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어렸을 적에...
산으로 들로 쏘다니는 작은 제 발에 신겨 어디든 따라다니던 「고무신」이란 친구가 있었습니다.
산 밑 윗마을과 신작로 가까운 우리 동네를 가로지르던 시냇물에서는 개미를 태우는 배도 되어주고,
송사리 잡는 뜰채도 되어주다가, 간혹은 불어난 물에 휩쓸려 그만 하염없이 떠내려 가버리는 바람에
어린 제 마음을 걱정과 슬픔에 잠기게도 했던 까만 고무신.
공사장 모래더미로 놀이터를 옮기면 고무신은 큰 일꾼이었습니다.
앞뒤를 동그랗게 구부려 모래성 쌓을 때 끼워 넣기도 하고, 모래를 퍼 담아 나르기도 하면서,
땅거미 풀썩 내려앉아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두껍아 두껍아 헌집 줄게 새집 다오」
손등에 모래를 수북이 쌓고 두드리는 제 곁을 말없이 지켜 주었더랬었지요...
그 고무신이 어느 날, 색동옷을 입고 「꽃고무신」으로 화려하게 나타났던 날의 놀라움과 기쁨을
저는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세상에 이렇게 예쁜 신발이 있다니!
그러나 「꽃고무신」은 국민학교에 입학할 무렵 등장한 운동화에 마음을 빼앗긴 제게 홀대 받고,
꼬질꼬질 때가 낀 채 마루 밑을 굴러다니다 온 데 간 데 없어져 버렸습니다.
고무신이 제 유년의 친구이듯,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데 고무신이 한몫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정작 우리 조상들이 신던 전통신발이 아님은 누구나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전통신은 가죽·비단·짚·삼·나무 등을 재료로, 마른 날엔 짚과 삼을 삼아 만든 짚신·미투리를,
비가 오는 진 날엔 나무를 깎아 만든 나막신을 신었으며, 평민들은 아무리 돈이 많아도
「삼색(三色)신」이라 불리는 이 세 가지 신 외에는 신을 수가 없었습니다.
양반들만 가죽이나 비단으로 만든 신을 신을 수 있었는데,
사대부들이 관복을 입을 때 신는 목이 긴 「화(靴)」와 평상시 신는 목이 짧은 「혜(鞋)」가 있었습니다.
이 신을 짓는 이들을 일러 화장(靴匠)·혜장(鞋匠)이라 했으며, 가죽으로 만든 신을 「갖신」,
갖신을 짓는다 하여 「갖바치」라 불렀지요. 화혜장들은 지금의 혜화동인 동소문 일대에 모여 살았고,
신발가게인 혜전(鞋廛)은 종로2가 보신각 근방에 여러 집 있었다는군요.
* * * * * 이제는 박물관에나 가야 겨우 만날 수 있는 우리나라 전통신의 맥을 잇고 있는 유일한 한 사람,
황해봉(52) 씨의 선조들은 「갖신」과 함께 피고 지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의 집안이 갖신을 짓기 시작한 것은 고조부 때로, 증조부는 이미 덕수궁·운현궁·별궁·의친왕궁 등
4궁에 신발을 대며 유명한 「궁궐 갖바치」집안으로 명성을 날렸습니다.
조부 한갑(漢甲·1889∼1982) 씨 역시 16살에 혜공(鞋工)이 된 이후,
고종의 「적석(赤舃) - 왕이 제사 지낼 때 신는 신」을 지어 올렸을 만큼 알아주는 솜씨로 가업을 이었습니다.
온 국민이 흰갓·흰옷과 흰신을 신어야 하는 국상 때는 백혜(白鞋) 주문이 밀려 며칠 밤을 새야 했고,
양반제도가 무너져가던 조선 말에는 평민들도 돈만 있으면 한 켤레에 쌀 한 가마 반 값이나 나가는
갖신을 신을 수 있었으므로 갖신은 더 이상 양반들의 전유물이 아니게 되었지요.
이때 갖바치들은 전에 없는 호황을 누리며 「값바치」로 불리기도 했다는데,
생전의 조부께선 늘 이 시절을 그리워하셨답니다.
그러나 일제의 민족문화말살정책과 1920년대 고무신, 1930년대 구두의 등장으로
자연히 전통신은 뒷전에 밀려났으며, 태사혜와 운혜 등 꽃신을 특히 잘 짓던 할아버지도
「최후의 궁궐 갖바치」라는 과거의 명예만 간직한 채 꽃신 짓던 손으로 목수일을 하며
생계를 꾸려가야 했습니다.
