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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웨슬리의 재물에 관한 네 가지 교훈
찰스 에드워드 화이트
우리는 거의 다 존 웨슬리(John Wesley)가 18세기 영국을 부흥시키고 감리교회를 출범시키는 데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다는 것을 안다. 그가 위대한 설교자이자 위대한 조직가였다는 것을 안다. 성화에 대한 교회의 사고에 그가 기여한 바를 기억한다. 그러나 웨슬리가 설교로 막대한 돈을 벌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날개 돋힌 듯 팔린 그의 저서들이 그를 영국에서 손꼽히는 부자로 만들었던 것이다. 한 사람이 연간 삼십 파운드면 풍족하게 살수 있던 시절에 그의 연간 수입은 천사백 파운드에 달했다. 이쯤되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돈 문제가 차지하는 위치에 관해 웨슬리가 강한 소신을 피력했다는 게 새삼스럽지 않다. 이 ‘부자’ 설교자는 돈에 관해서 우리에게 할 말이 많았다.
왜 부흥이 지체되는가
말년에 웨슬리는 감리교에 대해 실망이 커졌다. 그 운동이 두 형제로부터 백만 명에 육박하는 단체로 자라는 것을 지켜 보았지만, 그렇게 자란 뒤에는 본래의 영적 능력을 대부분 잃어 버렸다고 느꼈다. 한때는 의에 주리고 목말랐던 감리교도들이 이제는 더이상 그렇지 않다고 믿었다. 과거처럼 새벽 다섯 시 사경회에 참석할 만큼의 열정이 사라진 것을 지켜 보았다. 동지들이 이웃에 대한 사랑을 거의 다 잃어 버린 것을 우려했다. 그들이 예전처럼 기꺼이 병자와 빈민을 참아가는 모습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서 퇴보함으로써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케 하고 자기들 사이에서 그분을 몰아내게 되었다고 확신했다. 평생의 노역이 헛수고가 된 게 아닌가 하고 두려워했다.
웨슬리는 하나님이 감리교를 버리셨다고 생각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버림을 받게 된 원인을 생각했다. 특정죄가 첫사랑을 잃게 하고 그들을 하나님과 떼어 놓았다. 이 죄를 책망하는 설교자들을 찾아볼 수 없다고 개탄했고, 말년에 들어서는 이 죄를 더욱 자주 비판했다. 그가 인생의 마지막 삼년 동안 이 죄를 비판하는 설교집을 펴낸 분량은 과거 오십년간 같은 주제로 펴낸 책의 분량만큼 많았다. 그의 마지막 설교로 생각되는 설교에서 그는 동료 신자들이 이 분야에서 주께 불순종하는 것을 질책하였다. 심지어 더블린에 있는 감리교도들에게는 그들이 감리교의 쇠퇴에 직접 책임이 있다고까지 말했다. “여러분은 끊임없이 성령을 근심케 하고, 성령께서 우리 회중들에게 내리시는 은혜를 상당 부분 가로막는 장본인들입니다.”
더블린에 있는 이 사람들이 무슨 일을 저질렀기에 이런 질책을 받게 되었을까? 웨슬리의 눈에 띈 런던, 맨체스터, 브리스톨 감리교도들의 죄는 무엇이었는가? 웨슬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셨다고 확신케하고, 부흥을 가로막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든 죄는 무엇이었는가?
돈에 대한 사랑
웨슬리는 감리교의 초창기에 교인들이 대부분 가난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감리교가 결성된 이래 이삼십 년 혹은 사십년이 지나서는 많은 감리교도들이 초창기보다 이십배, 삼십배 혹은 백배가 더 부유해진 것을 지켜보았다. 이렇게 재산이 증가하면서 경건은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 웨슬리가 보기에 감리교도들은 돈을 더 많이 벌수록 하나님을 덜 사랑하는 것 같았다.
