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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구
최 태 응
1
집마다 밥상 위에 벌어지는 반찬이 다 같을 수 없듯, 사람마다 그 생김새에 비롯해서 입고 다니는 복장이며 신발까지가 또한 같을 수 없듯, 이웃 아이들이 자기네의 처지를 넘거나 말거나 한껏 차려입고 학교로 놀이터로 흩어져 가듯, 장손이가 대장간에 가고 온다.
어른들의 세상에서 곽서방도 마찬가지다. 멀지 않은 옛날, 그 육중스럽고 투미스러운* 지게에다가 짐을 이층으로 쌓고도 빈 몸처럼 내둘렀다는 꿈 같은 이야기의 자랑과 그 시절의 늠름하고 거세던 곽서방의 증거물은 될까 몰라도 오늘의 곽서방에게 지게는 짐을 지기 위한 쟁기가 아니다.
지게만으로 곽서방의 푼수로는 한 짐이 되고도 남는다.
그러니까 지게라기보다 그건 마고자래야 옳다. 외투라고 하든지……
“녕감, 그 지게 바꾸지 않을라우?”
힘꼴이나 씀직한 젊은이들이 입맛을 다시며 지게를 건드리면,
“아, 온, 지겔 바꾸다니.”
곽서방은 필펄 뛰며 자리를 뜬다.
어린것들이 매달려서 조르기만 한다면, 코를 따서 팽이라도 깎아줄 법한 곽서방이면서 유독 지게에 관계되는 일이면 무섭게 딱딱해진다.
지게는 곽서방에게 그렇게 소중한 물건이다.
2
“아즈바안.”
제아무리 단꿈에 꿀물이 넘쳤더라도 그 이상 반갑고 살뜰한 소리는 없다.
탁 엎디고 졸기 시작했던 곽서방을 지게가 넌지시 뒤덮는데도 모르도록 혼곤히 잠이 들었을 때도 장손이의 ‘아즈바안’ 소리는 깜짝 놀래는 것이 아니라 보드랍게 살며시 곽서방의 고막을 간지럼 태우는 것이다.
“어어이.”
장손이가 거푸 두 번 이상을 부르기 전에, 곽서방의 원만한 대답이 해변을 더듬어 간다.
소년의 그림자가 어데서든지 기쁨에 넘쳐 달음질친다.
하루에 한 번은 천하없어도 붙안듯 흐뭇이 입과 눈곁*에 떠오르는 만족한 미소가, 곽서방의 얼굴을 바람결에 움직이는 함박꽃 활짝 핀 것처럼 우물우물 떠오른다.
전후를 가리지 않고, 줄달음질쳐 오는 장손이의 작으나 탄탄한 몸뚱이가 곽서방과 함께 나루에서 떨어져 개판*에 밀려들 뻔한 기세로 가슴에 와 부딪칠 땐, 곽서방은 지게에 뒷등을 대고 있는 힘을 다해서 맞받는다.
그러면서도 순간적 위태를 넘어서는 이내, 좀더 세차라 하고 소년의 뒤통수를 한바탕 더듬어준다.
그때마다 곽서방은 아들 죽은 손자처럼 장손이가 타근하고* 귀엽고 사랑스러워진다.
장손이에게는 또한 아버지 없는 할아버지처럼 곽서방이 좋다.
해질 무렵 항구엔 바람이 한껏 쓸쓸하게 거칠게 속 쓰리게 불어와도 인제 상관이 없다.
해가 지고 어둠이 바뀌어 드는 것부터가 그래야 옳다.
온종일 떨어져 있어야 하는 그들이 붙안는 때가, 밤이 시초하는 때
가 아니냐.
배가 고프던 것도, 시재* 더 고폰 것도 씻은 듯 곽서방은 눈물이 흐르도록 세상이 한번 흡족해 본다.
―지게가 있고 장손이가 또 있고……
3
넘쳐 터진 누룽지 모양 되지도 않은 포도를 걸으며, 장손이는 무엇보다도 곽서방이 으레 그쪽으로 자기를 이끄는 왼편 손을 놓고 되도록 자연처럼 자리를 바꾸어서 곽서 방의 오른손을 잡아본다.
추위, 고의춤이나 저고리 속에 묻어두기만 하는 오른손이 언제나 온기라고는 없고 빠닥하다.
