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글 본문내용
|
다음검색
이 남자가 돌아왔다. 올 시즌 K리그가 한창 진행되고 있지만 이제 막 뒤늦은 개막전을 준비하는 이가 돌아왔다. 무릎 전방 십자인대 파열이라는 큰 부상으로 6개월 넘게 재활에만 매달려왔던 경남 수비의 핵 김주영이 드디어 독일에서 비행기를 타고 날아왔다. 어렵게 잡은 대표팀의 기회를 놓치고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곳에서 재기의 칼날을 간 김주영을 만나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김주영은 솔직했다. 인터뷰 내내 방황했던 시절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들려줬다. (사진=김형준) 반갑다. 오래 기다렸다. 요새 몸상태는 어떤가. 나도 반갑다. 아직 몸상태는 완벽하지 않다. 독일에서 재활에만 매달린 탓에 부상 회복 속도는 빠르지만 너무 조금하게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7~8월이 되면 컨디션을 끌어 올릴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유럽에서 꽤 오랜 시간 동안 재활을 했다. 축구의 본고장 유럽에 있었는데 혹시 박지성을 아는가. 당연히 안다. 정말 위대한 선수라고 생각한다. 오, 그런가. 당신은 비록 부상으로 낙마했지만 대표팀 유니폼도 입었었다. 박지성의 플레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그 분은 최고의 축구선수다. 환상적인 플레이를 펼친다. 존경할 만한 선배다. 다음 질문이다. 당신은 수비 치고 무척 빠른 발을 가졌다. 시종일관 그라운드를 누비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박지성의 별명 ‘산소탱크’를 어떻게 생각하나. 죽을래? 미안하다. <경남 김주영, “박지성은 존경할 만한 선배”> 기사 하나 나왔다. 이제 당신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일단 당신의 축구 이야기부터 들어보고 싶다. 원래 육상 선수였다고 들었다. 초등학교 때 무척 빨랐다. 학교에서는 적수가 없었다. 구대회에 나갔는데 당시 초등학생은 100m가 아니라 80m를 달렸다. 여기에서 엄청난 차이로 1등을 했다. 내가 마이클 존슨인 줄 알았다.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주기 시작했고 상도 주니 신이 난 것도 이때부터였고 공부를 못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아니 초등학교 4학년 산수가 뭐 그리 어렵나. 그런데 구대표로 서울시 대회에 나갔는데 거기에서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80m 결승에서 3등을 했고 주위에서 축하를 많이 보내줬지만 나는 그게 아니었다. 당시 165cm의 키에 거의 흑인처럼 까만 피부였던 신방학초등학교 녀석을 아직도 기억한다. 나보다 빠른 애가 있다는 사실에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그때 일찌감치 육상은 포기했지만 지금도 100m는 11초에 주파한다. 그런데 보통 발이 빠르면 공격수를 시키지 않나. 당신도 처음에는 공격수로 축구에 입문했나. 그렇다. 초등학교 때 브라질에 유학을 가 처음으로 축구를 시작했는데 그때는 내가 달리면 아무도 막을 수비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한국으로 돌아와 용인축구센터에서 테스트를 받았다. 당시 상급학교로 진학하게 될 초등학교 6학년과 중학교 3학년 학생을 뽑는 시기였는데 이미 중학교 1학년이었던 나는 선발 대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용인축구센터가 유망하다는 이야기에 아버지를 따라 일단 테스트부터 받기로 했다. 그러던 중 거기 한 분이 나를 눈여겨보셨고 수비수로 전향을 권하셨다. 자세히 이야기 해 달라. 테스트를 앞두고 한 분이 “너 수비 본 적 있어? 일단 수비 한 번 해보라”고 하셨다. 그때까지 수비수로 뛰어본 적이 없는데 그냥 시키는대로 할 수밖에 없었고 연습경기가 끝나자 그 분이 “아버지를 모시고 오라”고 하셨다. 