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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6. 묵상글 ( 연중 제15주일. - 마음이 정해지면 머리와 몸은 봉사한다. 등 )
*** 06:30, 2번째 김찬선 신부님 묵상글 추가. 18:05, 키엣대주교님 묵상글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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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6. 연중 제15주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마음이 정해지면 머리와 몸은 봉사한다
살다 보면 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 사람들은 어떠한 것을 판단해놓고 그 판단이 옳다고 고집을 부립니다.
이런 경우를 오늘 복음에서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은” 마음이 무딘 사람입니다.
이들 마음 안에 아무리 진리의 씨를 뿌려도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우리도 이렇게 눈멀고 귀먹은 사람이 되지 않으려면 한 가지를 깨달아야 하는데, 우리 안에 증거 자체 조작 기능이 내재하여 있다는 사실입니다.
누구든 자신의 주장을 확증해줄 근거를 찾는데 그 근거는 사실 그들 주장을 조작해 줄 도구밖에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증거가 믿음을 바꾸지 못하고, 오히려 믿음이 증거를 조작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믿어야 보이는 것이지, 보인다고 믿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결정하면 머리는 따라줄 뿐입니다.
2004년 5월 미국 FBI 요원들이 들이닥쳐 변호사이자 미군 전직 장교였던 ‘브랜던 메이필드’를 마드리드 폭탄테러 용의자로 체포하였습니다.
그해 3월 11일 192명이 사망하고 2천 명이 다친 끔찍한 마드리드 공격에 연루되었다는 혐의였습니다.
그는 미국인이지만 이슬람으로 전향했고 이집트 여성과 결혼한 상태였기 때문에 FBI에 계속 감시를 당하던 중이었습니다.
FBI는 마드리드 현장에서 폭발물이 담긴 파란색 쇼핑백을 발견하였는데 거기서 메이필드의 지문이 나온 것입니다.
FBI는 그 지문이 100% 일치한다고 주장을 했고 그것이 틀릴 가능성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자신의 지문이 미국과 대서양을 가로질러 8700㎞ 떨어진 곳에서 발견될 수 있었을까요?
그런데 바로 그날 아침, 스페인 경찰청이 폭탄 공격과 관련 있는 인물로 알제리 남성 ‘우나네 다우드’를 체포하였습니다.
메이필드보다 그의 지문이 FBI가 무시했던 애매한 영역을 포함한 검지 지문에 더 잘 맞을 뿐 아니라 그의 엄지 지문도 쇼핑백에서 발견된 지문과 일치했던 것입니다.
메이필드는 다음 날 풀려났고 FBI는 굴욕적인 사과를 공개적으로 해야 했습니다.
물론 200만 달러의 피해보상금을 지급해야 했습니다.
당시 미국은 2001년 911테러로 공포에 휩싸여 있어 아랍인들에게 대한 편견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전문가들의 판단을 맹신하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미국 최고 지문 감식반의 판단이 틀릴 리가 없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참조: ‘지능의 함정’, 데이브드 롭슨, 유튜브 채널 ‘책한민국’]
사람들은 증거가 믿음을 만든다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사실 믿음이 증거를 조작하게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기적을 요구하는 세대를 비판하신 것입니다.
눈과 귀를 막아놓고 보고 듣겠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똑똑한 전문가들도 자기 생각이 옳다고 믿어버리면 눈이 감기고 귀가 막혀 남의 말을 듣지 않으려 하고 뻔히 보이는 것도 보지 않으려 합니다.
이런 경우는 세상 사람들이 똑똑하다고 인정해주는 전문가들에게 더욱 자주 일어납니다.
1920년대에 미국 심리학회 회장이었던 ‘루이스 터먼’이라는 유명한 학자입니다.
그도 자신의 편견을 배열하며 과학이라 믿었습니다.
그는 IQ가 삶과 직결되고 IQ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각 학급에서 IQ가 140 이상인 아이들을 골라내어 그 아이들의 인생을 수십 년 동안 수집하였습니다.
결과는 어땠을까요? 차이가 없었습니다.
IQ가 높은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아주 조금 좋은 성과를 내는 이들이 있었지만, 그 이유는 그 실험을 하며 터먼이 그들에게 특별한 지원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실험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머리가 좋은 아이들에게만 특별한 지원까지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자기 집 식구들의 IQ를 재서 지능이 높은 순서대로 식탁에 앉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믿음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있으면 화를 내었다고 합니다.
데이브드 롭슨의 ‘지능의 함정’이란 책에서는 이런 사례가 아인슈타인, 에디슨, 스티브 잡스 등 모든 고집불통인 뛰어난 천재들에게 나타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고집은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그 고집은 한마디로 하면 ‘교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믿는 마음이 교만입니다.
자신을 믿는다는 말은 자신의 힘으로 ‘진리’에 다다를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진리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진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오히려 진리와 반대되는 자아가 있습니다.
그 자아를 믿으면 진리에서 멀어집니다.
그 자아에 대한 믿음이 강할수록 주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 약해집니다.
뱀이 하와를 그렇게 만들어 하느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게 하였습니다.
나의 눈을 가리고 나의 귀를 막는 것이 내 자신임을 알지 못하면 이 교만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됩니다.
이런 상태가 길바닥에 씨가 떨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그 씨를 먹는 까마귀가 창세기의 뱀이요, 탈출기의 파라오요, 우리가 버려야 하는 자아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 자아에게서 벗어나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길이 되지 않으려면 겸손하면 되고, 돌밭이 되지 않으려면 절제하면 되며, 가시밭이 되지 않으려면 청빈하면 됩니다.
겸손과 절제와 청빈을 ‘복음삼덕’이라고 합니다.
복음삼덕은 세속-육신-마귀를 이기는 무기입니다.
나 자신 안에서 끓어오르는 교만과 육체적인 욕구와 재물에 대한 탐욕만 줄여가면 자아가 죽고 눈이 열리고 귀가 열립니다.
그러면 진리의 말씀이 내 안에서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농부가 뿌리는 말씀의 씨는 비유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비유로 우리 마음에 떨어집니다.
그렇지만 교만과 육욕과 탐욕은 그 비유를 이해할 수 없게 우리 감각을 마비시킵니다.
남을 판단하는 것을 멈춥시다.
그러면 교만이 줄어들 것입니다.
육체의 욕망을 절제합시다.
그리고 십일조를 내봅시다.
그러면 눈이 열려 비유를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인터넷의 어두운 소굴로 과감히 발을 들여놓으면 케리(Kery)라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세상의 질서를 바꿀 해안을 가졌다고 자신을 소개합니다.
그는 캘리포니아 나바로 강 근처에서 몸에서 빛이 나는 너구리같이 생긴 물체를 만나 외계인에 납치되었었다고 말합니다.
그는 점성술을 절대적으로 믿고 에이즈 바이러스나 오존층에 구멍이 뚫렸다는 믿음은 다 가짜라고 주장합니다.
케리가 정신이상자처럼 보입니까?
케리 멀리스는 노벨상을 받은 과학자입니다.
다만 자신 안에 자신을 바보로 만드는 자아가 있고 그 자아를 믿으면 바보가 된다는 사실을 몰랐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너무 비참합니다.
