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무지개
창세기 9:8-17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사순절이 시작되었다. 오늘은 첫 주일이다. 사순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억하고, 나를 구원하신 십자가 사랑을 새기는 절기이다. 그 첫날을 ‘거룩한 재’(聖灰)의 날이라고 부른다.
시작을 ‘재’로 시작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나 자신이 흙과 먼지로 돌아갈 한시적 피조물임을 새삼 확인하는 것이다(창 3:19).
사순절 기간 동안 그리스도인은 스스로 금욕이나, 절제, 삶을 거는 소소한 약속을 통해 하나님의 질서에 참여한다. 도덕적, 윤리적 결심을 넘어서서 하나님과 관계를 확인하고, 되돌아보고, 반성하려는 마음을 다짐하는 것이다.
단지 습관상의 변화일지라도 이를 통해 하나님의 권위 아래 복종하려는 것이다. 무엇보다 질그릇과 같이 연약한 우리로 하여금 다시 하나님을 향하려는 뜻이다.
사순절을 시작하는 요즘은 겨울과 봄이 다투는 시기이다. 며칠은 한겨울, 또 며칠은 때 이른 봄기운을 느낀다. 앞으로도 꽃샘 추위와 잎샘 추위를 거치면서 자주 겨울은 봄을 위협하겠지만, 결국 봄은 겨울을 이길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아무리 발버둥 쳐도 결국 하나님 앞에서 항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한 줌 재로 돌아갈 존재임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나는 오늘도 하나님의 거룩한 숨을 지닌 존재로서 내게 주신 희망을 품고 살아갈 수 있다.
그런 은총을 힘입는 시간의 순례를 잘 행하기를 바란다. 새 봄에 내 마음의 무지개를 확인하면서 살기 바란다.
1)
무지개는 하나님의 구원 약속을 상징한다. 무지개는 모든 색의 어머니와 같다. 무지개의 일곱 빛깔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화해와 평화의 약속이 담겨있다.
창세기에서 큰 홍수 후에 뜬 무지개는 과거에 대한 어두운 기억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동시에 보여주었다.
무지개는 반복하여 나타남으로써 땅에 사는 모든 것들과 맺으신 계약관계를 상기하게 한다. 무지개는 다시는 홍수로 이 땅을 심판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언제나 확인할 수 있도록 눈에 보이는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한마디로 심판과 구원, 책망과 자비, 죽음과 은혜 사이에서 전적으로 일방적인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보여주는 언약 표식인 것이다.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와 세상 사이의 언약의 증거니라”(13).
무지개는 대홍수(창 6-9장) 직후 하나님이 노아와 모든 생물과 맺으신 약속의 증거이다. 언약의 상징이 된 무지개가 홍수 이전부터 있던 것인지, 아니면 홍수 후에 기후변화로 나타난 새로운 현상인지 성경은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무지개의 모양을 보라. 무지개 모양은 히브리어로 ‘케쉐트’라고 하는데, 전쟁 무기인 활을 가리킨다. 고대 신화 활은 신들의 전쟁 무기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신의 호전성과 적대감을 나타내던 활이란 상징이 창세기에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의 표식이 되었다.
무지개라는 활은 누구를 겨냥하고 있는가? 활시위는 인간을 향해 있지 않다. 바로 하늘의 중앙을 향해 화살을 팽팽하게 겨눈 형국이다.
즉 무지개는 인간의 반역과 배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스스로 책임을 지시겠다는 것이다. 죽음을 통해서라도 인간의 죄를 대신 맡으시겠다는 지극하신 하나님의 은총의 표현이다. 이것은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맺으신 영원한 언약과 맥이 통하는 상징적 근거이다.
어렸을 적에는 무지개를 종종 보았다. 그땐 하늘이 맑았고, 또 하늘을 자주 쳐다보며 놀았다. 사람들은 일상에서, 어디서든, 자연환경 가운데 하나님의 간접 계시를 만나게 되었다.
그런데 어른이 되고, 도시에 살면서, 우리는 하늘을 쳐다볼 기회가 별로 없다. 차 안에, 집 안에, 자기 자신 안에 갇혀 지내다 보니 무지개를 의식하며 살지 못한다. 무지개에 대한 그런 신비감도 별로 없다.
