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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은 인간이 만든 가장 재미있는 놀이도구 가운데 하나다. 축구, 야구, 농구, 배구, 골프 등 각종 공놀이에 사람들은 열광한다. 축구 한 종목만으로 승부를 가리는 월드컵은 올림픽에 버금가는 세계 최고의 축제로 자리매김 했을 정도다. 종류를 불문하고, 동그란 물체를 가지고 놀았던 공놀이. 공놀이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으며, 우리 조상들이 즐긴 공놀이에는 어떤 것이 있었을까?
[삼국유사]의 <태종춘추공(太宗春秋公)>전에는 신라 장군 김유신이 김춘추와 축국을 하다가 김유신이 발로 공을 차는 과정에서 김춘추의 옷고름을 떨어뜨린 탓에, 김유신이 김춘추를 자기 집에 데려가 여동생 문희를 만나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후 김춘추와 문희는 결혼을 했고, 두 사람 사이에서 신라 30대 왕인 문무왕(文武王)이 탄생한다.
김유신이 했다는 축국(蹴鞠)은 공(鞠)을 차는(蹴) 놀이로 중국의 경우 한나라(기원전 202~서기 220년) 시기에 이미 발전했으며, 당나라 때에 크게 유행했다. 당나라의 축국은 두 가지 형태가 있었는데, 국역(國域)이라 불린 경기장 양 끝에 구멍 6개를 파놓고 공을 차 넣는 구멍차기 형태와, 공을 떨어뜨리지 않고 높이 올려 오랫동안 차는 제기차기의 형태가 존재했다. 구멍차기는 격국(擊鞠)의 영향으로 구멍에 넣는 대신, H자 형태의 막대기기에 그물망을 얹은 공문을 세우고 공을 차 넣는 형태로 발전해 오늘날 축구와 비슷해졌다. 구멍차기는 군사훈련의 일환으로 유행했고, 제기차기는 왕실과 귀족들이 즐겼다.
김유신과 김춘추는 제기차기 형태의 축국을 즐긴 듯하다. 이때 공은 털을 사용하였으나, 당나라 때에 소나 돼지의 방광에 바람을 넣은 다음 가죽으로 감싼 공기공이 출현했다.
축국은 신라만이 아니라, 고구려에서도 즐겼다. [구당서(舊唐書)]의 <고려>전에는 “고구려인들은 바둑과 투호 놀이를 좋아하고, 사람들이 축국에 능하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일부 연구자들이 이 기록을 [후한서(後漢書)]에 실린 것으로 착각해, 1~3세기부터 고구려에서 축국이 유행한 것으로 오해했다. 국립민속박물관에서 발행한 [한국세시풍속사전] 등에도 이렇게 적혀있다. 하지만 실상은 삼국시대 말에 전해진 것이다.
그런데 축국은 고려시대 이후 크게 발전하지 못했다. 단지 이규보(李奎報, 1168~1241)가 쓴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실린‘우연히 기구(氣毬- 공기를 불어넣어 공중으로 높이 올라가도록 만든 주머니, 공을 일컬음)를 보고 뜻을 붙이다’는 시에서 축국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공기가 가득 차서 공이 되었을 땐 (氣滿成毬體)
사람에게 한 번 채여 하늘 높이 올랐는데, (因人一蹴沖)
공기가 빠지자 사람 역시 내버리니 (氣收人亦散)
쭈그러져 하나의 빈 주머니가 되었구려. (縮作一囊空)”
고려시대의 축국은 돼지 방광 또는 태(胎) 등에 바람을 넣어 공을 높이 차는 것으로, 제기차이에 가까운 형태의 공놀이였다. 골대에 공을 차 넣는 방식의 축국은 기록상 보이지 않는다.
이후 조선시대에 들어와 엽전을 넣어 만든 제기가 등장했다. 공을 쉽게 구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 쉽게 찰 수 있는 제기가 등장한 것이다. 1849년경에 홍석모(洪錫謨)가 연중행사와 풍속에 관해 정리한 세시풍속집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12월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엿보인다.
“젊은이들이 축국으로 놀이를 한다. 공은 큰 탄환만한데, 위에 꿩깃을 꽂았다. 두 사람이 마주 서서 서로 받아 차는데, 발로 잘 받아서 땅에 떨어뜨리지 않는 것이 잘 차는 기술이다.”
