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119 다해 연중2주일
이사 62:1-5 / 1고린 12:1-11 / 요한 2:1-11
어머니와 아들, 인간과 하느님
새해가 되면 사람들은 “올해 내 운수는 어떤가?”, “하는 일이 잘 풀릴 건가?” 등등. 미래에 대한 궁금증과 기대를 갖습니다. 특별히, 요즘처럼 사회가 불안정하고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증가하면 개인뿐만 아니라 국가의 운명에 대한 걱정도 커집니다. 얼마전 명리(命理)나 무당을 찾는 사람들이 점점 증가하고 있다는 뉴스를 보면서 이것은 미래에 대한 불안과 호기심 그리고 뭔가 안정감 주는 것을 붙잡고 싶은 사람들 심리도 커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해 봤습니다. 이처럼 이른바 개인의 삶이나 세계의 사건들이 미리 정해진 방식으로 전개된다고 하는 운명(運命)이란 개념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가 고민하고 있는 주제 중 하나입니다. 인도를 배경으로 하는 불교에서는 이것은 업(業)이라고 부르는 카르마(Karma)들 간의 연기법(緣起法)으로 설명합니다. 즉, 과거의 행위인 업이 현재의 삶과 미래를 결정하는 인과법칙입니다. 일종의 결정론적 이해입니다. 그래서 불교는 인간이 현세뿐만 아니라 다음 생까지도 계속되는 영원한 윤회의 굴레라는 속박에서 헤어나올 수 없다고 현실을 비관적으로 묘사합니다. 다만, 이러한 고해(苦海)를 제대로 깨닫고 수행을 해야만 인간은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한편, 동아시아 한자문명권에서는 출생과 죽음과 같은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고정된 요소를 명(命)이라 하고, 개인의 선택과 행동에 따라 변화가능한 것을 운(運)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동아시인들은 하늘의 명을 아는 것과 동시에, 나를 둘러싼 환경을 변화시키려는 인간의 도덕적 노력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이런 면에서 유교는 결정론과 자유 간의 조화를 추구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마찬가지로 서양문명에서도 이러한 점들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특별히, 서양문명의 기초라 할 수 있는 그리스도교 신학에선 이것은 신의 섭리와 인간의 자유의지 그리고 구원에 대한 문제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신학자들은 이것에 대하여 양극단의 주장을 펴고 있습니다. 예컨대, 어거스틴(Augustine)과 칼빈(Calvin)은 결정론적인 관점입니다. 어거스틴은 인간이 원죄로 인해 타락하였기 때문에 인간은 자력으로 구원에 도달할 수 없으며, 오직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습니다. 더 나아가 종교개혁 시기 칼빈은 어거스틴보다 더 극단적인 결정론을 주장했습니다. 그것은 창조 이전에 하느님은 어떤 사람은 생명의 구원으로, 어떤 사람은 죽음의 파멸로 결정해 놓으셨다는 ‘이중 예정론’을 주장함으로써 인간의 자유의지를 최소화하였습니다. 이러한 결정론적 구원론에 대척점이 입장으로 대표적인 인물이 펠라기우스(Pelagius)입니다. 그는 인간이 스스로 선을 행하고 구원에 이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느님의 은총이 필수적이지 않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이러한 펠라기우스 입장을 이단으로 배척했습니다. 그 대신에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는 신의 예정과 인간의 자유의지가 서로 협력하여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중용적 관점을 제시했습니다. 오늘날 천주교나 성공회에서는 어거스틴이 주장하는 하느님 은총의 우선성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하느님 은총과 인간의 자유의지 간의 협력도 필요하다고 보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중용적 입장도 수용하고 있습니다.
이상과 같이 ‘운명’에 대한 동서양의 다양한 관점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면 성서에서는 이것에 대하여 어떻게 기술하고 있나요? 저는 앞서 소개해 드린 이론과 신학적 진술이 아닌 오늘 복음에서 들은 가나안 혼인잔치에서 일어난 포도주 기적 이야기를 통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저는 아드님 예수와 어머니 마리아가 나눈 대화에 눈길이 갔습니다. 어머니가 잔칫집에 포도주가 떨어진 난감한 상황을 아들에게 이야기합니다. 그러자 아드님이 “어머니, 그것이 저에게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러십니까? 아직 제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요한 2:4)”라고 대답합니다. 즉, 이것이 저나 어머니에게 무슨 상관이 있냐는 뜻입니다. 아들 예수는 자신이 처음으로 활약할 곳이 잔칫집에서 술(酒) 기적을 하는 것이 별로 내키지 않은 듯합니다. 어쩌면 평소에 생각하시던 사역과는 달라서 아직 제 때가 오지 않았다고 하신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달리 말하면, 성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사명, 즉 구원예정에는 이러한 술 기적이 포함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어머니는 아들을 믿고 일하는 사람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요한 2:5)”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어머니에게 ‘등 떠밀린(!)’ 아들은 애초 계획과 달리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첫 기적을 행합니다.
