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 스테파노 신부
대림 제2주일
바룩 5,1-9 필리피 1,4-6.8-11 루카 3,1-6
안녕安寧.
안녕安寧. 안녕하세요. ‘편안할 안’安에 ‘편안할 녕’寧.
무심코 수없이 던졌던 이 말이 ‘나’와 ‘너’의 안녕을 확인하는 가벼우면서도 가볍지 않은,
‘나’와 ‘너’의 만남의 ‘처음’과 ‘끝’을 장식하는 소중하고도 아름다운 말임을.
서로가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음으로 인한 안도와 감격을 만끽하는 말임을.
지금처럼 앞으로도 안녕할 것을 서로에게 빌어주는 정겨운 말임을.
인권 주일을 맞으니, ‘나’의 안녕, ‘너’의 안녕, ‘공동체’의 안녕, ‘나라’의 안녕,
그리고 ‘세상’의 안녕이 더욱 절실해진다. 인권. 인권을 지키고 보장한다는 건,
남녀노소 모두가 차별 없이 별 탈 없이 ‘안녕’하도록 마음 쓰는 것이며, 혹 어떤 사건이
누군가의 안녕을 방해하고, 더 나아가 모두의 ‘안녕’을 방해한다면,
그 원인이 재발하지 않도록 행동하는 것이기에 그렇다.
나라 안팎으로 시끄럽다. 밖에서는 전쟁戰爭. 안에서는 정쟁政爭. 그로 인해 안녕 못하게 된
희생자들과 피해자들만 속출한다. ‘안녕’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전쟁 터에서, 건설현장에서,
공장에서, 바다 한가운데서, 군대에서, 길거리에서, 도시 한복판에서, 세상 곳곳에서,
그렇게 누군가는 소중한 존재를 안녕 못한 곳에서 안녕한 곳으로 떠나보낸다.
곳곳에서 인권이 유린되는 걸 바라보면서도, 그래도 다시금 희망한다. 수학여행을 안전하게
갈 수 있는 세상(세월호), 길거리에서도 안전하게 놀 수 있는 세상(이태원),
노동자가 부당하게 목숨을 잃지 않아도 되는 세상,
군인의 명예와 진심이 공권력에 실추되지 않는 세상, 사형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 세상,
전쟁이 종식되는 세상이 오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학생, 노동자, 이주민, 수용자, 전쟁피해자할 것 없는 모든 이가 안녕할 수 있는 그런 세상 말이다.
한 사람의 안녕으로 인해, 국민들의 안녕이 위협받는다면, 그 한 사람의 안녕은
정당하지 못하다. 우리나라가 전체주의 국가라면 한 사람의 안녕을 위해 국민들의 안녕이
희생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민주공화국이다.
‘이제는 더 이상’ 한 사람의 안녕을 위해 국민들의 안녕이 침해되어서는 안 된다.
국민들의 안녕을 위해 한 사람의 안녕은 ‘이제 안녕!’이어야 한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이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 등장하는 한 ‘어른’의 대사가 떠오른다. “편안함[安寧]에 이르렀는가?”
이 물음은 ‘너’를 향한 염려이고, 우리 모두를 향한 염려이며, 세상 온 존재를 향한 염려이다.
‘안녕에 이르렀는가?’ ‘안녕’할 권리가 있는 인간 모두가 지금도 앞으로도 안녕하기를 바라는
간절함과, 안녕 못했던 이들이 이제는 안녕함에 이르길 바라는 염원이 담긴 물음이다.
아기예수님은 안녕한 곳에서 안녕 못한 곳으로 육화 하셨다. 장성하셔서는 안녕의 무덤이었던
십자가를 안녕의 성사聖事로 성화聖化시키셨다. 안녕에 이르기를 갈망하는 ‘나’에게
당신 이부자리를 내어주시고, 안녕 못함에 허덕이는 이들에게는 당신만이 주실 수 있는
안녕(평화)을 선사하신다.
곧 오실 아기 예수님에게 말을 건넨다.
“아기예수님, 안녕!” 이에 그분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하다.
“안녕安寧이 너희와 함께!”
전주교구 유영 스테파노 신부
2024년 12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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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태 마태오 신부
대림 제2주일
바룩 5,1-9 필리피 1,4-6.8-11 루카 3,1-6
우선순위
네 사람이 물에 빠졌다. 대통령, 의사, 본당신부, 대학생이다. 과연 누구를 먼저 구해야 할까?
정답은… 넷 중에서 가장 ‘수영 못하는 사람’이다. 우리 삶에는 ‘우선순위’라는 것이 있다.
한정된 시간, 한정된 능력 안에서 모든 것을 다 챙길 수는 없으니
가장 소중하고 가장 절박한 것부터 먼저 챙기는 것이다.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된 인간은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동등한 존엄성을 지닌다.
