념화했다. 하루에 3개씩 나만의 정의를 써보자. 신념 사전이다. 이렇게 적다 보면 자신이 얼마나 견고한 통념에 갇혀 사는지 깨달을 수 있단다. 내가 가진 신념과 무엇을 좋아하는지도 명확해진다. 우리나라 말은 양단을 끌어안는 언어가 많다. 전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는 말들, 내버려 둬, 들락날락, 오르락내리락, 보일락말락, 시원섭섭하여 같은 말들이다.
작가들의 통찰과 광고 문구의 재치를 훔쳐라. 작가는 남들이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평범한 것을 낯설게 보고, 거기에서 받는 느낌이나 생각을 쓰는 사람이다. 에세이스트는 사람들이 익숙하다고 생각해서 주목하지 않는 사물이나 현상을 색다른 시선으로 바라본 결과를 글로 쓴다. 가계의 간판은 마음이 가게 만들어야 한다. 고깃집이 ‘肉 값하네’, 재치 있는 말로 고깃값을 할 정도다. 속 옷가게가 ‘보일락 말락’은 무엇을 파는지 각인시키는 재치가 있다. 단어 뒤집기는 생각의 물구나무서기다. 역경 逆境을 뒤집으면 경력 經歷이다. 생일 生日을 뒤집어보니 인생 人生이다. 단순히 한 생명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물리적 탄생만이 아니다. 유일무이한 생명체가 세상으로 나와 새로운 세상을 열었다는 상징적인 출생도 의미한다. 성실 誠實하지 않으면 실성 失性하고 지금 至今하지 않으면 금지 禁止되며 실상 實狀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으면 상실 喪失의 아픔을 겪는다.
한 사람의 생각은 그가 살아오면서 보고 느끼고 경험한 체험적 지혜의 역사적 산물이다. 그래서 바꾸기가 쉽지 않다. 삶을 바꾸지 못하게 하면서 생각을 바꾸라고 가르치는 것은 일종의 교육적 폭력일까? 지금의 생각은 과거의 생각과 연결된 연상일 뿐이다. 연산 능력을 키우는 방법은, 연결할 생각 재료를 갖추고, 자주 업데이트하는 것뿐이다. 별은 혼자 빛나지 않고 반사되어서 빛난다. 칸트는 “내 마음을 늘 새롭고 더한층 감탄과 경외심으로 가득 채우는 2가지가 있다. 그것은 내 위에 있는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속에 있는 도덕법칙이다.”말했다.
내가 본 것까지만 내 세상이다. 생각하지 못한 事故를 쳐야 생각지도 못한 思考가 시작된다. 역으로 思考하지 않으면 심각한 事故가 일어난다. 貴하게 대접받고 싶으면 귀를 기울여야 한다. 봄 春은 주변과 일상을 다시 보는 觀의 계절이다. 春을 통해 觀을 연상하면 매년 맞는 봄이 새로워진다. 늘 거기 있었지만 건성으로 봤기 때문에 안 보였다. 보는 것을 뜻하는 글자는 見 視 觀이다. 見은 눈을 뜨고 있으니 보이는 것인 것 see다. 그냥 눈앞에 있으니 보는 것이다. 視는 어느 각도에서 보느냐의 문제다. 見과 示가 합쳐졌는데 각도에 따라 다르게 보임을 뜻한다. 觀은 중심에서 보는 것이다. 뚫어지게 보는 것, 자세히 관찰하는 것이다. 큰 눈을 가진 부엉이가 보는 것을 형상화한 글자다. 관은 개념적으로 깊이 보는 것을 의미한다.
단어는 쪼개야 숨은 의미가 보인다. 영어 심장 ’heart’는 ‘he’와 ‘art’다. 그분이 주신 예술품이다. 함께 의미인 ‘together’는 to+get+her’로 나눠볼 수 있다. 그녀를 얻기 위해서이다. 실제 어원은 아니다. 의도적으로 나눠 생각한 것이다. ‘나이’도 ‘나’와 ‘이제’로 나눠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의미가 많다. 핵심의 가치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 “가치관은 지문과 같아서 똑같은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당신이 하는 모든 것에 그 흔적이 남긴다.”엘비스 프래스리이 말이다. 목숨과도 바꿀 수 있는 마지막 단어가 있는가? 예로 간디는 ‘비폭력’, 스티브 잡스는 ‘혁신’, 부처는 ‘자비’, 공자는 ‘인’, 플라톤은 ‘이데아’, 사르트르는 ‘실존’, 니체는 ‘아모르파티’ 등이 마지막 어휘라고 한다. 저자는 삶을 어제와 다르게 바꿔주는 3개의 단어가 있단다. 열성과 혁신과 도전이다. 열정은 지치지 않게 만드는 심장이고, 도전은 내 생각과 느낌을 믿고 능력을 확장, 심화하기를 멈추지 않겠다는 의지다. 혁신은 변화를, 도전은 성장을 낳았다.
벼리고 벼린 칼로 존재의 집을 뜯어고칠 때는 쓸모없는 도구는 과감히 버리고 새로운 것으로 바꿔야 한다. 일에서나 삶에서나 무언가 한계를 느끼고 있다면, 바로 칼을 바꿔야 할 시점이다. 지금 여러분의 언어가 한계가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타성에 젖은 식상한 언어는 너무 오래 써서 닳아지고 무뎌진 칼과 같다. 새로운 칼을 쥐면 더 수준 높은 사고를 하게 된다. 나의 사고방식에 들러붙은 한계를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다른 사람의 생각에 접속해서 그가 구사하는 언어를 배우는 것뿐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늙어가는 생각이 낡아지지 않도록 익숙한 단어가 낯선 개념을 잉태하도록 꾸준히 벼리는 것이다. 벼린 단어가 색다른 신념을 품고, 우리의 생각도 새로운 생각의 자손을 출산한다. 그래서 단어는 꺼져가는 생각의 불씨를 되살리는 불쏘시개다.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내가 쓰는 언어는 내 사고방식의 드러내는 일종의 비늘이다. 물고기가 어떤 물살을 타고 살았는지에 따라 비늘이 달라지듯, 내가 어떤 공간에 누구와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가 언어적 비늘이 되어 내 몸에 남는다. 민물고기가 바다에서 살아남으려면 아가미를 비롯해 신체 구조조정을 성공적으로 해내야 한다. 그래야 삶의 무대가 바뀐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적용하는 새로운 환경에 새로운 언어를 장착해야 한다. 언어는 존재의 집을 짓는다. 어떤 집을 짓느냐에 따라 그 집에서 사는 존재도 영향을 받고 변화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많은 것을 바꾸려고 노력했지만, 변화가 없었다면 이제는 벼리고 벼린 칼을 꺼내어 들고 내 존재의 집을 완전히 뜯어고칠 때가 왔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2022.10.05.
언어를 디자인하라-2
유영만, 박용후 지음
쌤앤파커스 간행
첫댓글 지금 껏
마음의 양식 집에만 부지런히 다니면서
슬쩍슬쩍 들어와 봤지만
읽어내기에 좀 부담스러운 바가 있어
지나침에 미안한 마음 없지 않았으나
오늘 글월 읽고 크게 감동했습니다.
감사합니다.
namgye12님
첫댓글 감사합니다
마음의 양식에는 제 글이
좀 모자란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있어 자유게시판에
수년간 쓰고 있습니다.
조금 도움이 되셨다니
위안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두번째 정독하고 있습니다.참 좋은 글입니다. 감사합니다
현농님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