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의 딸 문용옹주를 아십니까?
1900년에 고종의 딸로 태어났지만 왕궁에서 살아보지도 못하고, 공주라는 신분을 밝히지도 못하였으며,
자신을 낳아준 생모의 얼굴도 모른 채 떠돌이 인생을 살다가 인생의 막바지에는 사상범으로 몰려 감옥에
서 생활하기도 하는 등 몰락한 왕가의 후예로서 구한말 어지러웠던 세 월 동안에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가
돌아가신 우리 역사의 산 증인이자 비극이 아닐까?
고종에게는‘명성황후’와의 사이에 순종(1874-1926)
‘순헌황귀비’로부터 의민태자(1897-1970)
‘영보당 귀인 이씨’와의 사이에 완친왕(1868-1880)
‘귀인장씨’와의 사이에는 의친왕(1877-1955)
‘복녕당 귀인양씨’와의 사이에 덕혜옹주(1912-1989)
그리고 여기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문용옹주(1900-1987)는 상궁염씨와의 사이에 서울 계동의 민가에서 태
어났다. 문용옹주가 태어나자 말자 생모 상궁염씨는 고종황제 주변의 여자들이 벌이는 암투극의 희생양이
되어 조정에서 내린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 나고, 이후 생모의 동료인 임상궁의 주선으로 손창렬 부부의 양
녀로 경북 김천에서 자라다 여섯 살 때 양부는 죽고 양모가 집을 나가는 바람 에 어느 날 갑자기 걸인이 된다.
집도 없는 여섯 살 문용옹주는 방앗간과 남의 집 헛간에서 새우잠을 자고, 이집 저집 동냥으로 끼니를 때우
면서, 때로는 초상집과 잔칫집 등을 전전하면서 굶주린 배를 채우기도 하고, 남의 밭에 들어가 심어놓은 생
감자를 훔쳐 먹기도 하는 등 김천 에서 삼년간 거지생활로 모진 생명을 유지하게 된다. 아홉 살 때, 생모의
동료 임상궁의 도움으로 다시 서울로 와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하면서 진명여고에서 신교육을 받기도 하고,
임상궁을 엄 마처럼 의지하면서 일생에서 가장 행복한 나날을 보내기도 한다.
17살이 되던 해, 당대 최고 명문가인 ‘김한규’의 맏며느리로 시집을 가게 되는데, 신랑 ‘김희진’은 문용옹주 보다
3살 어린 14살이었으며, 시부모와 시댁 동생들의 따뜻한 배려와 보살핌으로 결혼초기에는 비교적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였는데, 2년 뒤 남편은 수영을 하다 익사하게 되고, 아들은 병으로 유명을 달리하게 된다.
사랑하는 남편과 아들이 죽고, 고종황제의 딸이라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면 생모처럼 불이익이 닥칠까 봐
나날이 근심으로 생활하든 문용 옹주는 아편과 술로 세월을 살아가는 시삼촌의 폭거를 견디지 못하고 중국
상해로 도피도 하였으며,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의 병수발을 위해서 몇 달 만에 서울로 돌아와 궂은 일도 마다
않고 한 집안의 맏며느리로 시댁살림을 이끌어 가면서 고 단한 삶을 살다가, 시부모의 죽음 후 마약과 술로
생활하던 시삼촌의 횡포로 많은 재산을 빼앗기고, 해방 후에는 무정부주의자이자 문용옹주 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던 시동생 김철진으로부터 생활비를 받았다는 명목으로 6. 25전쟁 후 사상범으로 몰려 투옥하게 된다.
빨갱이라는 사상범으로 10년형을 선고 받고, 전주에서 억울한 형기를 모두 채우고 출소하게 되는데, 박정희
정부 때 황손이라는 사실이 세간 에 밝혀져 대통령에 의해 법률적 복권이 이루어지게 되고, 출소 후 전주(경기전
내 조경묘 옆)에서 생활하다가 87살의 나이로 한 많은 생을 마감하게 된다.
1974년 당시 전동성당 주임신부였던 김환철(스테파노) 신부에게 '마리아'라는 세례명으로 영세를 받은 문용옹주는
할머니 민대부인(대원군 부인)과 이복 어머니 민비(명선황후) 모두 마리아라는 세레명을 가졌기에, 자기도 '마리아'
라는 세례명을 받고 싶다고 하였으며, 그 이유로 1866년 병인박해를 일으켜 수많은 천주교인들을 무참하게 살육한
죄값이라 하며 그 영혼들을 위해 할아버지인 대원군의 죄를 대신 갚는 심정 이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