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다리 아저씨
소한을 지나는 바람이 우는 소리를 낸다. 치우다 남은 낙옆 몇 닢이 하늘로 솟구쳤다가 보도로 나뒹군다. 꽁꽁 창을 닫은 검정색 승용차가 “쌩-” 지나간다. 낙옆은 보도 위에도 머물지 못하고 찢겨져 이내 도로 한 구석으로 굴러가 멈춘다. 다시 그 위로 부는 바람이 매섭다.
초등학교 시절, 7척 거구의 키다리 아저씨가 있었다. 인물은 잘 생겼지만 정신이 나간 걸인이었다. 근동의 초상집과 잔칫집에는 어김없이 삿갓을 쓰고 헤진 두루마기를 입은 키다리가 초대받지 않은 손님으로 왔었다. 아이들은 그에게 돌을 던지고 막대기로 찌르며 조롱을 하였다. 그는 그냥 달아날 뿐 아이들에게 달려들지 않았다. 어떤 이들은 키다리가 장군이 되려다 못되어 돌아버린 사람이라고 했고, 어떤 이들은 아름다운 아내가 바람이 나서 돌아버린 것이라고 했다. 큰 바윗돌을 번쩍번쩍 드는 천하장사라 하기도 했고, 공부를 너무 많이 해서 정신이 이상해진 것이라 하기도 했다. 나는 한 번도 키다리 아저씨가 힘을 쓰거나 글을 쓰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는 늘 말이 없었고 아이들이 괴롭히면 달아나기만 하였다. 여름에는 얇은 무명바지를, 겨울에는 두터운 솜바지를 입고 있었다. 동냥 와서도 밥을 달라거나 곡식을 달라는 말을 하지 않고 대문 앞에서 서 있기만 하였다. 말이 없어도 사람들은 키다리에게 먹을 것을 주거나 곡식을 주었다. 키다리가 밥을 끓여먹는 곳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그가 정말 정신이 나간 사람인지 궁금하여 유심히 살피기도 했는데 그는 가난한 집 대문 앞에는 결코 서질 않았다. 벙어리도 아니었다.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고, 어디서 잘 것인가에 대해서 아무런 의욕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그냥 바람 같은 사람이었다.
어린 시절, 내 고향을 배회하던 키다리가 어디로 갔는지는 누구도 모른다. 살아 있다면 팔십이 다되어가는 노인이 되었겠지만 세상에 미련 없는 분이 아직까지 살아 있을 리가 없을 것이다. 바람으로 흩날려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키다리가 타고난 재주를 발휘하지 못하고 걸인이 되어 떠도는 것을 가련하게 여겨 일을 시켜 보려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부잣집 행랑채에 머슴으로 머물렀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왜 키다리는 그 잘난 인물에도 불구하고 걸인의 길을 택했을까? 아무것도 추구하는 것이 없는 사람, 무슨 일에도 괘념치 않는 사람, 그 사람은 정신이 나간 사람일까 아니면 달관한 사람일까?
성북행 열차가 들어왔다. 나는 지금 서울역에 내려 딸아이가 공부하고 있는 아파트로 가고 있는 중이다. 사람들이 뛰어 간다. 뛰는 사람들은 호호 불며 군고구마라도 나눠 먹을 수 있는 따스한 집이 있으리라. 열차가 출발하는데 골판지 박스를 뒤집어쓰고 차가운 지하철의 바닥에서 웅크리고 있는 사람이 보인다. 돌아 갈 곳이 없는 사람, 사랑할 대상을 잃어버린 사람, 꿈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거기에 있었다. 키다리 아저씨가 차장에 스친다. 아파트 입구 응달의 목련나무에는 마른 잎들이 붙어 잎눈을 꼭 감싸 안고 있다. 낙엽마저도 보호할 대상이 있으니까 떨어지지 못하고 버티는 것이다. 사랑할 대상을 잃으면 삶의 의욕도 없어지는 것, 노숙자를 일으켜 세우는 길은 저들에게 사랑할 대상을 찾아주는 일일 것이다.
어두운 밤길을 돌아오는 아이의 볼이 발갛게 얼어 있다. 반가워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준다. 바깥에서 떨고 있을 생명들이 불쌍해진다. 오늘처럼 추운 날은 물에 젖어 언 바지를 입고 검불나는 들판을 휘적휘적 걸어가던 키다리의 뒷모습이 자꾸 어른거린다. 바람이라도 멈춰주었으면-. 포도에 뒹구는 것은 낙엽의 길이 아니다.(졸저 꼴찌로 달리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