그 분이 아버지께 “얘는 포지션 바꿔야한다. 원래 얘 나이 학생은 뽑지 않는데 포지션 바꾸면 받아주겠다”고 했다. 나한테는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내가 이미 또래 축구계에서는 호날두인데 수비를 한다는 건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아버지 생각은 달랐다. “일단 무조건 여기에 들어가야 한다”면서 “수비 한다고 하고 들어가서 공격하는 모습 보여주면 된다”고 하셨다. 나에게 수비수 전향을 권하신 그 분은 이런 말을 했다. “얘는 공격수 계속 하면 대학도 못 간다. 그런데 수비수하면 국가대표까지 할 수 있다.” 이 매의 눈을 가진 분이 누군지 궁금하실 것이다. 바로 허정무 감독님이었다. 놀랍다. 역시 ‘허카우터’라는 별명이 그냥 나온 게 아닌 모양이다. 그런데 또 놀라운 사실은 당신이 고등학교 시절 호주로 축구 유학을 떠났다는 점이다. 보통 유럽으로 많이 나가는데 특별히 호주를 선택한 이유가 있었나. 중학교 3학년 때 사춘기가 제대로 왔다. 또래 친구들이 오토바이 타고 다니고 그럴 때 나는 그런 짓은 안 했고 딱 하나만 했다. 그게 바로 리니지였다. 정말 축구보다 리니지를 열심히 했다. ‘현질’도 꽤 했다. 운동 시간 빼고는 리니지에만 빠져 있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그걸 아시고는 ‘쿨하게’ PC방 정액권을 끊어주셨다. 아버지가 나를 풀어주면 정신 차리고 그만둘 줄 알았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게 웬 떡인가” 싶어서 더 열심히 리니지만 했다. 방황을 많이 하던 시기였는데 중학교 때만 축구를 한 50번 정도 그만둔 것 같다. 나중에 커서 PC방 차리면 된다고 생각했다. 아버지께서 결국에는 내가 한국에 있으면 절대 정신 못 차릴 걸 알고 호주에 있는 김판근 축구교실로 보내버리셨다. 아버지께서 고민이 많으셨던 모양이다. 누나가 한 명 있는데 누나는 천재다. 지금은 MBA 과정을 준비하고 있다. 어머니가 중학교 국어 선생님이고 아버지도 참 머리가 좋다. 그런데 누나가 그 재능을 다 가져간 것 같다. 어릴 적 누나와 똑같이 재능, 눈높이, 구몬 다 해봤는데 나는 누나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거기에다가 리니지까지 접했으니 부모님 입장에서는 얼마나 답답했겠나. 호주가서 꼭 축구를 할 생각이 없으면 영어라도 배워오라고 하셨다. 이거 말 잘못 했다가는 예전 고종수처럼 될 수도 있다. 고종수는 리니지 발언 한 번으로 아직도 오해를 받고 있다. 그 이후로는 리니지를 끊었나. 호주에 가서 하고 싶어도 못했다. 거기는 인터넷 환경이 좋지 않아서 속도가 엄청 느리고 자주 끊긴다. 리니지 했다가 아이템 다 떨굴까봐 못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리니지를 접었고 이제는 손도 대지 않는다. 아버지가 정말 현명하셨다. 지금의 내가 있는 건 다 부모님 덕분이다. 경남에서 최고의 수비력을 선보이고 있는 김주영의 경기 모습. (사진=연합뉴스) 리니지를 끊었다니 다행이다. 무슨 소리…. 호주에 가서 FM을 시작했다. 저런…. 최악이다. 어디 하나에 빠지면 정신을 못 차리는 스타일이다. 호주에 처음 가 랭기지 스쿨에 다녔는데 이미 영어를 조금을 할 줄 알아서 별로 공부할 게 없었다. 그때 한 선배가 FM 하는 모습을 봤다. ‘뭐 저런 바둑판이나 쳐다보고 있느냐’고 무시했는데 몇 번 해보니 이거 신세계를 만난 느낌이었다. 호주에서 신나게 FM으로 시간을 보냈다. 나도 그 기분을 잘 안다. 그런데 리니지에 이어 FM이라니 이거 참 뭐라고 위로를 해야할지 모르겠다. 그러다가 우리나라로 치면 고등학교 2학년인 11학년이 되니 일반 고등학교에서 영어로 수업을 해 따라가기가 쉽지 않았다. 과제도 엄청 많고 아침 8시 반에 학교에 가 오후 4시까지 공부를 한 뒤 죽어라 뛰어 한국인 빌리지에 있는 훈련장에 가야했다. 운동이 4시에 시작인데 기구 준비해서 나오면 4시 반이었고 몸도 제대로 못 풀고 기온은 40도에 육박하고 미치는 줄 알았다. 축구 좀 해보려고 정신차렸더니 같이 뛰는 기성용은 청소년대표 가 있고 나는 FM만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인터넷 들어가보면 네티즌들이 ‘기성용 포텐이 터지네 마네’하고 있는데 내 현실은 시궁창이었다. 