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대 마르코 신부
대림 제1주간 목요일
마태오 7,21.24-27
생각은 행동이 아니다.
1917년 영국의 외무장관 밸푸어(Balfour)는 ‘밸푸어선언’(Balfour Declaration)을 통해
유대인들이 국가를 건설하는데 동의함을 선언하였고, 이에 미국은 대대적인 지지를 표명하였다.
그러나 이 선언은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에게 독립국가 건설을 약속한 후세인-멕마흔협정(1915년)과
중동의 터키영토 분할을 결정한 사이크스-피코협정(1916년)에 모두 위배되는 것이었다.
기원전 63년 폼페이우스 장군의 침략으로 로마제국의 속국이 된 이스라엘, 기원후 70년 8월 29일 예루살렘이
처참히 멸망한 뒤 유대인들은 전 세계로 뿔뿔이 흩어져 살면서, 비참한 운명을 감수하며
언젠가는 귀환하여 예루살렘을 다시 세울 것을 기약하고 ‘시오니즘’(Zionism,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를
건설하려는 민족운동)을 꿈꾸어 왔었다.
그들의 꿈이 드디어 이루어진 것인가. 1948년 UN은 영토도 없는 ‘이스라엘 건국’을 전 세계에 공포한다.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유대인들의 ‘대 예루살렘 계획’은 일사불란하게 전쟁도 불사하며 진행된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빼낸다고 했던가? 2천년 동안 살아온 팔레스타인 원주민 아랍인들이 고립되고
추방되면서 점령자에 대한 분노와 고통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씨앗이 되고 만다.
모두가 아브라함의 후손인데 유대인들의 아랍인들에 대한 태도는 실로 냉정하다.
반면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은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주택, 정착금, 직업)아래 이스라엘을
향한 이민 길에 오른다.
2004년 이스라엘에는 피부색이 다른 유대인계 에티오피아인들이 9만 명이상이 정착하고 있다.
“이민의 조건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대답은 “모세의 율법을 준수하는 자”이다.
‘평화의 도시’라는 뜻을 가진 예루살렘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이 바로 모세의 율법을 준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예언된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다.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인가? 오늘 복음이 바로 그 길을 제시하고 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21절)는 것이다.
하늘 아버지의 뜻이 과연 무엇인지는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드러난다.
마태오복음과 루카복음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의 진수(眞髓)는
각각 산상설교(마태 5,1-7,29)와 평지설교(루가 6,17-47)에 담겨있다.
물론 산상설교가 평지설교보다 내용도 풍부하고 복음서 전체에서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흥미로운 점은 둘 다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집 짓는 사람의 비유’로 설교를 마무리 짓고 있다는 것이다.
집을 짓는 사람의 비유에서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은 슬기로운 사람이고,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아무도 모래 위에 자기 집을 지을 사람은 없겠지만,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모래 위에
자기 집을 짓는 사람과 같다.
그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며, 그로 인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예수께서는 산상설교를 통하여 사람들에게 줄곧 ‘더 새롭고 더 나은 정의’를 요구하셨다.
이 정의를 가지지 않고는 아무도 하늘나라에 들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더 새롭고, 더 나은 정의는 설교나 가르침을 경청하는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경청한 내용을 실제로 행함으로써 예수님이 바라시는 정의가 만들어진다.
들은 것, 아는 것을 실행에 옮긴다는 것이 쉬운 일은 결코 아니다.
매일 아침 하루를 시작하면서 많은 것을 다짐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잠자리에 드는 우리들이 아닌가?
그래도 다짐해야 한다. 다짐은 출발점이고, 이는 길을 열어준다. 많은 것을 한꺼번에 다짐하지 말자.
“1%의 법칙”을 잊어서는 안 된다. 1%의 변화와 전진과 개선 없이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고,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으며, 완성은 꿈도 못 꾼다.