진리와 반대되는 자아의 주장이 자신 안에 있음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것을 모른 상태로 하는 과학적 연구는 모두 자체 증거 조작 기능에 당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눈멀고 귀먹은 마음이 무딘 백성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마음이 결정하면 머리는 따라줄 뿐입니다.
또 눈과 귀는 머리가 찾는 것만을 보고 듣게 됩니다.
그래서 이미 완고해진 마음은 외부의 것들로 바꿀 수 없게 됩니다.
완고한 마음을 버리려면 내가 아닌 주님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나를 믿어서는 안 됩니다.
내 안에 뿌려지는 말씀이 진리이고 나는 그 진리를 열매 맺게 하는 좋은 밭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알 때 눈이 열리고 귀가 열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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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오늘 복음은 씨뿌리는 농부의 비유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의 깊게 보고자 하시는 말씀은
이 비유를 말씀하신 후 군중들에게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라고 하신 이유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는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귀’가 당신의 비유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 말씀은 모두 하나의 ‘비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마태 13,34 참조).
예수님은 “내가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십니다.
이해하기 쉬워지라고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마태 13,13 참조).
예를 들어 꿀이 없는 세상에 꿀을 맛본 사람이 있다면 그 꿀맛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어…. 꿀은…. 마치 꽃처럼 향기롭고, 태양처럼 따사롭고, 사탕처럼 달곰하며, 엄마 품처럼 포근한 맛이 납니다.”
비유는 이렇듯 이미 다른 차원의 것을 경험한 사람이 자신의 체험까지 오게 만들기 위한 수단입니다.
마치 원시인처럼 살아가는 어떤 섬에 그들이 문명의 세계로 나아올 수 있도록 놓아주는 다리와 같습니다.
이것이 말씀이고 비유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들을 귀가 필요합니다.
자신들의 세상보다 그 다리를 건너는 것이 더 유익함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 다리를 건너게 됩니다.
그렇다면 다리를 건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말씀을 해석하려 들지 말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한 아버지가 임종을 앞두고 가진 재산을 다 팔아 아무 쓸모 없는 황무지와 같은 땅을 샀습니다.
그리고 게으른 두 아들에게 엄청난 크기의 땅을 반씩 나누어 주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들이 받은 땅속엔 내가 공평하게 나누어 묻어 둔 나의 모든 유산이 있단다.
그것을 찾아내어 행복하게 살아라.”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두 아들은 보물을 찾기 위해 각자의 땅을 열심히 팠습니다.
하지만 보물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첫째는 고된 노동 끝에 아버지에게 속았다며 분노를 터뜨렸습니다.
그는 땅을 헐값에 팔아 방탕하게 소진하였습니다. 결국 병에 걸려 외롭게 죽어갔습니다.
둘째는 달랐습니다.
역시 보물을 발견할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땅을 파다가 밭의 돌을 다 걷어 낼 수 있었습니다.
거기에다 씨앗을 뿌리니 엄청난 수확을 거둬들일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비록 황무지이지만 비옥한 땅을 알아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둘째는 돈도 많이 벌었고 행복한 가정도 꾸렸습니다.
왜 아버지의 말에 대한 두 아들의 생각이 달랐을까요?
첫째는 비유 말씀을 해석하려 들었고 둘째는 비유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어떤 말씀을 해석하거나 분석하려는 시도는 내가 그 말씀을 한 분 위에 선다는 뜻입니다.
더 똑똑한 사람이 덜 똑똑한 사람의 말을 분석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들을 귀가 있고 없고의 차이입니다.
말씀을 분석하고 해석하려는 이들은 자아를 긍정하는 사람들입니다.
자아는 뱀입니다.
뱀을 긍정하는 사람들은 뱀이 요구하는 ‘가져라’, ‘먹어라’, ‘높아져라’라는 명령이 행복이라 믿습니다.
그래서 그것과 반대되는 하느님의 요구는 들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마치 무덤에 묻힌 라자로에게 “이리 나와라!”(요한 11,43)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이
문밖에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길과 같은 사람은 자아를 긍정하기 때문에 그 말씀을 아예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돌밭과 같은 사람은 들었다가도 금방 잊어버립니다.
가시밭과 같은 사람은 돈 걱정 때문에 결국엔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됩니다.
어린이와 같은 사람만이 부모님 말씀에 순종할 줄 압니다.
그 말씀만이 자신을 어른으로 성장시켜 줄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믿기 때문에 부모의 말을 분석하기보다는 순종합니다.
우리는 무엇으로 주님 말씀에 순종할 준비가 되었음을 증명할 수 있을까요?
‘십일조 봉헌’이 신앙인으로서 들을 귀가 있다는 첫 번째 증거가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에덴동산에서부터 명령하신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십일조를 봉헌하면 가시밭과 같이 될 일은 없습니다.
유다 이스카리옷은 주님의 가시밭이었기 때문에 멸망하였습니다.
나무토막에 계속 불을 지피면 그 안에 있든 물이 빠져나옵니다.
마찬가지로 자신 내면의 안 좋은 욕구들을 솎아내기를 원치 않으면 아무리 성령의 불이 내리더라도
그 사람 안에서는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말씀에 무조건 순종하려는 마음을 갖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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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6. 연중 제15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나의 말씀 밭은?
연중 제15주일 독서와 복음은 하느님 말씀과
그 말씀을 듣는 사람의 관계에 관한 얘기입니다.
그런데 이사야서 말씀은 하느님의 말씀은 반드시 열매를 맺는다고 하는데,
복음에서는 그 하느님 말씀이 땅에 따라 풍성히 열매 맺기도 하지만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도 있음을 비유적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이사야서 말씀과 복음 말씀은 서로 모순되는 셈입니다.
하느님 말씀은 당신 뜻을 다 이루신다는 말씀과
아무리 하느님 말이어도 우리 마음 밭이 나쁘면 열매 맺지 못한다는 말씀이
서로 모순을 이루는 셈인데 이것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모순을 느끼기보다 사랑을 느낌이 좋을 것입니다.
‘반드시’라는 말에서는 사랑의 의지를 느끼고
길이나 돌밭이나 가시덤불에도 떨어졌다는 비유에서는
인간을 가리지 않고 아낌없이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는 것입니다.
저라면 내 말이 헛된 말이 되지 않게 하려고
내 말을 알아들을 사람과 듣고는 내 말대로 실천할 사람에게만 말을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 입만 아플 것이기에 그런 사람에게는 아예 입을 다물 것입니다.
그런데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에게 똑같이 비를 주시는 하느님께서는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말씀을 건네심으로써
당신 사랑에서 아무도 배제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인간의 경우 말을 건네지 않는다는 것은
상종조차 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이런 인간에 비해 하느님의 사랑은 인간이 말을 건네기를 거부하는
사람에게도 말씀을 건네시는 것이니 아무 데나 씨를 뿌리시는 하느님의 행위는
어리석음이 아니라 아낌없이 주심이고 가리지 않고 주심의 표시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당신 뜻을 이루시고야 만다는 말씀의 뜻 또한 사랑의 의지입니다.