그때 또 한국에 있는 여자친구가 이별을 통보했다. 남자 생긴 냄새가 났지만 물증이 없어 의심만 하고 있다가 몰래 미니홈피에 들어가 봤더니 일촌명에 ‘시크릿’이라고 있더라. 젠장, 양다리였다. 바로 아버지한테 전화해서 한국에 들어가야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일주일 뒤에 표 끊고 돌아왔다. 그게 뭔가. 호주에 가서 어떤 희망을 안고 돌아올 줄 알았는데 거기에서 유학 생활 끝난 건가. 마음 잡고 그런 거 없었나. 내 호주 유학 생활은 거기에서 끝이다. 리니지 때문에 호주 갔다가 영어 좀 배우고 FM하다가 여자친구 문제로 돌아온 게 전부인가. 한국에 돌아와서도 계속 방황했나. 호주에서 배운 게 없는 건 아니다. 당시 김판근 축구교실 멤버가 잉글랜드로 잠깐 축구 캠프를 간 적이 있었다. 거기에서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맨유와 아스널 유소년을 완파하고 리그 무패 우승을 차지한 블랙번 U-17 팀과 경기를 했는데 이 놈들 정말 미친 듯이 잘하더라. 난 내 스피드를 믿었는데 흑인 선수와 대결에서 꽁무니만 쫓아다녔다. (기)성용이는 자책골 넣고 난리도 아니었다. 0-6으로 깨지고 생각이 많아졌다. 사실 여자친구 문제도 있었지만 호주에서 축구도 못하고 공부도 못하는데 그거 두 개를 다 벅차게 쫓고 있는 내 자신을 보면서 “이러다 죽도 밥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한국에 돌아가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하고 싶었다. 그래서 신갈고등학교에 가게 된 것인가. 그렇다. 이제 게임도 지겨웠고 여자 문제로 고민하는 것도 싫었다. 블랙번 유소년에서 패한 뒤 나도 축구를 잘해보고 싶었다. 신갈고등학교에 가니 후배지만 대단한 선수들이 많았다. 거기에서 절치부심했다. 한 학년 어린 이승렬, 김보경, 박준태, 김다빈 등 내가 백암중 3학년 때 원삼중 2학년이던 친구들이 다 신갈고로 왔다. 당시 얘네들은 고등학교 레벨이 아니었다. 이승렬이나 김보경은 뭐 꾸준히 잘했고 그때는 특히 지금 인천에서 뛰고 있는 박준태가 날아다녔다. 내가 본 애 중에 걔는 정말 최고다. 아무도 못 막는다. 도저히 있을 수가 없는 애다. 후반전에 들어와서 두 골 넣고 게임 끝내는데 뭐 어떻게 설명할 길이 없다. 그런데 막상 내 현실은 별로였다. 걔네가 잘하는 거지 내가 잘하는 게 아니지 않나. 대학교 스카우트가 경기 보러 오는 게 고등학교 3학년인 나 때문이 아니라 고등학교 2학년인 걔네들 보러 오는 거였다. 에이, 결국에는 축구 명문인 연세대학교 입학해 놓고 너무 겸손한 거 아닌가. 내가 무척 존경하는 당시 백암고등학교 서영석 코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너희들 다 연·고대 가고 아무리 못가도 성균관대나 한양대 정도는 갈 것 같지? 나중에 어떻게 되나 한 번 봐봐. 지금이라도 정신 차려라.” 정말로 고등학교 2학년 겨울 때 막상 전국대회에서 우승했는데 나한테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오는 건 한 번도 없더라. 이를 악물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고려대학교 2진 형들이랑 경기해서 3-0으로 이기기도 했고 고등학교 3학년 춘계 대회와 대구MBC 대회에서도 우승을 차지했다. 당시 대구MBC 대회에서는 수비수로 MVP까지 받아 주목을 받기 시작해 연세대학교에 입학하게 됐다. 대학 생활은 어땠나. 얌전히 공만 찼나. 방황의 결정판이었다. 이전까지 축구가 재미없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는데 이때 처음으로 축구가 재미없다고 느꼈다. 더 이상 열정이 없어 1년 동안 아예 축구를 그만뒀었다. 일반 학생 신분으로 학교를 다니다가 호주로 어학연수를 떠났고 그렇게 축구를 서서히 잊어갔다. 학교 다니고 놀고 그냥 평범한 학생으로 돌아가 축구선수의 꿈을 포기하던 때였다. 그런데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경남 조광래 감독님이었다. “축구를 그만두기에는 아깝다. 입단 테스트를 해보자”는 내용이었다. 당신과 조광래 감독의 운명은 그렇게 시작된 건가. 