저는 이 장면을 관상하며 어머니와 아들 간의 아웅다웅하는 모습이 참 정겹게 느껴졌습니다. 동시에 모자(母子) 간의 신뢰와 서로에 대한 이해가 참으로 깊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의 성품을 잘 알고, 아들 역시 어머니의 마음을 잘 알기에 예수님은 애초에 생각한 자신의 계획을 바꿔서 물을 술로 바꾸는 첫 기적을 합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어머니 마리아와 아들 예수 간의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인간과 하느님 간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선한 예정도 인간이 간절히 원하면 변화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가나안 혼인잔치에서 일어난 첫 기적은 이점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이라 하겠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주도권을 갖고서 처음부터 예정하신 것이라기 보다는, 성모 마리아로 상징되는 인간이 느낀 이웃의 곤경에 대한 깊은 공감과 기도, 그리고 하느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가 있었기에 하느님의 마음을 움직였고, 마침내 하느님의 계획을 변경시킨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리하여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거기에는 ‘하느님이 먼저여야 한다, 아니다, 인간이 먼저여야 한다’하는 양자택일이 무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이분법을 극복할 수 있게 하는 요소는 무엇인가요?
첫째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 현장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그 현장은 혼인 잔치입니다. 그것도 인륜지대사인 혼인잔치에 준비한 술이 동이 난 난처한 상황입니다. 이 상황이 수습되지 않는다면 혼인잔치 분위기는 엉망이 될 것이고, 동네사람들에게 그 집안은 두고두고 손가락질 받을 것입니다. 참으로 난처한 상황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우리 인생에 대입해 보자면, 우리는 살면서 이런저런 일을 겪습니다. 어떤 때는 순조롭게 진행되다가 갑자기 반전이 되어 역경을 맞이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걸 벗어나기 위해 노력을 하기도 하지만, 때론 어찌할 바 몰라서 당황하게 되고, 신앙인들은 하느님의 도움을 간구합니다. 그 상황에서 하느님이 먼저냐, 내가 먼저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거기에서 나의 노력과 하느님의 도우심이 동시에 일어납니다. 오늘 혼인잔치의 기적처럼 말입니다.
둘째는, 그 현장에 대처하는 우리의 마음과 태도입니다. 특별히 성모 마리아의 모습은 우리들에게 중요한 통찰을 줍니다. 우선적으로 그녀는 통찰력과 공감능력이 뛰어났습니다. 마리아는 단지 그 잔치에 손님으로 참석해서 수동적으로 있지 않았습니다. 그 잔치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사람들은 어떠한지 등을 세심하게 관찰했습니다. 그러한 세심함이 있었던 것은 그녀가 혼인잔치를 치루는 그 사람들에 대한 깊은 애정과 공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러한 사랑의 마음이 없었다면, 그렇게까지 세심하게 보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잔칫집 주인을 대신해서 막무가내로 참견하진 않았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이 닥치자 그녀는 해결하기 위하여 팔을 걷어붙였습니다. 그리고 아들 예수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리고 나서 아들보다 더 과감히 실행합니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평소에 아들에 대한 깊은 이해와 신뢰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러한 마음과 태도를 갖추기 위해선 성모 마리아처럼 믿음과 사랑에 기반한 기도와 실천이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평소에 주님에 대한 깊은 이해와 신뢰를 쌓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바탕 속에서 우리가 살면서 만나는 일들, 특별히 나만의 일이 아닌 우리의 일, 이웃의 일에 공감하고 기도할 때 주님은 우리의 청을 들어주시고 함께 해 주실 것입니다. 아들 예수께서 어머니 마리아의 일에 함께 해 주신 것처럼 말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일상에서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것이 크던 작던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기적은 하느님과 인간이 함께 한 ‘창조’이기 때문입니다. 그 때 구원은 성취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느님 나라 기쁨을 미리 맛봅니다. 오늘 복음에서 들은 가나안 혼인잔치의 기쁨처럼 말입니다.
2025년 새해를 시작하면서 성모 마리아처럼 하느님의 마음을 움직이고, 하느님의 구원을 실현시킬 수 있는 기쁜 해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