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아래로 내려가자
마가복음 9:2-9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주현 후 마지막주일이다. 이를 산상변화주일이라고 부른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산에 오르셨는데, 그곳에서 주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에 휩싸여 변화되신 것을 기억하는 주일이다.
설날 연휴이다. 세상의 생일과도 같다. 일 년 중 가장 의미있는 시간이다. 민족 대이동이라고 부를 만큼 모두들 부모님을 찾아간다. 집집마다 잔치 수준으로 차려 먹고, 아이들에게 후한 마음으로 세뱃돈을 준다.
교회력에서 주현절기는 설날처럼 축제의 기간이다. 동방에서 온 박사들의 경배를 축하한다. 주현절 시작은 예수님의 세례로, 마지막은 세 제자의 변화산의 경험이다. 주현절을 예수님을 알아가는 사랑의 계절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이 땅에 빛으로 오신 예수님의 시간을 기념하고, 기억하는 것이다.
그러나 항상 축제가 지속되지는 않는다. 설 연휴가 끝나면 부지런한 일상이 계속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내년, 후년까지 설날 연휴 일정을 미리 살핀다. 그만큼 축제의 기간은 짧고, 아쉽다.
1)
예수님이 세 제자와 함께 산에 오르신 것은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주시려는 의도였다.
마가복음에 따르면 6일 전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8:27),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8:29)라고 물으셨다. 베드로는 얼마나 지혜롭게 대답을 잘했던가? 그런데 베드로는 그리스도(메시야)의 의미를 잘못 이해한 모양이다.
예수님은 질문 직후에 곧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겪게 될 수난에 대해 말씀하셨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리라(막 8:31).
그런데 이 말씀을 오해한 베드로는 예수님께 항변하였다. 결국 베드로는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꾸중을 들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불과 엿새 전의 일이었다.
예수님과 함께 산에 오른 세 제자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다. 세 제자는 충성스러운 사람들이다. 야이로의 딸을 병 고치는 현장에도(막 5:37), 겟세마네에서 마지막으로 기도하실 때에도(막 14:33) 따로 부르심을 받았다. 세 제자는 특권으로 부름받은 것이 아니라, 마지막까지 증인으로 부름 받은 것이다.
엄마 낙타와 아기 낙타가 정답게 이야기를 나눈다. 아기 낙타가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나는 왜 큰 발톱이 세 개가 있어요?
아가야, 그건 우리가 사막을 걸을 때 모랫 속으로 발이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있단다.
아기 낙타가 다시 물었다.
엄마, 그럼 내 기다란 눈썹은 왜 있어요?
아가야, 기다란 속눈썹은 우리가 사막을 여행할 때 뜨거운 햇빛으로부터 눈을 보호해준단다.
아기 낙타가 또 물었다.
엄마, 그럼 내 등에 큰 혹은 왜 있는거예요?
아가야, 우리가 사막을 오래 여행할 때 섭취해야 할 영양분을 그곳에 저장해 놓는단다.
아기 낙타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아하! 모래 속으로 빠지지 않기 위해 큰 발톱이 있고, 사막의 뜨거운 햇빛을 막기 위해 긴 눈썹이 있고, 오랜 여행에 양분을 저장하기 위해 큰 혹이 있고... 그런데 엄마! 이상해요.
왜 아가야?
그런데, 우린 왜 동물원 안에만 살지요?
부르심과 사명, 능력이나 조건을 두루 갖추고도 여전히 자기 자신 안에 갇혀있는 사람들이 있다.
예수님과 함께 산에 오른 세 명의 제자들은 과연 산 위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예수님이 따로 그들을 택하셔서 산 위에서 일어난 일의 증인으로 삼으신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은 산 아래로 내려오면서 무엇을 결심하였을까?
2)
예수님과 세 제자가 함께 오르신 산을 눈여겨보자. 성경에서 산은 영광된 곳이다.
그 산 위에서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에 갑자기 신비한 일이 일어났다. 기도하실 때에 주님의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난 것이다.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3).
교회에서 축제의 색은 흰색이다. 부활의 색이 흰색이고, 성탄절과 부활절 그리고 주현절 시작과 끝에 흰색을 교회력의 색으로 사용한다. 마르틴 루터의 상징은 백장미문장이다.
변화산은 어둠에서 빛으로 제자들의 무지를 일깨워 주시려는데 목적이 있다. 눈앞의 영광을 바라면서도 당장 수난을 피해 가려는 연약한 믿음을 바로 잡으시려는 일이다.
놀라운 일은 문득 두 사람이 나타나 예수님과 대화하는 장면이다. 두 사람은 히브리 민족의 위대한 민족지도자 모세와 최고의 예언자 엘리야였다.
“이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에게 나타나 예수와 더불어 말하거늘”(4).
베드로는 자기 앞에서 벌어진 이 놀라운 모습을 보고 황홀경에 빠진다. 바로 눈앞에서 모세와 엘리야를 보다니! 모세와 엘리야, 두 사람은 유대교에서 대단한 존재였다. 만약 그들의 무덤이 지상에 존재하였다면, 그들은 또 하나의 종교를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모세는 무덤을 남기지 않았다. 엘리야의 경우 하늘로 승천하였다. 그들은 유대인들의 마음속에서 죽지 않고 살아있는 존재였다.
구약 마지막 예언서 ‘말라기’에는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말 4:5)라고 전한다. 랍비들은 엘리야를 천사 같은 인물로 상상하였다. 그가 네 번의 날개짓으로 세상을 다니며 사람들을 돕는다고 생각하였다.
베드로는 흥분하였다. 신비한 광경을 보니 경이로움이 생겼다.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5).
