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만 미카엘 신부
대림 제2주간 목요일
이사야 41,13-20 마태오 11,11-15
사랑으로, 사랑하신 하느님을 보는 사람들의 나라
오늘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향해 이렇게 말씀을 시작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구약의 수많은 예언자들이 구세주를 예언했지만, 세례자 요한처럼 오실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길을 내면서 직접 준비를 시킨 사람은 없었습니다.
사실 세례자 요한과 더불어 앞으로 일어날 구원의 역사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성경은 이어집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에서의 그 '하늘나라'는
다름 아닌 구세주로 인해 드러나게 될 나라입니다.
이 나라는 사랑으로, 사랑이신 하느님을 마주 보는 사람들의 나라입니다.
사랑으로, 사랑이신 하느님을 직접 뵙는 사람들은 그 자체로 충만합니다.
부족함이 없습니다. 완전합니다.
이를 향해 전진하는 우리들은 순간순간 하느님을 포착하나 부족한 사랑으로 이내 놓치고 맙니다.
그래서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살을 취하시어 우리에게 오십니다.
사랑을 사시면서 나와 함께 하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오실 주님을 기억하니 마음 설렙니다.
서울대교구 홍성만 미카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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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철 이냐시오 신부
대림 제2주간 목요일
이사야 41,13-20 마태오 11,11-15
작은 자
작은 자는 남들이 자기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할 뿐 아니라 그 사실에 대해서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작은 자는 자신의 재능이나 덕행이 다른 사람보다 못하다고 진심으로 생각하며 서슴지않고
말째의 자리에 자신을 놓을 뿐 아니라 그러면서 기뻐합니다.
작은 자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그는 정직하기 때문에 자신의 재능, 시간, 물질, 덕행 등 모든 것이 홀로 선하신 하느님께로부터
거저 받은 것임을 알고 있으므로 아무 것에 대해서도 오직 하느님의 영광과 남의 이익을 위하여
사용합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시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꺼이 따라가는 것입니다.
작은 자는 남을 이해하기 위해서 자신을 죽이고 자기가 남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기에
결코 흥분하거나 분개하지 않습니다.
화를 낸다는 것은 자기가 옳고 남이 그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작은 자는 사람들이 칭찬해 줄 때에나 비난을 할 때에나 항상 평화중에 있습니다.
그는 언제나 하느님께서 보시는 그대로이지 사람들의 평가에 따라서 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작은 자는 진심으로 통회합니다...
오늘 복음(마태 11, 11-15)에서 예수님께서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일찍이 여인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이 없었다..."
라고 하십니다만 세례자 요한은 스스로 작은 자라고 하며, 장차 내 뒤에 오실 주님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는 자라고 자신의 겸손함을 보입니다.
이번에 성직자로 수품을 받은 저 젊은이들이 이러한 작은 자로서 충실한 사목생활을 하여
주님으로부터 세례자 요한처럼 큰 인물로 칭찬받기를 기도드리립니다.
그리고 먼저 하늘나라에 가서 '보기드문 큰 키'라고 지금 칭찬을 받고 있을 민성기 신부님의
많은 저서중 '하늘로부터 키재기'라는 책에서 일부 발췌하여 퍼드립니다.
신학생 시절, 가르멜수도회의 동갑내기 신부 장석훈 베르나르도는 창경궁을 거닐면서
저에게 말했습니다
"요셉아, 나이 마흔될 때까지는 나서지마라. 침묵해라. 공부해라. 세상이 너를 필요로 할 그때까지…"
그 사이 세월이 훌쩍 지났습니다. 어느새 불혹의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동안 묵상한 글들을 책으로 묶습니다. 부끄럽습니다.
그래도 책으로 묶는 것은 어제의 삶에 애착하지 않기 위함입니다...