웨슬리는 감리교도들 가운데서 경건이 쇠락한 사례들을 여러 가지로 지적했다. 첫째는 성화(聖化)에 대한 관심이 희박해진 현실이 잘 보여 주듯이,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식은 것이었다. 그는 감리교도들이 더 이상 “과거에 ‘완전을 향해 나아가려던’ 그런 열정”을 갖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둘째 사례는 교만이었다. 웨슬리는 동료 신자들의 늘어난 재물이 그들을 교만하게 만들었다고 경고했다. 그들은 각자 자신의 견해를 더욱 강력히 내세운 반면에 책망을 들을 의지는 갈수록 줄어들었다. “여러분은 예전처럼 유순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판단에 더욱 큰 비중을 두고 자신의 의지에 더욱 애착을 갖습니다”(‘기독교가 능력을 잃게 된 원인들’이란 제목의 설교에서).
감리교가 쇠락해 가는 또 다른 징후는 그들이 예전처럼 온유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웨슬리는 말하기를, 과거에는 “여러분의 사랑이 떠들썩하지는 않았지만 어느 경우에든 선으로 악을 이길 수 있도록 힘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얼마나 쉽게 화를 냅니까!” 그들이 영적으로 죽었다는 그 다음 징후는 가난한 자들을 도우려는 마음이 희박해진 것이었다. 웨슬리는 청중에게 이렇게 상기시킨다. “여러분은 한때 춥든 비가 오든 아니면 여러분의 길에 어떤 십자가가 놓여 있든 당연히 가난한 자들과 병든 자들과 절망한 자들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는 현실을 지적하면서 이렇게 묻는다. “그러나 이제 여러분은 비단옷을 더럽히기가 두렵습니까? …해충을 잡기가 두렵습니까?”
감리교도들이 어디까지 타락했는지를 보여 주는 마지막 징후는 개인 전도를 등한히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한때 사람들을 만나면 그들의 영혼에 관해서 흔쾌히 말했지만, 이제 웨슬리는 다음과 같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여러분 가운데 누가 무지한 자들에게, 길 잃은 자들에게 연민의 정을 품고 있습니까? 그들은 여러분 때문에 계속 방황하다가 아무런 제재 없이 불못에 던져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셨습니다” (‘부의 위험’이란 제목의 설교에서).
웨슬리가 혐오했던 단어
그는 언제나 사랑에 관하여,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관하여 설교한 사람이다. 심지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서로를 온전히 사랑할 수 있게 할 만큼 우리 마음을 가득 채울 수 있다고까지 가르쳤다. 그러나 웨슬리가 혐오한 단어가 하나 있었다. 그는 이 단어를 가리켜 ‘나태하고’, ‘부조리하고’, ‘어리석고’, ‘가련하고’, ‘사악하고’ , ‘마귀적’이라고 묘사했다. 그것이 ‘지옥의 말’이라고 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그것을 입밖에 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이 아주 익한 단어는 다름 아닌 ‘여유가 있다’(afford)라는 것이었다.
웨슬리가 음식과 의복과 생활 형태에서 사치를 비판하는 설교를 했을 때 감리교도들이 대답한 말은 “하지만 나는 그럴 여유가 있다”는 것이었다. 웨슬리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생활하고 일하는 데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 외에는 여유를 가질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린 주장의 논거를 다음 다섯 가지로 제시했다.
돈의 원천은 하나님이시다
그리스도인의 돈의 원천은 하나님이시다. 우리 가운데 정말로 지혜롭거나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버는 사람은 없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에너지와 지력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재물의 참원천이시다. 이제는 여유가 있으므로 더 고급스런 생활을 할 자격이 있다고 느끼던 감리교도들에 대해서 웨슬리는 이렇게 물었다. “여러분의 생활 형편에 누가 이런 여유를 주셨습니까? 아니면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그것을 대여해 주셨습니까?”(‘재물이 증가할 때 생기는 위험에 관하여’ 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돈의 사용을 주께 보고해야
그리스도인은 돈의 사용 내력에 관하여 주께 보고해야 한다. 웨슬리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돈을 지혜롭게 사용하라고 강조했다. 왜냐하면 주께서 그들에게 주신 돈을 그들이 어떻게 사용했는지 그 내력에 관해서 장차 주께 보고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도 그때가 언제일는지 모르기 때문에, 아무도 나중에 주님을 위해 돈을 규모 있게 쓸 계획을 세워 놓고 지금은 아무렇게나 쓸 수 없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이런 상태에 얼마나 더 머물러 있을 생각입니까?” 웨슬리는 여분의 돈을 마음대로 써도 된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내일 혹은 오늘 밤 여러분은 산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께 여러분이 맡은 이 달란트와 그밖의 달란트들의 사용 내력을 보고하도록 소환을 당하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의복에 관하여’란 제목의 설교에서).
