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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 2월, 흥선대원군이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아들 고종은 아버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지 않았다. 고종황제는 대원군의 문상을 가지 않아서 많은 비난을 받았다. <윤치호 일기 1898년 2월 26일> 쏟아지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고종은 왜 아버지의 죽음을 외면한 걸까? 대체 무엇 때문에 흥선대원군은 아들과 화해하지 못한 걸까? 흥선대원군에게 고종은 아주 특별한 아들이었다. 열두 살의 어린 고종을 왕위에 올려놓은 사람이 바로 흥선대원군이었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이 세상을 떠날 무렵에 아들과 아버지의 사이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벌어져있었다.
19세기 격랑의 한 가운데 서있었던 왕과 왕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에게 과연 고종은 어떤 의미였을까? 또 고종에게 흥선대원군은 어떤 존재였을까? 흥선대원군이 경기도 양주에 집곡산장으로 거처를 옮긴 1874년은 그의 삶에서 큰 시련기였다. 그의 나이 55세, 정계에서 밀려난 흥선대원군은 이곳으로 내려왔다. 국립중앙박물관에는 당시 흥선대원군의 정치적 입지를 보여주는 병풍이 보관 되어있다. 여섯 폭의 난초그림으로 만든 병풍인데 대원군의 호가 선명하게 적혀져있다. 양주 시절 그린 흥선대원군의 작품이다. 눈길을 끄는 것은 화폭의 윗면, 뿌리를 드러낸 노근란이 허공에 그려있다. 뿌리내릴 땅을 잃었다는 것은 정치적 입지를 상실한 자신의 처지를 빗댄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흥선대원군에게 위기가 닥친 것은 고종을 대신해 섭정을 한지 10년째 되던 해이다. 예상치 못한 상소 한 통이 대원군의 정치적 뿌리를 뒤흔드는 파란을 몰고 왔다. “전하께서는 친친의 지위를 높이고 녹을 많이 주되 국정에는 관여치 말도록 하소서” 면암 최익현이 고종에게 친정을 펼치라며 지난 10년 동안 누구도 거론하지 않았던 흥선대원군의 탄핵을 요구한 것이다. 사실 대원군은 아무런 정치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래서 10년 동안 권력을 행사했으나 왕이 이제부터 내가 직접 하겠다고 했을 때 저항할 수 있는 아무런 법적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으니 10년 동안 장악하고 있었음에도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대원군이 이용하던 궁궐 전용문이 폐쇄되었다. 대원군 탄핵 상소가 올라온 직후 고종이 직접 국정을 운영하겠다는 친정선포를 하면서 이루어진 조처였다. 그러나 영남 유생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영남 유생 만여명이 대원군이 정계에서 밀려나 직공으로 내려가자 아버지를 시골에 놔두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며 고종을 압박하고 나선 것이다.
공론정치를 중요시하는 조선 사회에서 만여명의 유생이 연이어 올리는 만인소는 국왕도 무시할 수 없는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보통 만인소의 길이는 약 100미터, 뜻을 같이하는 사람의 이름과 서명을 일렬로 기록했다. 영남 유생들은 이같은 만인소를 세차례나 올리며 고종의 불효를 질책했다. 유교국가에서 효를 내세운 논리 앞에서는 국왕이라고 해도 무작정 버티기 힘든 법이었다.
그러나 고종은 굴복하지 않았다. 주동자를 참형에 처하라는 지시까지 내리며 강력하게 나왔다. 끝내 아들 고종은 흥선대원군의 정계복귀를 허락하지 않았다. 고종은 유생들의 봉헌요구에도 불구하고 한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나 처음부터 두 사람의 관계가 대립적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고종과 흥선대원군의 사이가 벌어진 것은 언제부터일까?
운현궁은 흥선대원군의 정치 역정을 대변하는 공간이다. 이곳에서 고종을 낳았고 열두 살 어린 아들을 왕에 올리기 위해 노력했다. 당시 왕실의 권위는 추락할 데로 추락했는데 순조때부터 시작된 60여년간의 세도정치로 조선의 국정은 곪을 대로 곪아있었다. 이때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흥선대원군은 신정왕후와 손을 잡고 자신의 둘째 아들을 왕위에 올렸다.
