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가 점점 다가온다. 흰 눈은 송이송이 내려와 살포시 내려앉아 세상에 있는 온 집과 나무와 길을 모두 하얀색으로 수놓는다. 집집마다 창문 너머로 아름다운 장식들로 치장을 한 크리스마스 트리가 보인다. 크리스마스 電球가 고운 빛으로 하얀 세상에 황홀한 빛을 뿌리고, 흘러나오는 크리스마스 캐럴의 멜로디는 세상을 순수하고 따뜻하게 물들이며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킨다.
11월의 추수감사절이 끝남과 동시에 미국 全域에는 벌써부터 아름다운 캐럴이 울려 퍼진다. 마치 천사가 부르는 듯한 크리스마스 선율을 나도 너무 좋아했다. 추수감사절을 맞이하기 한참 전부터 나의 친한 친구 레이첼(Rachael Hendrickson)은 크리스마스 방학 동안 내가 자신의 집에 머물기를 원했다. (미국의 크리스마스 방학은 한국의 겨울 방학에 해당되며, 기간은 약 보름 정도다.) 추수감사절을 함께 보냈던 메기(Maggie Davis)를 포함해 다른 몇 명의 친구들도 나를 초대했지만 레이첼과의 先約 때문에 미안한 마음으로 거절했다.
레이첼은 시니어(senior)인 나보다 한 학년 어린 주니어(junior)였지만, 중국어 수업을 같이 듣게 되면서 우리는 돈독한 사이로 발전했고, 나는 이따금씩 레이첼 집에 초대받기도 했다. 드디어 12월 21일 금요일, 크리스마스 방학에 앞서 마지막 수업을 끝내고 기숙사에 도착했다. 나는 곧장 방학 동안 레이첼과 지낼 때 필요한 짐을 챙겼다.
저녁에 레이첼 집에 도착한 나는 제일 먼저 레이첼 그리고 레이첼 엄마와 크리스마스 트리를 장식했다. 한국에서는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크리스마스 트리를 본 것이 전부였던 나는, 居室 한 켠에 놓여있던 진짜 전나무를 보고 입을 쩍 벌릴 수 밖에 없었다. 지붕높이까지 뻗어있는 그 큰 나무에 우리는 크리스마스 장식들을 하나하나씩 달기 시작했다. 상자에 고이 모아놓은 갖가지 장식들은 일 년 만에 다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장식들은 서로 모양새 또한 달랐지만, 각각 의미하는 것도 달랐다. 손바닥만한 도화지에 물감을 퍼뜨려 그린 그림이 하나 있었는데, 이는 레이첼이 네 살 때 그린 그림이라고 했다. 레이첼 부모님이 결혼한 해의 크리스마스 날에 구입한 장식, 콜럼비아에서 구입한 작은 사람 장식, 솔방울로 만든 새 등 모든 것이 특별한 존재였다. 그 장식들을 하나씩 상자에서 꺼낼 때마다 레이첼과 레이첼 엄마는 내게 그 장식에 담긴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그들에게 크리스마스 장식이란 마치 오랜만에 펼쳐 본 앨범의 사진처럼 아름다운 추억들을 내포하고 있었다.
두 번째 날에 나와 레이첼은 크리스마스 쿠키를 만들었다. 레이첼 親家의 조상은 스웨덴에서 건너왔고, 따라서 레이첼의 할아버지는 100% 스웨덴 혈육을 가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레이첼 가족은 때때로 특별한 스웨덴 음식을 만들었다. 이 날은 스웨덴 쿠키를 만들었다. 레이첼 엄마가 미리 오븐에 따뜻하게 구워둔 꽃 모양의 과자가 식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우리는 그 위에 여러 색깔의 프로스팅(frosting: 버터나 쇼트닝이 들어가 촉촉하며 부드러운 크림과 같은 質感을 내는 것.)을 입혔다. 이쑤시개를 붓으로, 프로스팅을 물감으로 하여 우리는 세밀하게 쿠키 장식을 했다. 나는 레이첼을 위하여 한국어로 ‘레이첼’, 그리고 ‘사랑’이라는 단어를 적었다. 쿠키 장식은 보기와는 다르게 엄청난 인내를 요했고 한 번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았다. (후에 우리는 이렇게 장식한 이 과자들을 레이첼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친척들에게 선물로 주었다.)
뿐만 아니라 레이첼의 아빠가 요리사가 되어 우리는 스웨덴 소시지를 만들기도 했다. 콜브(Korv)라고 불리는 이 소시지는 스웨덴 중부에 위치한 베름란드(Värmland) 지역의 유명한 소시지로, 갈은 돼지고기, 소고기, 양파, 그리고 감자로 만든다. 이 날 우리는 이 재료들에 더불어 보리도 넣었다. 부엌의 큰 상에서 재료들을 손으로 잘 섞은 후에 우리는 분담해서 일을 진행했다. 레이첼 아빠가 돼지 창자를 벌리고 있으면 레이첼의 언니 미셸(Michelle Hendrickson)이 적당한 양 만큼 고기를 덜어서, 속재료를 창자에 주입하는 기계에 넣었다. 그러면 레이첼은 고기가 창자 안으로 잘 들어가도록 위에서 보드카 병을 이용해서 고기를 잘 눌렀다. 그러면 나는 레이첼 아빠가 Stop을 외치는 동시에 가지고 있던 끈으로 창자를 묶었다.
