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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 탄 김 장군'이 통탄하며 외쳤다… "제발 그만 좀 싸우라!"
조선일보
소설 '연해주'를 집필한 사회학자 송호근이 본지와 인터뷰를 가졌다. 송호근은 “100년 전 이념과 노선을 좇아 사분오열했던 독립운동에 실망한 김경천이 분열과 혐오를 반복하는 오늘의 한국 사회를 보며 ‘제발 좀 그만 싸우라’ 외칠 것 같다”고 했다. /김지호 기자
입력 2024.10.28. 00:18업데이트 2024.10.28. 07:20
https://www.chosun.com/opinion/2024/10/28/627BVEFJXVGOTNGZDXIRCD5RVA/
[김윤덕이 만난 사람]
<<잊힌 독립투사 김경천의 삶
소설 '연해주'로 쓴 송호근 교수>>
'軍神'으로 불리며 만주·연해주
누볐던 김경천 장군의 위패
순국 82년 만에 현충원에 봉안
러·일·중 강대국 둘러싸여
노선 좇아 사분오열한 독립군
이승만이냐, 김구냐 다투는 우리
100년 전 연해주 실패서 교훈 얻어야
김경천 장군의 위패가 최근 서울 현충원에 봉안된 것에 대해 송호근은 “우리가 이제라도 연해주 독립운동가들에게 주목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반가웠다”고 말했다. /김지호 기자
자작나무 숲으로 하염없이 쏟아지던 달빛이 그 시작이었다. 100년 전 볼셰비키 군대에 체포돼 강제수용소로 향하던 독립군들이 달빛에 흠뻑 젖은 이 철길을 서럽게 달렸을 것이다.
그중에 김경천이 있었다. 1920년대 ‘백마 탄 김장군’ ‘군신’으로 추앙받으며 만주와 연해주를 누빈 항일 투사였으나 소비에트 혁명의 반역자, 일본 첩자라는 누명을 쓰고 악명 높은 우랄산맥 수용소 군도에서 죽어간 비운의 인물이다.
지난 17일 김경천의 위패가 서울 현충원에 봉안됐다. 순국 82년 만이다. 잊힌 독립투사 김경천을 소설 ‘연해주’로 되살려낸 사회학자 송호근은, “100년 전 이념과 노선을 좇아 사분오열했던 독립운동에 실망한 김경천이 분열과 혐오를 반복하는 오늘의 한국 사회를 보며 ‘제발 좀 그만 싸우라’ ‘우리의 실패를 반복하지 말라’ 외칠 것 같다”고 말했다.
◇ 왜 연해주인가?
-어쩌다 김경천에게 매료됐나?
“이념적 편 가르기와 분열이 지속되는 이 시대에 대의를 위해 자신의 모든 걸 버린 그에게서 위로받고 싶었다.”
-대중에겐 생소한 이름이다.
“구당 유길준의 사상과 행적을 연구하던 중 이기동 교수의 ‘비극의 군인들’이란 책을 접했다. 보기 드문 비록(祕錄)인데, 거기 수록된 ‘김광서의 꿈과 모험’을 읽고 소설을 구상하게 됐다. 김광서는 김경천의 본명이다.”
-김경천은 황실 유학생으로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장교였던데.
“1905년 고종 밀서 사건과 연루된 혐의로 살해된 김성은 부령(중령)이 김경천의 친형이다. 경천은 천황의 군대에 충성을 맹세한 군인이었지만 식민 통치에 신음하는 조선을 보며 괴로워하다 3·1 만세 운동 직후 망명해 항일 투쟁에 나선다.”
-투쟁의 무대가 만주나 북간도가 아니라 러시아 연해주라는 게 새로웠다.
“연해주는 항일 운동의 발상지였다. 조선인이 연해주로 이주한 게 1863년부터라 블라디보스토크에는 최재형 등 재력이 있는 조선인들이 있었고, 이들이 독립운동 자금을 대면서 수많은 독립군 부대가 생겨났다. 안창호도 중국보다 연해주가 더 중요한 근거지가 될 거라 판단하고 정재관과 이상설을 연해주로 보내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 독립운동 기지를 만들게 했다.”
-그런데 연해주에선 청산리 대첩, 봉오동 전투 같은 큰 승리가 없었다.