자꾸 따뜻한 어린 손이 그걸 가만히 쥐어볼 때 곽서방은 흠칫한다. 장손이는 할 수 없이,
“오늘은 짐 좀 있습디까?”
해볼 것 없는 말을 꺼낸다.
짐을 졌고 벌이가 있었다고만 하면 벌써 호떡집 떡집들을 수두룩이 지나왔는데 곽서방이 무심 했을 법이 있는가.
묻기가 한스럽도록 곽서방의 대꾸는 눈앞이 꺼지는 듯한 한숨으로 되는 것이나 장손이는 곽서방의 한숨을 그거나마 쳐다보아야 그날 하루치의 안심을 가지는 것이다.
곽서방에게 벌이가 생기고 수입이 있다면 그건 온종일 갯바람에 그슬려 살결이 겉늙는 것과, 백사장에 뒹굴다 더미더미 몰아다 끼얹는 검불과 먼지, 그리고 몇 번이든지 졸라매어 가늘어진 허리, 꾸부러지는 속의 허기, 그것들뿐인 것이다.
배가 닿을 때마다 그저 있을 수 없는, 버릇 된 본능에서 지게를 비집고 거슴츠레한 눈을 푸르르한 수염부터 쳐든 위로 대단찮게 떠보기는 하나 짐이 산더미처럼 부두에 쏟아진다 해도 곽서방은 인제 아무런 입맛도 당길 것 없고 신이 나지도 않는다.
한쪽밖에 못 쓰는 팔을 허우저어서 역시 한쪽에 알맞은 짐이라고 한 개 얻어맡는댔자 흠썩 원거리로 쳐서 정거장이나 신남포나 한나절 날라다주고 기껏 크게 떠야 십오 전, 한껏 좋은 꿈 꾸고 횡재가 트이는 날이면 두 냥(二十錢), 그걸 받는다 한들 대수냐는 것이다.
하긴 매일같이 어린 장손이에게만 호떡, 시루떡, 어떤 날은 우동 이렇게 깔축없이* 신세를 지는 일 생각하면 다만 닷 돈이라도 보태고 싶으나 그건 또 장손이가 아예 그런 인색한 걱정을랑 꽁지도 건드리지 말라 했다.
그래야 할 사정이, 곽서방은 얼마 전에 하도 오래간만이라고 짐을 졌던 것인데, 마음은 살았다고 좀 듬직한 놈을 악으로 지고 가다가 독일사진관 앞 유난히 깨끗하고 매끄러운 시멘트 바닥에 냅다 엎드러졌던 일이 있다.
온통 모래 바탕에 엎질러버린 두부모처럼 상판이 골고루 벗어지고 두드러진 데마다 이지러져 피가 흐르고 한참이나 정신을 잃고 뒹굴던 꼴이라니……
그보다도 그날 밤 어둡도록 애를 태우며 나루턱을 헤매던 장손이가 눈물에 얼룩이 져서 시름없이 돌아오더니 누더기 속의 곽서방을 파내고 몸부림치며 서러워하던 그 가슴 아프던 양이라니……
“인전 아쎄, 짐 질 념은 말라요.”
명색뿐일망정 아내에게서도 들어보길 바랄 수 없던 정스러운 말, 자식이 있다 한들 이럴 수 있으랴 싶은 그윽한 당부를 곽서방은 목이 메어 오열하며 들었다.
그 후 곽서방은 시재 죽어도 한이 없는 자기 자신은 차치하고 어린 장손이를 보아 섣불리 짐을 맡으려 하지 않는다.
그러는 동안에 부두노동자의 세상에도 세리와 시세를 좇아 갖은 법석이 생기고 변천이 왔다.
곽서방은 섭섭할 것 없으나 지게꾼이란 턱줄과 자격에서 미끄러졌다.
노동조합이라는 것이 만들어지고 거기에 매어놓은 조건들을 구비해서 조합원이 돼야만 부두에서 짐을 다룰 수 있다.
첫째, 주소를 일러주면 물어서라도 찾아가야 하는 무식을 면하고, 국어 (일본어)로 항용 돌아가는 말귀만은 통해야 한다.
그것쯤이라면 요령으로 때울 수도 없지 않으나 먼저 보증이 필요한데, 사람이고 돈이고 곽서방을 보증해줄 끄나풀이라고는 없는 남포(南浦)다.
