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입은 치유자 - <운하의 소녀>
박강
창백한 두 소녀가 운하 위에 서 있다. 옷을 잔뜩 껴입은 소녀, 외투 앞자락이 열린 소녀. 두 소녀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 두려움이 두 소녀를 꽁꽁 얼렸고 ‘어떤 순간’에 소녀를 가두었다. 운하는 더 이상 흐르지 않는다. 이제 어른이 된 사라의 선생님은 아직도 내면의 소녀로부터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했다.
“사라의 글을 읽는 순간, 난 놀란 것은 아니면서도 등꼴이 오싹했던 것은 사실이다. 난 뭘 기대하고 있었던 걸까.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나는 사라가 나 대신 말해 주기를 기대하며, 그애를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차마 내가 그 기억을 글로 쓸 용기는 없으니까. 이젠 그만둬야 한다. 그 아이를 나의 이야기로부터 보호해 주어야 한다. 나 스스로 그 일을 글로 써야 한다. 써야만 한다.”35
그녀는 자신의 어린 제자 사라에게서 자기 내면에 갇힌 소녀를 본다. 그녀는 이 직감으로부터 수없이 달아나려고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오랜 외면을 끝내고 자기와의 싸움이 시작된다. 마주하고 싶지 않은, 마주하지 못한 내면의 소녀와 이제는 대면하고 화해해야 한다. 내면의 소녀를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다는 것을 그녀는 안다. 그녀는 내면의 소녀를 방치한 ‘불쾌해하는 기색’을 찾을 수 없는 어른이 될 수는 없다. 그녀가 겪은 일은 ‘상처’였고, 사라의 상처를 그녀는 외면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다. 그녀가 사라를 지키는 일을 자기의 상처를 드러냄으로만 가능하다. 그녀는 이야기 내내 수없이 다짐한다.
세상의 누구도 사라를 위로하지 않는다. 사라는 방치되었고 얼어붙은 운하 위에 서 있다. 사라의 엄마는 ‘자기를 낳은 엄마’를 부정하며 스스로에게 ‘모멸감’을 느끼며 딸 사라에게조차 냉소적이다. 최선의 방어가 소통을 거부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아빠는 어린 시절 부모의 침묵에 질식할 것 같았고 지금도 그들의 침묵에 갇혀 있다. 아빠에겐 침묵이 최선의 자기방어다. 사라의 부모는 이미 자기 안에 자기를 가두었고, 그래서 소통 불가능의 관계 속에서 사라는 자신이 ‘사랑받을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사라에게 유일하게 온화했던 할머니는 ‘어두컴컴한 묘지’에 묻혀있다. 사라는 사랑받는 존재가 되고 싶었다.
“눈을 감아봐. 그 모습을 그리고 싶으니까.
미술 선생은 사라의 긴 머리채를 조심스레 빗어내려 어깨 위에 늘어뜨렸다. 예전에 엄마가 공들여 머리를 빗겨줄 때도 기분이 참 좋았지. 미술 선생이 뭐라고 말을 하기는 했지만 사라는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했다. 단지 듣고 있으면 왠지 흥분되는 감미로운 목소리가 자신을 감싸주는 것을 느꼈을 뿐. 사라는 꿈을 꾸고 있었다.”63
사라는 미술 선생이 무엇을 하려는지 다 알지 못한다. 화가의 요구는 점점 교묘해지고 저항하지 못하는 사라는 스스로를 망가뜨리게 된다. ‘망가진 내면의 소녀’를 가두고 있는 사라의 학교 선생님은 자기의 두려움과 맞서지 못하고, 사라와의 소통 미룬다. 자기 대면이 두려워서 두 소녀 –사라와 자기 내면의 소녀-로부터 ‘도주’하려 한다. 사라가 유일하게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선생님의 얼굴에서 ‘공포’을 본 사라는 다시 좌절하고 달아난다. ‘아무도’ 사라를 붙들어 세우지 않는다. 사라가 갈 곳은 ‘미술 선생이 있는’ 화실밖에 없다.
“사라는 미술 선생이 처음 자기 등에 대고 속삭였던 순간, 뭔가 찌릿한 느낌이 몸 전체를 뚫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61
가지 않을 수 없는 곳, 유일하게 자신을 사랑하는 듯 여겨지는, 그래서 자신도 사랑한다고 생각되는 미술 선생은 사라의 몸을 탐하고 자신의 욕망 속에 사라를 가둔다. 사라는 ‘낡은 소파에서 잠든 소녀의 누드’가 된다. 사라의 선생님이 ‘옷을 잔뜩 껴입은 소녀’ 한 장의 사진이 되었듯이. 욕망의 한가운데 놓여있는 두 소녀는 두려움과 싸운다. 그 싸움은 결국 자신이 ‘망가졌다’는 죄의식이 되었고, 두 소녀는 스스로를 외면하고 왜곡시컸다.
“자신도 멀리 도망치고 싶다. 여기서 멀리, 이 사진으로부터 멀리. 이 기억으로부터 멀리. 사라로부터 멀리.”65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넘을 수 없는 벽을 세우고 싶었던 그녀는 사라로부터 달아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사라를 찾아야 한다. 사라는 어디로 달아난 것일까.
