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프라’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는가? 건담 프라모델을 줄여서 부르는 말이다. 프라모델은 조립식 장난감을 뜻하니, 건담 프라모델은 건담 조립식 장난감이 된다. 프라모델중에서도 건프라는 그 인기와 사업 규모로 인하여 하나의 장르가 된 영역이다.
건담은 1970년대 후반 일본에서 방영된 로봇 애니메이션이다. 건담 이전의 로봇 애니메이션들은 동심과 긍정적 상상력에 기댄 큰 힘을 형상화한 마징가Z와 같이 비현실적인 이른바 ‘슈퍼로봇’이 대세였다. 반면 건담은 로봇을 암울한 전쟁 속 병기로 등장시켰다. 당시는 애니메이션이란 아이들이 보는 애니메이션이었는데도 말이다. 이 건담의 감독인 토미노 요시유키는 일본의 유명 애니메이션의 감독이다. 그는 일본인이면서도 반전의식이 강했다. 이런 인물이 애니메이션 감독이 되고 보니, 아이들이 슈퍼로봇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전투의 승리감에 도취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오히려 전쟁을 강한 비극으로 간접 경험하기를 바랬다. 건담 이전에는 그 역시 합체하고 변신하는 슈퍼로봇 만화들을 그렸는데, 그의 작품은 늘 비극이 담겨 있었다. 주인공인 아이들이 자폭을 해서 겨우 적을 막아내지만 그것이 적의 1/8이라던가(무적초인 점보트3), 인류 전쟁의 죄악으로 우주가 멸망하는 식(전설거신 이데온)으로 말이다. 아이들 애니메이션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비극적이다.오죽하면 팬들로부터 부터 받은 별명이 ‘몰살의 토미노’였을까.
사실 건담은 일본 식민시대를 거친 한국인에게는 더 관심을 가지게 한다. 건담의 스토리에 식민지 개념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우주개척시대에 우주 개척지를 식민지로 보는 지구인들의 부당한 통치방식에 반발하면서 독립 전쟁이 일어난다. 우주개척민의 독립국가가 건담의 적이지만, 이들이 나쁘게 그려지기보다는 그들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 있다는 듯 그려지며, 종종 존경스럽고 선한 사람도 있는 스토리로 그려진다. 주로 양측 모두에서 전쟁을 일으키고 참상을 확대하는 이들이 악하게 그려지고, 정작 전쟁에 참여하는 이들은 비극으로 내몰리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건담 방영당시에는 이러한 설정이 참신한 것이어서 인기가 하늘을 찔렀다. 그전에는 이런 현실적인 감각의 만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전쟁영화를 방불케 하는 긴장감있고 역동적인 스토리, 선악으로 구분지어 폭력을 정당화 하는 단순한 스토리라인을 벗어난, 엑스트라 악당들 조차 깊이 공감할 수 있는 스토리는 당시 애니메이션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이는 아동뿐 아니라 어른들도 TV앞에 앉혔다. 그리고 감독의 의도대로 전쟁의 도구인 로봇은 멋있게 느껴졌을 지언정, 전쟁의 경험은 참혹한 것임이 잘 전달되었다. 이러한 기조는 후속작인 Z건담에서도 잘 드러난다. 끔찍한 전쟁을 겪은 주인공은 마지막화에서 숙적을 처치한 이후에 정신적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말 그대로 ‘미쳐’버린다. 초점이 풀린 동공으로 지남력은 커녕 대화 자체가 불가능하게 된 주인공의 모습은 전쟁의 비극을 잘 보여주는 명작으로 남았다.그런데 3부에 해당하는 건담ZZ에 와서는 영 딴판이 된다. 갑자기 가벼운 코믹물의 느낌이 나기 시작한 것이다. 무슨 일이 있었을까?