다행히 해방 후 우리 것을 찾는 이들이 조금씩 늘어나면서 할아버지의 꽃신 만들기는 이어졌지만,
굳이 아들에게 기술을 가르치려 들지 않으셨답니다. 이미 사양길에 접어든 일인데 「가업」이라는 미명 하에
아들에게 짐 지우고 싶지 않았음은 아비로서 당연한 선택이었을 것입니다. 결국 아버지 등용(登龍) 씨는
자동차 정비를 배워 정비공장을 운영했고, 생활도 오히려 그편이 더 나았답니다.
그러나 장인의 솜씨는 그렇게 쉬 사라지는 것이 아니어서 심심풀이 삼아 간혹 들어오는
주문 꽃신을 만들던 할아버지는, 1970년 중요무형문화재 37호 「화장(靴匠)」기능 보유자로 인정받았습니다.
집안 내력인 장인기질을 타고 났음인지 워낙 눈썰미와 손재주가 남달라 공예를 전공한 황해봉 씨였지만
앞날이 불투명한 꽃신에게 자신의 장래를 걸 생각은 전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 그가 제대를 하고 오니
미수(米壽․88세)의 할아버지가 예순 넷의 아들을 앉혀 놓고 꽃신 짓기를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아마도 당신의 죽음과 함께 꽃신마저 무덤에 묻히는 것을 바라지 않으셨기 때문이었을 터
먼 길을 돌아 환갑이 넘은 나이에 결국 꽃신과 마주한 아버지를 보며,
뗄래야 뗄 수 없는 꽃신과 자신의 「숙명」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아니면 영영 사라져버릴
꽃신에 대한 절박함을 느끼며, 본격적으로 비법을 전수 받기 시작했습니다.
3대가 작업실에 머리를 맞대고 앉아 꽃신을 지으며 끊임없는 질문과 대답이 오갔고,
단지 기술을 전수받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던 그는, 할아버지의 명성을 잊지 않은 사람들에게
판로를 개척해 서서히 주문도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부친 등용 씨가 고혈압으로 갑자기 세상을 등졌고, 넉 달 뒤에는 모친이, 다시 몇 달 뒤에는
손자를 가르치는 일에 혼신의 힘을 다 하던 할아버지마저 1982년 94세를 일기로 눈을 감으셨습니다.
2년 새 조부와 부모를 한꺼번에 잃은 황해봉 씨의 홀로서기가 시작되었고, 2004년 초,
조부가 가신 지 4반세기만에 마침내 할아버지에 이어 중요무형문화재 116호 화혜장 기능보유자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황해봉 씨는 특히 칼을 사용하여 가죽을 재단하고 작업하는 손놀림이 능숙하며
변(발을 감싸는 부분), 도리(발을 감싸는 부분의 가장자리), 칙휘(신의 뒤꿈치) 부분의 처리가 매우 정교하고
세련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답니다.
* * * * * 황해봉 씨가 만드는 전통신은 20여가지에 이르는데,
사대부 남자의 마른 신으로는 신코와 뒤축에 흰 선 무늬를 놓은 태사혜(太史鞋)가 주종을 이루고 그외,
노인용인 발막혜, 아무 문양이 없는 외코혜, 제례 때 신는 제혜(祭鞋), 내시들이 신는 왼마상 등이 있습니다.
여자용은 당초 무늬의 당혜(唐鞋), 구름 무늬의 운혜(雲鞋)가 대표적으로
신코에 죽엽(竹葉), 뒤축 봉합선에는 태극 무늬를 놓았는데, 갖바치들은 이것을 「굼벵이」라고 불렀답니다.
또 운혜의 일종으로 십장생과 꽃을 수놓은 수혜(繡鞋),
맵시 있게 울타리가 얕고 검은 가죽과 비단으로 만든 기생용 기혜(妓鞋)·흑혜(黑鞋),
「진신」이라고도 불리며 비올 때 신는 유혜(油鞋) 등이 있습니다.
신의 색깔과 무늬는 신분에 따라 엄격한 차이가 있었는데, 신에 놓는 무늬를 「눈」이라 부른답니다.
임금이 신는 의혜는 옥색 바탕에 남색 눈, 젊은 사대부들은 남색 바탕에 다홍 눈,
중년의 사대부들은 검은 바탕에 흰 눈, 노인들은 회색 바탕에 흰 눈을 놓아 만들었고,
여자용으로 왕비가 신는 의혜는 임금처럼 옥색 바탕에 남색 눈, 젊은 여인들은 다홍 바탕에 연두 눈,
나이 든 여인들은 옥색이나 진남색 바탕에 연분홍 눈을 놓았다는군요.
