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훈 타대오 신부
대림 제3주일(자선 주일)
스바니야 3,14-18ㄱ 필리피 4,4-7 루카 3,10-18
그러면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느님의 말씀이 세례자 요한에게 내립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세례자 요한은 자신을
찾아오는 군중들에게 회개에 알맞은 열매를 맺으라고 말 합니다.
이 말에 군중은 “그러면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묻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 하고 대답합니다.
이해하는 데는 어렵지 않은 말입니다. 그러나 실천하는 것은 쉽지 않은 말이기도 합니다.
가진 것을 나누어 준다는 것은 그 가진 것에 대한 애착이 있을 때 더 주저하게 됩니다.
애착이라는 것은 마음이 있는 자리에서 생겨납니다. 내 마음자리가 세상 것에 있고 세상 걱정에
있다면 세상 것을 모으고 지키는데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잃을까봐 노심초사, 전전긍긍, 좌불안석하게 됩니다.
그런 마음자리에는 이웃을 둘러볼 여유가 없습니다.
눈이 가려져 이웃이 보이지 않으면 그가 헐벗었는지, 먹을 것이 없어 굶주렸는지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내가 입을 옷이 변변한 것이 없어 속상하고, 입맛에 맞는 것이 없어 불만입니다.
그러다 보면 감사함보다는 불평과 불만이 주변을 채우게 됩니다.
불평, 불만은 한덩어리로 따라다니며 내 삶을 갉아 먹고 하느님에게서 나를 떼어 놓을 뿐만 아니라
이웃에게서도 나를 떼어 놓고 맙니다. 삶은 풍요로운 선물이 아니라 지쳐가는 전쟁터처럼 변해 갑니다.
그 자리에서 불안은 무럭무럭 자라나 나를 방황하고 길잃게 합니다.
세례자 요한을 찾아간 군중들도 메마른 삶에 지쳐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래서 어린 아이가 어른에게 물어보듯 “그러면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묻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나’라는 고립에서 벗어나 ‘하느님’, ‘이웃’을 보라고 초대합니다.
구원하러 오시는 하느님을 보고, 헐벗고 굶주린 이웃을 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가진 것을 나누라고 말합니다. ‘요즘 세상에 한국 사회에서 헐벗고 굶주린 사람이
어디 있어요?’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주변을 보는 마음이 닫혀 있기 때문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여전히 우리 주변에는 내가 당연하게 소유하고 누리는 것이
결핍되어 있는 이웃들이 있습니다.
자선주일은 우리 주변을 둘러보는 마음을 회복하고 이웃과 가진 것을 나누도록 초대하는
날입니다. 자선은 우선 주변을 보는데서 시작됩니다. ‘너’의 결핍이 보일 때,
‘나’의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나눌 수 있게 됩니다. 그 자리에 하느님 나라가 다가오고
회개의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회개란 세상 것에 대한 애착에서 하느님 나라에 대한 애착으로
우리 마음을 돌려 놓는 행위입니다.
아기 예수님의 오심에 대한 기다림이 깊어가는 대림 제3주일입니다.
마산교구 최훈 타대오 신부
2024년 12월 15일
************
이동화 타라쿠스 신부
대림 제3주일(자선 주일)
스바니야 3,14-18ㄱ 필리피 4,4-7 루카 3,10-18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대림 3주의 복음은 우리를 세례자 요한에게로 인도합니다.
세례자 요한 역시 오실 분을 기다리는 이였습니다. 요한은 구원의 때를 기다리고 준비하며
회개의 세례를 선포합니다.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회개입니다.
회개란 삶의 방향 전환을 뜻합니다. 그러나 막상 삶의 방향을 전환하기 위해서는
어디서 부터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할지는 막막합니다.
이런 맥락 안에서 오늘 복음은 군중들의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면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군중들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요한은 군중들에게 여벌의 옷과 음식을 가난한 사람과 나누라고
요청합니다. 동시에 세리들에게는 정해진 것 이상의 것을 요구하지 말것을,
그리고 군인들에게는 다른 이의 것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 것을 요청합니다.
한마디로 세례자 요한이 요청하는 회개란 자선을 베풀고 정의를 세우라는 것으로 요약됩니다.
사실 자선과 정의는 구약성경의 예언자들의 요청이자 그리스도교 전통이 가르치는 바이기도 합니다.
자선은 그리스도교적 사랑의 가장 구체적인 형태입니다. 자선은 단순히 자신이 가진 것의 일부를
가난한 사람에게 주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참다운 자선은 가난한 사람들의 처지를 이해하고
그들의 자리(입장)에 함께 서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자선은, 우리 자신이 노력해서 이루고 얻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실상 자기 자신의 것만은
아니라는 깨달음을 가져다줍니다. 그러기에 자선은 우리가 현세 사물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게
해 주며,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말하듯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만들어 줍니다.