대단한 분이 나를 찾아줬다는 사실이 놀라웠고 입단 테스트를 위해 경남으로 갔다. 연습 경기에 투입될 것이라 생각하고 준비를 했는데 그냥 이야기만 나누다가 30분 만에 나를 돌려보냈다. “뽑아 줄 테니 준비하고 있어라. 지금 너를 노리는 팀이 몇 군데 있는데 잠수 타 있으라”고 하셨다. 실제로 모 구단 감독님께서 나한테 전화를 해 입단 문제를 상의하자고 하셨는데 전화기가 잘 안 터지는 척 하고 끊은 적도 있다. 조광래 감독님을 믿었기 때문에 기다렸고 결국 이듬해 3순위로 경남에 입단할 수 있었다. 프로 생활을 처음 시작하니 기분이 어땠나. 처음에는 좋았지만 감독님의 혹독한 훈련으로 여유를 즐길 틈도 없었다. 칭찬은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첫 시즌인 2009년에 후보로 경기에 따라다녔는데 당시 경남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시즌 초반 5무 6패였다. 그러다가 내가 강원전에서 기회를 잡았고 그날 경기에서 승리를 하고 서서히 팀도 살아나기 시작했다. 나도 자신감이 생겼다. 항상 경남은 13위나 14위를 다투는 팀이었는데 그때는 참 순위표 보는 맛이 있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순위표 쳐다보면서 ‘얘네랑 승점은 몇 점 차고 이번 경기 이기면 몇 계단 올라서고’ 그런 걸 따지면서 행복해했다. 당신은 연령대별 대표팀과 유독 인연이 없는 선수였지만 2009년 K리그에서 맹활약하며 서서히 이름을 알렸다. 대표팀 욕심이 날 법도 했을 텐데. 전혀 그런 생각도 해보지 못했다. 2009년 시즌 정규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전북에 패하고 플레이오프 진출이 좌절된 날이었다. 선수단 회식을 하고 클럽하우스에 돌아왔는데 감독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지금 방으로 가니 어디 가지 말고 있으라”고 하셨다. 감독님께서는 나를 찾아와 이런 말씀을 하셨다. “마, 이제 프로 2년차가 되는데 국가대표도 한 번 해야되지 않겠나.” 순간 머리가 쭈뼛 섰다. 꿈도 못 꾸던 현실이 이렇게 대화의 주제가 된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리고는 내 생애 최고의 시즌인 2010년을 준비했다. 2010년 당시 경남은 최고의 팀이었다. 그때를 떠올리면 어떤 기분이 드나. 동계훈련을 하는데 2군도 아닌 3군까지 떨어졌다. 발목을 다쳤고 사실상 주전에서 제외됐었다. 전지훈련이 이제 열흘 후면 끝나는데 연습 경기에 나가면 개판을 치는 상황이었다. 감독님도 “포어 리베로를 쓰려면 네가 잘해야 하는데 네가 이해력이 딸려서 안 된다”고 걱정하셨다. 그리고 개막전에서 울산한테 0-1로 패하고 전남 원정에서 1-1로 비겨 출발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이후 쭉 치고 올라갔다. 결국 안방에서 서울을 1-0으로 꺾고 구단 역사상 최초로 1위까지 올라서는 희열을 느꼈다. 우리도 “올해는 된다”고 확신했다. 정말 축구가 재미있었다. 하는 우리도 이 정도인데 보는 사람은 얼마나 재미있을까하는 생각을 갖게 됐다. 내 생애 최고의 순간이었다. 나도 당시 경남 축구에 감탄하던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렇다면 조광래 감독이 경남에 있다가 대표팀으로 옮겼을 때 심정이 어땠나. 솔직히 감독님께서 대표팀에 안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당시 경남은 리그 우승이 꿈이 아닐 정도로 경기력이 좋았고 어차피 내가 대표팀에 뽑힐 일도 없으니 그냥 우리와 함께 감독님이 경남에 남기를 바랐다. 그런데 감독님이 대표팀으로 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감독님도 꿈이 있을 것 아닌가. 내가 감독님의 부름을 받고 대표팀에 갈 것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조광래 감독님은 나한테 칭찬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너는 빠르기만하지 공을 못 찬다”고 하셨다. 애정이 있어서 그런 잔소리도 한 게 아닐까. 하나부터 열까지 다 널 위한 소리. 내 말 듣지 않는 너에게는 뻔한 잔소리 아닌가. 