주님의 돈을 위탁받은 사람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돈을 위탁받은 사람이다. 하나심이 여러분의 수중에 두신 돈은 여러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다. 우리는 그 돈의 소유자가 아니라 그것을 집행할 책임을 맡은 자들이다. 따라서 돈을 사용할 때는 우리 마음대로 해서는 안되고 하나님의 지시대고 해야 한다. 웨슬리는 회중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면서 이 진리를 깨우쳐 준다. “청지기가 부랑아가 될 여유를 가질 수 있습니까? 자기 주민의 재물을 낭비할 여유를 가질 수 있습니까? 종이 상전의 지시와 어긋나게 상전의 돈을 사용할 여유를 가질 수 있습니까?”(‘기독교가 능력을 잃게 된 원인들’이란 제목의 설교에서).
필요로 하는 자들에게 나눠 주라
하나님이 그리스도인에게 돈을 주시는 이유는 그것을 필요로 하는 자들에게 건네 주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돈을 주시는 목적은 가난하고 궁핍한 자들을 도우라는 것이다. 돈을 자기를 위해서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이다. 웨슬리는 형편이 넉넉한 감리교도들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그 돈(가족을 위해 생필품을 구입하는 데 드는 액수를 뺀 나머지 전액)을 맡기신 이유는 주린 자들을 먹이고, 헐벗은 자들을 입히고, 나그네와 과부와 고아를 도우라는 것이 아닙니까? 실로 온 인류의 결핍을 구제하라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어찌 감히 주님의 것을 사취하여 다른 용도에 쓸 수 있습니까?”
사치품을 사느니 돈을 버리라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위해 사치품을 사느니 차라리 그 돈을 버리는 편이 낫다. 하나님은 우리를 시켜 당신의 이름으로 주린 자를 먹이고 헐벗은 자를 입히도록 우리를 당신의 재물 관리자로 삼으셨다. 여분의 돈이 있으면 그것으로 가난한 자들을 먹이고 입히는 데 써야 한다. 남의 음식과 옷을 망쳐놓는 게 나쁜 일이듯이, 돈을 쓸데없이 자기를 위해서 사용하는 것도 똑같이 나쁜 일이다. 웨슬리는 이렇게 말했다. "아무도 그 음식과 옷의 일부라도 바다에 던저 버릴 여유를 가질 수 없다. 그것은 주린 자를 먹이고 헐벗은 자를 입히도록 맡겨진 것이다. "웨슬리는 주장하기를, 그러나 만약 하나님의 돈을 낭비할 작정이라면 그것을 그렇게 사치스럽게 소비하느니 차라리 바다에 던져버리는 게 낫다고 했다. 돈을 바다에 던져버리면 적어도 그것을 쓸데없이 자기를 위해서 사용함으로써 그것을 보는 이들에게 “교만, 허영, 분노, 정욕, 세상 사랑, 그리고 천 배나 더한 ‘어리석고 해로운 탐욕’”으로 오염시켜 해를 끼치는 일은 발생하지 않기때문이다('의복에 관하여'란 제목의 설교에서).
웨슬리의 조언
웨슬리는 감리교가 본연의 영적 능력을 상실한 이유를 감리교도들이 부자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느꼈다. 그는 부를 탐하고 돈을 잘못 사용하는 등 유복한 생활에서 오는 죄들을 자주 질타했다. 특히 음식, 옷, 생활 형식에 사치하는 것을 책망했다. 그러나 돈을 잘못 쓰는 것을 단순히 정죄하고 만 것이 아니라, 청중에게 을바른 돈 사용법에 관한 뚜렷한 성경적 지침을 제시해 주기도 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수입을 어떻게 사용하도록 지시하셨는가? 웨슬리는 다음 네 가지 영적 우선 순위를 열거한다.