“운하가 얼었다. 도시는 죽었다. 아이들이 운다. 화가는 아이들을 그림 속에 가둔다.”68
단서는 사라의 글이다. 그녀는 화실 앞에 멈춰 섰다. 방으로부터 들리는 목소리, ‘이제는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있었다. 예전에 자기도 들었던 말들. 다시는 듣고 싶지 않은 말들’ 그녀를 보자 미술 선생은 달아났다. 정지된 화실에 그녀와 사라만 남았다.
“사라야, 난 네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알고 있어.
선생은 자기 손을 제자의 손에 더욱 가까이 가져갔다. 그리고 욕실 안의 소녀가 그 오랜 동안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을 일깨워 주었다.
넌 어떤 순간에도, 그 사람에게 몸을 준 게 아니야.
절대로. 그 사람이 네 몸을 훔친 거야. 그 사람이 널 훔쳤다고.”70~71
미술 선생을 신고하려는 선생에게 사라는 ‘고통 속에 갇힌 인형’을 가리키며 죄의식을 고백한다. 사라를 욕망의 도구로 만든 것은 남자다. 남자는 사라의 몸을 훔친 것이고 무엇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쟤는 좋아했거든요. 쟤의 잘못이에요. 분명히 벌을 받을 거예요.
선생은 잠시 벼랑 끝에 선 듯 아찔하다. 거센 바닷바람에 얼굴을 들이밀고 싶다. 울부짖고 싶다.
선생은 엉엉 울고 싶다. 끝없이.
미술 선생님의 목소리요. 목소리를 들으면 간지러웠거든요.
쟤가 어떻게 느꼈느냐 하는 건 쟤만의 문제야. 쟤가 좋아했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 그것을 이용할 권리는 없어. 벌을 받을 사람은 그 사람이지. 쟤가 아니야.
선생은 파도 소리보다 더 큰 소리로, 가슴이 터져버리도록 울부짖고 싶었다”72
사라의 감정은 존중되어야 하고 사라의 것이다. 감정을 이용한 남자의 행위는 폭력이고 범죄다. 단죄 되어야 한다. ‘상처입은 치유자’ 선생은 상처입은 소녀였고, 갇혔던 그녀는 외면하던 소녀를 안아주었다. 소녀는 사라였고 자신이었다. 사라의 말처럼 운하의 끝에는 ‘태양’이 있다. 그러나 그 반대편에는 ‘그 사람이 망가뜨린 아이의 초상화’가 있다.
“선생은 방을 빠져 나가 복도 벽의 사진을 떼어 냈다. 그것을 일기장에 끼우고, 서랍 속에 넣었다. 언젠가는 일기를 다시 쓸 것이다. 언젠가는 자신도 털어놓을 것이다.”74
사라는 ‘목소리’가 없다. 소녀는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을 말할 수 없는 서벌턴이다. 우리는 어른이 된 사라 선생님의 목소리를 통해 사라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그리고 자신을 외면했던 선생이 자기를 ‘새롭게’ 발견하는 순간 선생은 자기 목소리로 사라에게 말한다. ‘사라가 좋아했어도 미술 선생에게 그것을 이용할 권리는 없고, 벌을 받을 사람은 그 사람이지. 사라가 아니’라고. 선생도 이제야 깨달았다. 고통과 죄의식의 끝에서 자기의 ‘쌍생아’ 사라를 보며 자기를 응시하게 된 순간 알게 되었다. 사라의 목소리가 되어 자기를 객관화할 수 있게 됐고 자기를 이해하고 깨달음을 얻었다.
“이 이야기는 이미 앞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어느 이야기나 그렇듯,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도 끝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영원히 안 끝날지도 모른다.”5
‘수면제’를 먹고 잠든 아빠 엄마를 뒤로하고 사라는 버려진 자신의 인형을 꺼내 가슴에 안았다. 언 운하는 다시 흐를 것이다. 소녀는 지금도 운하 위에 서 있다. 날씨가 추워지고 더 추워진 어느날 운하는 다시 얼 것이다. 그리고 다시 녹을 것이다. 언 운하에 선 소녀를 소녀가 보고 있다.
“사라는 손가락 끝으로 시커메진 인형의 배를 누른다. 집게손가락의 지문이 배에 새겨졌다.”7
“봉제 인형을 커다란 못으로 찔렀다.”67
남자의 욕망은 소녀를 가두었다. 쌍생아처럼 가지고 있던 두려움의 답을 찾았다. 잘못된 죄의식은 세상이 만든 이데올로기다. 소녀의 잘못이 아니다. 어떻게 아프게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어떻게 이 벗은 몸에 상처를 주지 않고 만질 수 있을까?’
소통되지 않는 깨어진 세계에서 욕망이 망가뜨린 세상에서 상처 입은 아이가 어른이 되는 일은 가능한가. 어른이 된다는 것은 자기를 지키는 자기 배려이자 타자를 지키는 성찰이다. 선생은 사라의 목소리가 되어 비로소 알게 됐다. 두 소녀는 세상에 나왔다. 자기와의 싸움. 왜곡된 세상과의 대결. 어디까지 가든 좋다, 갈 수 있는 만큼 간다. 깨어져 있는 스스로를 치유하며, 치유되기를 반복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