뿐이라면 또 모를 것을 세금이란 것이 다달이 등골을 할퀸다.
육체적으로 보면 외모만은 남들의 절반이 넘지만 실속은 남의 삼분의 일 값도 못하는 곽서방에게 할인 없는 옹근* 세금은 곽서방의 수입을 비웃는다.
떠나온 지 오 년이 넘도록 손댄 일이 그것이었고 아는 데가 부두였기에 (그리고 장손이의 편의도 있고) 그는 시방도 무슨 시간을 지키는 회사원이나처럼 눈만 떨어지면 부두로 발길이 나간다.
부산하고 지저분한 항구에는 그러나 양지쪽이 있고 양지쪽에 지게를 앉히고 남쪽 하늘 밑의 산봉우리들을 조망하면 새큼한 눈에 졸음이 파고드는데 아련한 향수가 떠오른다
4
형무소 붉은 담을 지리하도록 끼고 돌아서 다시 무학산(舞鶴山)을 바라보며 얼마를 더 가면 거적과 흙빛 녹슨 양철조각과, 채 검은빛도 아닌 썩은 판자쪽으로 더덕더덕 깁듯 발려진 움집들이 아기자기 들어박힌 빈민굴로, 곽서방의 손을 자그마한 두 손으로 감싸듯 잡고 장손이는 숨차지 않게 걸어가며,
“아즈반, 배고프지?”
“아아니.”
“뭘, 고프지.”
“아아니.”
곽서방이 정말인 것같이 아니라고 하니까, 장손이는 자기가 한껏 시장한 것을 눌러 참느라고 군침을 꼬륵 삼킨다.
아무래도 견딜 수 없이 배가 쓰리다.
그는 다시 살며시 곽서 방의 얼굴을 쳐다본다.
꼭 허기를 느끼는 얼굴인데 도무지 아니라는 것이 알 수 없다.
제딴, 장손이는 곽서방이 아니라는데 자기만이 이렇게 시장할 법이 있느냐고 혼자 갸웃거린다.
마지막으로 지나치는 지짐집 앞에서 장손이는 한 번 멈칫하고, 기름이 질질 돌고 고소한 냄새를 후끈 끼얹는 빈대떡을 흘겨본다.
한편 손이 양복바지 호주머니에서 십 전짜리 셋과 오 전짜리 하나를 쥐어보고 딸랑 소리를 낸 뒤에 도로 꺼낸다.
그러고는 다시 걷는다.
아니라고는 하나 곽서방의 입가로 혀가 두루두루 침을 바르는 것을 발견하자 그는 곽서방도 배가 자기보다 못하지 않게 고프다고 단정해놓고, 그러니까 함께 참는 폭으로 참는다.
크기도 전에 늙어버린 것 같은 구도토리*나무를 지나서 사태밥*이 경사진 곳에 곽서방의 집을 비롯해서 기선네 집, 그다음이 장손네 집이다.
“여게서 좀 있으라요, 잉?”
“……“
곽서방은 도토리나무 밑 돌바위 위에 앉으며 끄덕인다.
“암메에요, 후레에 후레……”
장손이는 늘창* 갯가에서 주워들은 창가를 뽑으며 우선 곽서방네 굴뚝 곁으로 가면, 기선이가 마주 나온다. 기선이도 장손이와 동갑인 열세 살 된 계집 애다.
기선이는 곽서 방의 마누라인 막득이의 동자*와 상심부름을 해준다.
막득이가 뭇 사내들을 끌어들이고 투전을 붙이기도 하고 술도 받아다가 되넘겨먹기도 하며, 그런 때는 기선이를 울 뒤 잿등에 올려보내서 파수를 세운다.
“기선아.”
“응?”
“오늘두 이거 하니?”
손을 척척 치는 시늉을 하면 그들은 안다. 투전을 의미하는 것이다.
“시방 해애야.”
장손이는 더 말할 것 없이 끄덕이고는 자기 집으로 뛰어간다.
곽서방은 온몸의 피로와 허기가 엄습하고 심사가 울적해서 두 무릎 짬으로 얼굴을 숙여 박고 장손이가 다녀올 때까지 기다린다.
5
아내랄 것도 없다.
