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시____
노래는 아무것도
박소란
폐품 리어카 위 바랜 통기타 한 채 실려간다
한 시절 누군가의 노래
심장 가장 가까운 곳을 맴돌던 말
아랑곳없이 바퀴는 구른다
길이 덜컹일 때마다 악보에 없는 엇박의 탄식이 새어나온다
노래는 구원이 아니어라
영원이 아니어라
노래는 노래가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어라
다만 흉터였으니
어설픈 흉터를 후벼대는 무딘 칼이었으니
칼이 실려 간다 버려진 것들의 리어카 위에
나를 실어보낸 당신이 오래오래 아프면 좋겠다
박소란 / 1981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2009년 『문학수첩』으로 등단했다. 시집 『심장에 가까운 말』이 있음.
∥추천이유____한옥순
나의 노래는 빗줄기를 타고 어디로 어디로…
한옥순
비가 온다. 여름 비가 내린다. 봄내 가물어 속을 태우더니 몇 달 만에 단비가 오신다.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리드미컬하게 들린다. 비처럼 음악처럼 떨어지는 빗방울이 모여 빗줄기가 되어 흘러간다. 길고 부드러운 빗줄기는 어디로 가는지 슬그머니 따라가 볼까?
빗물이 가느다랗게 길을 내며 흐르고 흘러 지붕이 낮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어느 동네 골목 끝에서 맴 맴 돌더니 상가 앞 신작로로 흘러서 간다. 멋쟁이 양장점과 좋은 약국이 있고 독일 빵집과 수제구두 가게를 지나 새를 파는 가게 앞을 흘러가다 전파사 옆 동그라미 레코드 & 테이프라는 간판을 단 가게 앞에서는 천천히 흐른다. 레코드 가게 문 밖에 세워 둔 커다란 스피커에서 빗줄기의 리듬이 경쾌하게 흐른다. 노래가 흐르는 레코드 가게 앞에는 몸집이 작은 한 여자아이가 우산을 돌려가며 발장단과 고갯짓으로 리듬을 탄다. 아주 행복한 듯 미소까지 띠우고…. 몇 곡의 노래가 빗방울처럼 길에서 방울방울 흐르다 잠시 멈추니 여자 아이는 다시 우산을 고쳐 잡고 빗속을 걸어 발걸음을 옮긴다. 빗줄기도 흐르고 노래도 흐르고 여자아이의 발걸음도 흐르고 그 뒤를 세월이 흘러 흘러서 따라간다.
아버지는 노래 듣기를 무척 좋아하셨다. 일을 쉬는 날엔 마루에 걸터앉아 전축에 레코드를 걸어 놓고 눈을 지그시 감고 노래를 듣곤 하셨다. 아버지의 노래들은 어린 내가 듣기에는 왠지 청승맞고 슬프게 느껴져 싫었다. 나이가 들면서 아버지가 듣던 노래가 백년설과 남인수의 노래라는 걸 알았다. 중학교 2학년이 되던 해 생일, 작은 카세트 라디오를 선물로 사주신 아버지 덕분에 가뜩이나 혼자 노는 걸 좋아하는 나는 학교에서 돌아와 방에 들어가면 나올 줄 몰랐다. 라디오 듣는 재미에 푹 빠진 것이다. 그때 그 시절 한밤중 라디오에서 듣는 노래는 작은 배터리의 끝을 혀에 댄 것 만큼의 짜릿한 즐거움 그 자체였다. 뜻도 모르는 외국 노래들의 매력적인 멜로디와 디제이의 부드러우면서도 다정한 목소리로 해박한 음악 지식을 전달해주는 별이 빛나는 새벽시간은 열다섯 살 여자아이에겐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그때 그 시절 밤이 깊은 줄도 모르고 듣던 노래와 세상 이야기들은 어쩌면 내 인생에 있어 낭만의 전환점이 되어주었는지도 모른다. 그때부터 나만이 좋아하는 가수와 노래가 생겼고 그 노래들을 테이프에 녹음을 할 줄 아는 꾀가 생겼다. 그 습관 덕분에 지금까지도 100개가 넘는 카세트테이프와 몇 장의 레코드를 보물단지처럼 갖고 있다. 지금 생각하니 비 내리는 날 레코드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에 발걸음을 멈출 수 있는 아버지의 감성을 닮음은 얼마나 큰 감사함인지.
소소한 버릇이 사는 동안 녹녹지 않은 삶의 고충을 견디게 해주는 힘이 되어줄 때가 있다. 노래와 영화가 그러했고 책, 책, 책들이 그러했으며 그것은 지금도 그러하니… 혼자서도 잘 놀던 청춘 무렵의 나에게 카세트 라디오와 작은 턴테이블과 레코드는 가슴을 설레게 하는 사랑이었고 고백이었고 편지였고 엽서였다. 그리고 작은 책방이고 음악실이었다. 결혼 후 나에게 노래는 마음 아릴 만큼 짧은 행복이었고 긴 위로였고 한 잔 술이었고 기차표였고 친구였다. 어쩌면 내 아버지도 이러한 마음으로 노래를 들으셨는지, 어머니도 이런 심정으로 살아가던 날이 많았었는지 못난 딸은 이순이 지나면서야 깨닫고 있으니….
기차역 앞에서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매일 노래를 싣고 다니던 리어카는 이제 더 이상 거리에서 볼 수는 없다. 기타와 피아노를 배우고 싶어하던 어린 여자아이의 용돈을 한푼 두푼 모아 레코드를 사러가던 낭만은 먼 먼 옛이야기다. 테이프가 늘어지도록 듣고 또 듣던 노래들은 지금 나처럼 늙어가고 있으니 그럼에도 여전히 오늘을 어제처럼 살아가고 있는 내게 노래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다. 손길 따뜻한 시집이다, 달콤 쌉싸름한 인생극장이다. 감출 수 없는 흉터이다. 어느 개인 날 아침 갑자기 찾게 되는 한 알의 아스피린이다. 그리고 길지 않을 내일을 살아내야 할 내게 노래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다. 어릴 적에 뛰어놀던 이 세상 어딘가의 골목이다. 빗줄기를 따라 걷는 오롯한 혼자만의 길이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는 서른 즈음에 내 사랑 내 곁에이다. 그리고 내가 마침내 타박타박 걸어서 가야 할 길이다. 마지막으로 머물러야 할 고요한 집이다.
어쩌면 역설적으로도 읽히는 노래 같은 제목의 박소란의 「노래는 아무것도 아니어라」의 시를 읽는 동안 나도 모르게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노래를 알게 했고 노래를  듣게 했고 노래를 간직하게 했던 모든 것들과 노래를 사랑하는 이들 모두 모쪼록 많이 아프지 않기를 소망한다.
한옥순 / 경기도 동두천에서 태어났으며 2000년 『문학세계』로 등단했다. 시집 『황금빛 주단』 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