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경 SBS에서 하는 ‘사건 파일’이라는 시사프로그램의 진행을 한 적이 있다. 사건의 재연드라마 속에서 잠시 등장해 설명하는 역할이었다. 대본이 나오면 작가가 써준 대사를 외워야 했다. 단순 암기가 아니라 감정과 나만의 성격을 불어넣으라는 주문을 받았다. 촬영 장소는 길거리였다. 조명시설을 실은 트럭, 크레인을 탑재한 트럭, 배우들을 실은 버스 등 대부대의 이동이었다. 배우들이 연기를 하고 있을 때 감독이 내게 말했다.
“인 앤 아웃으로 해주세요.”
드라마 속으로 진행자가 잠시 들어가 말하고 빠져 나오라는 소리였다. 나의 행동과 대사가 자연스럽지 못하면 전체가 다시 그 장면을 만들어야 했다. 나 때문에 여러 사람이 다시 수고해야 하는 것이다. 내가 속으로 외운 대사를 중얼거리면서 어떤 걸음으로 카메라 앞으로 갈까를 고민할 때 내 뒤에 바짝 붙어 서 있는 사람이 성가신 느낌이 들었다. 그는 아까부터 내 뒤에 서서 미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계속 그랬다. 내가 참다 못해 그에게 말했다.
“아저씨, 죄송하지만 신경이 쓰여서 그러니까 다른 곳에 가서 구경하실래요?”
그가 멋쩍은 표정으로 가까이 오더니 내 귀에 대고 말했다.
“저는 길가는 행인 역할을 맡은 엑스트라예요.”
“아, 그러세요?”
비로소 버스에 왜 그렇게 많은 사람이 많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렇게 장소들을 옮겨 다니며 밤낮없이 재연드라마를 찍었다. 다른 장소에서였다. 앞에 가파른 계단이 보였다. 감독이 내게 지시했다.
“이번에 진행자 역할인 변호사님은 저기 계단 위에서 천천히 앞으로 보고 걸어 내려오시다가 열 번째 계단에서 서서 자연스럽게 멘트를 하고 다시 걸어 내려오세요.”
나는 계단을 내려오면서 발을 헛디뎌 굴러 떨어질까봐 걱정이 됐다. 촬영이 중단되면서 감독의 지적이 떨어졌다.
“표정에서 걱정이 보여요. 자연스럽게 하세요.”
그 외에도 별별 주문사항이 많았다. 대사를 하면서 걷고 책상 모서리에 궁둥이를 걸치라고 하기도 하고 시장 바닥에서 오뎅을 한 꼬치 맛있게 먹는 장면을 연출하고 멘트하라고도 했다. 간단한 연기의 세계도 정말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하철역 직원 역할을 맡은 엑스트라 한 사람은 그날 자기 역할에서 대사 한 마디가 있다고 너무 좋아하는 걸 보기도 했다. 그곳은 또 다른 세계였다.
언론인과 교수들이 모여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한 신문방송학과 교수로부터 재미있는 얘기를 들었다. 그 교수는 대학원에 학생으로 와 있는 영화배우 강수연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
“제가 우연히 알게 됐는데 한번은 SBS에서 출연료로 팔억 원을 준다면서 강수연에게 드라마를 찍자고 했어요. 강수연이가 그걸 거절하더라구요. 자기는 영화가 전공이지 드라마는 아니라는 거에요. 팔억 원이면 큰 돈인데 그걸 거절하는 모습을 보고 강수연이를 달리 생각했습니다. 사실 세상이 몰라서 그렇지 강수연 그 친구 가난한 형편이었어요.”
자본주의 사회는 돈이 신(神)이다. 거액의 돈을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은 신에 가까운 사람이 아닐까. 그 교수가 말을 계속했다.
“그 친구가 가진 단 한 가지는 무서울 정도의 연기력이죠. 비구니 연기를 할 때 머리를 빡빡 깎고 칼바람이 부는 겨울 눈덮인 계곡 얼음물 속을 홋겹 옷만 입고 몇 번이고 들어가기도 했어요. 일류가 되려면 그런 목숨 거는 게 있어야 해요. 배우 최민수는 드라마에서 죽는 장면의 표정을 실감나게 하기 위해서 이주 동안을 굶고 촬영장에 나갔잖아요? 강수연의 경우 연기력도 또 다른 사유로 한계에 부딪칩니다. 예를 들면 탤런트 이미숙의 경우는 지성적이다가도 극도의 탕녀로도 변신할 수 있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강수연은 고집불통의 집념을 가진 여자의 이미지를 전환시키기가 거의 불가능한 겁니다.”
그 교수가 말을 계속했다.
“강수연이는 내가 가르치는 언론홍보학 과정에 들어왔어요. 육개월 코스짜리인 별 게 아니지만 그 졸업식 날 보았던 인상깊은 장면이 있었어요. 강수연이가 아버지를 불렀더라구요. 그 아버지를 보니까 양복을 오랜만에 입었구나 하는 그런 느낌이 들었죠. 왜 시골마을에서 갑자기 서울 갈 때 영감들이 입는 복장같이 촌스럽고 어색한 그런 것 같았어요. 그런데도 스타가 된 강수연이는 테이블마다 아버지를 모시고 다니면서 인사를 시키는 거에요. 그 아버지는 우리 애를 사각모를 쓰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연방 인사말을 하구요. 그런 진솔한 성격을 가진 부녀더라구요.”
가난과 상처를 극복한 그녀의 삶이 연기에 생생하게 묻어 나오는지도 모른다. 목숨을 바쳐 하는 그들의 연기로 대한민국 드라마가 수출도 되고 세계적인 상도 받는 시대가 온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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