우리 인간이 들을 때까지 기다려주시겠다는 것이요,
인간이 듣지 않아도 당신 말씀을 거둬들이거나 포기하지 않으시겠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이러한데도 우리 인간의 마음 밭은
길이거나 돌밭이거나 가시덤불일 수도 있지요.
길이란 하느님 말씀이 씨도 먹히지 않는 경우입니다.
말씀을 냉대하는 경우요 전혀 이해치 못하는 경우요
받아들일 마음이 전혀 없는 경우입니다.
돌밭이란 돌이 섞여 있는 땅이란 뜻이니
받아들이긴 하지만, 깊이 뿌리내리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비유에서 씨란 하느님 나라에 관한 말씀이라고 했는데
하느님 나라에 관한 말씀이 솔깃하긴 했지만
하느님 나라를 이 세상에서 사는 데 있어 어려움이 생기면
그 말씀대로 사는 것을 포기해버리는 경우입니다.
가시덤불이란 근심과 걱정이 가시덤불처럼 많은 땅입니다.
그리고 근심과 걱정이란 말할 것도 없이 이 세상 근심 걱정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관한 말씀을 미사나 기도 때 듣지만
이내 이 세상 살아가는 근심 걱정에 뒤덮이는 경우입니다.
하느님께 기도하면 되는데 걱정하는 경우지요.
걱정이 기도를 뒤덮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분심으로 나타납니다.
어쨌거나 한 말씀으로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느님 말씀이
우리 인간에게서 좌절되는 세 가지 경우를 오늘 주님께서는 말씀하셨는데
나의 마음 밭은 어떤 상태인지 또 어쩔 것인지 돌아보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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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6. 연중 제15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은 연중 제15주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듣는 마태오 복음의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하늘나라에 관한 비유들로 이루어진 설교 말씀으로 이루어진 마태오 복음 13장에 들어 있는 내용 중의 한 부분입니다. 이 말씀은 농부,어부,상인들이 일상생활에서 만나고 겪게 되는 소박한 소재들로 이루어진 비유들로서 하늘나라의 특성을 드러냅니다. 하늘나라는 씨 뿌리는 사람이 넉넉하게 뿌리는 씨와 비슷하지만,좋은 땅에 떨어져 백 배,육십 배,삼십 배 열매를 맺는 것, 조그만 씨앗이 큰 나무로 자라나는 것이고,좋은 곡식과 잡초가 어울려 자라면서도 때가 될 때까지는 잡초를 뽑아내지 않는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누룩과도 같아서 반죽 속으로 사라지지만 그 안에서 부풀어 올라 빵이 되게 하고,귀한 진주와도 어떤 값으로든 그것을 사는 것이며,좋은 것들을 모두 담는 그물과도 같습니다. 어느 누구도 배제하지 않고 모두에게 열려 있는,하느님의 사랑이 완성되는 나라가 바로 하늘나라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구조적으로 복음서의 중심부에 위치한 이 비유들은,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11-12장에 대하여 다양한 설명을 제공하는 구실을 합니다. 씨 뿌리는사람의 비유와 그 해석(13,1-23)은 하늘 나라의 선포와 그 다양한 결과를 설명합니다.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 문이다”(13,13)는 구절은 “저 바깥 사람들이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여 저들이 돌아와 용서받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마르 4,11-12)는 마르코 복음의 역설적인 말씀을 쉽게 풀이한 것입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는 어떠한 시련과 갈등에도 아랑곳없이 하느님 나라의 복음이 사람들 가운데 확고하게 자리잡을 것이라고 믿으신 예수님의 신념이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비유란 본래 어려운 내용을 쉽게 풀어내기 위해 사용하는 법인데,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가 알아듣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는 주님의 말씀의 의미를 묵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말씀은 비유를 가리키는 히브리어(아크티프)와 아람어(마틀라)가 본래 ‘수수께끼’를 뜻하는 것임을 감안하면 쉽게 이해됩니다. 수수께끼는 그것을 애써 풀려는 노력이 없으면 그 답을 얻어낼 수 없습니다. 스무고개의 경우 처음 몇 고개는 힌트만 줄 뿐입니다. 본인이 끈질지게 물고 늘어지지 않으면 해답에까지 이를 수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신비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선문답의 화두처럼 예수님의 행적과 가르침을 보고 또 보고 듣고 또 듣다 보면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대한 설명은 예수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듣고 올바로 실천해야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깨닫게 된다는 교훈을 우리에게 전합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이미 받은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열매를 맺는 충실한 신앙에 강조점이 주어집니다. 비유에서처럼 신앙은 들음으로 시작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나 구원하는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은 일회적 결단이 아니라 시련을 극복하고 마침내 열매를 맺는 항구함과 인내를 요구합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백성이고 예수님의 참 가족이며 하늘나라를 지금 현세에서 사는 것입니다.
✝️ 일요일 성체의 날✝️
<세계 도처에 일어난 성체의 기적(마리아 헤젤러)>
몬카다(Moncada)의 성체기적
스페인 - 1392년
사제가 성찬전례의 말씀을 하고 난 후에 이네스는 오른손 엄지 손가락을 위로 쳐들어 올렸다.
“엄마, 저기 좀 봐요. 저기 신부님 오른손에 다시 아기 예수가 나타났어요. 와, 아름다워라! 바둥거리며 나를 보고 웃고 있어요.
엄마, 아기예수가 보이지 않아요?"
실제로 어린 이네스는 신부님이 영성체를 할 때에 그 아기예수가 사라지기 전까지 똑같은 기적을 두 번이나 체험하였다.
그리고 세 번째 미사성제에서도, 아이는 이 기적을 체험하는 똑같은 거룩한 은총을 받았다.
그 아이는 많은 신자들의 주의를 끌게 되었고, 미사가 끝난 후에 그들은 그녀에게 몰려와서 물어보았다. 기쁨에 가득찬 이네스는, 아기예수가 어떻게 보였으며 사람들을 어떻게 축복하였는지를 모두 이야기하였다.
이 놀라운 사건의 이야기는 곧 온 마을과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본당 신부도 이에 관해 듣고서는 이네스를 불러오라고 했다.
그녀는 어린아이답게 신부님의 질문에 대해 간단히 대답하였다.
그 아이는 그 상황을 인간의 관심에 맞춰 충분하게 설명한 것은 아니지만, 또 모순에 빠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 아이의 크고 순진한 눈에서, 그러고 그 소박한 대답에서는 알 수 없는 진실이 흘러나왔다.
본당 신부는 자신의 사제서품의 타당성과 또한 그 타당성으로 자신이 성찬의 전례를 위임받은 것을 확신하였으며, 미사 때 일어난 이 신기한 기적의 현상을 통해 사랑이 넘치는 주님의 가르침을 깊이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신중히 생각했고 그 현상을 쉽게 믿으려 하진 않았다. 매우 미섬쩍어 하면서도 침착하게 주님의 뜻을 생각하였다.(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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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페소 평화 관상 기도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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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6. 연중 제15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마태 13,16)
연중 15 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말씀이 있는 존재 이유’, 곧 ‘말씀이 왜 있는지’를 밝혀줍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이루기 위해서 있습니다. 곧 실현(성취)되기 위해서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표현으로는 열매 맺기 위해 있습니다.