소시지를 만드는 중간중간에 레이첼은 속재료를 프라이팬에 익혔다. 지글지글 익고 있는 그 고기를 보는 것은 너무 먹고 싶어 내겐 고문과도 같았다. 고기가 노르스름하게 잘 익자 우리 모두 숟가락을 들고 프라이팬으로 달려갔다. 태어나서 이렇게 맛있는 소시지의 속재료를 먹어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일반 소시지와 독특하게 보리가 들어간 이 소시지는 너무 맛있어서 나는 먹고 또 먹었다.
세 번째 날은 내가 방학을 맞는 며칠 전부터 학수고대하며 기다리던 날이었다. 레이첼 가족은 내가 미국에 있는 2년동안 나이아가라 폭포를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것을 기억하고, 나를 위해 크리스마스 방학에는 이곳으로 여행을 가기로 했다. 아침 일찍 레이첼의 부모님과 레이첼, 미셸, 그리고 나 이렇게 5명은 짐을 챙겨서 캠핑카에 올랐다. 매번 레이첼 아빠가 가지고 계신 이 캠핑카에 오를 때는 기분이 남달랐는데, 영화관에 온 것과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한 커다란 스크린이 우리 앞에 자리잡고 있었고, 천장에는 조명도 있어 아주 럭셔리하게 보였다.
나와 레이첼은 차에서 볼 수 있도록 크리스마스 영화 DVD를 하나 가지고 왔다. 오랜만의 가족여행에 들뜬 우리는 그 동안 나누지 못했던 즐거운 이야기들을 서로에게 풀어놓기 시작했다. 그런데, 얼마 후, 레이첼 엄마가 “우리 이제 캐나다에 거의 다 왔다”라고 말했다. 캐나다? 미국의 바로 위에 있는 그 나라? 에이, 거짓말! 이렇게 빨리 올 수가 없지! 그런데, 그 말은 놀랍게도 사실이었다. 우리는 두 시간 만에 미국에서 캐나다로 가는 입구가 있는 뉴욕의 끄트머리에 도착한 것이었다. 황당했다. 꼭 비행기로만 다른 나라를 갈 수 있다는 생각이, 캐나다는 미국과 많이 떨어져 있다는 나의 잘못된 고정관념이 쨍그랑 소리를 내며 깨지는 순간이었다.
나이아가라 폭포(Niagara Falls)는 오대호 중 하나인 에리 호(Lake Erie)에서 흘러나온 나이아가라 강이 온타리오 호로 들어가는 도중에 형성된 大폭포이다. 나이아가라 폭포는 미국 뉴욕 주와 캐나다 온타리오 주 사이의 국경선을 가로지르는 세 개의 폭포를 통틀어 이른다. 두 개의 대형 폭포는 염소섬(Goat Island)을 경계로 하여 캐나다령의 말굽폭포(Horseshoe Falls)와 미국의 미국 폭포(American Falls)로 분류되며, 소형 폭포인 브라이들 베일폭포(Bridal Veil Falls) 또한 미국에 속해 있다. 사실 두 개의 폭포가 미국령으로 속해있지만, 캐나다 측의 말굽폭포가 그 규모와 장관이 더 뛰어나다는 이유로 캐나다 쪽으로 관광객들이 더 몰린다.
폭포 쪽으로 발걸음을 한 걸음 한걸음씩 옮길 때마다 더 센 바람이 내 얼굴을 때렸지만, 나이아가라 폭포를 보고야 말겠다는 나의 열정을 가로막지는 못했다. 드디어 나이아가라 폭포를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는 다리 앞에 섰다. 아, 이게 말로만 듣던 나이아가라 폭포구나! 곧은 절벽을 무서운 기색 하나 없이 떨어지는 폭포의 우람한 자태와 폭포수가 떨어지며 내는 轟音(굉음)에 나는 넋을 잃고 폭포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쌍무지개의 출현 또한 우리에게는 더 없이 귀중한 선물이었다. 사정없이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한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사진으로나마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전율을 그대로 전달할 수 있기를 소망했다.
곧 우리는 캐나다로 건너가 다른 視覺에서 나이아가라 폭포를 감상하기로 했다. 걱정과는 달리, 천만 다행으로 내가 가지고 있었던 미국 비자로 나는 캐나다로 넘어가는 것이 가능했다. 그렇지만, 캐나다 국경선 바로 앞에서 비자 심사를 할 때에는 혹 내가 거절되는 것은 아닌지 하는 긴장감에 숨이 막혔다.