어른의 마음은 어린이의 마음과 달라 감탄사도, 의문문도 거의 없다. 다시 무지개를 보라. 내 안의 무지개를 느껴 보자. 무지개를 본다는 것은 하나님과 마주한 언약의 한쪽 당사자로 자신을 의식하는 것이다. 내 마음속에 무지개를 회복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 앞에 선 자신을 자각하는 일이다.
2)
창세기는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행하신 무지개 언약에 대해 말씀하신다. 홍수 직후 살아남은 노아 가족과 하신 약속이다. 그들은 인류를 대표하였다.
무지개는 처음 창조 세계가 홍수로 멸망할 때 유일하게 살아남은 노아와 그의 가족에게 언약하신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기록의 핵심이다.
무재개 언약은 갑과 을의 계약관계이지만, 갑이 을을 지배하지 않는다. 다만 언약의 주도권은 하나님이 갖고 계시지만, 인간에게 특별한 강제 의무가 주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무지개 언약을 가리켜 은혜와 사랑의 언약이라고 부른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이 무지개 언약을 맺은 당사자는 노아와 그의 가족은 물론 모든 생물이다.
“내가 내 언약을 너희와 너희 후손과 너희와 함께 한 모든 생물 곧 너희와 함께 한 새와 가축과 땅의 모든 생물에게 세우리니 방주에서 나온 모든 것 곧 땅의 모든 짐승에게니라”(9-10).
그 언약은 다시는 노아의 홍수처럼 세상과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않으시겠다는 약속이었다.
이러한 창조질서의 정신에 따라 국가의 헌법으로 명시한 나라가 있다. 라틴아메리카 에콰도르는 헌법을 개정하면서 21세기 새로운 가치인 평화와 생명의 가치를 구체적으로 포함하였다. 인간의 기본권은 물론 바다거북, 바다도마뱀, 물개와 같은 생물의 권리를 구체적으로 보장하는 조항을 만들었다. 이것은 자연권으로, 인류에게 당면한 요구를 현실화 한 것이다.
일 년을 모두 7가지 계절을 구분했던 정원학자 칼 푀르스터는 “자연은 신의 커다란 방주이다”라고 하였다. 노아의 구원 방주는 오늘 우리와도 연관된다.
성경에서 계약은 조건적 언약과 무조건적 언약, 두 가지 계약 조건이 있다. 조건적 언약의 대표적인 것이 십계명이다. 십계명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필수적으로 지켜야 할 내용이 담겨있다.
네 하나님만 섬기라, 안식일을 지켜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십계명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최소한의 길을 제시한 것이다. 약속을 잘 지키면 복과 보호를 받으며, 어기면 책망과 심판을 받는다. 조건적 언약은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그 계약관계는 깨진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무지개 언약은 무조건적인 하나님 일방적 계약이다. 무조건적 언약은 당사자가 지켜야 할 어떠한 조건도 없다. 하나님의 편에서 일방적으로 자비를 베푸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사랑의 의무를 지시는 것이다.
노아와 맺은 언약이 대표적이다. 하나님께서 조화롭게 창조하신 창조세계는 인간의 불순종과 타락으로 파괴되었으나, 단 한 사람 노아의 순종과 믿음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노아의 경우를 보면, 노아는 세상이 아무리 악해도 노아처럼 살 수 있음을 가르쳐주는 하나의 전형이다. 인간은 누구나 악과 죄에 대해 충동성을 지닌 존재지만, 동시에 이를 물리칠 수 있는 능력도 지닌 존재인 것이다. 주위에서, 누구나 그렇게 하더라도 그것을 물리친 노아를 보면 우리도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대표하는 노아와 함께 모든 생물과도 약속하셨다.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멸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11).
하나님이 인간뿐 아니라 모든 생물과도 약속하셨다는 사실은 이 언약이 창조질서와 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큰비가 온 후에 뜨는 무지개, 이것은 과거에 대한 어두운 기억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동시에 보여주는 것이다. 한 마디로 심판과 구원, 책망과 자비, 죽음과 은혜 사이에서 전적으로 일방적인 하나님의 사랑과 언약을 보여주는 징표인 것이다.