그따위가 아내이기에 곽서 방은 심사가 불붙는다.
그 때문에도 떠나왔다고 할 수 있는 물건넛적 시절에 남들이 일러 ‘갈보’ 라고, ‘나까이 (접대부)’ 라고 하면 죽기를 갈 삼고 해보려 들던, 그렇게 세차고 알뜰하던 사랑의 시절이 있었던 것도 꿈에 주물러본 한 함지의 인절미다. 아니 꿈에 싸버린 한 더미의 똥이다.
곽서방의 입에서 지금은 고대로 ‘갈보’다, ‘나까이’다 못해 ‘잡화냥년’ 이요, ‘천벌이 내릴 년’이다.
오늘의 곽서방은 꼭 그 아내 막득이를 저주하기에 살아 있는 것이다.
막득이가 함께 죽자고 하는 수가 있다면 곽서방은 까짓 계집 하나를 죽인달 것 없이 살려주는 마음, 부드럽고 평안한 본심으로 함께, 아니 셈을 눅쳐서 자기 혼자만 죽을는지도 모른다.
도대체 그런 아름다운 기회가 있기만 하다면 곽서방은 오늘껏 버티어온 원한과 조소의 긴장이 풀려서 목을 놓아 울 것도 없이 서리맞은 허재비* 모양 퍼억 하고 쓰러져버릴는지도 모른다.
한낮을, 두루마기나 되듯 지게를 끼고 부두에서 어른거리다가 허기가 일고 원래 불수된 몸에 피곤이 덮칠 땐 몰아내던 계집, 여우가 아니면 독사가 되어가는 계집, 그것의 앙칼진 눈꼴 속으로 기어들어야 하는 시름보다도 서편 물벌판에 와스스 소리를 내는 듯이 희번덕거리며 보랏빛 황혼을 퍼뜨리는 태양을 부릅떠 보고 한탄을 뿜어야하는 곽서 방이다.
하루에 두 끼, 쉬어지고 꾸드러진 바가지밥에 업수임과 모다구*가 빚어진 것 같은 조기대가리를 먹고 연명하려고 들어가야 하는 것인지 먹고 죽나 보려고 들어가는 것인지 곽서방은 날마다 도토리나무 아래서 자기 집 정상을 살펴다주는 장손이를 고대하며 다음 날은 부두에 밀린 썩은 뱃전에 의지하고 그냥 잠들어 고스란히 가버리리라 한다.
6
장손이는 벌써 기선네 집 앞에서,
“오만.”
과부 어머니를 부른다.
어머니가 아직 고대로 퍼놓고 있을 저녁을 안 먹겠노라고,
“나 뭐 사먹었어.”
정반대로 쪼륵 소리 나는 배를 힘써 불룩이며 든든한 척한다.
“아이두, 그름 이따래두 먹자. 어데 밥만한 기 있다던?”
장손이는 그 소리가 끊일 땐 곽서방네 굴뚝 곁이다.
기선이를 시켜 유릿조각을 바르도록 한 조왕문으로 눈을 바싹 댄다.
옴이 돋을 것 같은 낡은 비루(맥주)병이 가로세로 방바닥에 뒹굴고 윗목에 술상이 허출하니 밑쳐 있는 위에 지짐 부스러기와 호콩 껍데기가 한 거시기 닭이 버르집은* 겨 더미 모양 벌여 있다.
“?”
아랫목으로 눈을 돌리니 장손이로서는 새로울 것도 놀랄 것도 없이 반벌거숭이의 남녀가 비스듬히 누워 화투를 한다.
‘하하, 오늘은 여편네가 등이 달았구나.’
기선이가 늘 하던 말대로 곽서방의 마누라가 젖통들을 내놓고 시재 퀴퀴한 악취가 풍겨나는 것 같은 속곳, 그것마저 말통*을 끌러 치우고 그 징글스러운 비계토막 허리를 움찔할 때마다 피둥피등한 아랫배때기가 보였다 감추였다 그러면 사내가 코와 입을 시물거리며* 돈을 잃는다는 것이다.
잃는댔자 겁날 것 없는 막벌이 녀석이나, 그 판에 들어서 보태가지고 일어서는 사람이라고는 없다.
그 구적지근한* 얼굴 근처만 가도 구린내가 내달을 것 같은 입을 맞추는 것도 보았다.
