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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즈오 이나모리/교세라 회장" 종이봉투 파는 아들
아들은 1934년 1월21일 일본 규슈 남단 가고시마현 시로야마에서 태어났다. 2남3녀 중 둘째였다.
아버지는 인쇄업을 했다. 열심히 일한 결과 아버지는 중고 인쇄기계를 빌려 집에 들여놓고 사업을 꾸려나갈 수 있었다. 한번은 거래처 사람이 봉투를 자동으로 찍어내는 기계를 임대해주겠다고 제안했다. 임대료는 몇 년에 걸쳐 갚아도 상관없는 좋은 조건이었다. 아버지는 외곬이었다. 아주 좋은 조건임에도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터무니없는 욕심을 부리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과묵한 아버지에 비해 어머니는 밝고 적극적이었다. 어머니는 자식들이 친구와 싸우고 들어오면 가서 때리고 오라며 빗자루를 손에 들려 내보낼 정도였다.
초등학교에 들어간 아들의 성적은 그리 좋지 않았다. 아버지와 어머니도 아들의 공부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일단 집안에는 책이 없었다. 아들이 친구 집에 놀러 가면 문학전집 같은 것이 책장에 꽂혀 있곤 했다. 아들은 책을 갖고 싶었다.
“왜 우리 집에는 책이 없어요?” 아들이 툴툴거리면, “책에서 밥이 나오는 게 아니다”라고 아버지는 말했다.
아들이 초등학교 6학년 때. 아들은 숙제도 제대로 안 해갔다. 담임선생의 시선이 좋을 리 없었다. 가끔 질문을 해도 선생의 태도는 싸늘했다. 그러나 잘 사는 집 아이를 대하는 태도는 달랐다.
아들은 하굣길에 골목어귀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선생님의 편애를 받는 아이들을 때리곤 했다.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선생에게 불려갔다.
“그 아이를 특별대우 하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
아들은 항변이 끝나기도 전에 뺨을 얻어맞았다.
어금니를 깨물려 참았지만 결국에는 어머니까지 불려 오셨다. 집에 돌아온 뒤 저녁식사. 언제나 별 말이 없는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냐?”
“선생님의 편애가 잘못됐기 때문이에요.”
아들은 끝까지 버텼다.
“그러니까, 네가 옳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지?”
아버지는 더 이상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아들은 아버지가 자신을 믿어주는 것이라고 여겼다.
1945년 4월 아들이 중학교에 들어간 날 이후부터 미군의 공습은 이어졌다. B29 폭격기에서 폭탄이 비 오듯 쏟아졌다. 6월17일 대공습은 가고시마의 대부분을 불태워버렸다. 그 고비를 넘겼지만 8월 공습으로 집은 결국 불타버리고 말았다.
일본의 항복으로 전쟁은 끝났다. 그러나 집도 인쇄기도 불타버려 집안 형편은 날로 어려워졌다. 아버지는 신중한 성격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인쇄소를 다시 열어보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인쇄기계를 들여놓으려면 많은 돈을 빌려야 했다. ‘돌다리도 두들겨보지 않고는 건너지 않았던’ 아버지는 어머니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머니는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겠지만 아버지의 고집을 꺾지는 못했다.
저축해놓았던 약간의 돈도 인플레이션과 화폐개혁으로 휴지조각이 되어버렸다. 아버지는 소금을, 어머니는 기모노를 암시장에 내다팔아 쌀을 마련해야 했다.
3년 뒤 아들이 중학교를 졸업하자 아버지는 “이제 취직을 해서 일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들은 “시골에 있는 땅을 팔자”며 버텼다. 아들은 “졸업하면 반드시 취직해 집안에 보탬이 되겠다”고 몇 번이고 다짐한 끝에야 가고시마 시립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아들은 고등학교에서 야구에 몰입했다. 하지만 쌀 행상을 하고 있는 어머니는 “힘들게 고등학교까지 보냈더니 허구한 날 놀고만 다닌다”며 언짢아했다. 아들은 어머니의 이 말 한마디에 야구에서 손을 뗐다.