기록에 등장하는 축국은 요즘의 제기차기와 비슷하면서도 조금은 달랐다. 공에 깃털을 단 축국을 ‘축치구(蹴雉毬)’라고 했다. 축국은 ‘척구(踢毬)’, ‘답국(蹋鞠)’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는데, 주로 겨울에 행해지는 세시풍속으로 발전해왔다. 하지만 1882년 서양의 축구가 인천을 통해 들어오면서, 제기차기 위주로 발전하던 축국은 다시 골문에 골을 넣는 축구로 발전했다. 중국이나 일본의 축국도 제기차기 형태가 더 발전했는데, 동남아시아의 ‘세팍타크로’ 역시 제기차기 형태의 축국이 발전된 형태인 셈이다. 축구의 도입 이후 공으로 제기를 차는 형태는 점차 사라졌지만, 엽전을 넣은 제기를 차는 것은 민속놀이로 아직도 남아있다.
중국 수나라의 역사서 [수서(隋書)]의 〈백제〉전에는 “그 풍속에 투호, 바둑, 농주(弄珠) 등의 유희가 행해졌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사람들은 축국을 ‘농주지희(弄珠之戱)’라고 불렀다고 한다. 백제에서 즐긴 농주가 축국일 가능성도 없지 않으나, 그보다는 두 손으로 공을 여러 개 공중으로 던지고 받는 놀이였을 것이다. 농주는 ‘농환(弄丸)’이라고도 하는데, [삼국사기] 〈악지(樂志)〉에 수록된 최치원이 쓴 5개의 시(詩)인 향악잡영오기(鄕樂雜詠五伎) 가운데 하나인 ‘금환(金丸)’이 곧 농환이다.
“몸을 돌리고 팔 휘두르며 금환을 희롱하니, 달이 구르고 별이 흐르는 듯 눈에 가득 신기롭다.”
수산리 고분벽화의 기예도. 고구려 시대에는 농주를 부리는 재주꾼이 있었다. 농주는 두 손으로 공이나 방울을 여러 개 공중으로 던지며 노는 것으로, 이를 귀족들이 보고 즐기기도 했다.
최치원의 시에 등장하는 금환은 5세기에 만들어진 고구려 수산리 고분벽화에 등장하는 재주꾼이 여러 개의 공을 하늘에 던져서 주고받는 모습과 같다. 이 놀이는 고려 때에도 여러 오락(雜戱) 가운데 하나였고, 조선 시대에는 나례(儺禮- 섣달 그믐날에 악귀를 몰아내는 의식)행사에서도 행해졌다. 하지만 요즘은 서커스 공연에서나 볼 수 있는 것으로, 대중적인 놀이는 아니다.
삼국의 공놀이 문화에 큰 영향을 끼친 당나라에서는 목사(木射), 답구(踏毬), 격국(擊鞠), 보타구(步打毬), 축국 5종의 공놀이가 유행했었다. 목사는 십오주구(十五柱毬)라고도 하는데, 오늘날의 볼링과 닮은 실내 운동으로 중년 이상의 노인이 참여하기에 적합한 놀이였다. 이 놀이는 우리나라에 전파된 흔적이 없다. 답구는 큰 공 위에서 춤추는 것으로 호선무(胡旋舞)라고도 한다. 호선무는 본래 강거국(康居國- 중앙아시아의 투르키스탄)의 춤으로 당나라에 전파된 것인데, 고구려의 춤에도 호선무가 있었다. 그러나 이는 체조에 가까운 것으로 공놀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격국은 말을 타고 공을 치는 폴로(Polo) 경기로, 페르시아에서 시작해 당나라 초기에 중국에 전해져 크게 유행한 놀이였다. 보타구는 걸으면서 공을 치는 필드하키와 닮은 운동이다. 격국이 황실과 귀족들 사이에서 성행한 반면, 보타구는 말과 넓은 구장을 마련할 수 없는 평민들 사이에 유행했다. 우리나라에서 축국보다 더 유행한 놀이는 보타구를 포함한 격국, 즉 격구(擊毬)였다.