<제1독서>에서는 이를 이렇게 말합니다.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리는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이사 55,11)
<제2독서>에서는 이러한 ‘말씀의 실현’을 모든 피조물이 탄식하며 기다립니다.
“피조물만이 아니라, 성령을 첫 열매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우리의 몸이 속량되기를 기다리며 속으로 탄식하고 있습니다.”(로마 8,23)
<복음>에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의 결론처럼 마지막 구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 13,8-9)
분명, 나에게도 말씀의 씨앗이 뿌려졌을 터인데, 지금 나에는 몇 배의 열매가 맺혀 있는가? 사실, 내가 몇 배의 열매를 맺고 있는가? 질문해보게 됩니다. 이는 나는 어떤 땅인가라는 질문이라기보다 어는 땅을 얼마나 일구고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사실 씨앗이 떨어질 때 좋은 땅 이었는가 보다도 씨앗이 뿌려지면, 그 땅은 그 씨앗으로 말미암아 좋아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땅은 씨앗과 함께 일구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좋은 땅의 사람은 땅을 지배하지 않고, 뿌려진 씨앗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밭에서 일할 줄 알며 하늘을 쳐다보고, 함께 땅의 노래를 부르는 사람입니다. 땅을 윽박지르지 않고 갈라놓거나 파헤치지 않으며, 땅을 매만지며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바로 씨앗을 품은 농심입니다. 곧 뿌려진 씨와 함께 열매를 맺어야 하는 소명을 짊어진 사람일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마음 안에 그분의 사랑, 그 씨앗이 뿌려졌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어느 누구에게도 사랑하기를 마다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왜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까?”(마태 13,10) 여쭈었고,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셨습니다.
“너희에게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마태 13,11)
이 말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먼저, “하늘나라”가 신비라는 사실입니다. 곧 “하늘나라”는 인간 스스로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열어 보여주시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나라라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이를 믿고 받아들이는 이들에게는 이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하늘나라의 신비가 허락되지 않은 것은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하늘나라의 은혜를 베풀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들이 하느님의 은혜에 응답하지 않은 까닭일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태 13,12)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똑같이 하늘나라를 가르쳐 주셨고, 똑같이 기적을 보여주셨지만, 그들이 하늘나라의 선물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차별대우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받아들이는 자는 더 받아들여 넉넉하게 되고,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겨버리는 결과를 낳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마태 13,13)
분명, 그들에게 먼저 보여주고 들려주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당신이 초래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어둠이 초래한 결과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 구절은 참으로 이상합니다.
“이는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내가 그들을 고쳐주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마태 13,15;이사 6,10)
사실, 예수님께서 메시아로 오셨지만,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분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은 그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인간의 논리로는 풀 수 없는 수수께끼였을 것입니다. 이 문장을 주의 깊게 보면, 주어가 “그들”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그들을 고쳐주시기를 원하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자신들이 그렇게 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그들이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고침을 받게 되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가 자신들의 눈을 감고 귀를 닫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를 <요한복음> 사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요한 1,5)
오늘, 우리는 복음을 들으면서, 이처럼 ‘완고한 마음’이 얼마나 처참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지를 알아들어야 합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를 받아들인 제자들에게는 행복이 선언됩니다.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마태 13,16)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마태 13,23)
주님!
좋은 땅의 사람 되게 하소서.
좋은 땅일수록 뿌린 씨앗만이 아니라 뿌리지 않은 잡초도 잘 자라기에
시련을 끌어안고 살아갈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열매를 맺는데 당연히 있기 마련인 죽음의 길에서 도망치지 않고,
어떤 처지에서도 방관자로 살지 않게 하소서.
오늘도 기꺼이 죽어 열매를 맺는 좋은 땅의 사람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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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6. 연중 제15주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간수 하지 않으면 잃어버립니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당신의 말씀으로 늘 풍요롭게 해 주십니다. 이 시간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통해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습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뿌린 씨가 어떤 것은 길에, 어떤 것은 돌밭에, 어떤 것은 가시덤불 속에, 그리고 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졌습니다. 우리나라 농사법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비유는 갈릴래아 농부들이 일상적으로 체험하던 현실적인 이야기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먼저 밭을 갈고 두둑을 만든 다음 씨를 뿌리지만 팔레스티나에서는 씨를 먼저 뿌리고 밭을 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전 이해를 갖고 보면 알아듣기가 쉬울 것입니다. 비유에서 나오는 씨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밭은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이 비유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네 부류의 다른 인간의 마음을 이야기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로 사람 중에는 길바닥 같은 딱딱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대개는 배움이 많거나 자기의 가치관이 뚜렷해서 하느님의 말씀이 들어갈 틈이 없는 사람입니다. 신앙에 관해 얘기하려고 하면, ‘좋은 사람이나 믿으면 되지. 나에게는 얘기하지 마라’하는 무관심하고 외면하는 아주 완고한 사람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딱딱한 흙덩어리로는 도자기를 빚을 수 없습니다. 물렁하게 반죽을 해야만 도자기를 빚을 수 있습니다. 사람의 생각도 그렇습니다. 딱딱한 생각을 가지고는 아무 일도 하지 못합니다. 부드러운 생각을 가져야만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일단은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은 혹 들어도 진지함이 없이 건성으로 듣고 맙니다. 들을 귀가 있어야 합니다. 귀를 열어달라고 기도합시다.
창세기 2장16-17절에 보면 주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너는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어도 된다.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따 먹으면 안 된다. 그 열매를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그 열매를 따먹었습니다. ‘따먹지 말라’는 말씀을 듣기는 했지만 진지함이 없이 건성으로 들었습니다.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의 일만 생각했기 때문에 유혹에 넘어갔습니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지 말고 해야 할 것은 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길에 떨어진 씨앗을‘새가 와서 먹어버렸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13장 19절에는 길에 뿌려진 씨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부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고 했습니다. 악한 자는 누구입니까? 베드로가 예수님께 야단을 맞은 적 있잖아요. “사탄아 물러가라,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그렇다면 언제 악한 사람이 되느냐? 그야말로 사탄이 되느냐?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할 때입니다. 그러므로 길바닥 같은 마음을 경계해야 합니다.
두 번째의 사람은 돌밭과 같은 울퉁불퉁한 마음을 지닌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마음을 열고 말씀을 받아들이지만, 그 마음에 뿌리를 깊게 내리지 못하여 신앙이 오래가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조그마한 어려움이나 시련, 갈등이 있으면 성당을 나오지 않는 사람입니다. ‘성당 다니는 사람이 왜 저 모양이야?’하며 상처를 받고 쉽게 신앙생활을 포기하는 사람입니다.
의지가 약해서 결심을 하고도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말씀대로 살려고 했다가도 자신이 손해를 보거나 고통을 겪게 될 것을 두려워하여 말씀을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이죠. 신앙생활은 때로는 희생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런데, 왜 내가 이런 일을 해야 돼. 생색도 안 나는 일을! 굿은 일을 ….서운한 소리 들으면 금방 성당 안 나와요, 내가 왜 저런 미운 사람을 바라봐야 하냐고…신앙이 있는 사람은 그런 사람을 바꿔놓죠. 앙갚음을 하는 데 얄미울 정도로 사랑으로 앙갚음을 해요. ‘미운 놈에게 떡 하나 더 준다.’고 더 잘해줘요. 먹고 떨어져라!가 아닙니다.