“1910년대부터 1922년 말까지 연해주에서 벌어진 항일 투쟁은 당시 독립운동의 모순과 딜레마를 극단적으로 표출하고 있다. 러시아, 일본, 중국 등 강대국에 둘러싸인 채 민족주의, 사회주의, 공화주의로 노선 투쟁 하며 분열했던 연해주 독립군은 대부분 좌절하고 실패했다.”
-주로 볼셰비키 군대와 연대해 싸웠더라.
“연해주 독립군들은 러시아만이 조선의 독립을 도울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볼셰비키 혁명군은 일본이 퇴각하자 조선 독립군을 무장해제 시킨 뒤 강제수용소로 보냈다.”
1911년 일본 육군 기병장교 시절의 김경천 장군(위)과 1939년 소련에서 간첩죄로 체포된 직후의 초췌한 모습(오른쪽 아래). 김장군 왼쪽은 아내 유정화다. 왼쪽 아래 사진은 1921년 3월 연해주 빨치산 활동가 모임으로 김 장군이 맨 뒷줄 왼쪽에서 셋째에 서있다. 당시 연해주 포시예트 훈춘 한인 빨치산 총사령관이었으나 공산당원이 아닌 탓에 뒷줄에 섰다. /국가보훈부
◇ 말만 무성했던 지식인들
-볼셰비키와 연대했다는 이유로 김경천 등 연해주 독립군들이 항일운동사에서 소외된 걸까.
“일단 이들을 연구할 자료가 턱없이 부족했다. 소비에트가 1925년 이후 우리의 항일 운동사 자료를 다 폐기했을 가능성이 높다.”
-’진짜 김일성’으로도 알려진 김경천은 볼셰비키 당원이었나?
“그의 일기 ‘경천아일록’을 보면 ‘나는 사회주의자도 공산주의자도 아니다. 조선 독립을 위해 싸우는 자유주의자다’라는 표현이 나온다. 러시아 적군이 독립군을 참살한 사건(자유시 참변)을 보며 일본 군국주의에 못지않은 러시아의 광기와 폭력성에 치를 떨기도 한다. 훗날 김경천이 ‘인민의 적’으로 낙인찍혀 강제수용소에서 죽어간 이유다.”
-’경천아일록’엔 명문(名文)이 많더라.
“카자흐스탄에 살던 김경천의 유족이 2005년 까라간다 정보국 문서보관소에 신청해 구입한 그 일기장은 연해주 항일 운동사를 살피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다. 자신의 유년기와, 연해주 항일 투쟁 시기를 일기 형식으로 기록했는데, 일본에서 대학 수준의 교육을 받은 경천의 문장력이 뛰어난 데다 곳곳에 자신이 지은 시문과 지도를 곁들여 당시 상황이 생생하게 읽힌다.”
-어느 대목이 인상 깊었나?
“1922년 러시아에 의해 무장해제된 독립군들이 ‘겨울을 당하여 각지에서 걸인같이 방황하는 것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다’고 쓴 대목들.”
-지청천처럼 김경천도 상해로 가면 되지 않았을까?
“지청천의 권유로 상해를 방문했지만 김경천이 마주한 건 분열과 분파였다. 총·칼 들고 한번 싸워본 적 없는 사람들이 모여 말만 무성하게 해대는 모습에 실망한 채 연해주로 돌아온다. 15만 조선인을 떠날 수 없다는 생각도 컸을 것이다.”
-소설 속 다 같이 ‘독립군 아리랑’을 부르는 장면이 뭉클했다.
“재력가 최재형은 체코 군인들에게 사들인 무기를 숨겨뒀다가 독립군 부대에 나눠줬다. 그 무기를 들고 전장에 나서는 병사들 나이가 열아홉, 스물이었다. 변변히 먹지도 입지도 못한 채 나라를 되찾겠다는 각오로 싸우는 전투 장면을 묘사할 땐 며칠씩 몸살을 앓았다. 동시에 입만 나불대는 지식인의 한계를 절감했다. 그 시대에 태어났다면 나도 총과 칼을 들고 싸울 수 있었을까.”
-우연인지, 소설이 8·15 경축식이 둘로 쪼개져 열린 시기에 나왔다.
“서로 다른 길이지만 같은 목적을 향해 걸어갔던 사람들, 대의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그분들을 생각하면, 여전히 이념·정파 싸움에 몰두하는 우리가 부끄럽다. 연대해도 모자랄 판에 이승만이냐 김구냐를 다투는 우리가 부끄럽다.”
