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다 가이치 曾田 嘉伊智そだ かいち (1867~1962)】
「한국 고아의 아버지, 소다 가이치(曾田嘉伊智)의 삶」
대한제국 및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일본인 개신교 선교사, 교사, 사회복지활동가. 1905년 조선에 정착하여 전도사로 활동했고 아내 우에노 다키(上野タキ)와 1921년부터 가마쿠라 보육원을 운영하면서 평생 동안 고아들을 돌보았다. 후세 다쓰지와 함께 일제강점기에 조선을 도운 대표적인 일본인들 중 한 명이다.
조슈 번(現 야마구치현) 쿠마게군 소네촌 스미다 마을에서 태어났다. 오카야마에 위치한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고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다가 21세에 고향을 떠나 긴 방랑 생활을 하였다. 학자금 마련을 위해 나가사키에서 광부로 일하다가 25세에 홍콩에서 노르웨이 상선의 선원으로 일하면서 영어를 배웠다. 1896년 청일전쟁 이후 일본 제국의 식민지가 된 대만으로 가 독일계 공장에서 사무원 겸 통역관으로 취직하여 독일어를 배우다가 중국 본토로 넘어가 해군에 복무하면서 신해혁명에 가담했다. 하지만 정착하지 못하고 다시 대만으로 돌아오면서 산악지대를 방랑하는 등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다.
그러다 1899년에 31세였던 그는 한 경험을 통해 인생이 180도로 바뀌었다. 당시 대만에서의 불안정한 생활 때문에 과한 음주를 하는 경우가 잦았는데 어느 날 만취한 상태로 길거리를 방황하다가 쓰러져 서서히 의식을 잃어 가며 죽어가던 도중, 한 한국인 청년이 그를 업고 여관에 데려가 식비와 숙박비, 약값까지 마련해 주고 떠난 것이다. 이름 모를 한국인에게 도움을 받은 그는 자신을 구해준 한국인의 조국을 위해 은혜를 갚겠다면서 방탕한 생활을 즉시 청산하고 1905년 을사조약으로 국권을 침탈당하고 개신교 대부흥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던 대한제국에 들어와 황성기독교청년회에서 일본어 교사로 교육활동을 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종교부 총무로 재직하고 있던 독립운동가 월남 이상재 선생의 전도로 1906년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러던 중 개신교 신자이자 이화학당과 숙명여학교의 영어 교사로 재직하고 있던 우에노 다키를 만나 30세에 결혼하고 금주회 회장까지 지내면서 음주벽을 청산했다. 이후 일본인 경성감리회교회의 전도사가 되어 백만명 구령운동에 동참했다. 1911년 105인 사건이 일어나면서 윤치호, 이상재 등이 체포되자 데라우치 마사타케 조선 총독에게 석방을 요구했고 경성기독교회(현 덕수교회) 장로였던 와타나베 토오루 일본 대심원장(현 최고재판소장. 한국의 대법원장.)을 찾아가 "죄 없는 사람에게 왜 벌을 주려 하느냐"고 항의했으며 법정에서 이상재 선생의 재판을 맡은 판사를 꾸짖기도 했다. 이후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조선인 지도자들을 석방할 것을 요구하고 석방운동을 전개했다. 2년 뒤 보육인 사다케 오토지로[7]를 통해 보육의 길을 걸으면서 1896년 경성부 용산구 후암동에 사다케가 설립한 가마쿠라 보육원의 경성지부장으로 부임하여 1921년부터 1000명 이상의 조선인 고아들을 돌보기 시작하였다. 아내 우에노 다키도 1926년에 교사를 그만두고 보육 활동에 합류하였다.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시절에는 고아들에게 항일 교육을 시켰다며 육군 헌병대에 끌려가기도 했다. 1943년에는 77세에 함경남도 원산에 위치한 원산감리교회에 초빙되어 아내 우에노 다키에게 보육원을 맡기고 교역자로 부임하였고 이곳에서 생활하던 중 조선이 해방되었다.
해방 이후에는 소련군이 한반도로 남하하면서 원산에 살고 있는 일본인들의 집을 약탈하고 히키아게샤들을 강간하면서 일본인들이 교회로 대피하자 소다가 교회 입구에 나서서 이들을 보호했다. 1947년 10월 일본인들과 서울로 내려온 소다 부부는 일본으로 귀환하지 않고 미군정으로부터 조선 영주권을 취득했는데 얼마 안 있어 소다는 아내 우에노 다키에게 보육원을 맡기고 일본으로 건너가 폐허가 된 히로시마와 규슈, 홋카이도 등 전국을 돌아다니며 한 손에는 성경, 다른 한 손에는 세계 평화 어깨띠를 두르고 일본의 전쟁범죄를 회개하고 사과할 것을 촉구하며 가는 곳곳마다 일본인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였다. 그렇게 전국을 돌아다니던 와중에도 도둑을 만나고 폐렴에 걸려 고생했으며 교통사고를 당해 죽을 뻔하는 등 생사를 오갔다. 그러던 중 다키 여사는 1950년에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나 당시는 한일간의 국교가 맺어지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장례식에 참여하지 못했다. 1961년에는 사회인사가 된 고아원 동문들의 도움과 한경직 목사의 초청으로 특별기편을 타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윤태일 서울특별시장으로부터 서울특별시 시민증을 받았고, 국가재건최고회의로부터 일본인 최초로 문화훈장을 받았다.
1962년 3월 28일 가마쿠라 보육원의 후신인 영락보린원에서 고아들을 돌보며 생활하다가 향년 94세로 세상을 떠났으며 1950년 1월에 세상을 떠나 국회의사당에서 이윤영 前 사회부장관을 장례위원장으로 임명하여 사회단체연합장으로 장례가 치러졌던 우에노 다키 여사와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합장되었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당시 의장이었던 박정희 명의로 근조 화환을 보내면서 고인의 공적을 기렸다. 소다 부부는 양화진에 안장된 단 둘뿐인 일본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