세 번째는 가시덤불이 가득한 마음입니다. 이런 사람은 들은 말씀을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재물이나 세상 것들에 대한 유혹 때문에 신앙의 정신대로 나누지 못하고 쌓아두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은 주일은 꼬박 꼬박 지키고 자기의 건강이나 취미생활에는 충실하지만, 단체활동이나 봉사활동 할 시간을 내지 못합니다. 아직 세상이 중심이 되어서 매사를 자기 위주로 계획하고 시행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는 맺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은 걱정이 많아요, 왜?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이 지배하려니까
쓸데없는 데 머리를 많이 써야 합니다. 가시덤불의 특징은 금방 자라나는 겁니다. 뽑아도 뽑아도 금방 큽니다. 그래서 정말 정신 차려야 합니다. 소유, 지배, 권력, 명예욕은 뽑아도 뽑아도 쑥쑥 자라요.
네 번째의 부류의 사람은 좋은 땅과 같은 마음을 지닌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이것을 실천해서 선한 열매를 맺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자 여러분은 어느 땅에 속하는 것 같습니까? 길바닥, 돌밭, 가시덤불, 좋은 땅? 예, 좋습니다. 우리 모두는 다 좋은 땅 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상대로 빚어 만드시고 당신의 영, 숨을 불어넣어 주셨는데 나쁜 땅이 어디 있어요, 다 좋은 땅인데 가꾸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씨앗을 주시는 겁니다. 열매를 직접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우리의 수고와 땀이 필요합니다. 가꾸어야 하는 거죠. 다시 말하면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협력이 어우러져서 수확하게 되는 겁니다.
사실, 많은 사람이 열매를 맺는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열매는 많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말씀을 듣고도 말씀대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 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히브4,12). 1독서 이사야서의 말씀대로입니다. 비와 눈이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게 하듯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이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이사55,10-11). 반드시 뜻하는 바를 이뤄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농부는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여러 번 김을 매고 물을 주고 거름을 주면서 추수를 기대합니다. 열매를 거둘 때 한없는 기쁨과 보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인생이라는 농장에서 농사를 짓는 농부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심은 것을 거두게 됩니다. 많이 심고 잘 가꾸는 이는 많이 거두고, 적게 심고 가꾸지 않는 사람은 적게 거두며 아무것도 심지 않은 사람은 아무것도 거두지 못하게 되는 법입니다. 속담에 “봄에 씨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거둘 것이 없다.”“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고 하였습니다.
오랜 신앙생활을 했으면서도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분명 내 마음의 밭을 제대로 가꾸지 않기 때문입니다. 능력의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돌밭, 가시덤불의 상태에서 듣기 때문에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귀 있는 사람은 알아들으십시오. “하느님의 말씀은 부드럽고 우리의 마음은 단단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을 자주 듣게 되면, 마음이 열려 하느님을 경외하게 될 것입니다”(교부 푀멘).
주님께서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13,9)고 하셨습니다. 귀 있는 사람이란 ‘말의 의미를 깨닫는 사람, 이해하는 사람, 경청하는 사람, 순종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 모두가 귀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숙달된 자동차 정비사는 차의 소리만 들어도 어디에 고장이 있는가를 알아냅니다. 훌륭한 지휘자는 수많은 악기 소리 중에서도 잘못된 음을 금방 잡아냅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수고와 땀이 있었을까 미루어 짐작합니다.
우리의 귀는 어디에 훈련되어있습니까?? 어떤 사람은 영어, 수학, 과학에 관한 말은 잘 알아듣는데 하느님께 관한 말씀에는 문맹인 사람도 있습니다. 세상에는 눈이 밝으면서도 하느님의 말씀에는 어두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듣지 않아도 될 것들은 얼마나 잘 듣고 또 많이 아는 줄 몰라요, 연예인 이름을 줄줄 외우고 그의 경력, 활동..등등. 언제 무엇을 했는지 까지…스포츠, 신문, 잡지는 꿰차고 앉아 있으면서도 성경말씀에는 아주 깡통인 분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배움이 많지 않은 분인데도 성경 말씀을 장, 절까지 외우고 그 뜻을 잘 알아듣는 분도 계십니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정말 귀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하느님 말씀을 듣고 또 그대로 행하는 사람이 아니겠어요. 부제 서품식에서 복음서를 수여하는데 주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을 읽고, 읽는 바를 믿으며, 믿는 바를 가르치고, 가르치는 바를 실천하십시오.” 주님께서는 말씀의 씨앗을 우리 모두에게 주셨고 우리는 그 말씀을 듣고 믿고 가르치고 실행함으로써 좋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여러분이 귀 있는 사람이 되어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의 열매를 풍성하게 거두시길 바랍니다. 아무리 큰 은혜가 주어져도 받아들이고 실행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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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6. 연중 제15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제가 매일 올리는 묵상 글 때문에 도움을 받은 적이 있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지난번 이탈리아 성지순례를 갈 때였습니다. 성지순례 가이드께서 제게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팬데믹 때입니다. 신부님이 매일 올려주는 복음 묵상 글이 제게는 큰 힘이 되었습니다. 언젠가 한번 만나고 싶었는데 이렇게 만나게 돼서 반갑습니다.” 형제님은 제가 성지순례 온다는 것을 알고 밀라노 두오모 성당의 미사를 애써서 잡아 주었습니다. 그것이 저의 복음 묵상 때문에 위로를 받는 것에 대한 작은 보답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저도 처음 만나는 분이지만 마치 오랜 친구처럼 반가웠습니다. 형제님 덕분에 밀라노 두오모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할 수 있었습니다. 그 미사에 우간다에서 온 신부님이 함께 미사를 하고 싶다고 하여서 공동 집전하였습니다. 신부님은 로마에서 공부를 마치고 우간다로 돌아가기 전에 밀라노에 잠시 들렸고, 마침 우리가 봉헌하는 미사에 함께 하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이 모든 것이 제가 매일 올린 복음 묵상 글이 열매를 맺었다고 생각하니 감사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씨 뿌리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여기에는 3가지의 주제가 있습니다. 씨 뿌리는 사람, 씨, 토양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씨를 이야기하는 사람은 능력과 재능을 강조할 것 같습니다. 건강한 사람, 예술적인 감각이 있는 사람, 말을 잘 하는 사람, 외모가 준수한 사람, 장애가 있는 사람, 지적인 능력이 부족한 사람, 유전적인 문제가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변을 보면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토양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환경을 이야기할 것 같습니다. 가난한 집에 태어난 사람, 화목한 가정에 태어난 사람, 부유한 집에 태어난 사람, 부모가 늘 다투는 집에 태어난 사람, 가풍이 있는 집에 태어난 사람, 태어나면서 고아가 된 사람이 있습니다. 환경에 따라서 삶의 방향이 바뀌기도 합니다. 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씨 뿌리는 사람’입니다. 씨를 뿌리는 사람이 없다면 씨는 싹이 나지 못할 것입니다. 씨를 뿌리는 사람이 없다면 좋은 환경에서도 열매를 맺을 수 없을 것입니다. 씨 뿌리는 사람이 일부러 나쁜 토양에 씨를 뿌릴 이유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좋은 결실을 맺기 어렵고,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도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말을 할 때는 좋은 말을 해야 합니다. 사람을 살리고, 이해하고, 사랑하는 말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우리는 나쁜 마음으로, 상처를 주는 말을 하곤 합니다.