아들은 집안일을 돕겠다고 다짐했다.
‘무엇을 할 것인가?’
아들의 선택은 종이봉투 장사였다. 집에서 만든 종이봉투를 만들면 이를 자전거에 싣고 시내 가게에 팔겠다는 생각이었다.
전쟁 전 아버지는 인쇄일과 함께 부업으로 종이봉투를 만들었다. 이웃 아주머니들을 고용해 가내수공업으로 봉투를 만들어 팔았다. 아버지는 부엌칼에 체중을 실어 500장 정도의 종이를 한 번에 자르곤 했다. 그러면 아주머니들은 절단된 종이를 크기별로 접어 풀칠을 했다.
아들은 이를 눈여겨보았던 것이다.
어느 날 아들은 아버지에게 종이봉투 얘기를 꺼냈다.
“아버지, 종이봉투 만드는 일을 다시 해보세요. 제가 팔 테니까요.”
아버지는 처음에는 상대도 해주지 않았다. 그러나 아들은 몇 번이나 아버지에게 봉투 얘기를 꺼냈다. 아버지 역시 고생하는 아내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는 결단을 내렸다.
아버지는 봉투를 만들었고, 아들은 봉투를 팔았다. 10여 종류의 종이봉투였다. 그걸 대나무로 엮은 큰 바구니에 쌓아 자전거에 실었다. 한 짐 싣고 달려 나가면 그 무게로 앞바퀴가 들릴 정도였다.
처음 아들은 시내 이곳저곳 상점을 찾아 돌아다녔다. 그렇게 해서는 효율적이지 못했다. 어떤 상점은 봉투를 산지 얼마 안 돼 다시 봉투를 구입하지 않았고, 어떤 곳은 봉투를 구입하지 못해 다른 곳에서 봉투를 사기 일쑤였다.
아들은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팔 수 있을까라고 고민하다 요일별로 지역을 나눠 돌아다니기로 했다. 시내를 7개 지역으로 나눠, 일주일에 한 번씩 그 지역 상점에서 봉투를 파는 방법을 생각해 낸 것이다. 이렇게 지역을 나눠 봉투를 팔다 보니 자연스레 상점마다 수요를 확인할 수 있게 됐다. 봉투가 필요할 때마다 가게를 찾다 보니 단골도 개척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들은 고등학생이었다. 가게 문을 열고 “실례합니다”하며 들어갔다가 아들과 비슷한 또래의 여학생이라도 있으면 부끄러운 마음에 뒤로 돌아보지 않고 나온 적도 있었다. 부지런히 봉투를 갖고 가게를 들락거리자, 가 게 주인들은 아들의 얼굴을 익히게 됐다. 그들은 “어이, 꼬마야”하며 피곤한 몸을 쉬어 가게 해주었다. 때론 “남은 봉투를 다 놓고 가라”고 말해주기도 했고, 어떨 때는 다른 사람을 소개해 주기도 했다. 그 시절 아들은 ‘봉투 파는 소년’으로 통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과자가게 아주머니가 자전거 페달을 밟고 가는 아들을 불러 세웠다.
“우리 가게가 과자 도매상을 하면서 봉투도 함께 공급하고 있단다. 그러니 힘들게 돌아다니지 말고 우리 가게에 봉투를 직접 파는 게 어떠니?”
‘옳지, 이것이 도매라는 것이구나.’
물론 가격은 소매를 하는 것보다는 쌌다. 하지만 대량으로 팔 수 있어 그렇게 하기로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문을 들은 다른 과자 가게에서도 같은 주문이 들어왔다. 시내의 많은 과자점에서 이나모리 집안이 만든 종이봉투를 사갔다. 대량 주문이 많아지자 아버지와 아들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도저히 주문을 댈 수 없어 중학교를 갓 졸업한 배달 점원도 두게 됐다.