캐나다 영토의 나이아가라 폭포는 미국 쪽과는 180도 다른 느낌을 자아내었다. 미국 쪽이 폭포를 끼고 산책로나 공원을 만들어 놓은 반면에, 캐나다 쪽은 大관람차, 타워, 레스토랑, 게임장, 호텔 등 관광객들을 위한 놀이시설이 잘 조성되어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밤이 되자 빨간색, 노란색 등의 아름다운 조명이 폭포를 더욱 영롱한 모습으로 비추었다. 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는 한 측면의 폭포를 보았다면, 캐나다에서는 마치 병풍을 펼쳐놓은 듯 웅장한 폭포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또한 거리에는 미키마우스를 비롯한 여러 가지 디즈니 캐릭터가 네온사인으로 밤을 밝혀 주었는데, 관광객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동심으로 돌아갔다.
쓰러진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위의 킹콩, 비버 햄버거 레스토랑, 지붕이 바닥으로 뒤집힌 집 등 캐나다의 모든 관광지는 내 눈을 즐겁게 했다. 그 중에서 우리는 게임장으로 향했다. 사실 한 번도 게임장을 가보지 않았던 나는 수많은 사람들이 게임장을 찾은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레이첼이 가장 좋아하는 글로우 골프(Glow Golf)를 하기로 했다. 돈을 지불하려고 카운터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옆에서 친숙해 보이는 얼굴의 한 가족이 낯설지 않은 언어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한국인들이었다. 그 가족뿐만 아니라 게임장 안에서 다른 몇 몇 한국 가족들을 볼 수 있었다. 즐겁게 웃으며 여행을 함께 온 가족들을 보고 있노라니, 그 순간 나는 가족과 함께 있지 못해 아쉬웠다. 하지만 레이첼의 가족은 곧 내 가족이었기에 슬퍼하지 않았다.
골프를 시작했다. 글로우 골프를 하는 곳은 아주 컴컴한 곳이었는데, 벽면을 비롯해 여러 소품들 그리고 약 스무 개의 퍼팅을 할 수 있는 구간의 라인들 모두 형광색으로 빛이 났다. 마치 어두운 해저에 상어, 물고기, 인어공주가 헤엄쳐 노니는 듯한 풍경을 자아내던 그곳에서 우리는 형광 빛을 내는 골프 공과 골프채로 경기를 시작했다. 예전에 한국 학교 체육시간에 몇 주간 골프를 배웠던 경험이 있었던 나는 그래도 어느 정도는 골프를 하겠거니 예상했지만, 몸은 생각처럼 따라주지 않았다. 반면에 레이첼, 미셸, 그리고 레이첼 엄마는 1위를 두고 엎치락 뒤치락 하며 손에 땀을 쥐는 긴장감 넘치는 경기를 진행했다. 창피하게도 나는 꼴등이었고, 레이첼이 1등을 차지했다. (다음 날 아침에 캐나다를 떠나기 전, 나와 레이첼은 이곳으로 또 다시 와서 레이저 태그(Laser Tag)라고 불리는 레이저 총을 상대의 몸에 쏘는 게임을 하기도 했다.)
캐나다를 넘어 오기 전에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해결했던 우리는 허기가 지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다만 골프 경기 중에는 게임에 열중하느라 배가 전혀 고픈 것을 잠시 망각했던 것뿐이었다. 자정을 이제 막 넘긴 시간이었다. 폭포 주변에는 여전히 관광객들이 즐비했다. 그도 그럴 것이 밤 폭포의 모습은 말로는 표현이 안 될 정도로 예술이었기 때문이었다. 꼬르륵 소리를 내는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우리는 레스토랑 수색에 나섰다. 늦은 시간에 놀이 시설은 대부분 영업을 했지만, 식당街는 대부분 문을 닫았기 때문에 마땅한 레스토랑 한 곳을 찾는 것은 사실 어려웠다. 다행히도 우리는 Denny’s 라고 불리는 레스토랑을 발견해 들어갔다.
시계를 보니 정확하게 밤 12시 14분 이었다. 레이첼은 코코아와 미트볼 샌드위치를, 나는 오믈렛과 해시브라운(Hash Brown: 감자를 채 썰거나 작게 다져서 바삭하게 부쳐먹는 음식)을, 레이첼 엄마는 타코를, 그리고 미셸은 팬케이크를 주문했다. (레이첼 아빠는 당시 감기 때문에 피로하셔서 호텔에서 쉬고 계셨다.) 한 접시에 상당히 많은 양이 나왔다. 내 접시에는 기름에 볶은 버섯, 토마토, 베이컨, 양파 등으로 속이 꽉 채워져 있는 오믈렛이, 노릇하게 익은 해시브라운과 버터를 겉에 바른 토스트가 함께 나왔다. 허겁지겁 음식들로 허기진 배를 채웠다. 그렇지만 그 많은 양의 음식을 다 먹는 것이 무리였기 때문에 우리는 남은 음식을 결국 호텔로 가지고 왔다.
이렇게 우리의 열기로 무르익었던 밤은 끝을 맞이했다. 호텔의 창문으로 보이는 캄캄한 밤에도 관광객을 위한 시설에서 나오는 빛의 향연은 화려한 야경을 수놓았다.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물이 멈추지 않고 흐르듯이 이곳의 밤은 끝을 찾을 수 없었다. 레이첼 가족과의 아름답고, 즐겁고 또 행복한 나이아가라 폭포 여행은 내게 영원히 잊지 못할 추억을 안겨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