씨 뿌리는 사람은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감기약을 파는 사람이 감기에 걸려서 기침을 심하게 하면 그 약을 사려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강론을 하는 사제는 본인이 하는 강론을 삶으로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신자들은 사제의 강론을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변을 보면 말은 그럴싸하지만 삶은 전혀 다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의 위선과 허영을 나무라셨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하면 확신이 있어야 할 것이고, 우리가 걸어가는 발자취에 그리스도의 향기가 느껴져야 할 것입니다. 씨는 하느님의 말씀이고, 우리들의 말과 행동입니다. 그것이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우리가 좋은 토양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하면서 세상의 유혹에 흔들린다면, 시련과 고통 앞에 무릎을 꿇는다면 우리가 전한 말씀이 열매 맺기 힘들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늘 기도하고, 확신에 차서 성실하게 살아간다면 비록 척박한 토양이라도 하느님께서는 열매를 맺어 주실 것입니다. 순교의 시대에도 교회는 찬란한 꽃을 피웠습니다. 그러나 풍요로운 시대에도 교회는 활력을 잃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못했고, 열매를 맺지 못하기도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토양이 아닙니다. 그 토양을 만들어가는 사람의 마음과 결심입니다. 내가 말씀으로 무장하면 복음의 씨앗은 꽃이 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형제 여러분 장차 우리에게 계시될 영광에 견주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지금까지 다 함께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피조물만이 아니라 성령을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우리의 몸이 속량되기를 기다리며 속으로 탄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눈에 보이는 땅이 가물고, 채소가 병이 들면 양수기를 가지고 물을 대기도 하고, 약을 치기도 하고, 우리들의 정성을 다 기울여 농작물을 키우고 많은 소출을 얻도록 노력을 기울입니다. 지금 우리 마음의 밭은 어떤지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내 마음에 기도의 거름은 충분히 주고 있는지, 내 마음에 이웃에 대한 사랑과 배려의 열매는 잘 자라고 있는지, 지금 내 마음에 하느님 은총의 비가 촉촉이 내리는지 아니면 욕심과 이기심의 비가 시기와 질투의 바람과 함께 내리고 있는지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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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6. 연중 제15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아버지 농부農夫처럼 희망, 사랑, 믿음으로-
이 세상에서 하느님을 가장 많이 닮은 이들은 누구일까요? 저는 주저없이 농부와 어머니라 말하고 싶습니다. 정말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을 닮고 싶다면 어머니같은 마음으로, 농부같은 마음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예수님이 그 모범입니다.
오늘은 제28회 농민주일입니다. 농민주일하면 생각나는 복음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절,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라는 예수님 말씀입니다. 말씀대로라면 예수님은 농부 하느님 아버지의 아들입니다. 아버지의 농사를 통해 농부 아버지를 닮았을 예수님입니다.
농민주일을 맞이하여 주교회의 생태환경위원회 위원장 박현동 아빠스의 담화문도, 또 가톨릭 신문의 두면에 할애된 농민주일 특집도 시의적절했습니다. 담화문중 일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생명체의 대량학살을 가져오는 산업농업에 동참하는 것이 아니라, 유기농업을 선택함으로 모든 생명을 보호하고 존중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가톨릭 농민회원들은 현재의 어려움에도 ‘땅을 지키고 생명을 보호하는 일’이 하느님께서 주신 소명이라는 것을 깨달아 생태사도로서 굳건히 살아가길 희망한다.”
생태사도의 소명을 지닌 농민들이요 특집도 생태사도로서 활약중인 농민들에 대한 기사도 참 풍부했습니다. “땅 살리고 지구 살리는 유기농”이란 제하에 “잡초도 벌레도 함께 사는 게 결국 우리를 살리는 길이죠.”라는 기사도 좋았고, “여름보다 뜨거운 사람들-농민”. “뙤약볕 아래 구슬땀 흘려가면서도 창조질서 지켜내는 생태사도들”이라는 기사도 풍부했습니다.
어찌 농민만 생태사도입니까? 기후위기로 인해 지구와 인류의 미래가 불확실한 세상, 모두가 지구를 살리고 땅을 살리고 농촌을 살리는 생태사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식사시 이런 생태사도들인 농민들의 노고를 까맣게 지낸 일들이 참 부끄럽게 생각되었습니다. 특히 성사를 주관하는 사제들, 주방에서 식사를 챙겨주는 사람들은 농사에 힘쓰는 농부들의 노고를 늘 기억하여 그 삶의 자세를 배워야 하겠습니다. 사람들을 살리는 참 중대한 일 셋이 성사聖事, 식사食事, 농사農事임을 새삼 확인하게 됩니다.
농민주일을 맞이한 오늘 복음의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가 참 적절합니다.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통해 농부 아버지를 닮은 예수님의 모습이 잘 드러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에 대한 답을 줍니다. 씨뿌리는 사람처럼, 예수님처럼 살면 됩니다.
첫째, 희망입니다.
참으로 삶의 농부들인 우리들은 희망의 사람들입니다. 하느님께 궁극의 희망을 두기에 결코 절망하지 않습니다. 믿는 이들에게 절망은 없습니다. 하느님 사전에 없는 낱말이 절망입니다. 절망이 진짜 대죄입니다. 그러니 믿는 이들은 상황에 일희일비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 희망을 두기에 묵묵히 씨뿌리는 일의 과정에 충실할 뿐입니다. 보십시오. 길에도 돌밭에도 가시덤불속에도 떨어져 실패인 듯 하지만 결국은 성공인생으로 드러나니 바로 다음 대목입니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배, 어떤 것은 예순배, 어떤 것은 서른배가 되었다. 귀있는 사람은 들어라.”
하느님께 희망을 두기에 지인사대천명의 자세요 고진감래의 인생입니다. 하느님께 희망을 두기에 상황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결과는 하느님께 맡기고 한결같이 끊임없이 씨뿌리는 삶에 충실할 뿐입니다. 실제 농사의 80%는 하느님이 하신다는 우리 농부 수사님들의 고백입니다. 저역시 하느님께 희망을 두기에 날마다 이렇게 씨뿌리는 농부의 마음으로 강론을 써서 나눕니다. 희망의 사도 바오로가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장차 우리에게 계시될 영광에 견주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피조물이 허무의 지배 아래 든 것은 자의가 아니라 그렇게 하신 분의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희망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역경속에서도 살게하는 힘이 희망의 힘, 하느님의 힘입니다. 희망 역시 은총이자 선택이요, 훈련이자 습관화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사랑입니다.
땅 농사는 일년이지만, 삶의 농사는 평생입니다. 평생 삶의 농사꾼인 우리들입니다. 내 삶의 자리가 꽃자리입니다. 자리 탓할 것 없습니다. 참된 삶의 농부는 피하지도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길이든 돌밭이든 가시덤불이든 온갖 정성과 사랑을 다하는 삶입니다.