대표팀 발탁 당시가 궁금하다. 부산 원정 경기가 끝난 뒤 자고 있었다. 아침 7시에 전화가 왔다. 꼭두새벽부터 누군가 싶어 안 받으려고 했는데 실눈을 뜨고 보니 전화기에 대표팀으로 간 조광래 감독님 이름이 떠 있었다. 전화를 받았다. “어디고?” 감독님의 구수한 사투리에 “방인데요”라고 했더니 “운동 안 나가나?” 하시는 것이었다. “몸은 괜찮나?”라고 묻기에 “그냥 그렇죠 뭐”했다. 그랬더니 “그라믄 뽑으면 안 되겠네. 하기 싫은가보네”라고 하셔서 깜짝 놀랐다. “네?”하고 반문하자 “준비 잘하고 있으라”고 하시면서 자기 할 말만 다 하고 전화를 끊었다. 순간 멍해졌다. 이게 언젠가는 뽑을 테니 준비를 하고 있으라는 건지. 아니면 이번에 하는 대표팀 경기에 뽑는다는 건지 알 길이 없었다. 대표팀에 관심이 없으니 경기를 언제 하는지도 모를 때였다. 곧바로 인터넷에 접속해 대표팀 일정을 확인했다. 이란과의 평가전이 있는데 이 경기에 맞춰 뽑는다는 건지 아리송했다. 언제 대표팀 승선 소식을 공식적으로 들었나. 이거 미치겠는 거다. 다시 침대에 누웠는데 잠이 올 리가 있나. 그렇게 뒤척이고 있는데 한 기자분한테서 전화가 왔다. “대표팀 승선한 기분이 어때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미치고 팔짝 뛸 기분이었다. 너무 좋았다. 심장은 두근거리고 벌써 몸은 파주에 가 운동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곧바로 아버지한테 전화가 왔다. 아버지도 울먹거리셨다. 대표팀에 승선한 김주영의 모습. 그는 꿈에서도 그린 적이 없던 대표팀에 발탁되는 기적을 만들었다. (사진=연합뉴스) 하지만 이란전 이후 당신은 아시안컵 대표팀에 소집됐지만 불의의 부상을 당하고 말았다. 나는 축구를 하면서 크게 다친 적이 없다. 수술 해 본 적도 한 번 없다. 십자인대가 끊어질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도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 명지대학교와의 연습경기를 앞두고 딱히 다친 것도 아니었는데 무릎이 바늘로 쑤시는 것처럼 아팠다.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조광래 감독님과 함께 경남에 있다가 대표팀으로 온 가마 코치의 트레이닝 방식을 선수들이 잘 몰라 내가 시범도 보여야했고 대표팀에 막 들어왔는데 아픈 것 따질 여유도 없어 운동을 강행했다. 연습경기에서 오른쪽 풀백으로 섰는데 도저히 공격까지 올라갈 몸상태는 아니어서 위에 있던 (조)영철이에게 “나 도저히 못 올라가겠으니 공 주면 네가 돌파하라”고 했다. 그렇게 10분이 지났을까. 우려했던 큰 부상을 당하고 말았다. 부상 상황을 보다 자세히 설명해 줄 수 있을까. 경기 분위기가 굉장히 험악했다. 양 팀 모두 흥분한 상태였다. 상대팀의 긴 패스가 우리 진영에 떨어졌고 내가 등을 졌다. 아마 수비수들이 이런 동작 하는 걸 많이 봤을 것이다. 골라인 앞에서 상대 수비를 몸으로 막고 골 라인 아웃 시키는 장면과 비슷하다. 내가 상대 공격수를 몸으로 막고 (김)용대 형이 나와 처리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사인이 맞지 않았는지 용대 형이 나오질 않는 거다. 뒤를 힐끔보니 상대팀 공격수가 미친 듯이 달려오고 있었고 나는 용대 형에게 나와서 잡으라고 눈짓을 보냈다. 뒤늦게 용대 형이 나를 향해 뛰어나오고 상대 공격수도 나를 향해 뛰어와 내가 양 쪽의 충격을 몸으로 모두 흡수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정말 피하고 싶었는데 내가 몸을 사리면 곧바로 골을 먹을 수밖에 없어 ‘에라 모르겠다’하고 눈 질끈 감고 막고 있었다. 그리고는 충돌을 당해 큰 충격을 받고 나뒹굴었다. 이때 무릎에서 “우두둑”하는 소리가 났다. 주위 동료들도 그 소리를 들었다고 하더라. 조광래 감독님이 꾀병 부리는 걸 무척 싫어하셔서 아파도 참고 일어나려고 했다. 그런데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었다. 비명을 질렀고 2~3분 동안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 다치면서 바로 십자인대 파열일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나. 