첫째, 자기와 자기 가정에 쓸 것을 공급하라(딤전 5:8). 신자는 자기 가족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물품들과 시설들, 즉 “검소하되 충분한 영양분을 갖춘 충분한 음식과 입을만한 깨끗한 옷”과 살 거처를 반드시 공급해야 한다. 신자는 생업에 어떤 문제가 생기더라도 가족이 넉넉히 살아갈 수 있도록 보장해 주어야 한다.
둘째,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전 6:8). 그리스도인은 자신과 자기 가족에게 얼마를 지불할 지 어떻게 결정해야 할 어디서 선을 그어야 할까? 웨슬리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한 말을 인용하여 대답한다. 그는 ‘입을 것’으로 번역된 단어가 문자적으로는 ‘덮을 것’을 뜻하며, 따라서 의복뿐 아니라 거처까지도 포함한다고 덧붙이면서, 다음과 같이 말을 잇는다.
“사도의 의취로는 그 이상의 것이, 즉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물품들이나 최소한의 시설을 넘어서는 것이 부(富)라는 게 자연스런 결론이다. 충분히 먹을 음식과 입을 옷, 그리고 머리를 둘 곳을 가지고, 그 이상의 것을 가진 사람은 다 부자이다”(부의 위험에서 인용).
셋째, “모든 사람에게 선한 일을 도모하라”(롬 12:17). 그리고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롬 13:8). 웨슬리는 그리스도인의 돈에 관한 둘째 말씀은 채권자에게 해당하는 말씀이라고 말하면서, 사업자들은 그 사업을 운영해 갈 적절한 도구, 자본을 갖추어야 한다고 덧붙인다.
넷째,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괴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갈 6:10). 그리스도인이 가족, 채권자, 그리고 사업에 필요한 것을 공급한 뒤에 해야할 의무는 남은 돈을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는 데 사용하는 일이다.
웨슬리는 하나님이 자녀들에게 돈을 주시는 이유는 본인들의 합당한 필요를 채우도록 하심이요, 그 다음에는 나머지를 가난한 자들에게 줌으로써 하나님께 돌려 주기를 바라신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스스로를 많은 가난한 자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여기기를 바라신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뜻하신 대로 허락하시는 재물로 채움받기를 원한다. 그런 다음 주께서는 이렇게 물으실 것이다.
너는 인류에게 은택을 베푼 사람이었는가? 상대의 다양한 필요를 감안하여 주린자를 먹이고, 헐벗은 자를 입히고, 병자를 위로하고, 나그네를 도와 주고, 번민하는 자들의 고통을 덜어 주었는가? 소경의 눈이 되어 주고, 저는 자의 발이 되어 주었는가? 고아의 아비가 되어 주고, 과부의 남편이 되어 주었는가(‘선한 청지기’에서 인용).
웨슬리는 이 네 가지 성경적 원칙을 제시하는 것 외에도 어떤 상황들은 칼로 무를 썰듯 명료하지 않다는 점도 인정한다. 그리스도인이 주님의 돈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언제나 명확하지만은 않다. 따라서 웨슬리는 청중에게 돈 지불 방법을 결정하도록 돕기 위해서 다음 네 가지 질문을 제시한다.
첫째, 이 돈을 사용할 때 나는 마치 주인인 것처럼 행동하는가, 아니면 주님의 청지기인 것처럼 행동하는가? 둘째, 성경의 어느 부분이 내게 이런 식으로 돈을 지불하도록 요구하는가? 셋째, 이 물건을 구입한 행위를 주께 일종의 제물로 드릴 수 있는가? 넷째, 돈을 이렇게 소비한 것에 대해서 하나님은 의인들의 부활 때 보상해 주시겠는가?
마지막으로, 판단을 잘 하지 못하는 신자들을 위해서 웨슬리는 물건을 사기 전에 다음과 같은 기도를 드리라고 권한다.