문제는 나한테 있습니다. 아무리 씨앗이 좋아도 토양이 나쁘면, 길이나 돌밭, 가시덤불밭같은 마음밭이라면 결코 그 좋은 말씀의 씨앗도 자라나지 못합니다. 그러니 ‘아모르 파티Amor fati’, 내 운명의, 책임의 십자가를, 내 삶의 자리를 뜨겁게 항구히 사랑하는 것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입니다. 한결같이 사랑의 수행에 항구할 때 길도, 돌밭과 가시덤불의 박토도 옥토로 변할 것입니다. 악한 자의 유혹도, 환난이나 박해도,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도 너끈히 이겨냅니다. 이런 사랑의 수행에 항구할 때 서서히 좋은 땅의 마음밭으로 변모되어 마침내 풍요로운 수확입니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 어떤 사람은 백배, 어떤 사람은 예순배, 어떤 사람은 서른배를 낸다.”
낙심하지 마십시오. 한결같이 진실, 성실, 절실, 충실한 삶이었다면 보이지 않는, 하느님만이 보이는 곳에서 사랑의 열매들 잘 익어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무엇보다 말씀을 사랑하십시오. 주님 사랑은 말씀 사랑입니다. 인간의 본질은 말씀입니다. 사랑의 수행은 바로 말씀 수행입니다. 참으로 말씀을 경청하고 동화하면서 내 마음밭도 서서히 옥토로 변할 것입니다. 이런 사랑 역시 은총이자 선택이요 훈련이자 습관화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불신불립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서지 못합니다. 믿음을 잃으면 모두를 잃는 것입니다. 백절불굴의 믿음, 칠전팔기의 믿음입니다. 주님의 전사는 바로 믿음의 전사입니다. 한결같은 믿음을 위해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가 필수전제조건입니다.
참으로 씨뿌리는 사람은 믿음의 사람,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하느님께 궁극의 희망을, 궁극의 사랑을 두기에 이런 항구한 기다림의 믿음, 인내의 믿음입니다. 희망과 사랑, 믿음이 하나로 결속되어 있음을 봅니다. 무엇보다 희망의 하느님, 사랑의 하느님께 대한 철석같은 믿음입니다.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
바로 이런 말씀에 대한 철석같은 믿음이요 사랑입니다.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습니다. 말씀은 빛이며 생명이요 영입니다. 이런 말씀사랑과 말씀공부와 말씀실천이 우리를 정화하고 성화하여 옥토의 마음밭이 되게하고 날로 주님을 닮은 참나의 성인이 되게 합니다. 공부중의 평생공부가 하느님 공부, 말씀 공부요 말씀 공부중에 날로 깊어지는 믿음입니다.
수도원 하늘길 메타세콰이어 가로수들이 심은지 14년이 되는데 하늘 높이 자란 아름드리 믿음의 나무들이 되었습니다. 믿음의 내적성장도 이렇습니다. 한결같은 사랑의 말씀 수행과 함께 가는 믿음의 여정입니다. 이런 믿음 역시 은총이자 선택이요, 훈련이자 습관화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아버지 농부처럼 희망으로, 사랑으로,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요, 영혼 건강, 정신 건강에 이보다 더 좋은 영약靈藥도 없습니다. 참으로 희망으로, 사랑으로,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절망은 없습니다. 늘 새 하늘과 새 땅의 새날입니다. 무엇보다 말씀공부에 말씀실천에 항구한 평생학인이 되어 사시기 바랍니다. 말씀의 씨뿌리기 복음 선포적 삶에 항구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날로 우리 마음밭을 비옥하게 해주시고 풍성한 말씀의 열매들을 수확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씨앗은 하느님의 말씀, 씨뿌리는 이는 그리스도이시니, 그분을 찾는 사람은 영원히 살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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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6. 연중 제15주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늘 행복할 수는 없지만 행복한 일은 매일 있다.’
어디서 들은 말인지 모르지만 저는 이 문장에 마음에 무척 듭니다. 꼭 이 문장을 읽을 때마다 오늘 제게 주어진 보물이 무엇인지 또는 오늘의 나의 행복이 무엇인지 꼭 찾고 싶어지기 때문입니다. 꼭 주님과 보물찾기하는 느낌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의 제 하루에 씨앗을 뿌리십니다. 그 씨앗은 제 마음 여러 곳에 떨어집니다.
어떤 씨앗은 길에 떨어집니다. 혼잡하고 복잡한 길, 떠들썩하고 분주한 길에 씨앗은 떨어지고 이내 그 씨앗은 있었는지도 모르는 저의 무관심 속에 사라져버립니다.
어떤 씨앗은 돌밭에 떨어집니다. 울퉁불퉁하고 모난 모습 안에 떨어진 씨앗은 고집스러운 성격과 순간의 이타적이지 못한 이기심 속에 죽어버립니다.
다른 씨앗은 제 안에 가시덤불에 떨어집니다. 처음에는 잘 자라도록 노력하지만, 점점 제안에 욕심이 올라옵니다. 주님을 섬겨야 하는 제 마음은 어느새 저를 주님의 자리에 올려놓고 섬기고 있습니다. 이렇게 씨앗의 숨통은 또 끊어지고 맙니다.
그런데 다행입니다. 양지바른 곳, 성실한 밭이라고 불리는 그 땅에 떨어진 씨앗은 오늘도 잘 자라납니다. 저는 매 순간 씨앗의 양분을 주기 위해 선함을 선택하고, 희생을 선택하고, 사랑을 선택합니다. 이렇게 오늘도 저는 조금의 씨앗을 정성스레 하느님 대전에 봉헌합니다.
데스파시토
데스파시토
영어로 하면 슬로우리~
천천히, 천천히, 그런 뜻이다.
‘케네스 로’ 기업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칠십 대 후반에도 테니스를 치고 실력이 더 좋아졌고 말하면 사람들은 그 이유를 궁금해합니다.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좀 더 느긋한 마음으로 하니까요.’
천천히는 빠르지 않다는 말이다.
그러나 빠르지 않다는 말이
발전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어쩌면 더 견고한 발전을 만들어 가는 말이
‘천천히’일지도 모른다.
데스파시토~ 오늘도 천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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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6. 연중 제15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몇 년 전에 대림 특강을 위해 호주에 갔던 적이 있습니다. 북반구에 살고 있었던 제가 적도 이남인 남반구에는 처음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차이가 있을까 싶어서 별 준비 없이 호주로 떠났습니다. 그리고 도착과 동시에 새롭고 특별한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한국과 전혀 다른 계절 체험이었습니다. 한국은 12월이라 추운 겨울인데, 호주는 너무 더운 한 여름이었습니다. 남반구와 북반구 날씨가 정반대라고는 들었지만, 직접 경험해보니 너무나 신기했습니다. 말로만 듣던 한 여름의 크리스마스를 보냈습니다.