오랜 병석에 누워있던 철종이 1863년 12월에 승하하자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 고종이 용상을 이어받았다. 신정왕후가 수렴청정에 나섰지만 그 뒤에는 대원군이 있었다. 대원군과 조정대신들이 만난 상견례 자리에서 대원군이 던진 일성은 대신들을 충격에 빠트렸다. "나는 천리를 끌어들여 지척으로 삼고자하며 태산을 깎아 평지를 만들고자 하며 남대문을 높여 삼척으로 만들고자 한다." 태산처럼 비대해진 노론 정치를 청산하고 약해진 왕권을 강화하겠다는 선언이었다.
대원군은 가장 먼저 조선의 최대 권력 기구로 전락해버린 비변사를 폐지해버렸다. 동시에 북인과 남인 계열에 속한 인재들의 명단을 적은 북보와 남보를 만들었다. 세도정치 기간 정치에서 등한시된 인재를 골고루 등용하기로 한 것이다. 황현의 매천야록에는 흥선대원군이 실시한 또 다른 개혁정책이 상세하게 실려 있다. 정조 임금도 손을 못 댄 서원의 횡포, 교육 기관이던 서원은 백성들을 수탈하는 기구로 변질되어 있었다. 흥선대원군은 서원 철폐를 지시했다.
유생들의 저항은 격렬했다. 서원 철폐를 중단하지 않으면 죽음도 불사하겠다고 맞선다. 대원군에게 분서갱요를 단행한 진시황제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하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흥선대원군의 뜻이 고종의 뜻이었다. 백성들의 허리를 휘게 하는 낡은 제도를 바꾸어나가는 아버지의 정책은 그 자체로 국정의 스승이었다. 그렇다면 두 사람이 어긋나기 시작한 것은 언제일까?
1871년 신미양요 직후까지도 고종의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미국의 로저스 함대가 무력 공격을 개시하며 강화도에 상륙한 것은 1871년 4월. 흥선대원군은 결사항전을 촉구했다. 조선군은 53명의 전사자를 내며 격전을 벌였고 고종도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지지했다. 전국 곳곳에 척화비를 세운 대원군은 서양오랑캐와 싸우지 않으면 화친한다는 것이고 화친은 곧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대원군에 대한 백성들의 지지는 폭발적이었다. 유생들은 대원군에게 나라의 큰 어른이라는 대로라는 칭호를 올리자했고 고종은 승인했다. 그런데 고종의 사고의 변화가 나타난 것은 미국과 전쟁이 끝나고 난 다음에 서서히 외부 정보들을 구체적으로 접하게 되면서 조금씩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다. 청나라에 다녀온 연행사의 보고를 받을 때 고종은 이전과 다른 모습이었다. 고종은 국제 정세에 관심을 기울였다.
고종은 그 해 말, 박규수를 청나라에 파견했다. 박규수는 고종이 가장 신임하는 신하였다. 고종은 박규수를 통해 중국이 더 이상 세계 질서의 중심이 아니며 조선도 고립에서 벗어나야한다는 생각을 키워갔다. 중국이 이제 마음대로 세상을 좌지우지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중국에 기대고 편승하며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때 조선은 고립될 수밖에 없다는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다.
박규수의 귀국보고에 고종이 특별한 관심을 보인 이유는 또 있다. “황제께서 총맹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친정을 하면서 백성들의 바람에 부흥하신다 는데 과연 그러하신가?” 청나라의 어린 황제가 섭정에서 벗어나 친정을 한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어느덧 고종의 나이 21살. 더 이상 섭정할 명분이 없어진 나이였지만 대원군은 여전히 국정 운영권을 놓지 않았다.