지난 17일 오후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위패 봉안관에서 열린 독립유공자 7명 위패 합동 봉안식에서 독립유공자 김경천의 외증손녀 김올가씨가 추모편지를 낭독하고 있다. 국가보훈부는 이날 러시아와 카자흐스탄 지역에서 희생된 김경천(1998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오성묵(2009년 애국장), 한창걸(2007년 애족장), 김미하일(2010년 애족장), 최성학 (2006년 건국포장), 한성걸(2008년 건국포장), 이영호(2010년 건국포장) 등 독립유공자 7명에 대한 합동 위패 봉안식을 진행했다. 국외 독립유공자에 대한 합동 위패 봉안식은 국립묘지가 조성된 이후 이번이 처음이다. /뉴스1
◇ ‘아버지 죽이기’서 ‘아버지 찾기’로
-사회학자가 왜 소설을 쓰시나?
“사회과학은 인간과 사회를 설명하려 하지만 ‘이해’는 못 한다. 인간을 이해하려면 문학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회과학자가 지도를 만드는 사람이라면, 인문학자 혹은 문학인은 그 길을 가는 사람이다.”
-’강화도’ ‘다시, 빛 속으로’ ‘연해주’까지 소설을 세 편 발표했는데, 한국인의 역사적 정체성의 변화를 탐구해 온 송호근의 역작 ‘인민의 탄생’ ‘시민의 탄생’ ‘국민의 탄생’ 3부작의 소설 버전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더라.
“세 작품이 탄생 3부작과 딱 맞아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봉건시대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시기를 탐구하면서 인민, 시민 국민의 삶에 눈 떠가는 과정을 소설로 형상화해 보려고 노력한 것은 사실이다.”
-탄생 3부작에 몰두한 이유가 ‘아버지 죽이기’에서 아버지를 찾아야 하는 이율배반적 상황에 직면했기 때문이라고 썼다.
“우리 70년대 세대는 한국의 못난 과거가 폭압적인 현재를 낳았다고 믿었다. 우리의 과거는 결핍과 열등감의 수원지라 믿었다. 그런데 조선 시대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아버지, 할아버지의 시대를 알아야 현재 우리 사회가 부닥쳐 있는 난제들을 풀 수 있는 거였다. 20세기 한국의 기원을 찾아 역사의 미로를 헤매기 시작한 이유다.”
-무엇을 찾았나?
“이를테면 한국 사회에서 타협이 잘 안 되는 이유는 조선 시대 500년을 이어온 과거 시험에 있었다. 1년에 세 번 과거를 봤고, 한 번 볼 때마다 1만5000명이 전국에서 몰려들었다.
채점 기준은 누가 사서삼경의 원문에 맞게 쓰고 해석했느냐였다. 거기엔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만 있지, 변증법이라는 게 없다. 정당성 투쟁이 DNA인 사회에 정의는 없다. 그것은 타협을 통해 도달하는 개념이다. 시비를 가리고 정답을 찾는 데만 몰두해 온 것이 오늘의 경쟁 사회, 경쟁 교육을 낳았다.”
-’나는 시민인가?’ 하는 화두도 던졌다.
“대한민국이 생기고 80년이 돼가는데 변한 건 딱 한 가지, 잘살게 된 것뿐이다. 우리의 시민 의식이 형성된 과정은 왜곡의 연속이었다. 시민의 핵심은 권리와 책임인데 우리는 권리 주장에만 익숙해져 있다. 그나마 우리가 학교 다닐 때는 사회에 헌신하는 사람이 되라는 훈화를 들었는데 요즘엔 종교인들도 그런 얘기 잘 안 한다. 자유만 있고 책임은 실종됐다.”
-정치는 더 나빠지고 있는데.
“586세대가 물러나는 것이 유일한 희망이다. 이념과 진영을 사수하는 것이 인생의 신념으로 굳어져 있는 이 세대는 민주주의를 출산했지만 육아하는 데는 실패했다. 민주주의를 죽일 수도 있다.”
왼쪽은 유길준의 ‘서유견문’ 초판본. 오른쪽은 유길준의 세면도구.
◇ 100년 전 유길준의 관복
-가수 조용필에게 ‘어느 날 귀로에서’라는 노랫말을 써줘 화제가 되기도 했다. 요즘도 작사를 하시나?