막연하게 아는 경험과 실제로 경험해서는 아는 것은 분명히 달랐습니다. 그런데 주님에 대해서도 그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막연하게만 사랑의 주님, 평화의 주님, 일치의 주님이라고 말할 뿐, 이런 주님을 체험하는 곳에는 가려 하지 않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니 주님과 대화를 나눌 수 없고, 성경을 읽지 않으니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주님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세상의 것만을 쫓으며 사니 일상 안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시는 주님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에 대해서도 실제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학창 시절 수학 문제 풀던 것이 기억납니다. 선생님께서 수업 중에 문제를 직접 풀어주십니다. 그러면 그 뒤에 이 문제가 시험에 나오면 저절로 풀게 될까요? 배운 문제를 자기가 직접 풀어봐야 시험 문제의 답을 맞힐 수 있게 됩니다.
전지전능하신 주님이지만 우리 역할에 따라 주님을 더 가까이에서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주님 말씀, 주님 뜻을 직접 실천해야만 하는 이유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늘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냥 온갖 부정적인 마음으로 불평불만만 하면서 주님에게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이는 하느님 나라에 관한 기쁜 소식이지요.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모습을 바꾸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좋은 땅의 마음을 갖추고 있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길에 뿌려지고, 돌밭에 뿌려지고, 가시덤불에 덜어진 마음과 같았습니다. 좋은 씨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그냥 버려집니다.
주님의 말씀은 그냥 듣기만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듣고 직접 몸으로 따라야만 실제로 구원의 은총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사랑 그 자체이십니다. 농부는 좋은 땅에 씨를 뿌리지, 나쁜 땅에 씨를 뿌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랑 가득하신 주님께서는 나쁜 땅의 모습을 갖춘 우리의 마음에도 당신 말씀의 좋은 씨앗을 뿌려주십니다.
주님의 사랑을 직접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회개하고 주님의 말씀을 듣고 따라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온몸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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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여러 가지 언어로 말합니다. 이 여러 가지 언어란 그리스도를 증거해 주는 겸손, 가난, 인내 그리고 순종입니다. 우리가 생활에서 이들을 실천할 때 그 실천을 통하여 여러 가지 언어를 말하게 됩니다(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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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6. 연중 제15주일. 키엣 대주교님.
씨 뿌리는 사람
우리가 뿌리는 씨앗이 언제나 잘 자라서 꽃과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닙니다. 좋은 결과를 맺기 위해서는 씨앗을 뿌리는 사람들의 마음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단지 씨앗뿐이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태도일 것입니다.
관대한 사랑
예수님께서는 두 손 가득 그 많은 씨앗을 이곳 저곳 많은 곳에 뿌렸습니다. 한톨도 남기지 않고, 한치의 계산도 없이 아낌없이 뿌렸습니다. 비옥하고 기름진 땅은 물론, 척박한 땅에도 뿌렸습니다. 사람의 발자국이 새겨진 좁은 오솔길까지 모든 곳에 씨를 뿌렸습니다. 그분께서 뿌리신 씨앗이 싹이 트고 무럭 무럭 자라 온 세상에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성실함과 끈기
처음 뿌린 씨앗은 새들이 쪼아 먹고 그 다음에는 가뭄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땅이 맞지않아 실패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실패에 굴하지 않고, 고단함을 잊고 열심히 씨를 뿌리셨습니다. 씨를 뿌리는 사람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아야합니다.
희망의 씨
씨를 뿌린다는 건 희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희망이 있기에 돈과 힘 그리고 시간을 과감하게 투자할 수 있습니다. 희망은 고난과 실패를 극복하는 힘입니다. 씨 뿌린 날이 있으면 반드시 수확할 날도 있습니다. 희망이 있기에 성과도 얻을 수 있는 것 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답하기 위하여 세계 여러 나라에서 많은 사제들이 열정적으로 씨를 뿌리고 있습니다.
제가 부임했던 베트남 최북부 산악지대의 랑선교구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1876년 도미니크 선교사들이 이곳에 도착했을 때 300여명의 신자들뿐이었습니다. 그 후 교구 최초의 베트남 주교인 바오로 빙선 주교님은 시대적 역경을 무릅쓰고 열정적으로 씨를 뿌리셨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한알의 씨앗이 되어 랑선 땅에 묻히셨습니다.
그 후 주님께서 저를 랑선 밭으로 보내주셨습니다. 1999년 제가 부임했을 때 교구청에는 연로하신 신부님과 수녀님 두분밖에 안 계셨기에 어떻게 주님의 사업을 시작할 지 막막하였습니다. 직접 종을 치고, 교구청 문을 열고, 미사를 올리고, 산을 넘어 신자들을 찾아가 미사를 드렸지만 형제 자매들의 눈에는 언제나 채워지지 않는 영적갈망이 있었습니다. 신자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주님의 말씀 안에 살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심하게 되었고 주일 미사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에는 주일 묵상글들이 많지 않았기에 각 지역에서 묵상글을 읽고 영적 나눔을 하는 모임들이 생겨났습니다.
세상 모든 것은 뿌리는 대로 거둬드립니다. 자비를 뿌리면 사랑을 거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어느 누가 아니라 모든 사람을 당신의 밭에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응답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르심을 듣는다면 부르심에 따라, 아끼지 말고 꾸준히, 희망과 사랑의 씨를 뿌려야 합니다. 아끼지 말고 어떠한 계산도 없이, 한 곳도 빠뜨리지 말고 세상 모든 곳에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이용하여 씨를 뿌려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을 전파하는 태도입니다. 복음은 생명의 양식입니다. 그러므로 한 명도 빠뜨리지 말고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바오로 성인의 말처럼 ‘좋은 시간, 나쁜 시간 가리지 말고’ 꾸준히 씨를 뿌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간절히 바라는 것은 바로, 당신의 제자들이 이 땅에 사랑의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사랑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내가 싫어하는 사람, 나를 싫어하는 사람까지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차별없이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열정적인 사랑만이 잡초와 잡석을 변화시켜 기름진 땅으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하느님께서는 쉼없이 지금도 복음의 씨를 뿌리십니다. 지금 당신은 그 복음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2. 주님의 부름을 받았습니까? 이 부름에 어떻게 답하고 있는 지 생각해보십시오.
3. 세상 모든 것은 뿌리는 대로 거둬드린다고 합니다. 지금 내가 거둬드리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말씀의 나눔
1. ‘사랑’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내가 싫어하는 사람, 나를 싫어하는 사람까지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차별없는, 열정적인 사랑만이 ‘변화’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진정한 사랑의 마음으로 버려진 땅에도 씨를 뿌려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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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6. 연중 제15주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분과 나>
나 없이
그분 아무 것
아닌 듯
나 없이
그분 아무 것
할 수 없는 듯
기꺼이
그분 나에게
당신 맡기시네
내 안에서
당신 활짝 피리라
나를 믿으시고
내 안에서
당신 곱게 영글리라
나를 바라시며
내 안에서
당신 맘껏 누리리라
나를 사랑하시니
내 안에 그분 없이
나 아무 것
아니기에
내 안에 그분 없이
나 아무 것
할 수 없기에
기꺼이
나 그분을
목숨처럼 품으리라
내 안에서
그분 활짝 피시도록
그분을 믿으며
내 안에서
그분 곱게 영그시도록
그분을 바라며
내 안에서
당신 맘껏 누리시도록
그분을 사랑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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