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연의 불꽃-문인수의 시 세계
오형엽(문학평론가. 수원대 국문과 교수)
문인수의 시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서정 본연의 모습이다. 문인수의 시선은 풍경과 마음이 상호 교섭하는 순간을 주시한다. 이때 그가 포착하는 것은 생의 깊이와 밀도인데, 문인수 시의 서정은 이 생의 깊이와 밀도를 끌어안으며 침묵 속으로 가라앉힐 때 생겨난다. 기나긴 시간의 흐름 속에 누적된 고통과 방황은 이 서정의 깊이와 밀도, 그리고 침묵의 심연 속에서 인고의 정신과 서로 버팅기고 팽팽한 긴장을 형성하고 있다.
동강 높이 새 한 마리 떴다.
저, 마음에 뚫린 구멍 꼭 그만하다.
산의 뿌리가 다 만져진다.
단 일획 깊이 여러 굽이 새파랗게 일자무식의 백 리 긴 편지를 쓴다. -「동강의 높은 새」전문
「동강의 높은 새」는 문인수 시의 전체적 의미구조를 응축하여 보여준다. 1연의 “동강 높이 새 한 마리 떴다.” 라는 짧은 한 문장은 마치 동양화의 큰 화폭에 점 하나를 찍음으로써 전체적 구도를 잡는 듯한 효과를 낳는다. 즉 ‘땅-하늘’의 이원적 구도 속에 ‘새-강’을 단번에 제시하는 것이다. 2연은 이 자연의 거대한 풍경을 시적 자아의 마음으로 치환한다. “저,”는 풍경에 개입하는 자아의 마음이 그리는 흔적이자 궤적이다. 이 흔한 궤적은 쉼표의 순간 만큼 찰나의 움직임이다. 그리하여 “마음에 뚫린 구멍 꼭 그만하다.” 라는 문장은 ‘새’의 ‘존재’를 ‘마음’의 ‘구멍’과 겹쳐놓음으로써 풍경에 투영된 자아의 적막을 사진처럼 인화한다.
1연과 2연이 ‘하늘’의 풍경이라면, 3연과 4연은 ‘땅’의 풍경이다. “산의 뿌리”까지 다 만지는 것은 “동강”의 깊은 물일 것이다. 4연의 “단 일 획의 깊이”는 이 강의 깊이를 말해주지만, “백리 긴 편지를 쓴다”는 그 길이를 보여준다. 동강의 물은 “단 일 획”으로 깊이 그리고 멀리 흐른다. 여기서 “일자무식”과 “편지를 쓴다”의 모순어법은 의미심장하다. “편지를 쓴다”는 굵고 깊고 길게 흐르는 동강의 모습이자 문인수 시의 모습일 것이다. 그러면 왜 “일자무식”인가? 유식과 박식과 물들어 있는 언어의 질곡과 가식과 포즈로부터 벗어나서 살아있는 생 그대로를 드러내는 것이 동강의 모습이며 문인수 시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4연의 “새파랗게”는 이처럼 가식없는 원초적 생의 색깔일 것이다. 더 나아가 이 시가 지닌 여백과 침묵은 바로 이처럼 형언 불가능한 생의 순연함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자 하는 방식일 것이다.
이 시에서 우리가 다시 한번 상기하는 것은 “하늘-땅”의 이원적 구도 속에 자라잡고 있는 ‘구멍-뿌리’의 의미망이다. 전반부가 ‘하늘’에 떠 있는 ‘새’를 ‘마음’의 ‘구멍’과 병치함으로써 그 적막을 형상화한다면, 후반부는 ‘산’의 ‘뿌리’와 ‘강’의 ‘깊이 및 길이’를 ‘시인’의 ‘시’와 병치함으로써 생의 원형질을 형상화하고 있다. 이처럼 자연과 자아, 풍경과 마음을 상호 침투시키며 중첩하는 순간에 포착되는 생의 적막과 심연으로부터 문인수 시의 서정은 깊이와 밀도를 획득한다. 문인수 시의 근저에 자리 잡고 있는 슬픔의 세계는 이 생이 적막과 심연으로부터 기인하는 듯이 보인다.