발해 정효공주묘의 벽화. 발해인의 모습과 문화를 반영한 귀중한 자료인 이곳 벽화에 격구채를 든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발해 시대에 격구가 크게 유행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격구는 당나라가 아닌 중앙아시아와 몽골초원을 거쳐 고구려에 전해졌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으나, 기록이나 고분벽화 등에는 흔적이 없다. 격구는 발해시대에 유행하기 시작했다. [일본후기(日本後記)]의 기록에 따르면 822년 정월 발해국 사신 왕문거(王文矩)가 일본 궁정에서 타구를 시연했다고 한다. 발해시대에 격구를 즐긴 흔적은 3대 문왕의 넷째 딸인 정효공주(貞孝公主, 757∼791년)의 무덤 벽화에 그려진 격구채를 든 사람의 모습에서도 찾을 수 있다. 신라의 경우 격구와 관련된 기록은 없으나, 경주 구정동(九政洞) 방형분(方形墳)의 모서리 기둥에 새겨진 서역인(西域人) 한 명이 격구채를 들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로서 당나라에서 크게 유행했던 격구가 신라에서도 유행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요사(遼史)] 〈소효충(蕭孝忠)〉열전에 1038년 발해인의 격구를 금지시키면서, 발해인들은 격구를 하며 무예를 연마하기 때문에 이를 금지시키자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격구는 말타기 실력과 함께 역동적인 경기를 치르기 위한 체력과 순발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무예 훈련으로 적합했다. 따라서 요나라 사람들은 발해 유민들이 격구를 통해 무예를 익혀 반란을 일으킬 것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무인들의 훈련에도 적합한 격구는 고려와 조선시대에 들어와 군사들의 훈련 수단이자, 놀이로 더욱 발전했다.
조선 전기에 편찬된 고려시대 역사서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는 918년 고려 건국 직후, 상주(尙州) 지역의 적장 아자개(阿玆蓋)가 항복하여 귀순하려고 하자 태조 왕건이 그를 맞이하는 의식의 연습을 격구장에서 했다는 기록이 있다. 기록에 따르면 고려 초기에 이미 격구장이 마련되어 있었던 것이다. 당시 개경 만월대 궁궐의 앞뜰에 조성되었던 구정(毬庭)은 광장인 동시에 격구장이었다.
격구는 장시(杖匙)라는 채를 이용하여, 나무공(毛毬)을 쳐서 일정한 거리에 있는 구문(毬門)에 넣는 경기이다. 고려 초기에는 궁궐에서 왕과 왕족 중심으로, 중기에는 무신을 중심으로, 후기에는 단오에 격구장이나 저잣거리에서 상하층이 참여한 대규모 격구대회 형태로 전승되었다. 조선시대에는 무과시험으로 채택되어 놀이적 성격이 줄어들었다가 점차 장치기로 변모되었다.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한국세시풍속사전>
1170년 무신정권이 일어나 폐위되었던 의종(毅宗, 재위:1146∼1170년)은 격구를 매우 좋아해 내관이나 호위 병사들에게 격구를 시키고 구경하기를 즐겨했다고 한다. 그는 며칠씩 격구를 구경하기도 했고, 스스로도 격구 기술이 뛰어나 직접 즐기기도 했다.
무신정권의 최고 권력자 최우(崔瑀, ?~1249) 역시 격구를 좋아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1229년 강화도에 있던 자신의 집 주변의 수백 채를 강제로 철거하여 그 자리에 동서로 수백 보(步)에 달하는 큰 격구장을 건설하였는데, 바둑판처럼 평평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는 격구를 할 때 동네사람에게 물을 뿌려 먼지가 일지 않게 하는 일이 잦아 원망을 사기도 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1116년 예종(睿宗, 재위: 1105∼1122년)이 서경(西京)에 행차하였을 때, 왕을 환영하기 위한 행사로 부녀자들에게 말을 달리어 격구를 하게 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예종이 이를 못하게 하여, 이후 여자 격구는 사라지고 말았다.
격구가 너무 유행하자 1314년에 격구 금지령이 내려지기도 하였으나, 관리들이 사찰 등에서 법을 어기면서도 격구를 했다. 결국 격구는 부활되었다. 단옷날에 고려는 원나라와 국제 경기를 하기도 했다. 이색(李穡, 1328∼1396)이 [목은시고(牧隱詩稿)]에서 “단옷날 조정에서 격구를 하는 것은 예전부터 행해 온 관례다.”고 할 정도로, 격구는 고려시대 내내 번성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격구 기술이 매우 뛰어난 인물이었다. 태조, 정종, 태종. 세종 등 조선 초기의 왕들은 궁궐 내에서 종친들을 불러 격구를 즐기기도 했다. 특히 태종(太宗)은 물러난 태상왕 이성계를 방문해 격구를 즐기면서 부자간의 정을 나누었고, 그 자신이 상왕(上王)이 되어서는 세종(世宗)과 함께 공을 쳤다. 이때 상품을 걸기도 하며, 격구를 전후해 술자리를 갖기도 했다. 세종 때 편찬된 [용비어천가] 제 44장에는 태조 이성계의 격구 솜씨에 도읍의 백성들이 모두 놀랐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격구가 왕실뿐 아니라, 대중에게도 익숙한 공놀이가 되었음을 짐작케 하는 부분이다.