베드로는 얼마나 신기했을까? 그래서 대뜸 출애굽 당시 광야의 초막을 상기하면서 세 분을 위해 초막 셋을 짓겠다고 한 것이다. 산 위에서 그 빛의 황홀경을 보고 맨 처음 든 생각이, “여기다! 이곳이 우리가 원하던 이상향이다”라는 생각이 든 것은 자연스럽다.
산 위에 초막 셋을 짓겠다는 제안은 엉뚱했지만, 성경은 베드로가 자기가 한 말이 어떤 의미인지도 모른 채 한 말이라고 하였다. 아마 베드로는 흥분한 나머지 초막을 짓고 눌러앉겠다고 한 것이다. 우리도 그렇지 않은가? 자주 주저하고, 자주 머물고 싶고, 자주 안주하고 싶은 것이 우리들의 마음이다.
예수님은 이에 대해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으셨다. 다만 본문은 우리에게 ‘네가 경험한 황홀경을 너의 종교로 삼지 말라!고 경고한다.
문득 궁금해진다. 도대체 예수님과 두 분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셨을까? 누가복음은 예수님과 두 사람이 나눈 말씀의 내용을 전해준다.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 쌔”(눅 9:31).
여기에서 ‘별세’란 헬라어로 ‘엑소더스’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당할 십자가의 수난을 뜻한다.
예수님과 모세, 엘리야와 나누신 말씀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통해 새로운 엑소더스를 이끌고 계신다는 것이다. 산 아래에서 행할 새로운 출애굽 사건이었다. 나는 내 삶의 엑소더스를 꿈꾸는가?
모든 사람이 엑소더스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 이대로가 가장 좋은 사람도 있다. 앞으로 선거 때가 되면 사람들의 선택은 ‘바꾸자!’ 아니면 ‘이대로!’ 일 것이다.
예수님은 그 산을 내려가자고 말씀하신다. 산 위에서 영광에 취하지 말고, 산 위에서 현실을 외면하지 말고, 산 위에서 너 자신의 존재를 잊지 말고, 이제 내려가라고 하신다.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엑소더스를 하라고 하신다. 네 삶의 변화를 계획하고, 너의 현실로부터 출애굽 하라! 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났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7).
이 말씀은 주현절기 첫 주일의 말씀이다. 요단강에서 세례받으실 때에 예수님이 홀로 들었던 말씀인데, 이젠 제자들도 듣는다. 불확실한 그들의 믿음을 견고하게 하셨던 하늘의 음성이었다.
이제 예수님은 제자들과 산에서 내려오시면서, 세 제자에게 말씀하신다.
“경고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9).
3)
산은 내려오기 위해 올라가는 법이다. 너는 영광의 순간에 머물지 말아라. 영광은 십자가 너머에 있는 법이다. 이제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그 엑소더스에 참여하고, 그 증인이 되어야 하였다. 성령의 도우심으로만 가능한 일이었다.
예수님은 산을 내려가자고 하신다.
‘높으신 주께서 낮아지심은 낮은 자를 높여 주심이요, 부요한 주께서 가난해 지심은 가난한 자 부요케 하심이라’(찬송가 467장).
산 위에 오르신 주님은 영광을 취하기보다, 다시 산을 내려오셔서 당신의 수난의 길을 계속 가신다. 우리더러 너도 네 산에서 내려와, 함께 엑소도스의 길을 가자고 권면하신다.
오는 수요일은 성회수요일이다. 축제가 끝나고 사순절이 시작된다. 이제 빛의 절기에서 재(災)의 절기로 바뀌는 것이다. 사순절은 연중 가장 경건한 기간이다. 아디아포리즘이란 말이 있다. 성경에서는 명확하게 지적하고 있지 않으나 신앙생활의 금지규칙으로 정하는 것이다.
사순절은 보다 경건생활에 집중한다. 그래서 알콜은 물론 초콜릿 등 달콤한 군것질 금지, 육류 소비 축소, TV 시청 절제, 과도한 취미생활, 고질적인 습관 중단과 이를 고치기에 힘쓴다. 내 잘못된 습관이 있는가? 이번에 단 한 가지라도 집중하여 실천해 보길 바란다.
사순절의 상징은 재이다. 재를 사용하는 것은 회개해야 할 자신을 돌아보고, 인간은 누구나 흙으로 빚어진 허무한 존재임을 각성하여 다시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마음을 열며, 그 인생으로 하여금 온유하고 겸비한 생활을 하도록 한다. 물론 사순절 금지규칙을 경건이란 말로 억지로 할 일은 아니다.
안쏘니 드 멜로는 이렇게 말하였다.
“사람을 착하게 만들려는 종교는 사람을 악하게 만들고, 사람을 자유롭게 만들려는 종교는 사람을 착하게 만든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자유하라. 그 자유 안에서 충실하라. 그 충실함으로 네 믿음을 돌아보라! 그런 의지와 결단으로 사순절에 참여하려는 사람은 40일 동안이 자기 인생에서 빛나는 시간이 될 것이다.
예수님은 산 아래로 내려가자고 하신다. 산 아래, 내 삶의 현실과 현장에서 하나님은 내 길에서 나와 동행하신다. 믿음의 길, 삶의 행진, 고단한 문제투성이의 인생일망정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의지하라고 하신다.
네 일상의 잠에서 깨어나, 황홀경의 낮잠으로부터 깨어나 너를 바꾸어라. 산 위에서 본 그 영광스런 변화를 위해 이제 네 산 아래에서 변화의 삶을 행하라.
“산 아래로 내려가자.”
하나님의 은총과 능력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