주님, 주께서는 제가 이 돈을 이 음식, 옷, 또는 가구에 지불하려고 하는 줄을 아십니다. 그리고 주께서는 제가 당신의 재물을 맡아 관리하는 자로서 주님이 그것을 제게 맡기실 때 뜻하신 바에 따라, 그 재물 중 이 부분을 지출하는 것이 바른 눈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임을 아십니다. 주께서는 주께서 명하신 대로 제가 주의 말씀에 순종하여 이 일을 하는 줄을 아시오며, 이는 주께서 그렇게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간구하옵나니,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거룩한 제물이 되게 하옵소서! 그리고 제 안에 증인을 주시사 주께서 모든 사람을 그 행위대로 갚으실 때 이 사랑의 노역 때문에 제가 상을 받게 하옵소서(‘돈의 사용법’에서 인용).
웨슬리는 양심이 청결한 신자라면 누구나 이런 기도를 드린 다음에는 돈을 지혜롭게 사용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웨슬리는 자녀들에게 지나치게 많은 것을 사주는 것을 특히 경고한다. 자신을 위해서 돈을 낭비하지 않으려는 사람도 자녀에게는 관대할 수가 있다. 욕구를 만족시키려 들면 오히려 욕구만 키우게 된다는 원칙에 입각하여, 웨슬리는 위와 같이 자녀들에게 선의를 품는 부모들에게 다음과 같이 묻는다.
여러분은 왜 자녀들에게 더 큰 교만이나 정욕, 더 큰 허영, 또는 어리석고 해로운 욕구를 주려고 합니까? …여러분은 왜 분수 이상의 지불을 하여 자녀들에게 유혹과 올무를 더 많이 안겨 주고, 더 큰 슬픔으로 자녀들의 마음을 찌르려는 것입니까(‘돈의 사용법’에서 인용).
웨슬리의 예
웨슬리는 든에 관한 설교를 많이 했다. 이익에 대한 바른 사용과 그릇된 사용에 관해서 많은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당시 영국에서 고소득자의 한 사람으로서 자기가 설교한 대로 실천할 기회를 가졌다. 그가 돈에 관해서 한 말을 무시한 사람은 많았을지도 모르나, 돈을 사용한 방법을 업신여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가 행동으로 설교한 것은 말보다 더욱 크게 울려 퍼졌다.
어렸을 적부터 웨슬리는 극한 가난이 무엇인지를 알았다. 아버지 사무엘 웨슬리는 영국에서 성직자에 대한 급여가 낮기로 유명한 소교구의 국교회 사제로서 먹이고 입힐 자녀가 아홉이나 되었다. 웨슬리는 아버지가 빚에서 벗어나는 것을 거의 보지 못했고, 한번은 아버지가 채무자 교도소로 끌려가는 모습도 보았다. 따라서 웨슬리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성직자가 되었을 때 그로 인한 경제적 반대 급부는 꿈조차 꾸지 않았다.
웨슬리는 아버지의 직업은 이었으나 가난은 잇지 않았다. 그는 소교구 사제가 되는 대신에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가르치는 데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느꼈다. 그는 링컨대학 특별연구원으로 선임되었고, 그뒤부터 경제적 위상은 급격히 달라졌다. 그 직위에 있으면서 삼십 파운드의 연봉을 받았는데, 혼자 살아가는 데는 너무 풍족한 액수였다.
그곳에서 가르치는 동안 놀음, 담배, 술에 돈을 쓰면서 자신의 상대적인 풍요를 누린듯하다. 어느 날 그가 그림 몇 점을 사와 방에 막 걸었을 때 시녀가 들어왔다. 추운 겨울날이었는데 그 여자는 얇은 아마포 옷밖에 걸치고 있지 않았다. 외투를 사서 입도록 돈을 줄 생각으로 호주머니를 뒤져보았으나 한 푼도 남아 있지 않았다. 자기가 돈을 사용하는 형태에 대해 주께서 기뻐하시지 않으셨겠구나 생각하고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었다.
