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 방송에 문제 애완견 길들이기가 방송됐습니다. 말이 문제 애완견이지 그 개는 자신의 판단에 따라 할 일을 제대로 하고 있었습니다. 단지 애완견의 주인입장에서는 상당히 당혹스런 일이지만 말입니다. 예를 들면 개를 차에 태우고 가면 개는 차안에서 난리를 칩니다. 보통때는 아주 조용한 개였지만 유독 차에 태우고 가면 그야말로 미친개로 둔갑합니다. 또 차 와이퍼가 움직이면 난리를 부리는 개도 있었습니다. 차에 태우고 가다 주차장에 멈추면 또 미친듯이 날뛰는 개도 나옵니다. 세가지 경우 모두 개주인 입장에서는 여간 곤혹스런 상황이 아닙니다.
개 행동전문가가 등장하고 진단과 처방을 제시합니다. 세가지 종류의 개는 모두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차만 타면 난리치는 개는 청각과 후각이 매우 발달한 종류입니다. 엔진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입니다. 엔진소리가 마치 폭격기 소리같고 탱크소리같은 것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 개입장에서는 당연한 반응입니다. 차 와이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개는 그 와이퍼가 무서운 존재처럼 여겨진 것입니다. 갑자기 거대한 물체가 왔다갔다하니 놀랄 수밖에요. 보통개들보다 민감한 것입니다. 파킹할 때 날뛰는 개는 주인이 자신을 차에 남겨둔채 가버리지 않을까 매우 걱정하는 상황입니다.과거 유기견으로 그런 트라우마가 존재한 개였습니다. 개 행동전문가는 특정한 훈련을 통해 개를 진정시키고 그런 상황이 별 것 아니라는 인식을 개에게 심어줍니다. 기다려라는 지시를 하고 그에 상응하는 먹이를 제공하면서 말이죠. 그런 과정이 되풀이 되자 개들은 인간이 볼 때 과잉행동을 하지 않게 됩니다. 나름 야성적인 행위를 없애면서 길들이기에 성공한 것입니다. 보는 내내 정말 신기할 정도라고 판단될 정도였습니다. 이런 것도 인간의 측면에서 느끼는 감정입니다. 아주 간단하지만 개를 저렇게 길들일 수 있을까 놀라울 따름입니다.
사실 개는 늑대를 길들여 인간이 옆에 둔 대표적인 가축입니다. 야생의 늑대를 앞에서 설명한 방법으로 아주 천천히 길들여서 지금의 개로 변화시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야생적인 본능의 늑대가 인간의 말을 아주 잘듣고 인간에게 무조건 복종하는 그런 개체로 진화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그런 과정에서 인간이 늑대를 집 울타리로 끌여들이기 위해 먹이라는 미끼를 활용했을 것입니다. 좀 더 편하게 살아가기 위해 늑대는 자신의 야성을 숨기고 인간에게 꼬리를 치면서 그들로부터 먹이를 얻었을 것입니다. 늑대는 인간에게 복종하는 것으로 하루내내 먹이를 찾아 헤매는 그 수고로움과 위험을 줄일 수 있었습니다. 사람도 늑대에게 먹이를 주면서 다른 동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었고 데리고 다니며 무료함을 달랠 지근거리 벗으로 삼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늑대는 애완견이 되면서 야성을 거의 모두 상실했습니다. 오히려 야성을 드러내면 인간에게 타박을 받습니다. 얻어맞기도 하고 먹이를 공급받지도 못하게 됩니다. 개는 판단합니다. 야성은 하등에 필요없는 허접쓰레기같은 것이라고 말입니다. 무조건 주인에게 꼬리치고 애교피우면 그것으로 생존은 가능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늑대는 점점 멸종단계에 접어들고 말았습니다. 인간은 집안에 두며 애교를 피우는 개뿐만 아니라 자신과 자신의 가족 그리고 집을 보호하기 위해 다른 야생동물들과 맞설 이른바 강한 힘의 개도 필요했습니다. 집안이 아닌 집밖에 두며 집을 지키는 용도입니다. 집안에 존재하며 주인에게 온갖 애교를 피우는 부류를 애완견이라고 하고 그래도 야성을 조금 유지하면서 집밖에서 집을 지키는 역할을 하는 부류를 방범견 또는 경비견이라고 부릅니다.
얼마전 한국의 야당대표가 한국의 언론의 상당수가 애완견이라고 해서 보수집단과 보수언론으로부터 강한 항의를 받았습니다. 그와관련해 8년전 jtbc 손석희 앵커의 앵커브리핑이 화제를 모았습니다. 손 앵커는 앵커브리핑에서 < 워치독, 랩독, 가드독...그리고>라는 제목으로 논평했습니다. "워치독(WATCH DOG)은 감시견을 뜻하며 정치권력과 자본권력을 감시하며 자유주의 체제의 가치를 지키는 역할을 한다. 랩독(LAP DOG)은 권력의 애완견같은 언론을 뜻한다. 주인의 무릎위에 올라앉아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달콤한 간식을 받아먹는 그 안락함에 취해버린 언론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가드독(GUARD DOG)은 언론 그 자신이 기득권 구조에 편입되어서 권력화되었고 그래서 권력을 지키려하고 그 속에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 때로는 그들이 지키려 했던 대상을 향해서도 공격적이 된다. 물론 그것은 지키려 했던 대상의 권력이 약해졌을 때 혹은 지키려 했던 대상이 자신의 이익과 반하게 될 때이다. 슬리핑독(SLEEPING DOG)도 있다. 매우 중요한 이슈가 발생했는데도 그냥 눈을 감고 자는 모습을 보이는 언론을 말한다."
물론 워치독과 랩독 가드독 그리고 슬리핑 독 모두 늑대로 부터 순화되고 길들여진 개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개들의 성격과 성향에 따라 너무도 많은 차이를 보이게 됩니다. 개들 입장에선 실질적인 워치독은 없을테고 대부분 랩독이나 슬리핑독이겠지만 말입니다. 가드독일 경우 주인이 가만히 두겠습니까. 쫒아내거나 사살해버릴테지요. 하지만 길들여진다는 것이 인간의 생활에 도움은 되겠지만 그래도 너무도 인간의 욕망과 요구대로 개들이 사육되는 것은 아닌지 애석해 보이고 불쌍해 보이기도 합니다. 개들과 무관의 제왕이라는 언론이 비교대상이 되는 것은 매우 서글픈 현실입니다. 앵커브리핑처럼 그렇게 분류되는 언론의 현실이 매우 답답하고 안타깝게 여겨지는 것은 어쩌면 언론 그리고 언론인이라고 불리는 자들이 스스로 자행한 행위의 평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언론도 아닌 조직이 언론이라는 가면을 쓰고 행한 죄의 대가가 아닌가도 여겨집니다. 여기서 다시 미국의 3대 대통령이었던 토마스 제퍼슨의 '나는 언론없는 정부보다 정부없는 언론을 택하겠다'라는 말이 다시 생각납니다.
2024년 7월 21일 화야산방에서 정찬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