말 걸지 말아라.
나무의 큰 키는 하늘 높이 사무쳐 오르다가 돌아오고 땅 속 깊이 뻗혀 내려가다가 돌아온다. 나갈 곳 없는 나무의 중심은 예민하겠다. 도화선 같겠다. 무수한 이파리들도 터질 듯 막 고요하다.
누가 만 리 밖에서 또 젖고 있느냐
비 섞어, 서서히 바람 불고
나무의 팽팽한 긴 외로움의 끝에 와서 덜컥, 덜컥, 걸린다. 슬픔은 물로 된 불인 것 같다. 저 나무 송두리째 저 나무 비바람 속에서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른다.
나무는 폭발한다. -「슬픔은 물로 된 불인 것 같다」전문
이 시는 ‘나무’의 형상을 통해 ‘하늘-땅’의 이원적 구도를 함축하고 있다. “하늘 높이 사무쳐 오르다가 돌아오고/ 땅 속 깊이 뻗혀 내려가다가 돌아”오는 “나무의 큰 키”는 시인 자신의 모습이다. 하늘의 높이와 땅 속의 깊이를 동시에 추구하는 이 나무는 그 돌아옴이 가져오는 하강과 상승의 충돌로 인해 “예민”한 중심을 갖는다. 이 충돌이 가져오는 막 터질 듯 고요한 도화선이 바로 문인수의 시이다. 1연의 “말 걸지 말아라”는 이 도화선 같은 침묵의 세계가 운명을 건 일종의 투쟁임을 암시하고 있다.
이 운명의 “긴 외로움”과 “슬픔”에 사로잡혀 있다. “젖고”와 “비바람”이 가중시키는 이 슬픔의 세계는 그러나 “나무의 팽팽한” 가지 끝에 와서 “덜컥,/ 덜컥, 거린다.” 슬픔의 세계와 맞닿아 있는 ‘물’의 이미지는 도화선 같이 팽팽하고 예민한 나무의 중심에 부딪혀 ‘불꽃’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무는 비바람 속에서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른다. “슬픔은 물로 된 불인 것 같다.” 라는 한 문장은 이 시를 지탱하는 지렛대 역할을 하면서, ‘물-불’의 이원성을 통합하고 있는 ‘슬픔’이 나무의 심연에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우리는 문인수가 지닌 ‘하늘-땅’의 이원적 구도가 ‘상승-하강’, ‘물-불’ 등의 이원성을 파생시키며 더 복합적인 의미구조를 형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문인수 시가 지닌 ‘하늘-땅’, ‘상승-하강’, ‘물-불’ 등의 이원성은 하나의 생명 속에서 충돌하며 강력한 소용돌이를 발생시킨다. 이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가 문인수를 정처없이 떠도는 방랑길로 내모는 듯이 보인다.
흐린 봄날 정선 간다. 처음 길이어서 길이 어둡다.
노룻재 넛재 싸릿재 넘으며 굽이굽이 막힐 듯 막힐 것 같은 길 끝에 길이 나와서 또 길을 땡긴다.
내 마음 속으로 가는가
뒤돌아 보면 검게 닫히는 산, 첩, 첩,
비가 올라나 눈이 오겠다 -「정선 가는 길」전문
흐린 봄날 정선 가는 길은 어둡다. 재를 넘으며 가는 길 위에서 길은 그 끝에서 다시 길을 당기며 이어지고, 뒤돌아보면 첩첩한 산중에 검은 어둠이 가로막고 있다. 이 길은 시인의 마음의 길이다. 여기서 정선은 굳이 정선이 아니라 영월일 수도 동강일 수도 우포늪일 수도 있다. 정처 없이 가야 하는 길 위에서 길은 마음을 당기고 마음은 길을 당긴다. 어둡고 적막한 마음의 길 위에 비가 오거나 눈이 온다. 문인수 시에서 ‘물’에 ‘젖음’은 단지 곤고하고 누추한 몸과 마음의 상태만을 비유하는 것은 아니다. 「동강의 높은 새」에서 동강의 깊이가 산의 뿌리를 만지고 새파랗게 일자무식의 긴 편지를 쓰듯, ‘젖음’을 통해서만 생의 심연에 닿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문인수 시의 근저에 자리 잡고 있는 슬픔의 세계는 전통적 한(恨)이 지닌 수동적 운명의 모습이 아니라, 몸과 마음의 근원적 자리로 침잠하여 그 심연에서 불꽃을 피워 올리려는 능동적 운명의 모습을 띤다. 운명의 뿌리를 탐사하려는 문인수의 촉수에 감지되는 것은 아버지와 어머니라는 육친의 끈이다.