네 상전께서 “잘하였도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라고 말씀하시겠나? 너는 이 가련한 사람을 추위에서 막아 줄 만한 돈으로 벽을 장식했다! 아, 공의여! 자비여! 이 그림들은 이 가련한 시녀의 피가 아닌가(‘의복에 관하여’에서 인용).
이 사건의 영향으로 웨슬리는 11년부터 가난한 자들에게 더 많은 돈을 줄 생각으로 씀씀이를 줄이기 시작했다. 그는 첫해에 삼십 파운드를 벌어 이십팔 파운드를 생활비로 쓰고 이 파운드를 구제에 썼다고 기록한다. 다음 해에는 수입이 배로 늘었으나 여전히 이십팔 파운드만 생활비로 쓰고 삼십이 파운드를 구제에 썼다. 셋째 해에는 수입이 구십 파운드로 뛰었으나 이번에도 생활비는 이십팔 파운드만 쓰고 육십이 파운드는 구제했다. 넷째 해에는 백이십 파운드를 벌어 다시 이십팔 파은드만 생활비에 쓰고 구십이 파운드는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다.
웨슬리는 그리스도인이 십 일조만 하면 다 되는 게 아니라, 수입 중 가족과 채권자의 몫을 뗀 나머지는 모두 내야 한다고 설교했다. 수입이 늘면 생계의 표준은 그대로 있어도 헌금의 표준은 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옥스퍼드에세 이런 관행을 시작했고 나머지 생애 내내 그렇게 행동했다. 수없이 수천 파운드로 뛰어 올랐어도 검소하게 살고 나머지 돈은 흔쾌히 냈다. 어린 해에는 수입이 천사백 따운드를 약간 넘었는데, 그 중 삼십 파운드를 뺀 나머지를 다 냈다. 그는 보화를 땅에 쌓아 두기를 두려워 했고, 그래서 그 돈은 장부에 기록되자마자 구제사역으로 빠져 나갔다. 그는 한꺼번에 백 파운드 이상을 소지한 적이 없었다고 기록한다.
웨슬리가 씀씀이를 줄인 방법 가운데는 사치품을 사지 않고 궁핍한 자들과 한편에 서는 것이 있었다. 그는 그리스도인이 자신을 가난한 자들의 일원으로 여기고,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들을 도우라고 돈을 주셨다고 생각해야 한다고 설교했다. 그는 가난한 자들과 함께 살고 먹음으로써 말을 실천으로 옮겼다. 웨슬리의 지도하에 런던 감리교도들은 런던에 과부들을 위한 가정 두 곳을 세웠다. 감리교 집회와 성찬 때 거둔 헌금으로 그들을 지원했다. 1748년 웨슬리는 그런 시설들에서 살았고, 마침 그 도시를 찾아온 다른 감리교 목사들도 그러했다. 웨슬리는 같은 상에서 같은 밥을 먹으면서 모든 그리스도인이 참여할 하늘 잔치를 기대하는 것을 즐거워했다.
존 웨슬리는 가난한 자들과 함께 먹고 함께 자며 사치품들을 삼가는 것으로 그들과 한편에 섰을 뿐 아니라, 때로는 구제할 돈을 더 많이 확보하기 위해서 자신의 생활마저 돌보지 않았다. 거의 사년 동안 주로 감자만 먹고 지냈다. 건강을 생각해서 한 일이긴 했지만 돈을 모으려는 뜻도 있었다. “내 식사비를 절감한 것이 먹을 게 없는 다른 사람을 먹일 것이다.”
1774년 웨슬리는 다음과 같이 썼다. “내가 죽을 때 만약 내게 십 파운드가 남아 있다면 여러분과 온 인류는 내가 도둑과 강도로서 살다가 죽었노라고 손가락질해도 괜찮습니다.” 1791년 그가 죽었을 때 그의 유언에 언급된 돈은 그의 호주머니와 옷장 서랍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동전 몇 닢뿐이었다. 그는 생시에 번 삼만 파운드를 거의 다 구제에 사용했다. 참으로 웨슬리 자신의 말 그대로였다. “내 책들은 언제든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면 남기고 떠날 수밖에 없지만, 다른 모든 점에서는 내 손이 내 유언 집행자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