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덕 베드로 신부
대림 제2주간 토요일
집회서 48,1-4.9-11 마태오 17,10-13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마태 17,12).
믿음이 없는 이들에게 세례자 요한은 엘리야로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신은 정해진 때를 대비하여, 주님의 분노가 터지기 전에 그것을 진정시키고,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되돌리며, 야곱의 지파들을 재건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집회 48,10)라는 말씀이 세례자 요한을 통하여 이루어졌다는 사실도,
그가 구세주 예수님을 준비시키고자 왔다는 사실도 전혀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마태 17,12).
예수님 또한 믿음이 없는 자들에게 세례자 요한처럼 다루어질 것입니다.
죄인들이 그분께 돌아와 회개하는 모습을 보여도, 그분의 말씀과 기적 안에서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드러나도, 믿음이 없는 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구원자도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도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그때에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카야파라는 대사제의 저택에 모여,
속임수를 써서 예수님을 붙잡아 죽이려고 공모하였다”(26,3-4).
정작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던 사람들은 바로 ‘하느님의 일을 하던 사람들’,
‘하느님과 아주 가까워 보이는 이들’이었습니다. 교회 안에서 중요한 일을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늘 하느님 구원의 신비를 알아볼 수 있는 믿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루하루 성실하게 성체 앞에 머물며 기도하는 삶, 주님의 말씀을 듣고 묵상하며
자신을 돌아보고 그 말씀을 실천하는 삶 안에서 믿음은 자라고 커 나갑니다.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며 그분을 향한 우리의 믿음을 점검하면 좋겠습니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아멘.
대전교구 김재덕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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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만 안젤로 신부
대림 제2주간 토요일
집회서 48,1-4.9-11 마태오 17,10-13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변모 사건(마태 17,1-9 참조)의 후속 보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에서 내려오는 길에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암시하십니다.
앞서 마태오 복음 16장 21절에서 예고된 예수님의 운명은 영광스러운 변모 사건에 이어서
오늘 예수님의 입을 통하여 다시 한번 예고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화는 오늘 복음의 중심을 이룹니다. 먼저, 제자들이 엘리야와
그의 역할을 묻습니다. “율법 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말라키 예언서 3장 23절에 따르면, 엘리야는 오기로 약속된 예언자로서
하느님의 구원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은 인물입니다(마태 11,14 참조).
마태오 복음 17장 2-3절에서 예수님과 모세뿐 아니라 엘리야의 발현을 목격한 제자들은
그의 나타남이 크고 두려운 날에 대한 말라키 예언자의 예언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또는 메시아의 오심과 어떻게 관계되는지 궁금하였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질문에 답변하십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언급하시는 엘리야는
세례자 요한을 가리킵니다. 세례자 요한과 엘리야를 같은 인물로 이해할 수 있는 까닭은
마태오 복음 17장 13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마태오 복음사가는 마르코 복음사가보다 강한 어조로 세례자 요한이 다시 오기로 약속된
엘리야라고 강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척받고 고난받은 엘리야의 예언자적 모습에서
세례자 요한을 보셨고, 세례자 요한의 고난은 다가올 예수님 당신의 고난을
미리 보여 준다고 이해하셨습니다.
이제, 이 땅에 오시는 예수님을 기다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 가운데 하나는
이런 예언자적 모습이 아닐까요? 우리는 엘리야와 세례자 요한이 보여 준 모습을 배워야 합니다.
그들의 예언자적 활동은 메시아의 오심을 준비하는 구체적 실천 방법이었습니다.
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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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대림 제2주간 토요일
집회서 48,1-4.9-11 마태오 17,10-13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타볼산에서의 거룩한 변모 후 산에서 내려올 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율법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마태 17,10)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마태오 17,11)라고
엘리야의 사명을 밝히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마태오 17,12)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먼저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을 엘리야로 알아보지 못했음을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이미 와 있는 엘리야를 알아보지 못한 그들은 이미 와 있는 메시아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세례자 요한도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요한 1,26)
이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엘리야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듯이, 당신께서도
그렇게 제멋대로 다루어지고 고난받게 될 것을 예고하십니다. 결국 엘리야를 알아보지 못함은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함을 말해주며, 엘리아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암시해 줍니다.
그렇습니다. 엘리야도 메시아도 ‘이미’ 왔지만,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먼저 우리 가운데 와 계신 분을 알아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분을 알아보는 영적인 눈을 떠야 할 일입니다.
특히 성탄을 준비하면서 ‘먼저’ 우리에게 와서 우리를 바로잡는 엘리야의 인도를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그분을 제멋대로 다루지는 않아야 할 일입니다.
만약 오늘 우리가 완고함과 비뚤어진 마음과 악의로 형제들을 거부하고 배척하면,
그분은 오늘 우리에게 그렇게 제멋대로 다루어지고 고난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더 이상은 '이미' 우리 가운데 와 계신 그분을 버림받지 않고 박해받지 않도록
해 드려야 할 일입니다. 더 이상은 그분을 제멋대로 다루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겪으신 것처럼,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에서 있기 마련인
고난에 당황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음에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의 편지에서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시련의 불길이 여러분 가운데 일어나더라도 무슨 이상한 일이나 생긴 것처럼
놀라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니, 기뻐하십시오.
그러면 그분의 영광이 나타날 때에도 여러분은 기뻐하며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 1서 4,13)
또한 바오로 사도는 ‘고난’을 ‘그리스도인의 특권’이라고까지 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위하는 특권을, 곧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하여
고난까지 겪는 특권을 받았습니다.”(필리피서 1,29)아멘.
<오늘의 샘 기도>
주님!
제 눈이 가려져 엘리야를 알아보지 못함은 빛을 피하고
어둠을 좋아한 어리석음이었습니다.
제 가슴이 굳어져 당신을 맞아들이지 못함은 진리보다
제 자신으로 꽉 채운 완고함과 오만이었습니다.
하오니, 빛이요 진리이신 주님!
저를 밝히소서.
제 어리석음과 완고함을 걷어내소서.
오만불손함을 태우소서.
제가 밝아져, 더 이상은 당신을 제멋대로 다루지 않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에서 참조
가톨릭 사랑방 catholics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