자선은 참으로 자선이라는 행위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우리가 자선의 의미를 더욱 묵상하면 할수록, 자선은 정의의 요청에 맞닿아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거나 ‘강탈하거나 갈취’하는 마음으로 자선을 행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또한 가난한 이들의 몫을 돌려주지 않는 정의란 거짓 정의에 불과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선과 정의는 서로 다른 두 개의 덕목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사랑의 두 얼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고 준비하기 위해 회개를 요청합니다.
회개란 자선을 베풀고 정의를 세우는 일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한국 교회는
대림 제2주일을 인권 주일 및 사회 교리 주간으로, 그리고 대림 제3주일을 자선 주일로 보냅니다.
자선을 베풀고 정의를 세우는 일은 오늘도 여전히 우리가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며
묵상하고 실천해야 하는 덕목입니다.
부산교구 이동화 타라쿠스 신부
2024년 12월 15일
************
서철승 가롤로 신부
대림 제3주일(자선 주일)
스바니야 3,14-18ㄱ 필리피 4,4-7 루카 3,10-18
나에게 꼭 필요한 것도 남에게 주어라.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세 친구 이야기를 해봅니다. 어느 나라에 성질이 고약하고 포악한 왕이
있었습니다. 그 왕은 사람들이 조금만 잘못해도 감옥에 가두어 버리거나, 자기 마음에 안 든다고
사람들을 죽이기도 하였습니다.
어느 날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그 왕의 행차를 만났습니다. 길 가던 모든 사람이 머리를
수그리고 깊은 절을 올렸는데, 그 사람은 잠시 딴생각을 하다가 왕 앞에서 인사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왕은 노발대발 분노하며 그 사람을 체포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내일 아침에 궁궐로
재판을 받으러 오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튿날 왕 앞에 가는 게 너무 겁이 난 그는 따라가 줄 친구를 찾았습니다.
평소 본인이 첫 번째로 소중하게 생각하는 친구에게 같이 가자고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왕이 포악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친구는 단칼에 거절하였습니다.
잘못했다가는 자신도 죽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두 번째로 소중하게 생각했던 친구에게 같이 가자고 부탁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두 번째 친구도 왕이 무섭다고 말하면서, 왕 앞에까지는 갈 수 없고 왕이 보이지 않는
궁궐 대문까지만 따라가겠다고 말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친구에게 가서 같이 가자고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친구는 전혀 걱정하지 말라고 이야기하며, 그 포악한 왕 앞에 가서 너를 변호하고
지지해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첫 번째 친구는 평소에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돈이랍니다.
돈은 관까지만 따라갑니다.
두 번째 친구는 가족이랍니다. 가족은 무덤까지만 따라가서 울어준답니다.
세 번째 친구는 누구일까요? 자선, 선행이랍니다.
끝까지 따라가서 우리를 변호해 주고, 지지해 준답니다.
우리가 세상을 마치고 난 후에 우리에게 남는 것은 우리가 바락바락 긁어모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준 것이랍니다.
너희는 가진 것을 팔아 자선을 베풀어라. 너희 자신을 위하여 해지지 않는 돈주머니와 축나지 않는
보물을 하늘에 마련하여라.(루카 12,33)
자선은 사람을 죽음에서 구해주고, 모든 죄를 깨끗이 없애준다.(토빗 12,9)
자선은 튼튼한 방패와 단단한 창 이상으로, 너를 위해 원수와 맞서 싸워 주리라.(집회 29,13)
오늘은 자선 주일입니다. 복음에서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3,11).”라고 나와 있습니다.
옷 두 벌은 인간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수량입니다. 한 벌은 입고, 동시에 다른 한 벌은
세탁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중에 한 벌을 남에게 주라는 의미는, 나에게 꼭 필요한
거라 해도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과감하게 주라는 의미입니다.
먹을 것도 그렇게 하라는 의미입니다.
나눔은 내가 배불리 먹고, 내가 다 쓰고 남은 것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 꼭 필요하다고 해도
남에게 나누어주는 것이 진정한 자선의 정신입니다.
십자가 상 죽음에서 백성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내주신 예수님께
나눔 실천에 필요한 신앙적 용기를 달라고 청해봅시다. 아멘.
가난한 이에게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주님께 꾸어
드리는 이, 그분께서 그의 선행을 갚아 주신다.(잠언 19,17)
전주교구 서철승 가롤로 신부
2024년 12월 15일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에서 참조
가톨릭 사랑방 catholics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