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명화
멀고도 가까운 나라 일본, 이웃이지만 역사적으로는 한국과의 우정은 아름답지 못하다. 피해의식이랄까, 일방적인 침략, 일방적인 희생, 일방적인 만행을 겪은 터라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문득문득 솟구치는 반일감정은 어쩔 수가 없다. 가해자의 입장에서야 부끄러운 과거사를 들추는 일이 달갑지 않겠지만 피해자로 당해야 했던 참혹한 고통은 알면 알수록 치가 떨리고 가슴이 서늘해진다.
군함도는 일본 나가사끼 바로 밑에 위치한 하시마 섬으로 군함의 모형을 닮았다고 하여 군함도라 불린다. 과거 조선인들을 강제로 끌고 가 온갖 고난을 겪은 곳으로 우리에게는 일명 지옥의 섬으로 알려진 곳이다. 누구에게는 비극일 수 있는 장소가 누구에게는 찬란한 가치로 인정받고 있는 현실이다. 일본은 하시마가 영광스러운 근대산업문화유산이라며 유네스코에 등재 시킨 것만 봐도 가해자와 피해자의 차이점은 완연히 다르다.
영화는 이러한 불행한 과거의 진실을 알리고 숨겨진 역사를 되돌아보자는 의미로 류승완 감독이 제작해 새롭게 창조한 작품이다. 일제 강점기에 군함도로 강제 징용되어 학대받고 고통 받은 조선인들의 목숨을 걸고 섬을 탈출하는 이야기이다. 영화의 내용 중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한 것이라고는 강제노역과 군함도라는 섬의 공간뿐이다.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는 완전 허구로 구성된 것이라는 유승완 감독이 말했음에도 일본의 반응은 날카롭다 못해 침략자의 음흉한 근성을 나타내고 있다. 산케이 신문은 한국영화 ‘군함도’의 내용은 모두 다 거짓‘이라고 1면에 보도했다. 일제강점기 조선인에 대한 학대는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부끄러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낱 흥미본위로 제작된 영화를 두고 이롭지 않은 신경전의 보도를 하는 것은 가해자인 일본이 해야 할 예의는 아닌 듯싶다.
일찍이 대작이란 소문만큼 출연진들 또한 이 시대 스타들이 대거 참여 관객들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악단장 이강옥 역에 황정민이, 그의 딸 소희 역에 김수안이, 경성 최고의 주먹왕 최칠성 역에 소지섭이, 광복군 소속 요원 박무영 역에 송중기가, 말년 역을 맡은 이정현까지 그야말로 한국연예계를 대표하는 기라성 같은 배우들의 총출동이다.
상영이 시작되면서 극장안은 음울한 긴장이 출렁댄다. 지하 1000m 아래 갱도를 향해 걸어가는 사람들, 마치 어두컴컴한 지옥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승강기에서부터 갱도 안을 가득채운 벌거벗은 조선인들을 조명한다. 여기에 잠깐 흑백 화면이 보이다가 컬러 화면으로 전환된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폭력과 강압으로 얼룩진 가학적 노동 장면은 역사의 비극적 감각을 전달한다. 점령군 일본군의 눈을 피해 벌이는 조선인들의 아슬아슬한 곡예가 끝없이 가슴을 두근거리게 한다. 지하 갱도에서 석탄 채굴작업을 하는 조선인들, 배우들의 열연도 일품이지만 탄광을 그대로 재현한 세트장까지, 실제 탄광에 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온다.
인간은 누구나 살고 싶어 한다. 강자와 약자에게는 서로가 넘지 못할 선명한 선이 있다. 약자가 살기 위해서는 마음에도 없는 아첨도 해야 하고 잘못이 없는데도 머리를 조아려야 한다. 악단장 이강옥 역시 살기위한 몸부림이 처절하다. 일본 순사에게 속아 자신이 이끌던 악단들과 함께 군함도로 강제 이송된 날부터 그의 삶은 벼랑 끝에 서게 된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이어지는 노동은 인간의 한계를 넘나든다. 조센징이라는 이유하나만으로 강제노역에 동원되어 무차별적인 학대와 성적노리개가 된다. 쉴 틈조차 허락하지 않고 허리조차 필수 없는 열악한 작업환경에서도 끝없이 채탄을 강요당한다. 하루에도 수십 번 갱도가 터지는 각종 사고들이 빈번해지면서 걸핏하면 사람들이 죽어나간다. 하루의 부과된 할당량을 채운들, 그들은 노동의 댓가조차 받지 못한다. 일본인들의 악랄한 계산법과 자기만의 이익을 위해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충견의 계획된 음모에 속고 속는 울분에 속이 탄다. 다소 거친 폭력성도 있지만 감동이 전해주는 아름다운 사랑에 눈시울이 뜨거워지기도 한다. 악단장 이강옥의 무덤덤한 부성은 아버지의 위상인 듯싶다가도 어린 딸을 위한 아비의 진실 된 말 한마디를 듣고 있으면 코끝이 찡해 오고 가슴이 뭉클한 감동이 전해온다.
영화의 소재에 대해 다소 불편한 오해도 있다. 한수산의 소설 ‘까마귀’를 각색한 작품이란 설도 있다. 하지만 ‘군함도’는 어디까지나 류승완 감독이 처음부터 끝가지 시나리오로 쓴 픽션이다. 물론 소설 ‘까마귀’ 역시 군함도로 끌려간 징용군 이야기로 노동하다 희생당한 조선인을 다룬 점은 같지만 영화 군함도는 그보다 인간적 휴머니즘을 전한다. 영화의 주요 쟁점은 목숨을 걸고 다 같이 탈출을 시도하는 조선인들의 활약상과 절박한 상황에도 나를 희생하여 다른 이의 생명을 살리려는....바로 그 휴머니즘이 관객이 마음을 흔든다. 너무나도 가슴 아픈 우리의 역사를 소재로 영화를 만들어 우리들에게 뜨거운 울림을 전달해 주는 류승완 감독에게 이번만큼은 거장이란 칭호를 붙여주고 싶다.
어떤 기억은 듣거나 생각날 때 참 좋다가도 금방 잊어버리거나 곧 시들해지고 만다. 그러나 어떤 기억은 시큰둥하게 치부해버리다가도 마음속 앨범사진처럼 또렷한 풍경으로 남겨 두었다가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책상 깊숙이 넣어둔 생일카드처럼 꺼내보곤 한다. 군함도 영화가 바로 그렇다. 시사회를 보았으면서도 또 다시 상영하는 날이 기다려진다.
한번뿐인 인생은 그 누구라도 대신 살아주지 못한다. 그런 만큼 목숨만큼 귀한 것은 없다. 시대를 잘못 태어난 우리 선조들의 한 맺힌 절규를 기억하는 것도 어쩌면 우리가 꿈꾸는 미래의 희망을 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한수산의 소설에서도 이렇게 말한다. "어제를 기억하는 자에게만이 내일은 희망이다"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