아들의 사업 인생 출발점은 종이행상이었다. 풋내기 사업치고는 성공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자 아들은 종이 파는 일을 그만뒀다. 대학에 가고 싶었다. 아들은 결핵을 앓았다. 그래서 대학에 진학하면 약학을 전공하고 싶었다.
그러나 대학에 들어가기는 쉽지 않았다. 형도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바로 돈벌이에 나섰는데 자신이 대학에 가겠다고 고집을 부리기는 쉽지 않았다.
아버지는 “고등학교 보내니까 이제 또 대학이냐?”며 못마땅하게 여겼다.
아래로 동생이 다섯이나 있었다. 지방은행이라고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으로 대학 진학은 포기했다. 아들은 담인 선생에게 “대학에 갈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자 선생은 “내가 부모님에게 말씀드려보겠다”면서 집으로 찾아왔다.
“가즈오에게는 다른 아이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뭔가 특별한 것이 있습니다.”
담임선생이 아버지 앞에서 머리를 조아렸다. 아버지는 당혹해 했다. 선생의 끈질긴 설득 끝에 장학금과 아르바이트로 집안에 부담을 주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아버지는 불편한 마음을 접었다.
1951년 아들은 오사카 대학 의학부를 목표로 야간열차에 몸을 실었다. 아들은 그 어느 때보다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기대했던 만큼 충격도 컸다. 재수를 할 여유는 없었다.
아들은 늦게 시험을 치는 지방의 가고시마 대학에 입학하게 됐다. 약학과는 거리가 먼 공학부 응용화학과를 선택했다. 집에서 입던 점퍼와 슬리퍼를 끌고 통학할 정도로 학교는 가까웠다. 책을 살 수 있는 형편이 아니어서 거의 매일 도서관에 틀어박혀 책과 씨름했다.
야쿠자가 될 뻔한 교세라 회장 1954년이 되자 이나모리 가즈오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이제 그는 4학년. 졸업반이었다. 취업에 대한 고민이 그를 괴롭혔다. 그는 전공을 살려 석유화학 회사에 들어가고 싶었다. 그러나 당시 일본은 불경기였다. 일본에선
한국전쟁의 특수가 사라진지 오래였다. 취업을 고민하던 가즈오에게 한 친구가 제안을 했다. 그에게 일본 통상성 과장으로 있는 작은 아버지에게 취직자리를 부탁해 보겠다는 것이었다. 가즈오는 곧바로 친구의 작은 아버지에게 부탁을 하러 가자고 독촉했다. 친구의 작은 아버지에게 간다는 말도 하지 않은 채 둘은 도쿄로 향하는 밤기차에 몸을 실었다. 그만큼
가즈오는 취업에 신경 쓰였다. 새벽녘에 도쿄에 도착한 이들은 곧바로 친구의 작은 아버지 집으로 향했다. 느닷없이 방문이었다. 친구의 작은 아버지는 잠에서 깨지도 않았다. 겨우 친구의 작은 어머니가 “이 곳까지 왔으니 인사라도 하고 가라”고 해서 친구는
집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오래지
않아 나온 친구의 얼굴은 굳어있었다. “너희 작은 아버지가 무슨 얘기를 했냐”는 가즈오의 독촉에 친구는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일본 최고의 도쿄대학생들도 취업하기 쉽지 않대. 웬만한 줄이 없으면 대기업에 들어갈 꿈도
꾸지도 말라는 꾸지람을 하셨어…….”
큐슈로 내려온 가즈오는 석유회사를 포함해 취업문을
두드렸으나 모두 허탕이었다.
“나 같은
지방대 출신은 전혀 거들떠보지 않구나.” 취업문제가 안 풀리자, 가즈오는 나쁜 곳으로 빠져들려는
충동을 느끼기까지 했다.