따라서 모든 인간의 생명은 다 같이 소중하다. 대통령의 생명이 말단 공무원의 생명보다 더
귀하다고 말할 수 없고, 부자의 생명이 가난한 이의 생명보다 더 값지다고 말할 수 없고,
젊은이의 생명이 노인의 생명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니 모두에게 소중한 생명을 우리는 다 함께 잘 살아내야 한다. 이는 하느님의 뜻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내게 맡기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모두 살리는 일이다.”(요한 6,39)
다만 똑같은 생명이라도 각자의 사정과 형편에 따라 그 위급함과 절박함의 정도가
달라질 수 있다. 똑같이 물에 빠졌어도 수영을 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그 처지가 달라지듯이,
똑같이 배고프고 똑같이 병에 걸려도 통장 잔고에 따라 그 처지가 달라진다.
그러니 생명의 소중함은 다 같다 하더라도 단 하나도 잃지 않고 모두가 함께 살기 위해서는
가장 어려운 처지의 가장 절박한 이들부터 먼저 구해야 한다. 과연 착한 목자는
“아흔아홉 마리 양을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마태 18,12) 않는가!
결국 우리 모두의 구원은 이 ‘우선순위’에 우리 모두가 동참할 때 가능해진다. 이는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이 선포한 하느님 구원의 모습에서도 드러난다.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서 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되는 것은 결국 산과 언덕이 깎여 골짜기를 메워줄 때 가능하게 된다.
골짜기에 대한 우선적 선택에 산과 언덕이 동참하는 모습이다. 우리 모두의 구원은
이처럼 가장 절박하고 가장 가난한 사람에 대한 우선적 선택을 통해 실현될 수 있다.
물론 빌라도와 헤로데, 한나스와 카야파 못지않은 자들이 다스리는 지금의 이 세상에서
주님의 구원을 선포한다는 것은 우리 또한 세례자 요한처럼 수난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이야말로 이 시대의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여야 하지 않겠는가!
여전히 골짜기는 깊고 산과 언덕은 높기만 한 세상이지만 우리의 정성과 노력이 계속된다면
언젠가는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루카 3,6)
대전교구 김용태 마태오 신부
2024년 12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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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원 베드로 신부
대림 제2주일
바룩 5,1-9 필리피 1,4-6.8-11 루카 3,1-6
회개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고, 오실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라고 외칩니다. 공관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4,17)라고 선포하십니다.
‘회개하여라.’의 의미는 ‘삶을 쇄신하라.’, ‘마음과 정신을 완전히 바꾸어라!’,
‘죄에서 벗어나 하느님께로 향하라.’ 등을 뜻합니다.
‘회개’는 방탕한 짓을 그만두고 올바로 행동하라는 의미만은 아닙니다. 품행이 단정하고,
행동에 어긋남이 없고, 책임감 있고,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 기도도 많이 하는 바리사이들이
사실은 그들이 그토록 고대하던 메시아와 가장 갈등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엄격주의, 완벽주의, 율법주의, 공로 업적주의, 우월감, 중독증(권력, 명예, 폭력),
상호의존적 관계, 세심증, 간헐적 폭발 장애(분노조절장애), 편집증에 사로잡힌 이중인격자들입니다.
이러한 위선자들 때문에 백성은 도탄에 빠졌고, 결국 나라가 망했습니다.
마르코복음에서 사도들은 일면 예수님의 외침을 이해한 것처럼 보입니다.(1,16-20 참조)
그러나 그들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의미를 잘못 알아들었음을 복음의 후반부에서
분명하게 알려줍니다. 그들은 자신을 영광스럽게 하려는 생각에 십자가를 지고
종이 되라는 말씀에 귀를 막았습니다. 바리사이든 제자들이든 모두 진정한 회개,
즉 그들 자신을 분명히 대면하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이에 따라 예수님의 첫 번째 메시지는 공관 복음에서 ‘회개하여라.’이지만, 요한복음에서는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두 제자가
“묵고 계시는 데가 어딘지 알고 싶습니다.” 하고 말하자 와서 보라고 하셨습니다.
(공동번역 요한 1,38)
이 같은 회개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는 여러 방법과 많은 단계들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에서 ~으로’라는 패턴(분열된 상태에서 온전함으로, 죄에서 은총으로,
정체 상태에서 새 삶으로의 변화)을 따르는데, 반드시 어떤 것을 ‘거쳐야’만 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회개 역시 눈이 멀고 하느님의 권능을 체험하면서 단번에 완성된 것처럼 보이지만,
이전에 중요하게 생각했던 가치들과 우선순위들을 재평가하는 과정을 거쳐야 했습니다.
회개는 윤리 항목 몇 개를 고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린이처럼 되는 것입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 18,3)
어린이처럼 된다는 것은 하느님의 모상을 드러낸다는 것으로,
내재하시는 하느님의 모상을 회복시켜 한층 더 그분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심리학에 따르면, 이 아이는 본래의 자기(self)입니다. 훌륭하고, 거룩하고, 강하고, 능력 있고,
기쁨이 가득하고, 현명하고, 희망에 차 있고, 그 자체가 선물인 삶을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이 아이는 참된 자기, 내면의 아이, 성스러운 아이, 경이로운 아이, 지혜로운 아이로도 불립니다.
서울대교구 문종원 베드로 신부
2024년 12월 8일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에서 참조
가톨릭 사랑방 catholics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