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黃마리아 (1865~1937)】
「하와이 호놀룰루 대한인부인회 및 대한인부인구제회 중심인물로 활동」
평안남도 평양(平壤) 출신이다. 자료에 따르면 1905년 하와이 이민 당시 40세이므로 1865년생으로 추정된다. 같은 지역 출신 강익진(康翊晋)과 결혼하여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다.
결혼 후 자식들을 공부시킬 목적으로 남편 몰래 하와이 이민을 추진하였고, 1904년 장남을 결혼시켰다. 1905년 5월경 장남 부부, 장녀, 막내아들을 데리고 이민길에 올랐다. 이민길에는 평남 증산(甑山)에서 살 때 알던 공립학교 교사 출신 강명화(姜明化)와 아들 강영소(姜永昭)를 비롯한 가족들, 그리고 백일규(白一圭) 등이 함께 하였다. 1905년 5월경 제물포에서 일본 고베(神戶)에 도착하였다. 1905년 6월 13일 하와이에 도착 후 키파훌루(Kipahulu) 사탕농장에 배치되어 농장에 끌려가 노동을 시작하였다.
4개월 후 호놀룰루 에와(Ewa)농장으로 이주하여, 장남을 학교에 보내고 딸과 며느리와 함께 바느질과 빨래를 하며 생계를 꾸렸다. 1909년 2월 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에서 주최한 일본의 강제합병 계획을 철회를 요구하는 공동회에서 의연금을 기부하였다. 1912년 12월 교육을 목적으로 장남을 미 본토로 보냈다. 1913년 4월 19일 딸과 함께 호놀룰루에서 대한인부인회(Korean Women's Association)를 조직하고 회장이 되어 한인 부인운동에 앞장섰다. 9월 대한인부인회를 확장하기 위해 재봉소를 설치하고 부녀 양복, 남성 복장을 만들어 판매키로 하고, 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수전위원(收錢委員)으로 선출되어 부인들을 심방하였다. 1914년 대한인부인회 재무로 활동하면서 그해 5월 서간도 재난동포 구제금으로 300달러를 모집하여 선교사 노블 목사를 통해 송금하였다. 6년 동안 대한인부인회에서 활동하면서 국내는 물론 해외의 재난동포 구제사업에 노력을 기울였다. 1914년 4월에는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 기관지 『국민보(國民報)』에 의연금을 기부하였다.
1919년 3월 14일 국내의 만세운동 소식이 하와이에 보도되자, 대한부인회 명의로 3월 15일 하와이 각 지방 부인 대표들을 소집하였다. 호놀룰루에서 열린 임시공동대회에 41명의 부인 대표들이 모였고, 임시회장으로 선출되었다. 3월 19일 2차 대회에서는 새로운 조직을 발기하기 위해 임시회장 사무를 손마리아에게 넘겼다. 3월 29일 대회에서 각지의 부인회를 통합하자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4월 1일 법인관허장을 얻어 대한인부인구제회(大韓人婦人救濟會, Korean Ladies Relief Society)가 설립되었고, 이후 평생 부인구제회를 위해 헌신하였다.
1928년 호놀룰루 감리교회 부인보조회 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30년 1월에는 하와이 한인의 정치기관 수립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 봉대(奉戴)를 목적으로 하는 하와이 한인협회 1차 창설회 모임에 참석하여 발기인으로 서명하였다. 1934년 하와이 와히아와 미감리교회 부인보조회를 조직하고 회장에 선출되었다. 1936년 11월에는 대한인부인회 회장으로 임시정부 김구(金九)에게 100달러를 보내며 ‘군인 양성’을 위해 써달라고 부탁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