‘어차피 불공평한 세상에서 제대로 된 회사에 들어가지 못할 바에야 인텔리 야쿠자나 돼버릴까. 이런
불공정 사회보다 의리를 중시하는 야쿠자가 훨씬 나을지 몰라.’
시내 번화가의 야쿠자 사무실 앞을 서성거릴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곧 마음을 다잡았다. 고향의 가난한 집에는 취직을 간절히 바라는 부모와 어린 동생들이 있었다. 그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답답했지만
‘세상의
불공정을 한탄만 한다고 인생이 풀리지는 않는다.’ 얼마 뒤
담당 교수가 가즈오를 불렀다.
“아는 사람이 교토에서 초자 제조회사를 하고 있다네. 자네가
괜찮다면 그 곳에 부탁해 볼 수 있을 것 같네만.”
‘초자?’
가즈오에게 익숙한 단어가 아니었다. 그러나 따지고 재고 할 형편이 아니었다. 고향의
부모에게 취업이라는 소식을 들려드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가즈오는
교수에게 고개를 숙이며 “부탁드립니다”라고 말했다. 가즈오에게 ‘초자’는 생소한 무기화학 분야였다. 교토에 있는 회사에 들어가기 위해선 초자에 대해 좀 알아야 했다. 그는 무기화학을 가르치는 교수를 찾아가 초자의 원료가 되는 점토 연구에 시간을 쏟았다. 시간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6개월이라는 짧은 시간이었다. 밤을 새워 초자를 파고들었다. 그리고 졸업논문으로 <이리키 점토의 기초적 연구>를 썼고, 그 논문과
함께 그의 대학생활도 끝을 맺었다. 그의 첫 직장은 교토의 쇼후공업이었다. 그의 부모는 아들이 교토의 제조회사에 다니게 된 것을 반가이 맞아 주었다. 형은 어깨를 두드려주었고, 부모는 당시로는 엄청나게 비싼 양복을 취업 기념으로 사 주었다. 그렇게
그는 가고시마를 떠나 교토를 향했다. 1900년대 세워진 쇼후공업은 교토의 변두리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 회사는 일본에서 처음으로 고압초자를 만들어 내며 승승장구를 달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입사할 당시 사세는 무너지고 있었다. 회사 상황은 법정관리에 들어가기 일보 직전이었다. 게다가
경영자의 전횡이 심했고, 노사 간의 갈등도 심각할 정도였다.
‘이런 회사여서 나 같은 지방대학 출신에게도 자리가
돌아왔구나’라는 한숨만이 나왔다.
입사 첫날 소개받은 기숙사에 들어와서는 곧바로 이 회사를 떠야만 한다는 생각만이 떠올랐다. 사람이 도저히 살 수 없을 정도로 온통 먼지투성이인 방이었다. 그날 밤 다섯 명의 동기가 한 자리에 모였다. 모두
한결같이 “이 회사를 떠나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기숙사엔 식당조차 없어 동기들은 돈을 모아 난로를 사놓고 자취생활을 해야만 했다. 거의 매일
미소(일본식 된장국)와 공깃밥으로 식사를 때우기 일쑤였다. 가즈오가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일을 마치고 저녁 준비를 위해 회사 근처 야채가게에 갔다. 가게
주인인 듯한 아주머니가 말을 걸었다.
“총각,
못 보던 얼굴인데?”
“며칠 전
쇼휴공업에 입사한 신입사원입니다.”
“아, 그
회사요.”
아주머니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어디서
왔어요?”
“가고시마에서 왔습니다.”
가즈오는
아주머니의 얼굴에서 놀라는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멀리서 왔네요. 그런 회사 다니면 장가가기도 쉽지 않다던데…….”
