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점고개를 넘어
고개를 이르는 한자어로는 령(嶺)과 치(峙)와 현(峴)이 있다. 셋 모두 뫼 산(山)을 부수로 달고 있다. 이 말고도 재(岾)가 있다. 고개를 재(岾)라고도 하는데 이 글자는 ‘점’으로도 읽힌다. 이때는 땅이름으로 쓰이는 경우다. 우리 고장에서 ‘점’이라는 지명이 한 곳 있다. 삼정자동에서 용제봉으로 향하는 등산로를 따라 가다 불모산으로 건너가면 잘록한 고개가 나온다. 그곳이 상점이다.
장유로 통하는 창원터널이 지나는 산등선이 상점이다. 대청계곡 끝 동네가 상점마을이다. 닭백숙과 오리고기를 파는 음식점이 있는 곳이다. 한 해가 저무는 마지막 토요일 나는 상점고개를 넘어갈 일이 있었다. 고향 큰집의 조카딸이 형제들을 모아 송년 모임을 가지면서 인근에 사는 숙부를 초대했다. 진주 큰조카가 창원 숙부를 태워 가려고 했다만 나는 걸어서 가겠노라고 했다.
집사람은 감기가 떨어지지 않고 있으며 다니는 절에서도 맡은 일이 있어 동행이 어려웠다. 나는 등산복 차림으로 길을 나섰다. 집 앞에서 101번 시내버스를 타서 대방동 대암산 등산로 입구에서 내렸다. 삼정자동 아파트단지를 돌아 용제봉으로 오르는 등산로인 임도를 따라 걸었다. 계곡을 건너니 지난해 이맘때 뚫린 불모산 숲속 길이 나왔다. 그 길로 가면 성주사 주차장이 나온다.
나는 숲속 길로 들지 않고 임도를 따라 상점고개로 향했다. 상점에서 왼쪽으로 가면 용제봉이고 오른쪽으로 가면 불모산이다. 불모산으로 가는 길은 등산로 말고 차도도 있다. 그곳엔 공군부대와 방송국과 통신사 중계소가 있어 산꼭대기까지 차가 올라야 한다. 불모산을 오르면 창원과 진해 시가지가 훤히 내려다보인다. 가덕도를 비롯한 점점이 뜬 섬들도 한 눈에 조망되는 산이다.
아까 용제봉으로 오르는 갈림길에서 두 갈래 선택지가 있었다. 용제봉 정상으로 올랐다가 장유사로 내려서는 길이 있다. 또 한 가지는 상점고개에서 장유사 언저리를 둘러친 산등선을 따라 내려서도 되었다. 그런데 나는 두 선택지에 미련이 없었다. 세밑에 닥친 한파로 날씨가 차고 가파른 높은 산꼭대기까지 오르고 내리기엔 성치 않은 내 무릎에 무리를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상점고개 못 미쳐 산악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내려왔다. 불모산을 오르려는 산행객들도 간간이 지났다. 고개에는 성황당처럼 수령이 꽤 되고 수관이 아름다운 소사나무가 있다. 그곳에서 왼쪽으로 난 용제봉으로 오르는 길을 따라가다 상점마을로 가는 길로 내려섰다. 숲길은 가랑잎이 쌓이고 너들이 나오기도 했다. 인적이 드문 호젓한 숲은 졸참나무 같은 낙엽활엽수가 자랐다.
아침 방송은 세밑에 매서운 추위가 닥쳤다고 했다. 서해안엔 눈이 내리고 울릉도와 제주 산간지역은 대설경보가 내렸다. 내가 걷는 곳은 양지 바른 곳이라 그리 추운 줄 몰랐다. 숲이 끝난 곳은 윗상점마을이었다. 계곡 따라 닭백숙이나 오리고기를 파는 음식점이 들어선 곳이다. 가족단위나 계모임을 위한 회식 장소로 많이 찾아오는 곳이다. 주말이라 손님들이 간간이 드나들었다.
계곡을 한참 내려가니 참숯찜질방이 나오고 이어 장유 신도시 아파트단지가 나타났다. 조카딸이 사는 아파트는 신도시 가운데 율하지구라고 들었다. 선사유적지 고상가옥을 복원시켜 놓은 관동공원을 둘러보았다. 이어 굴암산에서 흘러내린 계곡을 따라 걸었다. 신도시 부지를 만들 때부터 친환경적으로 잘 보존한 생태하천이었다. 산책로엔 운동을 나온 사람들이 더러 거닐었다.
율하고등학교 뒤를 지날 즈음 조카딸로부터 전화가 왔다. 조카딸이 사는 아파트는 그곳에서 멀지 않았다. 아파트단지 입구를 들어서니 조카사위가 마중을 나왔다. 시골의 큰형님 내외와 울산의 작은조카와 질부는 먼저 와 있었다. 이어 진주 큰조카와 질부가 귀염둥이들을 데리고 왔다. 창원 숙부는 장유 조카딸의 집을 찾아가면서 대방동에서 상점고개를 넘어 네 시간 남짓 걸었다. 13.1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