“2년 전인가, 한번 더 써준 적이 있는데 퇴짜 맞았다(웃음).”
-조용필의 오랜 팬이라고 했더라.
“유학 시절 힘들 때마다 테이프가 닳도록 들은 노래가 ‘창밖의 여자’다. 그는 동의하지 않겠지만, ‘창밖의 여자’는 시대를 담은 노래였다. 우리는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를 ‘누가 민주주의를 아름답다 했는가’로 바꿔 부르기도 했다(웃음).”
-’그들은 소리 내 울지 않는다’의 저자로 송호근을 기억하는 사람도 많다. 50대 인생 보고서였는데 지금은 60대가 된 그들이 현재에도 일을 가장 많이 하는 연령층으로 최근 보고됐다.
“곧 손녀가 태어난다. 그래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다. 부모를 부양한 마지막 세대이면서 자식에게는 부양받지 못하는 우리 세대는 이제 손자들 돌볼 준비를 하고 있다. 전 연령대에서 일을 가장 많이 하고 있다는 건 노후 준비가 돼 있지 않다는 방증이다. 그래서 슬프다.”
-다음 소설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김경천을 우회해 다시 유길준이다. 미국에서 유학하던 20대에 한 박물관에서 유길준의 관복을 보고 울컥했다. 유길준이 1856년생, 내가 1956년생으로 100년 차이인데, 그는 왜 100년 전 이곳에 왔을까 하는 질문을 27세였던 그때 처음 가슴에 품게 됐다. ‘서유견문’을 읽을 땐 눈물이 났다. 그가 왜 제1장에 ‘세계 지리’부터 소개했는지 이제는 안다. 갑오개혁의 실패로 망명한 뒤 도쿄서 1000킬로 떨어진 절해고도로 유배 간 유길준의 심경에서 소설을 시작해 볼까 한다.”
잊혀진 연해주의 독립운동가 김경천 장군의 삶과 투쟁을 소설 '연해주'로 되살려낸 사회학자 송호근 교수. /김지호 기자
☞송호근
1956년 경북 영주 출생.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사, 하버드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포스텍 석좌교수를 거쳐 현재 한림대 석좌교수 겸 도헌학술원 원장이다. ‘인민의 탄생’ ‘시민의 탄생’ ‘국민의 탄생’ 등 여러 저술이 있으며, 장편소설 ‘강화도’ ‘다시, 빛 속으로’를 발표했다. 이병주국제문학상, 지훈학술상을 수상했다.
김윤덕 기자
2024.10.28 01:03:00
송호근 교수님은 진짜 학자시네요. 이런 분이 존경받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송호근 교수님, 감사합니다. 일제 치하라는 그 절망의 상황에서도 우리 조상들은 자기를 희생하며 독립운동을 하면서 죽어갔습니다. 그런데 지금 선진국이 된 대한민국에서 우리는 자기 이익, 자기 패거리 이익만 따지면서 해악만 끼치는 정치질을 해대고 있습니다. 통탄스러운 현실입니다. 기껏 나라를 되찾아주고 또 경제 발전을 시켜주니, 이제 와서 저질, 악질 정치꾼들이 대한민국을 말아먹고 있습니다. 다시 박정희 장군이 나와서 싹 다 갈아엎어야 할 상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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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8 04:01:01
진실을 깊이있게 알려주시느라 애 많이 쓰셨습니다.진보와 민주 탈 쓴, 입만 열면 썩은내 풍기는 북괴 바라기의 시각과는 전혀 다른 올곧음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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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8 05:34:02
송호근 교수님의 건필을 기도 드립니다. 오래오래 좋은 글을 남겨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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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8 07:46:38
조선인의 DNA를 가장 잘 이해하고 분석한 자들이 바로 일본인 이었다. 무지하고 게으르며 허세에 쩔어있고 실용보다 체면을 중시하고 집단적 이기주의의 근본에는 뿌리깊은 반상의 전근대적 노예시스템과 족보와 가문, 유교적 통치시스템에 길들여져 조금만 선동하면 패가 갈려 서로 물고 뜯는다는 것을 이미 120년 전에 간파했다. 미제역시 이러한 사실을 알고 힘 안들이고도 쉽게 이 민족을 통치 할 수 있는 방법을 터득했다. 이러한 민족성은 개화 될 수 있을까? 불가능 하다고 본다. 소수의 지성인들은 존재 할 수 있지만 절대의 무식과 무지한 중우가 존재하는 한 식민지 노예시스템의 전형은 계속 유전될 것이다. 윤석열을 뽑아놓고 그를 우파라고 믿고 따르는 이들이나 이재명을 위해 무슨짓도 마다 않을 것 같은 개딸들만 봐도 이러한 생각은 더욱 힘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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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8 08:08:41
