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 평전> -조영래 著
역사적 인물을 평가하는 ‘전기’를 ‘평전’이라 한다. 한 인물을 기리기 위해 쓴 전기와는 달리 평전은 한 사람을 통해 당시 시대를 들여다보면서 그 사람의 업적과 역할을 평가하는 것이 목적이다. 따라서 우리는 평전이라는 글에 두 가지 방향으로 접근이 가능하다. 하나는 ‘인물의 시대적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인물의 관점에서 바라본 시대상’이다. 그러나 이는 꼭 따로 떨어져 있는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인물이 바라본 시대상에 의해 인물의 행동이 결정되고 그러한 행동이 곧 인물의 시대적 의미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깨알같은 잔글씨로 씌어진 한 뭉치 노트가 책으로 만들어 진 후 ‘전태일 평전’이란 이름을 얻기까지는 10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했다.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라는 긴 제목의 책은 독재정권 하에서 판매금지-정확히는 시판 중지 종용-처분을 당했다. 그러나 이 책은 탄압과 착취의 계절을 살던 독자들의 분노와 호응 속에 1990년 당당히 ‘전태일’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오늘날까지 현대의 고전으로 사랑 받고있다.
1970년 11월 13일 한 청년 노동자가 분신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이 무엇인지 사람들은 전혀 관심이 없었다. 단지 그가 화염을 온몸에 안은 채 죽어갔다는 사실만이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졌을 뿐이다. 죽음의 공연만이 자신의 절박함을 알릴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던 암울한 시대, 그는 누군가는 걸어야 했던 그 참혹한 길을 선택했던 것이다. 책은 전태일의 어린 시절을 시작으로 그가 자라온 과정을 그려나가며 그가 일회용품 같은 노동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설명한다. 가장 낮은 곳에 있어야 했던 그의 삶은 언제나 버거운 노동 속에 짓눌려야 했지만 한편으로 배움에 대한 열정과 생에 대한 긍정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이른 새벽 여관을 돌며 구두닦이 일을 하던 전태일은 1964년 평화시장 노동자로 취직하게 된다. 한 달 월급은 1천 5백 원. 좁고 불결한 공간에서 하루 14시간 노동. 갖은 악조건을 겸비한 평화시장의 다락방 작업장은 책의 표현대로 ‘노동지옥’이었다. 끝도 없이 되풀이되는 지긋지긋한 평화시장의 생활은 그에게 ‘푸른 하늘을 쳐다볼 권리’마저 빼앗아 갔으며 고학을 그리던 ‘내일에의 꿈’은 숨막히는 노동의 질곡 속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학교에 있어야 할 어린 여공들이 단지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휴일도 없이 하루 14시간의 노동을 강요받는다.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만든 것일까? 그는 자신을 규정하는 주변의 모든 억압들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왜 밑바닥 인생들은 항상 밑바닥 생활을 하고 있는가?’ ‘왜 고통 받는 사람들은 항상 고통만 받고 있는가?’ 그는 서서히 알아갔다. 어째서 조직된 소수가 다수를 지배할 수 있는지를. 어째서 순응만이 현실의 생존을 보장할 수 있는지를. 어째서 세상은 ‘착실’, ‘겸손’, ‘온건’, ‘성실’ 따위의 말들에 온갖 아름다운 찬사를 퍼붓는지를. 그는 마침내 인간으로서의 존립을 위협하는 한계 상황에 내몰려 이 수많은 질문에 대한 저항을 시작한다. 현실의 질곡이 결코 인간이 뚫을 수 없는 금성철벽이 아니라는 확신과 함께. 전태일은 재단사가 되어 어린 여공들의 편에 서기도 했고 힘들게 모은 돈으로 근로기준법을 구해 열심히 읽기도 했다. 평화시장 노동자들을 모아 ‘바보회’를 조직해 보다 구체적인 노동운동에 대한 구상을 하기도 했고 직접 현장을 조사해가며 정리한 노동실태보고서를 들고 노동부의 관리를 찾아가기도 했다. 물론 세상은 그의 순진함을 멸시 했지만 그 역시 호락호락한 상대만은 아니었다. 계획했던 시위가 무산되고 믿었던 형사에게 배신당한 후 그는 최후의 일격을 위해 몸에 석유를 붓는다.
작가는 남의 등을 밝고 올라가고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는 절대로 손해를 보지 않는 ‘똑똑한 사람’이나 그러한 사람 앞에서 적당히 타협할 줄 아는 ‘현명한 사람’이 되기를 거부한, 참으로 인간의 길을 걷기 원하는 ‘바보’들의 생각을 ‘전태일 사상’이라 이름 짓고 책 4장에 소개했다. 그가 말한 전태일 사상이란 무엇인가.