“생각을 바꾸면, 태도가 달라지고, 태도가 바뀌면 습관이 달라지고,
습관이 바뀌면 운명이 달라진다.”는 말이 있다. 생각이 행동은 아니라 할지라도 행동의 기반이 된다.
실수가 잦으면, 더 이상 실수가 아니라 실력이 되어버리듯이 조그만 것이라도 빈도가 잦아지면
습관이 되는 법이다.
조그맣고 대단하지 않더라도 좋은 생각과 좋은 다짐으로 좋은 습관을 들이는 연습을 하자.
말은 행동이 아니니 말로만 ‘주님, 주님!’ 하지 말고,
주님께서 진정으로 바라시는 아버지의 뜻, 즉 가르침의 내용을 행동에 옮김으로써
반석 위에 나의 집이 설 수 있도록 기초를 놓자.
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
*********
정진만 안젤로 신부
대림 제1주간 목요일
이사야 26,1-6 마태오 7,21.24-27
오늘 복음은 마태오 복음사가가 전하는 ‘산상 설교’의 결론에 해당하는 7장 13-27절 가운데
마지막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권위 있는 스승으로서 부르심에 응답하여 당신의 뒤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베풀고 계십니다. 제자들은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기 위하여
파견될 것입니다(10장 참조). 파견된 이의 사명을 수행하는 데에 배움은 필수입니다.
오늘 복음은 집 짓는 사람의 비유를 소개합니다.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이 말씀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사람과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서로 반대의 뜻을 지닌 두 개의 형용사
‘슬기로운’과 ‘어리석은’은 각각 다른 방식으로 집을 짓는 두 사람의 특징을 설명합니다.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사람은 슬기로운 사람입니다. 그 집은 강물과 바람의 위협에도 무너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 집은 강물과 바람으로 무너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수사학적 방식을 통하여 제자들에게 마지막 날의 심판을 경고하시며,
또한 부르심에 응답하는 길에서 하느님의 뜻에 맞갖은 결정을 내리도록 호소하십니다.
하늘에 계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는 복을 얻기 위한 조건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고자 결심한 우리에게 용기 있는 결단을
요청하십니다.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따라, 우리는 슬기로운 사람이 되어
상을 받거나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
***********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대림 제1주간 목요일
이사야 26,1-6 마태오 7,21.24-27
‘이사야의 묵시록’(24―27장 참조)으로 불리는 오늘 독서의 신탁은 온 세상을 대상으로 합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시어 황폐하게 하시겠지만, 당신 왕권을 보존하시고
시온산에서 구원을 내리신다는 것이 주된 내용입니다.
“우리에게는 견고한 성읍이 있네. 그분께서 우리를 보호하시려고, 성벽과 보루를 세우셨네.
신의를 지키는, 의로운 겨레가 들어가게, 너희는 성문을 열어라. 한결같은 심성을 지닌 그들에게,
당신께서 평화를, 평화를 베푸시니, 그들이 당신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그날에 하느님의 정의가 나타나기를 학수고대하는 노래로서, 주님 백성의 앞날을 대비하시는
하느님의 이끄심으로 찾게 될 안녕과 보호를 기념하며, 신실한 예루살렘과 개혁된 유다를
마음속에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사야 예언자는
“영원한 반석”이신 주님을 길이길이 신뢰하라고 강조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살아야 할 삶의 대원칙인 ‘산상 설교’를 마무리하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실천을 강조하십니다. 끊임없는 선택의 기로에서 분명한 태도로 삶의 방식을
선택해야 하는 신앙인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가 되어야 합니다.
위로와 희망의 노래 속에서, 이사야 예언자와 시편 저자가 강조하는 주님께 대한 굳은 신뢰가
오히려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모래처럼 쉽게 무너질 사람이나 제후들이 아니라 굳건한 반석이신 하느님을
마음과 목숨과 생각을 다하여 오롯이 신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서울대교구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에서 참조
가톨릭 사랑방 catholics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