여름방학이 끝나 다시 서울로 돌아와 혜화동 보나벤뚜라 수도원에 머물고 있던 초가을 9월 17일,
너무나 뜻밖이었던 그 여름 사건을 떠올리며 끄적이다가 아래의 졸시를 노래하게 되었습니다
하늘로부터 키재기
세우려 한다 세우려 한다 한없이 세우려 한다
오르려 한다 오르려 한다 한없이 오르려 한다
재려 한다 재려 한다 한없이 재려 한다
보이는 것은 무엇이든 한없이 세우고 한없이 오르고 한없이 재려 한다
누가 더 높이 쌓았는지 누가 더 높이 올랐는지 한없이 쌓고 오르고 재려 한다
사람은 땅에 사는 동물 사람은 땅으로부터 높이를 재는 동물이다
보이는 것의 기준은 땅이기에...
허나 보이지 않는 게 있다
사람들은 그를 하느님이라 불렀다
하느님은 하늘에 사시는 분 하느님은 하늘로부터 높이를 재는 분이시다
오늘에야 사람들은 불현듯 하늘로부터 키재는 법을 알았다
하늘로부터 키재기를 시작한다
난쟁이의 키가 커져 보인다 바벨탑은 낮아지고 난쟁이의 키는 커졌다
내리고프다 무너뜨리고프다
오, 캐노시스! *
갑자기 비가 내리고 세상이 바로 보인다.
※ 캐노시스 : 어원은 희랍말의 kenosis로서 그리스도의 육화의 신비를 나타내는 의미로 많이 쓰여지고
'비움'이라는 뜻을 지닌다.
하늘로부터 키를 재는 지혜, 이러한 지혜는 하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는, 첫째 순결하고 다음은 평화롭고 점잖고 고분고분하고
자비와 착한 행실로 가득 차 있으며 편견과 위선이 없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지혜로운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답게
온유한 마음을 가지고 착한 생활을 함으로써 그 증거를 보여주도록 하십시오" (야고 3, 13-18).
세상의 이치에서 볼 때 작아진다는 것, 내가 작아진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고 바보같아 보이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작아지는 그 곳, 바로 그 곳에는 낯설음이 있습니다.
왠지 어색하게 낯설은 그 곳에서 우리는 여느 세상과는 다른 새로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작아지기를 어색해 하고 낯설어 하는 것은 세상이 가르치는 것과는 다른
그 새로움에 길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새로움과 낯설음, 바로 여기에 예수께서 육화하시어 우리와 같은 피조물로까지 작아지시고
십자가상에서 수모를 당하시면서까지 보여주고자 하셨던 세상,
'새 하늘과 새 땅' (묵시 21, 1)이 자리하는 것입니다.
작은 것에서부터 크게 되는 변화는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역사의 신비입니다(마르 4, 31).
정현종 선생의 「섬」이라는 단순한 시가 있습니다. 그 전문은 이렇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저는 이 시를 대하면서 시인이 노래하는 이 '섬'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하느님의 말씀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하고 곰곰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습니다. 이 섬은 사람들 사이에 있습니다.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사이에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는 곧잘 이런 말을 합니다 :
"사람이라고 다 사람인가? 사람이 사람다워야 사람이지."
디오게네스가 찾아 헤매던 사람이나, 정현종 선생이 노래 한 '섬'을 저는 같은 맥락에서 보고 싶습니다.
사람다운 사람, 사람다운 사람은 찾기가 어려운 만큼 우리 눈에도 잘 띄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는 우리가 동경하고 한번은 꼭 가보고 싶은 섬처럼, 한번은 꼭 만나고 싶은 사람일 것입니다.
그는 사람들 사이에 비록 드러나지 않아 우리 눈에 뜨이지 않을 뿐이지
우리들 가운데, 우리와 함께 분명히 있습니다.
누구일까?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참으로 어렵습니다.
참으로 나 자신이 변화되지 않으면 어렵습니다. 여기에는 근본적인 변화가 요청됩니다.
나의 삶의 자세를 세상의 상식적인 기준이 아닌 하느님의 기준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쉬운 일이겠습니까? 나 자신이 작아지고 또 작아져야 하는데 그것이 쉬울
리 없습니다. 자존심을 뭉그러뜨려야 하는데 그것이 쉬운 일일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
(루카 14, 11 : 18, 14)이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어린아이들처럼 낮아지게 됩니다" (마태 18, 4).