처음 건담(퍼스트 건담이라 불린다)이 방영되고 나서 건담을 프라모델로 만들어 보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처음 몇몇 회사들은 사업성이 부족하다 판단하고 이를 거절하였다. 그러다가 한 회사가 이를 실행하게 되고 최초의 건프라가 탄생한다. 이 건프라가 말 그대로 초 대박을 친 것이다. 사업이 되면 늘 그렇듯 요구사항이 많아진다. Z건담에서는 건담이 비행기 형태로 변신하는데, 건담ZZ에서는 3단변신합체하도록 요청을 받는다. 사실 이는 '슈퍼로봇'에서 자주 등장하던 설정으로 병기로써의 로봇을 강조하는 건담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완구회사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코드를 넣어서 건프라로 더욱 인기를 끌어 볼 심산이었을 것이다. 또한 스토리도 좀 더 밝게 하여서 건담 골수팬들이 아닌 더 많은 시청자들이 보도록 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건담 인기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비극적 전쟁의 리얼함, 이 본질을 잃어버린 건담ZZ는 기존 팬들의 외면을 받았다. 추락하는 인기를 감지한 제작사는 중반부쯤 다시금 이전의 비극적 분위기를 살려보았으나, 기존 팬의 마음을 돌리기는 커녕, 새로운 팬들도 떠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대망의 건담 3부작의 마지막은 가장 긴 방영기간에도 불구하고 자중자란 속에서 초라한 엔딩을 맞이했다. 그리고 3단 분리합체하는 건담ZZ의 건프라는 가장 인기없는 건프라중 하나가 되었다. 다른 시리즈들의 건담은 지금도 때에 맞추어 리뉴얼되어 나오는데 건담ZZ만은 그렇지가 않다. 비록 애들 만화로 취급되던 애니메이션이더라도 ‘바깥의 사정’이 본질을 건드릴 때, 컨텐츠로서의 힘을 상실하는 것은 당연지사. 이후의 스토리를 담은 극장판에 등장한 로봇들은 반면, 지금까지도 가장 인기있는 건프라로 남는다. 전쟁의 비극이라는 주제를 잘 살려 '리얼로봇'의 본질로 돌아온 탓이다.
나는 건프라를 보는 것만 좋아 하지 직접 만들지는 않는다. 건프라는 생각보다 누가 만드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데 그 디테일에 신경쓰는 것이 취미치고는 좀 피곤하게 느껴진다. 그보다는 설명서 그대로 만들어지는 레고와 같은 블럭이 나는 좋다. 우리 집에 진열되어 있는 몇 안되는 블록 중 제일 큰 것은 옥스포드사에서 나온 콜로세움이다. 콜로세움 모형이 책꽂이 한구석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나름의 스토리가 있다.
교회 사역하던 시절 정말로 마음이 정말로 어려웠던 시절이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목회자 가정의 자녀로, 대학생 선교단체 단기사역자로, 선교사로, 목회자로, 개척교회, 대형교회, 이민교회 등의 사역을 하면서 넘어왔던 모든 경험에도 불구하고 가장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 마침 새벽기도 본문이 고난 받는 성도들을 위해 쓰여진 요한계시록이었다. 이 어려운 시기를 통과하면서 이 어려운 요한계시록 강해를 준비하게 된 내가 자연스럽게 가장 초점을 맞추게 된 것은 요한계시록의 독자들이었다. 기묘하다 못해 기괴해 보이는 심상들이 난무하는 요한계시록이지만, 사실 그 독자들이 경험하고 있는 심적 압박과 고통을 떠올려보면 그리 강렬한 것도 아니었다. 콜로세움에 끌려 사자밥이 되는 상황 속에서 기꺼이 신앙인으로써 살아가려고 하는 그런 믿음의 선진들. 오히려 요한계시록은 독자들이 읽기에 심정적으로 적합한 온도로 쓰여진 셈이다. 설교를 준비하면서 그랬다. "맞아, 이게 신앙이지.” 그 시절 이후로 내게 요한계시록의 이름 모를 독자들이 어떤 의미에서는 사도들보다도 더 높은 내 마음속 신앙의 영웅들이 되었다. Remember Readers of the Revelation. 내 메신저의 상태메시지이다. 그 어떤 어려움도 요한계시록의 참혹함을 뚫고 살아간 믿음의 선진들 앞에서 나자신을 겸손하게 만든다. 이들의 신앙적 태도를 되새기고자 콜로세움 모형을 거실에 진열해 두었다.
현대 교회 신앙이 이런 참혹한 현실을 돌파할 수 있을까? 팬시한 환경과 좋은게 좋은 거라는 불편함 없는 신앙을 강조하는 현실속에서 말이다. 안다. 나도 안다. 더 많은 이들을 성도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라는 것, 그 취지가 나쁘지 않다는 것.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참혹함을 뚫고 살아가는 리얼함을 잃어버린 건담은 매력이 없었다. ‘애들 보는 만화 영화’라 불리던 애니메이션도 이럴질대, 종교는 어떨런지. ‘슈퍼'한 척 할 수 있어도 '리얼'해 보이지는 않을테니 말이다. 초월적 신앙을 말하지만, 리얼한 삶은 잃어버렸다는 평가를 듣는 이유를 건담을 보면 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