교세라 회장은 우장춘 박사의 사위였다 이나모리는 쇼후공업에서 특수자기를 연구하는 부서에 배치됐다. 이 부서는 고주판 절연성 자기를 연구하고
있었다. 회사 사정은 계속 어려워졌다. 월급날이 돼도 월급이 나오지 않았다. 회사에서는 “일주일만 기다려 달라”고 해서 기다리면, 다시
“일주일만 더 기다려 달라”고 할 정도였다. 동기들 하나 둘씩 회사를 떠났다. 가을 무렵에는 이나모리를 포함해 달랑 2명만이 남았다. 두 사람은 자위대 간부후보생 학교에 원서를 내기로 하고 시험을
치렀는데, 둘 다 시험에 합격했다. 마지막으로 호적초본을 내면 간부후보생이 될 수 있었다. 이나모리는 집에 호적초본을 부쳐달라는 편지를 보냈지만 호적초본은 끝내 오지 않았다. 결국 서류제출 시한을 넘겨 이나모리 혼자만이 회사에 남게 됐다.
호적등본을 보내지 않은 건, 이나모리의 형이었다. 형은 이나모리의 편지를 찢어버렸다. 가난한 집안에서 동생만을 대학에 보내고 취직도 했는데, 반년도 못 참고 회사를 그만두려는 동생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형은 대학에 가지 않고 일을 하고 있었고, 여동생도 이나모리
때문에 자신을 희생하며 일하고 있었다. 이제 다른 선택은 없었다. 이나모리는 회사에 남아 연구에 몰두하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회사와 기숙사를 왔다 갔다 하는 시간이 아까워 냄비와 난로, 이불을 싸들고 연구실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연구에
몰입했다. 외롭고 고독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성과가 서서히 나오기 시작했다. 좋은 연구개발 결과가 나오면서 상사의 칭찬도 잦아졌다. 그러면 점점 더 업무에 재미가 붙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임원들까지 이나모리를 신뢰했다. 이듬해 가을, 이나모리가 이끄는 개발팀은 특수자기과란 별도 부서로 독립했다. 입사 2년 만에 부서를 지휘하는 책임자가 된 것이다. 그때만 해도 분말을 혼합하는 세라믹 개발은 3D 작업이었다. 하루 종일
분말을 뒤집어쓰고 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럴
때마다 이나모리는 이렇게 부서원들을 독려했다.
“이 세라믹 부품이 없으면 텔레비전 브라운관을 만들 수 없다. 우리들은 지금 도쿄 대학이나 교토 대학에서도 할 수 없는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연구를 하고 있는 거야.” 그맘때 회사 노조에선 파업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나모리는 고민했다. 파업에 들어가면 특수자기과의 생산은 올스톱된다. 그렇게 되면 마쓰시타에 브라운 부품을 납품할 수 없다. 마쓰시타는 고민 끝에 생산을 계속하기로 한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이나모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생산은 계속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부서원을 모두 불러 놓고 말했다.
“이 시점에서 파업을 하게 되면 주문이 끊기게 되고 회사는 도산할 수밖에 없다. 우리 과는 파업에 참가하지 않고 생산에 계속했으면 한다. 모두 공장에서 먹고 자고 할 생각을 하자.” 부서원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회사 정문에서 노조원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었기에 공장을 들락날락할 형편이 못되었다. 이나모리는 갖고 있는 돈을 탈탈 털어 식량을 사들였고 이불까지
옮겨놓으며 생산에 대한 의지를 보였다. 문제는 제품을 만들더러도 어떻게 밖으로 보내느냐는 것이었다. 한 사람이 이 문제를 해결했다. 부서원 중 유일한 여자직원이었다. 그녀는 공장에서 숙식할 처지가 아니었다. 때문에 매일 출퇴근을 했다. 이나모리는 그녀가 출근하기 전에 생산한 제품을 공장 뒷문 쪽에 던져 놓았다. 회사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그녀는 그 제품을 가지런히
모아 마쓰시타로 보내곤 했다. 노조에선 파업을 거부했던 이나모리를 ‘회사의 앞잡이’라며 비난하기 일쑤였다. 이나모리는 생각이 달랐다.