교과서에 쓰여진 독립운동사 90%는 과장과 왜곡으로 꾸며져 있다. 이 소설은 그야말로 허구를 전제로 쓴 건인지.. 이 핵심 포인트를 저자의 입에서 밝혀야 한다. 청산리 전투, 봉오동 전투와 자유시 참변.. 역사와 허구를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 1922년 자유시 참변 이후 무장 운동은 없었다. 1932년 윤봉길과 이봉창의 거사 이후에는 항일테러 조차도 없었고 오로지 정적 테러만 있었다. 1940년 광복군 창설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장개석 군대의 하부조직으로 전투 기록도 없다. 무장 독립운동사는 90%가 왜곡이요 과장이다.. 국뽕 중독에서 벗어 나고 사실로 역사를 보자.김좌진, 홍범도,김구...과연 우리가 아는 그런 독립운동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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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8 09:18:49
‘586세대가 물러나는 것이 유일한 희망이다’ 라는 말이 진정한 희망이다. 공감한다. 이세대가 살이져야 국민이 국민다워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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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8 08:38:55
이승만이냐 김구냐를 선택하는건 천만년 민족의 운명이 걸린 일이었다. 피흘려 목숨으로 해결할 사안이었다. 이승만은 송호근보다 29배 천재로 미래의 패권국 미국과 손잡고 천만년 번영할 자유민주주의 공화국을 건설했다. 건국의 신이다. 김구는 우리 독립군을 학살하고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해 수십만명을 굶겨죽인 악의제국 소련의 앞잡이 김일성과 손잡고 봉건왕조유일사상 공산주의 국가를 건설하려 했다. 송호근의 무식을 통탄한다. 김일성 김구 같은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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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8 08:29:12
잊혀진 영웅으로 독립군 총재 서일 장군이 있다. 김좌진 홍범도를 좌우로 두고 일제와 싸우다 자유시참변에 실망해 지결하셨지만 그가 독립군을 운영하고 만주를 개척한 공을 다들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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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8 08:57:07
사기치는 송호근아 조선은 3.1운동부터 3만명 미만이 일제에 저항하다 숨졌다. 2천만 조선인 중 극히 일부가 저항했다. 대부분은 평민 노비이고 일부 양반이다. 생각해봐라 우크라이나도 40만명 가까이 목숨걸고 싸우니 압도적 무력을 가진 러시아에 버틴다. 왜 독립군이 없었을까. 그리고 공산 독재봉건국을 세우려한 사회주의자들도 다 독립군으로 봐 줘야할까 생각해봐라. 전쟁을 일으켜. 니 조상 200만명을 죽이고 100만명을 굶겨 죽이고 100만명을 공개처형한 김정은 일가의 앞잡이도 독립군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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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8 08:55:37
백마탄 김장군, 어감 더럽다. 김일성이랑 백두혈통이라는 저 윗동네 돼지일족를 일컫는 것으로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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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8 08:40:09
백마는 만주에는 없었다. 몽고가 백마탔다는 기록이 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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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8 07:53:40
백마 탄 김장군 러시아에서는 백마 타는 것이 맞나 그 환경에서 백마 타는 것이 올바른 것이엇나 궁금해서 물어 본다. 중국은 백마 타는 것은 금지다 러시아는 백마 타고 다니는 것이 올바른 것이었나 ㅋㅋㅋㅋㅋㅋ 나의 사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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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8 05:24:49
강하지도 못한 백성들이 100년의 역사속에 너무 나약한 한민족으로 강대국전쟁으로 시달려왔다 그것은 우리가 편가르기 좋아 한 덕분이다 한민족이라는 단일 민족으로 소위 애국자라는 분들이 항상 합의에의한 단합이 아니라 상충된 주장이 결별로 동지가 아닌 적으로 강한 군대를 선택하여 한민족을 팔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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