그런데 이상하게도 들것에 실려 나오니 괜찮은 것이었다. 무릎을 구부려봐도 고통이 없었다. 팀닥터에게 “아시안컵 갈 수 있을까”하고 걱정했더니 “넌 갈 수 있다. 무조건 같이 가야한다”고 하더라. 별 일 아닐 줄 알았는데 그래도 MRI를 한 번 찍어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해 웃으면서 병원으로 갔다. 조광래 감독님도 “돈 없으니 경남가서 찍으라”고 농담을 하셨다. 그냥 장난치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병원에 가 MRI를 찍더니 의사가 자꾸 “ACL 같다”고 하더라. ‘ACL? 아시아 챔피언스리그 이야기하는 건가’하고 있는데 알고보니 ACL이 십자인대를 뜻하는 용어였다. 거기에서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전방 십자인대 완파였다. 이제 막 대표팀에 승선해 이름을 알리던 순간이었는데 충격이 대단했을 것 같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아시안컵에 못나간다는 것이었다. (곽)태휘 형이 내가 대표팀에 들어가자 “나는 이제 지는 선수이니 네가 이 기회를 잡아라. 여기 아무나 들어오는 게 아니다”라고 응원해 주기도 했는데 이 현실을 믿을 수 없었다. 또한 나는 눈 주위가 7번이나 찢어졌어도 한 번도 축구가 위험한 운동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내가 만약 무리한 동작을 하다 다쳤으면 이해하겠지만 나는 수비수들이 제일 많이 하는 동작을 하다 이런 부상을 당했다. 앞이 캄캄했다. 전방 십장인대 파열이라는 큰 부상을 당하고 부축을 받으며 그라운드를 빠져 나가는 김주영. 그는 이 부상 이후 아직 그라운드에 서지 못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부상을 당한 날 밤, 어떤 생각을 했나. 병원에서 돌아와 서울로 올라갈 짐을 싸고 잠자리에 누웠다. 그런데 새벽 두 시가 되니 도저히 아파서 잠을 못 자고 방에서 데굴데굴 굴렀다. 무슨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다. 아침이 되자 코치진이 내 방에 찾아왔다. 내가 일어나서 예의를 갖추려고 했더니 조광래 감독님이 “그냥 누워있으라”고 하셨다. 코치진 모두가 내 침대 앞에서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외국인 가마 코치도 그 모습을 따라하고 있었다. 무슨 조문 온 사람들 같았다. 이불만 얼굴 위로 덮으면 딱 죽은 사람 꼴이었다. ‘이 사람들이 날 은퇴시키려고 하는 건가. 다시는 오지 말라고 하는 건가’ 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심각한 상황에서 자꾸 개그 욕심 부리지 말라. 당신은 한국에 남았고 대표팀은 아시안컵 참가를 위해 떠났다. 아시안컵 경기는 지켜봤나. 나 같으면 성질나서라도 안 봤을 것 같다. 공교롭게도 내가 서울에서 수술대에 오른 날 대표팀의 아시안컵 첫 경기가 열렸다. 수술을 하고 회복실에 있는데 다쳤을 때의 그 말 못할 고통이 계속 이어졌다. 척추는 마취를 했고 무통주사가 몸에 맞지 않아 속도 울렁거렸다. 너무 고통스러웠다. 그런데 우리 동료들이 뛰는 경기는 꼭 응원하고 싶었다. 감독님도 당시 여론상 아시안컵에서 우승하지 못하면 경질될 것이라는 이야기도 많았다. 회복실에서 혼자 붉은악마가 돼 열심히 응원했다. 대표팀에 빙의됐다. 나 같으면 내가 빠진 대표팀이 잘 되는 모습이 별로 좋을 것 같지 않다는 생각도 든다. 헤어진 여자친구가 잘 되면 얼마나 배 아픈가. 내가 가장 싫어하는 마인드다. 내가 비록 부상으로 나왔지만 그들을 응원하는 게 도리라고 생각한다. 입장을 바꿔 놓고 내가 경남에서 경기에 나서는데 2군 선수들이 그런 마음을 갖고 있다면 얼마나 짜증나겠나. 축구는 전술도 중요하고 체력도 중요하지만 뒤에서 받쳐주는 사람들이 얼마나 희생하느냐가 중요하다. 오랜 친구인 (기)성용이도 정말 우승에 대한 꿈이 간절했다. 축구는 조직력의 스포츠다. 나는 강원에 있는 (오)재석이를 무척 좋아하는데 걔가 이런 면에서는 정말 멋진 선수다. 그럼에도 당신은 무척 씩씩한 것 같다. 누가 보면 십자인대 끊어진 선수인지 모를 정도로 밝다. 나는 항상 입버릇처럼 십자인대 끊어지면 은퇴할 것이라고 했다. 