3)
걷기도를 하면서 점촌에서 상주를 가던 중에 다리쉼을 하려고 동네 어귀의 한 까페에 들렀다. 시골에 있지만 아주 깨끗하고 세련되었다. 주인 얼굴을 다시 쳐다볼 정도였다. 여주인은 무표정하였다.
카페 이름이 아스만인데, 카페를 나설 때까지 무슨 뜻인지 몰랐다. 카페를 나서면서 까페 이름을 설명하는 배너를 읽었다. 외국에서 시집 온 여성 이야기였다. 아마 무표정한 여주인의 사연일 것이다.
아스만은 키르키즈스탄 말로 하늘이었다. 키르키즈스탄에서 시집온 여성은 집 안에서도, 집 밖에서도 말 상대가 없었다. 우리 말을 모르니 얼마나 답답했을까? 그럴수록 친정이 무척 그리웠단다. 그러던 어느 날 자전거를 타고 나섰다가 문득 하늘을 올려보았는데 한국의 하늘과 키르키즈스탄의 하늘이 너무 똑같아서 놀랐다고 한다.
이후로 친정이 그리울 때면 하늘을 쳐다보았다. 겨우 1초면 그리운 사람들을 볼 수 있노라고 적었다.
하늘을 올려다 볼 수 있는 것은 참 다행한 일이다. 하늘은 얼마나 소중한가? 하늘은 하나님을 대신하는 상징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죄를 지은 사람에게 하늘이 무섭지 않으냐고 한다. 또 하늘을 보고 자신은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고도 한다.
일상에서 하늘을 바라는 것은 참 소중한 일이다. 우리가 비 갠 하늘에 뜬 무지개를 바라보지 못한다면, 내 안의 무지개를 품고 살 일이다.
하나님이 노아와 맺으신 언약은 이처럼 모든 민족과 인류, 모든 생물과 맺으신 것이다. 오늘 우리 자신도 하나님과 언약의 한 파트너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나와 언약을 맺으셨다. 그 언약 때문에 늘 희망의 사람으로 살아간다.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있으리니 내가 보고 나 하나님과 모든 육체를 가진 땅의 모든 생물 사이의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16).
언약의 증거는 얼마나 중요한가? 만약 내가 언약 가운데 살고 있다고 믿는 사람은 남다르게 행동한다. 언약의 증거는 하나님께서 나를 기대하고, 신뢰하고, 사랑하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믿음의 사람은 내 마음의 눈으로 무지개를 보는 사람들이다. 늘 마음속에 하늘의 무지개를 품고 살면서, 평생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 사랑을 경험하면 살아간다. 그 사람은 앞이 캄캄한 인생의 절망을 맞더라도 심령의 눈으로 무지개를 본다. 믿음의 길은 내 안의 무지개를 바라보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다.
영국 성공회 대주교 윌리엄스는 무신론자 리처드 도킨스와 토론에서 “나는 우주에서 내 위치를 이해하려면 창세기를 본다”고 하였다.
과연 창세기는 우주 안에서 나를 어떻게 조명하고 있는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나를 창조하셨고, 믿음의 선조들을 복의 통로로 삼아 나를 축복하신다.
창세기에는 차원이 다른 지혜가 담겨있다. 윌리엄스는 “신은 사랑과 수학의 결합”이라고 불렀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은 사랑 없이 이해가 어렵다.
무지개의 한국식 표현은 색동이라고 한다. 그래서 색동을 가리켜 ‘한국 무지개’라고 부른다.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고 일부러 교회 이름을 지은 것은 아니지만 뜻하지 않게 무지개, 곧 언약의 백성이란 특별한 이름을 갖게 되었다.
그러기에 희망의 언약인 무지개 징표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 받은 것이다. 그런 화해와 평화의 상징, 언약과 희망의 증거가 되기를 바란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일방적으로 은혜의 약속을 하셨다. 그런 하나님의 은총을 기대며, 의지하는 일은 신실한 하나님의 자녀의 모습이다. 이 사순절기에 그런 약속을 지닌 사람답게 살자. 그는 바로 희망의 존재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이 사순절의 인생을 보내는 우리 모두와 그 무지개 언약 위에 함께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