“노조 활동을 적대시할 생각은 없다. 다만 회사가 소생할 불씨를 꺼뜨리면 안 된다는 것뿐이다.”
노조 역시 특수자기과 덕에 그나마 회사 매출을 유지하고 있어 이나모리를
비난했지만 묵인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나모리의 쇼후공업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주임으로 승진한지 3개월이 흘렀을 때였다. 히타치제작소에서 세라믹 진공관을 만들어달라는 제안이 들어왔다. 이나모리가 개발 책임자가 되어 여러 차례 시제품을 만들었지만 만족할
성과를 내놓지 못했다. 이즈음 은행 출신의 새 사장이 취임하면서 야오야마 마사지 부장이 물러났고 새 기술부장이 부임했다. 새
기술부장은 “자네 능력으로는 무리인 것 같으니 손을 떼라”는 말을 했다. 전직 부장인 아오야마 마사지는 “자네는 자유롭게 놔두면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는 성격”이라며 모든 일을 믿고 맡겨 주었다. 반면 새 부장은 그러지 않았다. 이나모리는 새 부장의 조치에 반발해 “그렇다면
회사를 그만두겠습니다”며 사표를 던졌다. 이나모리가 회사를 그만둔다는 소문이 회사에 퍼지자 같은 부서 직원들도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이들도 이나모리를 따라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했다. 아오야마 역시 회사를 그만두는 것은 물론 회사를 창업할
수 있도록 투자금을 모아주겠다고 했다. 아오야마는 교토대 공학부 동기생들에게 투자를 부탁하러 다녔다. 그러다 미야기전기제작소를 찾아 투자를 요청했다. 처음 미야기전기제작소 쪽은 “20대의 새파란
애송이를 믿고 투자를 하냐”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러나 아오야마는 물론 이나모리까지 회사를 수차례 찾아 간곡히 투자를 부탁하자, 결국
미야기 사장을 비롯해 몇몇 사람이 투자를 해주기로 약속했다. 공장은 미야기전기제작소의 빈 창고였다. 창업을 위해선 전기로를 포함해 설비와 원재료, 운용자금이 필요했다. 1000만엔에 이르는 큰돈이었다. 회사를 창업하기로 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집을 은행에
담보로 잡히고 돈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한 사람은 아내에게 “집이 언제라도 날아갈지 모른다”고 조심스럽게 말하자, 아내는 오히려 “남자들끼리 서로 반했다고 하는데 어쩌겠어요?”라며 웃어넘겼다. 남편은
자신을 이해해주는 아내에게 눈물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1958년 12월 이나모리는 쇼후공업을 그만두었다. 곧바로 특수자기과에서 함께 근무했던 스기나가 아사코와 결혼했다. 아사코는 파업당시 생산된 물건을 공장 뒤편에서 받아 마쓰시타로 보냈던 바로 그 여직원이었다. 이나모리와 아사코가 가까워지게 된 건, 도시락이었다. 이나모리가 회사에서 먹고 자고 했을 때 점심시간 때면 그의 책상 위에 도시락이 올라와 있었다. 여러 반찬을 손수 만들어 담아 놓은 도시락이었다. 이나모리는 한 톨의 밥알도 남기지 않고 먹어치웠다. 이튿날, 그 이튿날도 도시락이 올라왔다. 아사코가 매일 가져다 놓은 것이었다. 이나모리가 너무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었기에 연민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지만, 이나모리는 자신을 알아주는 고마운 마음을 느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자연스레 가까워졌고 함께 식사도
하고 서로의 집을 방문하기도 했다. 아사코의 아버지는 세계적인 육종학자 우장춘 박사였다. 일본에서 태어난 그는 1947년 한국행을 결심했다. 당시 우리나라 채소 육종연구가 매우 초보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을 때 배추ㆍ감자의 품종 연구에 몰두해 우리나라 환경에 맞는 배추를 개발해 국내자급을 가능하게 했고 무균 씨감자 생산으로 6ㆍ25 전쟁 이후 식량난 해결에 크게 기여했다. 그는 우리나라의 채소작물의 육종연구가 세계적 수준으로 발돋움하는데 크게 기여해 ‘한국 근대농업의 아버지’로 불리고 있다.