술기운에 붉어진 몸때기, 돈따기에 땟국이 흐르는 가슴을 붙안고 추잡을 부리는 양도 보았다.
북데기* 속의 도야지들 모양 이불 속에서 자꾸만 킬킬거리는 것도 드문드문 보아온 장손이었다.
그런 것들에 대면 오늘은 점잖다.
장손이는 입 속으로 종알거린다.
‘저게 왜 곽서방 아즈반이 아닐까?’
불현듯 곽서방의 얼굴과 수염이 눈앞에 떠오른다.
장손이는 급자기 도토리나무께로 달음질친다.
“아즈바안.”
너무 오래되 었다는 미안에서 그는 가늘게 소리를 지르며 뛴다.
7
아랫거리 지짐집에 마주 앉아서 장손이는 시루떡 한 접시와 빈대떡 오 전어치 그리고 곽서방에게 약주까지 한 잔 대포로 사놓았다.
대장간에서 일급으로 받는 돈으로 장손이는 대놓고 곽서방과 함께 먹는다. 처음 삼십 전에 들어가서 요새는 오 전을 올려서 삼십오 전씩 받는다.
좀더 있으면 사십 전 그다음에는 오십 전도 더 받을 자신이 있다고,
“내 그땐 국수랑 어묵이랑 다 사디레요.”
한다.
“장손아아.”
“예?”
“너 좀더 크거든 내 지겔 가져라.”
곽서 방은 언제나 그 말이다.
그 지게는 한창때 물 건너 살 적에 나무를 열두 믓*이나 졌던 것이라 했다.
벼를 두 섬이나 져도 지겟다리에서 삐걱 소리도 나지 않더라고도 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장손이도 몸이 부쩍부쩍 크고 힘차지는 것 같았다.
“장손아아.”
“예?”
“난 아무래두 올 겨울엔 선창에 못 나갈 거 겉다.”
“!”
오늘따라 곽서방은 맥이 없다.
술을 마시면 그래도 거나해서 곧잘 기운 있어 보이던 그 허세라도 좋으니 장손이는 하다못해 지게 이야기라도 해주었으면 하나 곽서방은 아주 풀이 죽었다.
“너희 오만 말대루 장손인 이댐에 기선이하구 양주*가 되구 잘살갔지?”
전에 없던 말을 하며 곽서방은 장손이의 뒷머리를 쓸어준다.
장손이는 웬일인지 가슴이 묵직하고 눈시울이 뜨거움을 느꼈다''
그저 돈만 많으면 하는 생각이 치밀고 나중에는 대장간에서 쇳덩어리라도 집어다가 팔아서 흠뻑 맛있는 음식과 비싼 술이라도 먹여주고 싶다.
이모저모로 모아보거나 뜯어보거나 헐쳐도* 장손이가 일 다니는 대장간 주인보다는 복과 덕이 얼굴에 찼는데 아즈반이 어째서 불행한가를 알 수 없다.
장손이는 기억에 남음이 없는 죽은 아버지가 곽서방인 듯 착각될 때도 있다.
자손도 없고, 여편네라고 아귀 같은 것의 영감이기보다 차라리 자기의 아버지라면 자기가 흡족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곽서방으로 쳐도 그리 밑질 것 없음직하고 또 장손이 어머니도 외롭지 않은가. 한데 도무지 야속하다.
8
“아즈반, 아즈반?”
한껏 술에 취하는가 싶게 곽서방은 상 아랫머리를 들이밀고 푸우푸우 하더니 잠이 들었다.
“아즈바안.”
장손이는 이상하도록 날래 깨어주지 않는 곽서방을 놓고 이번에는 조금 먼 데서 찾는 것같이 가늘고 길게 불러보니까,
“어?”
곽서방은 항구에서 모양으로 얼른 일어나며 상을 떠받는다.
“아즈반 가자요.”
다시 달려들 듯 장손이가 소매를 잡으니까 그제야 제대로 뜨는 눈에 눈물이 글썽하더니 그 말라붙다 못해 쌈지처럼 오글쪼글 주름이 잡힌 데 어디서 스며나는지 모를 눈물이 주르르 흘러 살이 쑥 빠진 볼을 한 절반 빠르게 기다가 뚜둑 하고 가슴에 듣는다.