동료들이 재활하는 모습을 보면 너무 안쓰러웠다. 절대 사람이 할 수 있는 짓이 아닌 것 같았다. 지금 이렇게 웃으면서 이야기하지만 나도 지금 사실 속으로는 엄청 스트레스 받는다. 병실에서 부모님과 함께 있을 때면 힘든 내색 안하려고 애도 많이 썼다. 다 때려 부수고 싶을 정도였다. 부모님을 생각하면서 힘든 표정 안하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 김주영은 독일에서 홀로 자기 자신과 힘겨운 싸움을 펼치고 갓 돌아왔다. 이제 조금만 더 지나면 그를 K리그에서 볼 수 있다. (사진=김형준) 수술을 마친 뒤 독일로 날아갔다. 여기에서부터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 아닌가. 우리는 점심시간을 기준으로 오전과 오후 이렇게 두 차례 재활 운동을 하는데 독일은 그게 아니다. 철저히 개인주의다. 재활 트레이너 시간이 맞춰 하루에 세 번 프로그램을 실시하는데 그게 자기들 마음대로다. 예를 들면 그 세 명이 오전 8시, 오후 2시, 저녁 7시밖에 시간이 안 나면 거기에 다 맞춰줘야 한다. 그게 매일 다르다. 혼자 생활하면서 밥하고 설거지하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재활 프로그램 시간 맞춰야 한다. 친구도 없지 길눈은 심각하게 어둡지 재활 운동 끝나면 집에 틀어박혀 멍 때리고 하루를 보냈다. 독일 갈 때 게임기를 하나 사 갔는데 원래 '위닝일레븐' 초보였지만 이제는 고수가 돼 돌아왔다. '위닝일레븐' 독일 전지훈련 간 사람은 처음 봤다. 독일에서 K리그는 자주 챙겨봤나. 유투브로 하이라이트 정도는 챙겨봤다. 뭐 골 장면을 보는 수준이라 K리그 돌아가는 상황을 잘 알지는 못한다. 원래 K리그에 나설 때는 우리팀 경기는 물론 상대팀 경기까지 다 챙겨보고 나가야 마음이 편해 꼼꼼히 체크하는 편인데 독일에 있는 동안에는 그렇지 못했다. 그렇군, 그런데 이건 진심으로 궁금한 건데 윤빛가람은 정말 K리그 안보나. 걔는 진짜 안 본다. 경남 클럽하우스에 가면 상대팀 경기를 CD로 구워서 특정한 장소에 놔둔다. 볼 사람들은 거기에서 가져가서 보면 된다. 나는 항상 보는 편인데 그래도 후배 챙겨주겠다고 윤빛가람한테 가져다 주면서 “너 이거 봤어?”했더니 “안 봤는데요”라고 하기에 CD를 내밀었다. “그러면 봐”했더니 아주 쿨하게 “저 안 봐요”하더라. 그러면 CD를 내밀었던 내 손은 얼마나 민망한가. (박)주영이 형도 축구 보는 거 정말 싫어한다. 챔피언스리그 결승도 안보고 자기 나온 경기도 안 본다. 재미없단다. 자기가 짱인줄 아는 모양이다. 평소 윤빛가람을 자주 디스한다. 당신에게 윤빛가람은 어떤 존재인가. 처음에 걔가 우리팀에 들어온다고 했을 때 주위에 많이 물어봤다. 어떤 성격인지 궁금했다. 그랬더니 다들 “뭐 괜찮아요. 그냥 조금 건방진데 한 번 겪어봐요”하더라. 겪어봤더니 정말 애는 안 나쁘고 착하고 괜찮은데 건방진 건 맞는 거 같다. 다 친하고 애정이 있어서 그런 소리 하는 거 다 안다. 최근 경남은 다소 부진하다. 그 원인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선수 몇 명만 바뀌어도 조직력에 문제가 생기는데 우리팀은 지금 감독이 바뀌었다. 이 부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조광래 감독님이 처음 왔을 때도 별의 별 욕을 다 들었다. 시간이 필요하다. 최진한 감독님도 이제 자신이 원하는 축구를 시작하려던 차에 루시오나 몇몇 선수들이 부상을 당해 잠시 침체기를 겪는 걸로 보인다. 부상 선수가 돌아오고 조직력이 갖춰진다면 충분히 해볼 만하다고 생각한다. 당신과 함께 지난 시즌 멋진 활약을 펼쳤던 전준형은 이적했고 이용기는 부상을 당했다. 이제 경남에 복귀하면 새로운 외국인 선수 루크와 발을 맞춰야 한다. 적응에는 문제가 없을까. 루크가 잘하고 못하고는 그리 크게 중요하지 않다. 그의 마인드가 중요하다. 자기가 독단적으로 플레이 해 커뮤니케이션이 잘 안 되면 참 골치 아프다. 그런데 동료들한테 이야기를 들어보니 루크는 정말 성격 좋고 믿음직하고 착하단다. 별명이 ‘바보 천사’라고 하던데 일단 돌아가서 나만 잘하면 별 문제가 없을 것 같다. 복귀는 언제쯤으로 예상하고 있나. 당신을 어서 빨리 그라운드에서 보고싶다. 원래는 7월말로 생각했었는데 조금 더 여유를 가지고 재활에 충실하고 싶다. 아마 8월이 되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동안 많이 방황한 것 같다. 