첫째, 전태일 사상은 밑바닥 인간의 사상이다. ‘밑바닥 인간’과 ‘사상’은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밑바닥에서 만들어졌기에 그것은 어떤 고명한 철학자의 다변多變보다도 생생하고 감동적인 진실을 담고 있다. 둘째로 전태일 사상은 각성된 밑바닥 사상이다. 언제나 억압받았던 자신의 삶을 거꾸로 바라보고 강요되어왔던 가치관을 전면적으로 거부하는 사상. 자신이 느끼고 자신이 생각하고 자신이 보는 주체적인-따라서 ‘각성된’-민중의 사상이다. 셋째로 전태일 사상은 기초현실에 대한 철저한 비판으로 완전한 거부-완전한 부정-의 사상이다. 한 인간의 참된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한 도구로만 인식하는 기존 사회는 그에게 완전히 무가치하고 완전히 부정되어야 하며 완전히 추악한 덩어리였다. 넷째로 전태일 사상은 행동의 사상이다. 그가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서로가 서로의 ‘전체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전태일이 남긴 유서에는 “나를 아는 모든 나여, 그리고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여”라는 문구가 나온다. 한 인간도 남김없이 모두가 인간적인 관심과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사회는 그 혼자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의 인간으로서의 존립 조건임을 알고 있었기에 그는 행동해야만 했다.
그의 눈에 비친 6,70년대 한국은 노동자의 울분과 탄식을 먹고 자라나는 괴물 같은 자본주의시대였고,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최소한의 생존을 위한 요구조차 받아들여지지 않는 억눌린 시대였다. 그는 어떤 아름다운 이론과 명쾌한 논리로 세상을 바라보지 않았다. 단지 자신을 옭아매는 끔찍한 고통에 대한 의심과 그러한 고통 속에 신음하는 나약한 동심童心을 위한 투쟁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대인식은 그의 행동-정당한 몫을 갖기 바라는 투쟁, 침묵을 뚫고 부조리한 현실을 드러내는 투쟁, 더 나아가 인간 존엄성을 회복하기 위한 투쟁-을 불러왔고 이러한 투쟁이 전태일의 시대적 의미가 되었다. 그는 한국 노동운동 그 자체였고 고속 성장 시기에 외면당하고 버림받은 민중들의 의식意識이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오늘의 우리에게 전태일은 어떤 의미인가. 작가는 ‘오늘 그들은 약할지라도 내일은 반드시 강성强盛해질 것이다’라고 했는데, 이 말이 적어도 오늘의 수구 언론의 지면에서는 이루어진 듯하다. 노사의 갈등이 있을 때마다 강성노조를 비난하는 사설이 오르내리기를 반복하는 모습을 보면 과연 작가의 예언이 적중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그렇게도 강성한 노조를 갖고 있는 노동자들은 여전히 전태일이 최후에 걸어야 했던 길을 선택한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 끝에는 종종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언론의 외면과 사람들의 무관심속에 그 죽음의 씨앗은 싹을 틔우지도 못하고 무참히 짓밟혀버리곤 한다.
2006년 3월 28일. 화물연대가 총파업에 돌입하자 신문들은 한결같이 위태로운 논조로 물류대란이 우려된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정작 화물연대의 요구가 무엇인지 상세히 전하는 신문을 찾기는 어려웠다. 서울-부산을 왕복할 때 받는 운송료는 39만원인데 기름 값만 35만원이 나온다고 한다면 누가 놀라지 않겠는가. 여기에 알선 수수료를 제외하고 나면 오히려 적자가 생긴다. 화물운송 노동자 1인당 평균 가계부채가 4천 만 원에 달하고 신용카드 빚이 2천 만 원에 이른다는 점을 확인한다면 열심히 일을 하면 할수록 빈곤이 심화된다는 말은 더 이상 역설이 아님을 실감할 것이다. 그동안 몇 차례 있었던 파업을 통해 정부와의 협상을 이끌어내기도 했지만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으며 요구는 묵살되었다. 오늘날 우리에게 전태일 사상이 유효한 것은 우리가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여전히 민중이 외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루쉰이 말하길, ‘먹으로 쓴 거짓말은 피로 쓴 진실을 감추지 못한다.’ 전태일이 말한 진실은 그의 피로 쓴 것이다. 전태일이 바라던 세상이 왔을 거라 믿고 싶었지만 무차별적인 폭력 진압과, 가압류, 이어지는 노조위원들의 투신자살과 외국인 노동자들의 현실 그리고 강성노조를 비난하는 수구언론의 선동 앞에서 전태일의 싸움은 여전히 계속됨을 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가 피로 썼던 진실은 삶이 고통스럽고 야만적이라는 일상의 관찰이 아니라 함께 걸어간다면 언젠가 얻게 될 새로운 세상-참으로 인간다운 삶을 보장받는 세상-을 향한 희망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가 ‘행동’할 수 있었단 말인가.
어쩌면 좀 잔인한 것 같지만
내가 지나온 길을 자네를 동반하고 또다시 지나지 않으면
고갈한 내 심정을 조금이라도 적실 수 없을 것 같네.
내가 앞장 설테니 뒤따라오게.
-전태일의 1969년 9월의 수기中
첫댓글 위대한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