장손이도 탓없이 울먹해져서 ,
“아즈반, 왜 그래요?”
새삼스럽도록 애매한 괴로움에 잠긴 곽서방을 일으켰다.
“어? 가자니? 그래!”
곽서방은 투덜투덜 주워붙이듯 말을 뱉으며 비틀하고 일어섰다.
“가자, 가지 그럼, 못 갈 기 뭐이가?”
무슨 뜻에선지 연방 지껄인다.
장손이는 웬일인지 큰 소리 내어 울고 싶은 것을 애써 참으며 문밖에 나섰다.
“음, 가서 그저 음.”
곽서방은 한사코 중얼거린다.
“아즈반, 지게.”
“어?”
지게라면 죽었다가도 한번 꿈틀해볼 것 같던 곽서방이 오늘밤은,
“지게, 너 못 지간?”
막 내버리듯 소홀하다.
실상 오래간만에 속도 빈 데 술이 들어가서 그런지 술은 해롭다던 말이 옳은지 곽서 방은 사지가 제가끔이다.
장손이가 지게를 졌다.
보통 중가마한 지게가 아니다.
길이 우둘우둘한 데서는 다리가 턱턱거리며 땅을 차고 발뒤꿈치도 지른다.
장손이는 곽서방의 손을 놓고 전반* 같은 지게 멜빵을 부여안은 채 숨이 차서 걷는다.
구도토리나무가 보일 때는 그냥 가슴속이 거친 바다와 같이 들싸고 가쁘다.
곽서방을 앉혀두고 장손이가 앞서 가보아야 하는 지점에서 고만 주저앉았다.
실망하리라 예측했던 곽서방이 손을 허우저으며,
“용타 우리 장손이, 다 컸다. 지게두 맞는다. 이전 네 가져라.”
엄벙덤벙 떠들며 어쩌자고 비틀비틀 자기 집으로 가는 것이다.
“아즈반.”
장손이가 지게를 벗어놓고 쫓아갔을 때는,
“으아악.”
어두운 방 안에서 몸이 오싹하는 무서운 소리가 나고 한바탕 툭탁거리는 판이었다.
장손이는 캄캄한 속에서 눈을 꼬옥 감았다 떴다.
‘오오.’
똑똑하지는 않으나 상자 궤짝 틈에 엎드러지는 그림자가 곽서방이다.
벌거숭이 계집은 네 활개를 벌리고 아랫목 포대기 위에 펴드러졌고 또 하나 사람 같은 것이 무릎을 세우고 일어나려 기를 쓰는 모양이다.
그놈의 발길에 채어서 곽서방이 나가동그라져서 죽을는지도 알 수 없다는 생각에 장손이는 억울한 슬픔이나 무서움을 넘어서 독기와 울분이 치밀어 발밑에 너저분한 술병을 한 개 집어 다부지게 몇 대를 짓모아댔다.
9
기선이 아버지가 달려와서 불을 켜고 그 밉상스럽게도 죽이고 싶은 사나이를 잡아 일으키고 멱살을 끌고 경찰서로 갔다.
여편네를 죽인 것은 장하다.
하나 반신불수건 굶어 살았건, 그리고 알뜰한 고생살이로만 늙었다 한들 쉰넷이라는 나이에 그렇게 허풍스러울 데가 어딘고.
장손이는 곽서방의 발딱거리는 가슴을 쓸어주며 흐느껴 울었다.
곽서방을 발길로 지른 사나이는 부두에서 배가 발착할 때마다, 그건 흡사 뉴스에서 본 무쏠리니만 못하지 않게 지게꾼들을 쟁개비 모자 쓴 병사들 훈련하듯 좌지우지하던 찌그렁이*였다.
“개 겉은 놈 보자.”
장손이는 혹시 그 사람도 같은 의미로 힐끗 보는 것 같은 우악스러운 얼굴을 보았다.
“장손아, 장손아.”
귀에다 대고 대답을 해도 곽서방은 저 혼자 서너 번을 부른 뒤에,
“넌 내 조상이다, 아반이다.”
기운 없이 몇 마디씩 지껄이고는,
“아이구 가심야.”
시재 숨을 끊는 듯한 괴로움을 보이고 얼마 동안 혼돈 상태에 빠진다.
장손이는 대장간을 집어치웠다.