그럼에도 계속 축구를 하는 이유가 있다면. 축구를 그만둘 위기가 많았다. 그런데 나는 그라운드에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 원래 어디 하나에 빠지면 거기에만 집중하는 성격이다. 경남에 처음 와서 <피파 온라인> 게임을 했는데 내 능력치가 쓰레기인 것이었다. 어떻게 (김)병지 삼촌보다 달리기가 느릴 수 있나. 경남에서 내 능력치가 제일 안 좋더라. 900짜리를 언제 키우나. 결국 아이템 사서 레벨을 200까지 키웠고 ‘금카’까지 만들었다. 그래도 안 좋은 건 어쩔 수 없어 때려 쳤는데 얼마 전에 잠깐 확인해보니 지금은 능력치가 1200정도 되더라. 뿌듯했다. 하나에 빠지면 앞뒤 안가리고 집중하는 이 ‘오타쿠 정신’을 앞으로는 축구에서만 발휘하고 싶다. 힘든 재활 기간 동안 당신을 버티게 한 원동력이 있다면. 2009년 말부터 2010년 전반기까지 정말 경남에서 신나는 축구를 했다. 항상 우리끼리 K리그가 유럽처럼 겨울에 시작했다면 경남이 우승했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때는 경기에 나가면 질 거라는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고 정말 즐기는 축구를 해 승리를 따냈다. 독일에서 외롭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지만 그걸 참을 수 있던 원동력은 바로 당시의 즐거운 기억 때문이다. 그리고 함께 울고 웃고 동료들과 팬들을 생각하면서 버텨냈다. 올 시즌을 남들보다 늦게 시작하게 됐는데 개인적인 목표가 있나. 부상이 없었으면 좋겠고 비록 잘하진 못했지만 다치기 전과 같은 경기력을 보여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여전히 그 느낌을 기억하고 있다. 또한 누군가 인터뷰 할 때마다 팀이 6강 플레이오프에 오르는 게 목표라는 걸 보면 “식상한 말 좀 그만했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정말로 나 역시 6강 플레이오프 진출이 목표다. 휴가를 조금 늦게 가더라도 7위보다는 6위가 낫다. 마지막으로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팬들에게 한 마디 해달라. 날 위해 새벽기도 좀 나가줬으면 좋겠다. footballavenue@nate.com |
첫댓글 미치겠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태어나서 본 인터뷰 중 가장 웃긴듯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저도 진짜 태어나서 본 인터뷰중 가장 웃겼어요 리니지,FM,윤빛가람,박지성드립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박지성을 아는가 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 웃기네요. 리니지 끊으라고 호주보냈더니 FM을시작해 ㅋㅋㅋ
늑대퇴치하려고 호랑이 불러들인격 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윤빛가람 디스 ㅋㅋㅋㅋㅋ
경남에 처음 와서 <피파 온라인> 게임을 했는데 내 능력치가 쓰레기인 것이었다. 어떻게 (김)병지 삼촌보다 달리기가 느릴 수 있나
박지성드립쩐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박주영디스도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미치겠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호주에 가서 FM을 시작했다.
저런…. 최악이다. 호주에 가서 FM을 시작했다.
저런…. 최악이다. 호주에 가서 FM을 시작했다.
저런…. 최악이다. 호주에 가서 FM을 시작했다.
저런…. 최악이다. 호주에 가서 FM을 시작했다.
저런…. 최악이다.
새벽기도를 나가야겠구만
ㅋㅋㅋㅋㅋㅋㅋㅋ 이거 인터뷰 쩌네 ㅋㅋㅋㅋㅋㅋㅋ
인터뷰돋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날 위해 새벽기도 좀 나가줬으면 좋겠다.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