그의 상가엘 다녀왔습니다. 환갑을 지난 그가 아흔이 넘은 아버지를 안고 오줌을 뉜 이야기를 들었습니 다. 生의 여러 요긴한 동작들이 노구를 떠났으므로, 하지만 정신은 아직 초롱같았으 므로 노인께서 참 난감해 하실까봐 “아버지, 쉬, 쉬이, 어이쿠, 어이쿠, 시원허시것 다아” 농하듯 어리광부리듯 그렇게 오줌을 뉘였다고 합니다. 온 몸, 온 몸으로 사무쳐 들어가듯 아, 몸 갚아드리듯 그렇게 그가 아버지를 안고 있을 때 노인은 또 얼마나 더 작게, 더 가볍게 몸 움츠리려 애썼을까요. 툭, 툭, 끊기 는 오줌발, 그러나 그 길고 긴 뜨신 끈, 아들은 자꾸 안타까이 따에 붙들어 매려 했 을 것이고 아버지는 이제 힘겹게 마저 풀고 있었겠지요. 쉬, 쉬, 우주가 참 조용하였겠습니다. -「쉬」전문
시인은 아흔이 넘은 아버지를 안고 오줌을 누인 “그”의 이야기를 듣고, 그 장면을 연상하며 아버지와의 끈을 생각한다. “아, 몸 갚아드리듯”이라는 표현은 아버지로부터 받은 육신을 다시 아버지를 위해 되돌려 드리는, 인생의 깊은 의미를 드러낸다. 시인은 아버지가 누는 오줌발을 “길고 긴 뜨신 끈”으로 이해한다. 이 ‘끈’은 이승과의 끈인 동시에 아들과의 끈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오줌발의 길고 긴 끈을 안타깝게 붙들어 매려 하는 아들과 힘겹게 마저 풀고 있었을 아버지의 모습에는, 우주도 숨죽이며 지켜볼 정도로 눈물겨운 생의 근원적 비의가 담겨 있다. “농하듯 어리광 부리듯” 말하고 있는 시인의 어조에는 “물두레/줄, 흰 광목줄// 끝의 //아버지//......//뻐꾹뻐꾹 퍼 올리는,/ 치밀어 오르는 봄, 봄......”(「하관」)에서 보듯 숨이 끊어질 듯 비장한 생의 체험과 인식이 숨어 있는 것이다. 그러면 심연의 뿌리 끝에서 만나는 어머니의 모습은 어떠한가?
나는 그동안 답답해서 먼 산을 보았다. 어머니는 내 양손에다가 실타래의 한 쪽씩을 걸고 그걸 또 당신 쪽으로 마저 다 감았을 때 나는 鳶이 되어 하늘을 날았다.
밤 깊어 더 낯선 객지에서 젖는 내 여윈 몸이 보인다.
길게 풀리면서 오래 감기는 빗소리. -「실」전문
어머니와 나는 “실”로 연결되어 있다. 답답해서 먼 산을 보는 “나”는 어머니의 실타래에 감겨 하늘을 나는 연이 된다. 「동강의 높은 새」에서 하늘 높이 뜬 새가 마음에 뚫린 구멍으로 비유되듯, 그리고 「슬픔은 물로 된 불인 것 같다」에서 하늘 높이 사무쳐 오르다가 돌아오는 나무처럼, 연이 되어 하늘을 날았던 시인은 낯선 객지를 여윈 몸으로 떠돈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 “밤 깊어 더 낯선 객지에서 젖는 내 여윈 몸”은 정처 없는 방황과 곤고한 삶의 여정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젖어서 여위어야 몸이 보이기 때문이다. “길게 풀리면서 오래 감기는 빗소리”에서 보듯, 빗소리에 젖어들 때 생의 심연에 자리 잡고 있는 어머니와의 끈이 만져지는 것이다.