틈틈이 곽서방의 지게를 쳐들어도 보고 걸머지고 마당을 걸어보기도 한다.
너무 긴 것 같은 지겟다리를 서너 치쯤 잘라내면 당장 가벼운 짐이라도 지고 견딜 것 같으나 그러다가 보통 지게가 될 듯해서 그냥 둔다.
그러고는 혼자 홍분해서 중얼거린다.
“내가 열다섯에만 나봐라.”
하니까 열다섯이래야 그다지 어른 태가 나지 않는 대장간 아이들의 몸집이 떠오르는 것을 애써 떨쳐버린다.
“뭘 그 새끼들은 난쟁이지, 맹꽁이들…….”
장손이는 자꾸 씩씩한다.
10
더 바라지는 않았으나 홀연히 겨울이 왔다.
하아얀 당촛가루 같은 독살스러운 눈이 내리더니 당장 뜨물이 얼고 수챗구멍이 막히다 못해 딴 살이 돋고, 거리에는 검정 얼음이 박쥐 눈알 반뜩이듯 오종종히 박혔다.
곽서방은 장손이 어머니가 떠넣어주던 죽 마룩*을 넘기지 못하다가 죽었다.
숨이 닫히렬 때,
“장손아! 너 글두 배우라…….”
더듬더듬 이런 말을 남기고 갔다.
장손이는 곽서방보다도 그런 것들을 결심하고 있었으니까 끄덕였다.
슬퍼할 것도 없다.
장손이는 항구로 나왔다.
지체없이 동네 사람들이 거적때기로 곽서 방의 시체를 꾸리는 것을 말끄러미 볼 수 없음에서다.
며칠 만에 나와 보는 항구는 그새 남의 것처럼 달라졌다.
곽서방이 쪼그리고 앉아 낮꿈에 잠겨서 서러움 아닌 눈물을 무심 중에 흘리던 양지쪽에는 회오리바람이 거기에서 사라진 듯 짚북데기가 낟가리처럼 들이 쌓였고, 그 위에 노대*가 끼얹은 듯 허퍽허퍽하는 갯얼음이 되는대로 덧업혔다.
거추장스럽기만, 휑데데엥 하기만, 항구는 볼꼴이 아주 없다.
바다 가운데에 닻을 내린 검은 윤선들은 다시는 연기를 토하며 움직여볼 성싶지도 않고, 갯장 수리에 들어찬 목선들이머, 작은 기선들을 묶어놓은 듯이 얼음이 돌라 꾸렸다.
있어도 겁날 것 없는 찌그렁이도, 다른 노동자들도 없다.
묵묵히 부두를 한 바퀴 돌고 나서 장손이는 바다 건너 구름 가린 산꼭대기들을 아득히 바라본다.
곽서방은 인제 그곳으로 가야 다시 만나볼 것 같다.
“아즈바안.”
귀에 울리는 소리, 그것은 제가 부르던 것이 아니라 이렇게 서서 가만히 듣기만 하던 소리 같다.
코빼기가 시큰하고 가슴이 멍청하거나 말거나 장손이의 성난 것 같은 눈과 뇌리에는 열다섯 살 된 자기가 꽤도 장성했고 곽서방의 굉장히 크고 무거운 그 지게가 자기에게는 마고자보다도 더 가든하고* 깡총하게 업혀 있는 것이 보여진다.
“아즈반!”
순간 툭 터진 서편 바다를 더듬고 음산하게 불어다가 몰아치는 한껏 시린 바람이 장손이는 무척 상쾌하다.
『문장』 14호(1940. 3)
최 태 응
최태응(崔泰應)은 1917년 황해 은율에서 태어났다. 휘문고보를 거쳐 일본 니혼(日本)대학 문과를 수료했다. 이후 월남해 『민주일보』 정치부장, 『민중일보』 편집부장 둥을 역임했다. 1939년 『문장』 에 「바보 용칠이」와 「봄」 이, 1940년 「항구」가 추천되면서 등단했다. 앞의 두 작품을 통해 일종의 원형적인 인간애 정신을 경건한 수준에서 제시했고, 해방 후의 작품에서는 현실의 문제를 주로 다루었다. 『전후파』 「허기」 「산 사람들」 「삼인 가족」 「샌프란시쓰코는 비」 등의 작품이 있다. 1998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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