정조 때 편찬된 종합무예서 [무예도보통지]에 등장하는 격구하는 모습. 총포와 화포가 발달하기 전까지 마상격구는 무과시험으로 채택되었으며, 군사훈련용으로 널리 권장되었다. | 폴로경기하는 모습. 손잡이가 달린 긴 봉을 이용해 골을 넣는 모습이 격구와 매우 유사하다. <출처: gettyimages> |
세종은 말 타는 솜씨가 좋아야 격구를 잘 할 수 있으므로 격구를 무예 연마에 매우 적절하고 효과적인 수단으로 생각하여, 1425년 무과시험 과목으로 채택해 군사들에게 보급시켰다. 조선의 기본법전인 [경국대전]에는 격구와 관련된 항목이 있다. 막대에 붙은 숟가락 길이는 27㎝(9치), 너비 9㎝(3치), 자루길이 105㎝(3자 5치), 공 둘레 39㎝(1자 3치), 출마표(시작 위치)와 치구표(공을 흩어 놓은 지점)는 50걸음, 치구표와 구문(毬門)까지는 200걸음, 구문 사이 거리는 5걸음으로 정해야한다는 규정이 그것이다.
1421년 11월 25일 세종은 상왕(上王)인 태종, 효령대군 등과 함께 날씨가 추운 탓에 교외에 나가지 않고 궁궐 안마당에서 타구(打毬)를 했다. 이때의 타구 방식이 [세종실록]에 설명되어 있는데, 편을 갈라 승부를 겨루며, 몽둥이의 모양은 숟가락과 같고, 몽둥이 머리는 손바닥 크기이며, 물소 가죽과 대나무를 합해 자루를 만들었다고 하였다. 또 마노(碼碯), 혹은 나무로 만든 공의 크기는 달걀만 하며, 와아(窩兒)라는 구멍에 공을 넣으면 점수를 얻게 되는데, 구멍은 넣기 힘들기 섬돌 위에, 혹은 평지에도 만들었다고 한다. 또 공을 치기 위해서 꿇어앉기도 하고, 혹은 서서 치기도 했다고 한다.
기록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타구는 하키보다는 골프나 게이트볼에 가깝다. 이를 장치기, 격봉(擊捧), 봉희(棒戱)라고도 했다. 타구(打毬)는 원나라 말에 유행하던 것이 조선 초기에 전해진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1455년 세조가 등극한 이후에는 격구가 아닌 봉희를 관람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장치기는 막대기와 돌 정도만으로 놀 수 있기에, 서민들의 놀이로 유행하게 되었다.
세종 시기 절정을 이루었던 격구였지만, 차츰 신하들이 고려 말의 사치스럽고 향락적인 격구의 폐단과 병폐를 지적하며 중단을 요청하는 예가 늘어갔다. 게다가 조선은 건국 이후 많은 말들을 명나라에 빼앗김으로써 말이 많이 부족해졌다. 또한 조총(鳥銃)이 등장한 이후에는 말을 타고 격구를 하면서 기마 무예를 연마할 필요성이 줄어들었다. 1790년에 편찬된 무예 훈련 교범인 [무예도보통지]에는 격구보(擊毬譜)가 따로 수록되어 있기는 했지만, 말을 타고 하는 격구는 조선 후기에는 사실상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양반층에서는 차츰 몸으로 하는 것은 천한 놈이 하는 짓이라고 여겨 타구(打毬) 또한 지배층의 활동을 적은 기록 속에서 사라져갔다. 양반들은 활쏘기, 투호 등 심신을 닦고 덕을 함양하는 놀이는 즐겼지만, 야외에서 자유로운 신체활동을 하는 것은 점점 꺼렸다. 고려시대 말을 타고 격구를 하던 여성들은 조선시대에는 더 이상 찾아볼 수가 없었다. 다만 걸으면서 공을 쳐 골문에 공을 넣는 격구인 얼레공치기와 장치기와 제기차기, 축국 정도만이 백성들의 공놀이로 조선 말기까지 남아있었을 뿐이었다.
참고문헌: 나순성, [한국 축국ㆍ격구고], [민족문화연구] 3호, 1969;이태웅,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임금들의 신체활동과 유희오락], [한국체육학회지], 35-4, 1996;심승구, [축국과 공놀이], [한국역사민속학강의] 1, 민속원, 2010;심승구, [아이들도 왕도 신나는 장치기 놀이],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 청년사, 1997;范永聰, [唐代球類運動探析], [중국사연구] 73집,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