작음, 작아진다는 것, 작아지는 것이야말로 하느님 앞에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자세이며
신앙인에게 없어서는 안될 덕입니다.
작아지고 작아질수록 그만큼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입니다.
나의 시간, 나의 공간, 우리의 시간, 우리의 공간을 비우면 비울수록,
내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여기면 여길수록, 세상의 눈으로 보아 바보가 되고 어리석어 보이면 보일수록,
하느님의 신비로운 역사, 하늘나라가 이 땅에 내려오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가
우리 안에 가득할 것입니다.
"우리 작아집시다!
우리가 작아질 때 예수께서 우리 안에 육화하실 것입니다."
성 바오로회 이현철 이냐시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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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봉 스테파노 신부
대림 제2주간 목요일
이사야 41,13-20 마태오 11,11-15
기다림 2
오늘 독서를 통한 하느님의 고백을 들으면
‘이제는 그 바보 같은 사랑을 그만 두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느님의 인간사랑은 결코 헤아릴 수 없다고 하지만 “벌레 같은 야곱” “구더기 같은 이스라엘”인줄
뻔히 아시면서도 “오른 손을 붙잡아 주고” “도와주리라”고 다짐을 하시니
정말 이해하기 힘듭니다.
세상에는 신도 많고 종교도 다양합니다. 단언하건데 그 많은 종교는 모두 뇌물을 요구합니다.
상이 잘 차려진 제사일수록 기도의 힘이 세지고 더 많은 복채를 통해 더 큰 복을 받게 된다하니
그렇습니다.
오직 그분의 이스라엘, 그리스도인들의 제사만이 ‘속죄제’입니다.
세상의 것으로 해결될 수 없는 죄,
세상의 것으로는 결코 얻지 못하는 구원의 역사가 그분의 희생을 통해 이루어지는 현장이 미사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곧 믿음이며 사랑이며 희생이어야 할 까닭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노예살이를 한 세월이 430년입니다.
세상의 어느 민족도 400년을 꼬박 노예로 지내는 일은 인류 역사상 전무하다고 합니다.
긴 세월은 자신의 주체를 흐리게 할 것이고 긴 시간은 서로를 동화시킬 것이며
긴 시간을 참아내지 못한 민중의 궐기와 반항의 역사가 일어나기 마련이라 합니다.
말라키 예언자를 통해서 이르신 하느님의 약속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말라 3, 23)는 말씀은
350년 만에 이루어졌습니다.
오늘 복음을 전한 마태오사가의 집필시기를 따지면 거의 400년이 흘렀을 것이라 꼽아집니다.
그 긴 세월, 하느님께서는 침묵하셨습니다.
예언이 사라지고 역사가 뒤바뀌는 와중에서 이스라엘인들의 갑갑함이 얼마나 컸을까 싶습니다.
호세아에게 들려주신 하느님의 절규를 기억하며 죽어간 숱한 세대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사야를 통한 하느님의 사랑에 의지하면서도 아무런 확신을 얻지 못하고 사라진 세대도 있었습니다.
무조건 믿고 기다린 그들의 간절한 시간을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을 적었던 마태오사가의 마음을 헤아려봅니다.
‘받아들이고자’ 하는 자에게만 들리는 복음, 믿는 자에게만 보이는 메시아,
그것을 몰라보는 이스라엘이 안타까워서 펑펑 눈물을 쏟았을 것도 같습니다.
하느님의 침묵은 잊음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약속은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미 내게 와서 “두려워 마라”하시는 그분의 음성을 듣는 일은 받아들이는 마음에만 가능합니다.
이미 곁에 와 계신 그분을 두고 누구를 찾으십니까?
그분을 기다린다면서 무엇에 분주하며 무엇에게 휘둘리며
무엇을 위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까?
참으로 무엇을 기다리고 계십니까?
부산교구 장재봉 스테파노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에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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