* * * * * 무려 72단계에 걸친 신발의 제작과정은
너무 복잡하고 용어도 생소하여 자세히 소개하지 못하겠지만, 자료에 의하면 이렇습니다.
우선 봄·가을에 모든 신발의 바탕재료인 백비(白皮)를 마련하는 일로 시작되는데, 곱게 쑨 쌀풀로
삼베와 모시를 붙여 햇빛에 말렸다 이슬에 젖게 하기를 일주일 간 거듭하면 빳빳하고 든든한 백비가 됩니다.
가죽은 원래 신나무와 백반으로 까맣게 물들인 노루가죽을 썼지만 요즘은 소가죽으로 대신한답니다.
물 뿌린 백비를 네 겹으로 접어 고루 두드려 펴고 칼로 신본을 뜬 후, 신본에 맞도록 자른 비단·가죽 등도
여러 겹 붙여 눌러줍니다. 밑창만도 겉창·중창·도두개 등 세 장을 떠붙이고, 그 위에 다시 백비 한 겹을 놓은 후
1cm 폭으로 오린 가죽(대대비)으로 가장자리를 따라가며 붙입니다.
그런 다음 송곳으로 구멍을 뚫어 맞바느질을 한 뒤 안쪽에 융을 입히고, 신바닥의 미끄럼을 방지하고
빨리 닳지 않도록 160개나 되는 징을 박는데, 징에도 납작징·오뚝징 등 종류가 많답니다.
이때 바느질은 먼저 송곳으로 구멍을 뚫고, 밀랍을 발라가며 일일이 세 가닥씩 꼬은 무명실에
「(저모猪毛)」라 불리는 멧돼지 목덜미털을 이어 붙인 바늘로 꿰맵니다.
징을 박은 후, 신울타리와 창을 뒤축쪽에서부터 맞춰가며 맞바느질해 붙이고,
안쪽에 얇고 흰 백마가죽을 입히는 도리두르기로 대강의 공정은 끝이 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그 다음이랍니다. 신발의 성패는 바로 신코의 모양내기에 달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꽃신 안에 꽉 들어차는 나무 골을 넣고 모양을 잡는 마무리가 가장 힘들고 기술을 요하는 작업이 됩니다.
이처럼 신의 종류는 겉모양과 무늬에 따라 나뉘지만
어느 것이나 72번의 손길을 거쳐야 하는 것은 매 한가지입니다.
그래서 한 켤레를 짓는 데 꼬박 열흘이나 걸린다니, 장인의 숨결과 정성이 고스란히 배어 있을 꽃신을
발에 꿴다는 상상만으로도 공연히 송구스러웠습니다.
1978년 결혼한 부인 김미정 씨는 시할아버지와 남편이 함께 만든 꽃신을 신고 시집을 왔으며,
고 육영수 여사도 조부 한갑 씨가 만든 신을 신고 마지막 길을 갔답니다.
죽은 사람이 신는 신을 「습신」이라 하는데, 육 여사는 갑자기 변을 당한 바람에
친정어머니가 마련해놓은 자신의 꽃신을 대신 신겼다는군요.
저 역시 꽃신을 한 켤레 간직하고 싶었지만...
그와의 이야기가 끝난 후에는 감히 가격을 물을 수 없었습니다.
장인의 삶과 꿈과 땀으로 지은 꽃신을 돈으로 따진다는 건 그 역시 원하지 않을 것만 같았기 때문입니다.
다만 「한 켤레 20~50만 원 선」이라는 1996년 자료에서 어림짐작만 해볼 따름이었지요.
5대째 가업을 묵묵히 이어오고 있는 황해봉 씨의 소망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전통신과 관련 자료들을 모아 꽃신박물관을 세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의 한복 아래 꽃신을 받쳐 신도록 만드는 일이랍니다.
첫댓글 김경녀선생님 오랫만에 글 올려주셨네요.^^ 저도 꽃신 한켤레 간직했다가 딸 시집 보낼적에 주고픈데 가격이 만만치 않군요. 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건강하시고 좋은 봄 날 되세요.
* * * 안녕하세요, 자미님... 늘 반겨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리고 꽃신... 저도 무척 갖고 싶더군요... 이담에 형편이 피면 한 켤레 마련하려구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