그러다 급기야 탄핵대상이 되고야 말았다.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 눈뜨기 시작한 고종은 친정 선포와 함께 아버지 흥선대원군과는 다른 자신의 길을 걸어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이 정계에서 물러났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다른 생각은 끊임없이 격렬하게 충돌한다. 강화도 초지진은 흥선대원군과 고종의 서로 다른 정책이 정면으로 충돌한 현장이다. 초지진 소나무와 성벽에는 포탄 자국이 상흔처럼 남아있다. 당시 군함들이 대포로 공격한 흔적이다.
고종의 친정이 시작된 직후, 일본의 국교 제기 요구가 국정의 현안으로 떠올랐다. 일본의 국서를 접수해야 무력 충돌을 피할 수 있다는 고종과 개화파의 주장은 대원군파의 거센 반대에 부딪혔다. 19세기 조선의 대외관계 주요기사를 수록해놓은 용호한록을 보면 일본의 국서 접수 요구에 대한 흥선대원군의 입장도 상세히 기록되어있다. 대원군은 무력을 앞세운 일본의 요구를 받아주면 안된다는 입장이었다.
결국 1876년 2월 3일. 조선은 대원군이 포대를 설치한 강화도에서 무력을 앞세운 일본과 외교통상조약을 체결한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국제정세를 고려한 고종은 대원군의 반대를 무릅쓰고 개화정책을 추진한다. 점점 대원군과는 멀어져갔지만 세계와 교류하며 근대화된 문물을 이용해 부국강병을 이루어야한다고 판단했다.
통리기무아문은 그러한 고종의 구상을 실현할 국제 통상학 전문 기구였다. 해외 시찰단을 파견할 때 고종은 개인 사재까지 내놓았다. 무기 제조기술을 배울 유학생들을 청나라에 천진기기국에 보내는 한편 별기군을 창설해 신식군대로 훈련시켰다. 고종의 개화정책에 대한 반발도 컸다. 유림들의 위정척사운동이 이어졌다. 그 무렵 고종을 제거하려는 역모사건이 발각되었다. 놀랍게도 역모사건의 주동자 이재선은 고종의 이복형이었다. 대원군 지지세력들이 유림과 손을 잡고 이재선을 왕으로 추대하려다 거사 직전에 체포된 것이다.
그렇다면 흥선대원군이 추구한 부국강병의 길은 무엇일까? 군사 장비를 기록해놓은 훈국신조군기도설을 보면 서부 열강에 맞서 힘을 키우고자했던 대원군의 노력이 담겨져 있다. 대원군 집권기에 개발된 신무기들도 실려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수뢰포다. 수뢰포는 수중에 설치하여 적선을 폭파하는 무기이다. 설치하고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수뢰포 내부에 물이 차올라 수압에 의해 작동되는 수중 시한폭탄이다. 목표는 같았지만 가는 길은 달랐다. 대원군은 먼저 우리 손으로 나라의 힘부터 키워야한다는 생각이었다.
고종의 개화정책에 반대하는 세력의 중심에는 늘 흥선대원군이 있었다. 더구나 고종을 퇴위시키려는 역모사건까지 일어나자 아버지와 아들의 사이는 더욱 멀어진다. 그런데 정계에서 은퇴한지 9년째 되던 해, 대원군이 정계에 복귀하는 비상사태가 벌어진다. 1882년 6월, 군인들에게 밀린 월급으로 지급하던 썩은 쌀이 도화선이 되었다. 별기군이 생긴 뒤로 푸대접을 받아온 구식 군인들의 분노는 폭동으로 발전했다. 개화정책에 불만을 품은 백성들까지 가세하면서 심각한 상황으로 번져갔다.
이른바 임오군란이었다. 임오군란은 흥선대원군을 정계로 복귀시켰다. 사태를 수습할 수 없게된 고종이 급기야 대원군을 부른 것이다. 6월 10일 아침, 흥선대원군은 그렇게 고종과 마주했다. 9년만에 이루어진 부자간의 만남. 고종은 임오군란 사태를 부탁하며 흥선대원군에게 전권을 넘겨준다. 대원군의 조치는 파격적이었다. 물가상승의 원인이 된 화폐발행을 중단시키는 등 먼저 불안한 민생경제부터 바로잡아나갔다. 그리고 5군영과 3군부를 부활시키고 통리기무아문을 폐지했다.