회사를 창업하기에 앞서 8명이 이나모리의 신혼 방에 모였다. 그들은 “오늘의 감격을 잊지 않기 위해 피로써 서약하자”며 새끼손가락을 베어 피로 서명했다. 회사 이름은 교토세라믹이었다. 세라믹은 일반인에게 익숙하지 않았지만 현대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직원은 28명이었다. 사장은 미야기, 아오야마가 잔무, 아나모리가 이사 겸 기술부장을 맡았다. 1959년
4월1일이었다. 그날 밤 기념 연회가 열렸다. 이나모리는 “지금은 미야기전기제작소 창고를 빌려 시작하지만 이제 곧 교토 제일, 일본 제일, 세계 제일의 회사가 될 것입니다”라며 막 창업한
작은 회사였지만 원대한 꿈을 내놓았다. 이나모리는 매일 아침 가장 일찍 출근했다. 출근길에 그는 교토에서 자리를 잡고 있는 회사를 보며 ‘우리는 언제 저런 회사처럼 성장할 수 있나’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교토에는 시마즈 제작소(이 회사 직원이 노벨 화학상을 수상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일본전지 같은 대기업들이 많았다. 철강을 두드리고 해머를 내리치는 자동차 부품공장 옆을 지날 때면 ‘이들
회사를 뛰어넘을 수 있을까’하는 걱정으로 마음이 무거워지곤 했다. 다행히 마쓰시타전자에서 TV용 자기제품을 대량으로 발주했다. 그러나 기계와 인원은 제한됐고, 숙련되지 않은 사원이 대부분이 창업
기업이 양산체제까지 가는 데는 가시밭길이었다. 철야작업을 밥 먹듯이 해 사람들은 과로로 쓰러지지 직전이었다. 누군가 “마라톤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페이스를
조절해야 한다”며 충고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나모리의 생각은 달랐다.
“신참자가 페이스를 생각할 여유가 어디 있나. 우리는 꼴찌 중에서도 가장 꼴찌다. 전력질주를 해도 언제 따라잡을지 모르는 처지다. 최소한
출발만이라도 100m 달리기를 하듯 전력으로 뛰어나가야 한다.”
그렇게 1년 동안 한눈팔지 않고 계속 달렸다. 그 결과
매출액 2600만엔, 경상이익 300만엔이라는 흑자를 기록할 수 있었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미야기 사장은 수년 동안 적자를 보게 될 것이라고 각오했다고 있었다. 이듬해에도 매출과 이익이 두 배로 늘어났다. 그러나 그 무렵 젊은 사원들의 불만은 극도로 달해 뜻하지 않은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우리는 왜 관계 맺음에
서툰가"
같은 아파트 위층과 아래층에서 자취를 하는 젊은 남녀가
있다.
꽤 오랜 시간을 같은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지만 말 한마디 제대로 나눠 보지 못한 사이다. 시간을 때우는 남자는 천장을 바라보며 한숨을 쉰다. 남자는 위층 여자가 애인을 데려와서 파티를 열었구나라고
착각한다.
그리고 세상 사람 모두가 행복해 하는 오늘, 자신만 혼자라는 외로움에 못 이겨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여자가 몸부림치는 소리였던 것이다. 두 남녀의 비극을 담은 이 이야기는 그 둘은 비극적인 결말을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소설 속 두 남녀의 문제는 누군가에게 먼저 다가서거나 마음을 열기 두려워했다는 점이다. 누군가와 항상 얼굴을 맞대고 생각을 공유해야만
했다.