허리까지 물에 들어간 왕버들 여러 그루 다 다 늙도록, 썩어 자빠지도록 나오지 않고 있다. 눈보라, 비바람의 세월을 뚜벅뚜벅 걸어 여기 당도한 보폭이겠다. 그 악산 늠름한 전모가 물에 비쳐 온전하지만 가파르다, 사납다라는 아버지에 대 한 기억까지도 물오리 한 마리를 풀어 금세 다 지우시는 어머니, 이승에 홀로 남아 깊으시다. 잘 섞였으므로, 사랑이란 말조차 이 일대의 바닥없는 고요를 이루는데 금세, 물에 녹아 풀릴 것처럼 한 사내가 카메라를 자동셔트로 맞춰 세운 뒤 애인 속으로 거침없이 걸어 들어가고 있다. -「주산지」전문
“주산지”의 물에 허리까지 들어간 왕버들이 늙어서 썩어지도록 살고 있다. 이 “주산지”의 ‘물’은 “눈보라, 비바람”과 더불어 “물”의 이미지로 연결되면서 “세월”의 고난과 풍파를 말해준다. 그러나 그 세월을 “뚜벅뚜벅 걸어 여기 당도한 보폭”에는 인고의 정신이 스며들어 있다. 이 인고의 정신은 물에 비친 악산의 가파르고 사나움을 물오리 한 마리를 풀어 지우시는 어머니로부터 기인한다. “사납다라는 아버지의 기억까지도” “금세 다 지우시는” 어머니는, 가파르고 사나운 남성성의 세계를 물오리 한 마리처럼 지우고 섞여서 바닥없는 고요를 이루는 일이 곧 사랑일 것이다. “애인 속으로 거침없이 걸어 들어가고 있” “사내”처럼, 주체와 대상이 섞이고 풍경과 마음이 겹치는 자리에서 문인수의 시는 사랑을 배운다.
저 만월, 만개한 침묵이다. 소리가 나지 않는 먼 어머니, 그리고 아무런 내용도 적혀있지 않지만 고금의 베스트 셀러 아닐까 덩어리째 유정한 말씀이다. 만면 환하게 젖어 통하는 달, 북이어서 그 변두리가 한없이 번지는데 괴로워라, 비수댄 듯 암흑의 밑이 투둑, 타개져 천천히 붉게 머리 내밀 때까지 억눌러라, 오래 걸려 낳아놓은 대답이 두둥실 만월이다. -「달북」전문
고통과 방황을 견디는 인고의 정신과 생의 적막과 심연을 끌어안는 사랑을 통해 문인수의 시는 “어머니”와 “달”이 한 몸으로 결합된 “만월”을 잉태한다. “만월”은 “만개한 침묵”이며 “소리가 나지 않는 먼 어머니”이다. 이 만월은 “환하게 젖어 통” 하므로 “북”처럼 “그 변두리가 한없이 번”진다. 소리가 나지 않는 소리로 북처럼 울려 퍼지는 이 달무리의 흔적은 “괴로워하”면서도 “억눌러”서 오래 축적해온 시인의 대답이다. 두둥실 떠올라 북처럼 울리는 이 ‘달북’처럼 문인수의 시는 침묵 속에 가라앉힌 서정의 깊이와 밀도를 통해 우리에게 길고 오래 가는 울림을 전해준다. “비수 댄 듯/ 암흑의 밑이 투둑, 타개져/ 천천히 붉게 머리 내” 미는 것은 검은 심연 속에서 그 어둠을 뚫고 솟아나는 시의 불꽃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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