고종의 핵심 개화정책 기구인 통리기무아문을 폐지하고 모든 것을 옛 제도로 되돌려놓았다.
고종은 힘겹게 추진해온 개화정책을 부정하는 대원군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의 집권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정국 수습에 나선지 33일째되던 날 대원군은 청나라 군대에 납치되었다. 청은 대원군이 그대로 권력을 잡았다가는 그동안의 개항 이후에 청나라와의 긴밀한 협조관계 속에서 문호개방을 하던 조선 정부의 정책이 다시 물거품이 되고 옛날로 돌아갈 것을 우려한 것이다.
대원군의 천진 억류 생활은 눈물로 시작되었다. “도착했을 때 배멀미로 나는 혀가 빠져나와 말려들고 힘이 없어 앉지도 먹지도 못했다 약은 고사하고 한 모금 물을 주는 이가 없었다. 서러워 흐느끼니 눈물이 쏟아졌다.” 친필로 쓴 체진비망록에는 위홍장이 대원군을 심문하는 과정도 적혀있다. “6월 9일 저녁의 민란은 누가 일으켰습니까? 백성들과 군인들이 일으킨 것 같소.” “민란의 우두머리는 누구입니까? 10년간 물러나 산장에 있으면서 국정에 관여하지 않았소.”
대원군이 중국에 가기 전에 먼저 간 사람이 있다. 김윤식, 어윤중, 변영주라는 세 사람이다. 이 사람들이 먼저 이홍장을 찾아가서 대원군이 원인이니까 영구히 납치해두라고 한다. 청나라의 대원군 납치는 고종이 영선사로 파견했던 김윤식과 어윤중의 정보제공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렇다면 대원군의 억류사실을 안 고종은 어떤 조치를 취했을까? 청나라의 외교문서에는 고종이 대원군의 소환을 요구하는 사절단을 여러 번 보낸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사절단이 나눈 대화 문서에는 이상한 대목이 나온다. “국왕이 대원군의 귀국을 요청했는데 진정에서 우러나온 것인가? 국왕께서 대원군의 귀국을 요청한 것은 실로 사사로운 정 때문에 나온 것입니다.” 대원군의 귀국은 고종에게 있어 또 다시 고종을 몰아낼 수도 있는 위협감을 느꼈을 것이다. 대원군이 청나라에 억류 된지 23일째에 접어든 8월 5일. 이번에는 고종이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추진하던 정책과 제도를 폐지시킨다. 고종은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상징하는 전국의 척화비를 모두 제거했다. 쇄국과 개혁의 갈림길에서 흥선대원군과 고종의 서로 다른 생각은 임오군란으로 다시 한번 극명하게 드러났다.
“사람의 그림자도 없다. 오직 마음 붙일 사람이라고는 문 지키는 사병밖에 없는데 불러도 대답이 없고 말을 해도 알아들을 수가 없다.” (체진비망록) 청나라에 억류된 흥선대원군은 조선으로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는 처지였다. 그런데 임오군란은 흥선대원군이 청나라로 납치되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일본과 청나라 등이 한반도에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직접적으로 개입하게 되자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관계도 외세에 의해 왜곡되기 시작한다.
고종실록에는 임오군란 직후에 마련한 대원군을 받드는 특별 규정이 실려 있다. 이른바 대원군 존봉의절 규정이다. 대원군이 타고 다닐 가마의 종류부터 흉배는 거북의 무늬를 쓰고, 품대는 청색의 가죽에 수정을 박은 것을 쓴다는 것까지 너무나 사소해 보이는 규정이다. 하지만 청나라에 억류되었던 흥선대원군이 운현궁으로 돌아온 1885년 8월 이후, 이 규정은 예상치 못한 위력을 발휘한다.
3년 1개월 만의 귀국, 흥선대원군은 예전과는 달라져있었다. 쇄국을 주장하던 그가 주한외교사절단을 연이어 초대한다. 그런데 그로부터 불과 며칠 뒤, 운현궁 대문을 밖에서 걸어 잠그는 차단봉이 설치된다. 대원군 존봉의절 규정에 새로운 조항이 추가된 것이다. 대문 밖에는 관원을 배치시켜 고종의 허락 없이는 외부인이 대원군을 만날 수 없도록 통제했다.