하지만 요즘 가족의 단위가 작아지고 혼자 사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사람과 대면하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마음을 여는 데 점점 서툴러진 것이다. '무인도에 가져가고 싶은 것 하나'를 고르게 했더니 열 명 중 하흡 명이 노트북이나 휴대전화라고 답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사랑하는 애인이나 친구를 꼽았던 것과는 사뭇 다른 결과다. 이제는 사람을 연결시켜 줄 수 있는
'물건'에 만족하고 있다는 뜻이다. 소통의 범위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으며 세계 각지에서 내뿜는 목소리가 가득하다. 분명 소통의 양은 늘었지만 서로가 나누는 소통이
아닌
일방적인 나 자신의 목소리만 내고 있다는 것. 엔터키만 누르면 상황 끝인 메신저가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상대의 대답을 듣고 싶지 않다면 '차단'이라는 기능을 이용해 수면 아래로 사라질 수도 있다. 당연히 사교성 부재 현상이 나타날 수밖에.
인정은 받지만 인간관계에는 영 젬병이다. 조금도 미안한 기색 없이 우아한 식사를 즐길 수 있는 게
그다.
타인에 대한 배려라곤 눈곱만큼도 없던 그가 여자 주인공을 만나 조금씩 마음을 열고, 사람을 대하는 법, 결혼할 수 있는 남자로 변해 가는 과정이 흥미롭게 펼쳐진다. 서툰 데에도 나름 이유가 있다. 누군가의 기분을 맞춰주는 게 피곤해서, 마음의 벽을 쌓고 살았던 것이다. 특히 사고력이라는 말에 대해 '진정성이 부족하다.' '오지랖이
넓다.'라며
알레르기 반응을 보일 정도로 편견을 가진 사람에게 관계 맺음은 머나먼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사람 사이에 세워진 벽을 허무는 묘약이 될
터이니.
'공짜' 복사의
비밀
일본의 '공짜' 복사 기계 '타다카피(Tadacopy, 일본어로 공짜 복사라는 뜻)'. 이곳은 자선단체가 아니다. 오셔나이즈라는 기업이 운영하는 엄연한 영리 서비스 매장이며 일본 게이오대 학생들의 아이디어를 모태로 2006년 탄생한 회사다.
전혀 수익이 날 것 같지 않은 이 서비스로 회사는 2007년 한 해 동안 2억 엔의 매출을 올렸다. 1년 만에 10배나 성장한 것이다. 학교 근처 사업장의 광고가 가득하다. 전단지에 비해 훨씬 더 오래 간직한다. 더 오랫동안 보관하니 이보다 좋을 순 없다. 일본 전역 46개 대학으로 사업을 확대했다. "통상적인 관념 뒤집기"
처음 큐래드가 일회용 반창고 시장에 진출했을 때 업계의 반응은 매우 부정적이었다. 이미 존슨앤존슨 사의 밴드에이드가 꽉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승부를 걸어 볼 만한 남다른 전략이 있었기 때문이다. '퍼플 카우'를 개발해 밴드에이드의 아성에 도전했다. 살구색의 반창고가 전부였는데, 속성에 과감히 반기를 든 것이다. 누가 사겠느냐고 코웃음을 쳤지만 소비자의 반응은 달랐다. 동심을 사로잡아 어린이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상처 난 곳이 없어도 '퍼플 카우'를 붙이는 아이들이 있을 정도였다. 어린이들이 주 소비층이라는 사실에 기반하여 타깃이 무엇에 열광하는지를 정확히 포착해 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상처를 최대한 감춘다는 제품의 주된 속성에 과감히 수정을 가하고 타깃의 특성에 주목한 단순한 접근으로 쿠래드는 업계 1위였던 밴드에이드를 가뿐히 제칠 수 있었다. 새로운 사업 아이템을 찾고 있다면, 통상적인 관념이 수용된
제품을 한번 유심히 살펴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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