대원군이 귀국하자마자 이루어진 가택 연금. 사람들로 붐비던 운현궁은 인적이 끊겼다. 내천야록에는 이 시기 대원군을 암살하려는 자객이 운현궁으로 침입하고 원인조차 알 수 없는 폭발사고가 발생했다고 실려 있다. 대체 무엇 때문에 대원군은 그토록 가혹한 처지에 놓인 걸까?
청나라의 내정간섭이 심해지자 고종은 러시아와의 외교관계를 강화해 조선의 독립을 유지하고자 했다. 이를 눈치 챈 청나라가 고종을 견제하기 위해 대원군을 귀국시킨다. 흥선대원군의 귀국과 함께 조선의 운명은 걷잡을 수 없는 국면으로 치달았다. 동학농민군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청나라군과 일본군이 조선 땅에서 대치한 것이다.
1894년 7월 23일 새벽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일본은 조선군을 무장해제 시킨 뒤 친일개화파 정권을 수립하고 흥선대원군을 끌어들였다. 일본군이 조선의 심장을 점령한 상태에서 이루어진 흥선대원군과 고종의 기막힌 만남. 대체 무슨 생각으로 흥선대원군은 일본과 손을 잡고 친일개화파 내각에 참여한 걸까?
그가 생각한 것은 어디까지나 왕권이 주도하는 나라였다. 개화파 관료들이 주도하는 나라가 아니었다. 일본에 대해서도 맞설 건 맞설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대원군은 평양에 주둔하고 있던 청군에게 지원군 파병을 요청하였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흥선대원군은 동학농민군에게도 동학군을 북상시켜 경복궁을 점령하자고 밀서를 보냈다. 대원군의 구상을 실현하기 위해 실제로 중앙에 대원군파는 친일내각인사들에 대한 암살에 나서기도 했다.
흥선대원군의 거사 계획은 일본군 축출에서 끝나지 않았다. 당시 역모사건 판결문에 이준용의 이름이 등장한다. 놀랍게도 왕위찬탈 음모로 기소된 이준용은 흥선대원군의 손자다. 그렇다면 대원군은 고종을 끌어내리고 손자 이준용을 왕으로 세우려 한 것일까? 그는 고종이야말로 나라를 망친 주범이라고 보았다. 자신만이 그동안 고종이 망쳐놓은 나라를 다시 바로 세울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대원군의 모든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오히려 일본에 이용당함으로서 아들 고종과는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흥선대원군은 명성왕후 시해사건의 누명까지 쓴 채 운현궁에 유폐되었다. 이 시기 대원군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하는 뮈텔 주교의 일기가 발견되었다. “최근 대원군이 그의 아들인 국왕과 화해를 하기 위해 나에게 중재를 해달라고 요청해왔으나 나는 이 제안을 거절했다.”(뮈벨 주교 일기 1897년 3월 8일)
생애 마지막 순간 대원군은 왜 고종과 화해하려 한 것일까? 1898년 2월 22일, 흥선대원군은 79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죽음 앞에서 아들과 화해하려 했지만 끝내 이루지 못했다. 흥선대원군은 부국강병의 꿈도 아들 고종도 잃고 한 줌 흙으로 돌아갔다. 흥선대원군과 고종이 살다간 구한말은 마치 뜨거운 불과 차디찬 물이 만나는 것과도 같은 거대한 전환기였다. 아버지 흥선대원군도 아들 고종도 부국강병의 꿈을 이루기 위해 달렸다. 하지만 타협할 줄 몰랐던 흥선대원군은 결국 아들과 갈등하는 사이 그토록 이루고자 했던 부국강병의 길을 놓치고 만다. 어쩌면 흥선대원군의 비극은 아들의 능력을 믿지 못한 아버지가 아들이 해야 할 정치마저 대신하려 한데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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