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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 중앙박물관 추천 동선
명품30선
꼭 봐야 할 각 시대별로 가장 귀중한 문화 유산인 명품 30선을 놓치지 마세요!
1주먹도끼
세계의 구석기 문화사를 바꾼 '주먹도끼'
선사고대관 > 구석기실
주먹도끼는 끝부분이 뾰족한 타원형 석기로, 뭉툭한 부분을 손으로 쥐고 여러 용도로 사용했던 구석기시대 도구입니다. 돌의 한쪽을 떼어 낸 뒤 반대편을 다시 떼어 내 지그재그 모양의 양면 날을 만들었습니다. 구석기인들은 미리 전체적인 모양을 생각하고 계획을 세워 원하는 형태의 주먹도끼를 제작했습니다. 주먹도끼는 서유럽, 중동, 아프리카, 영국, 인도, 동아시아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서 발견되며, 대략 170만 년 전부터 10만 년 전까지 사용되었습니다. 주먹도끼를 만든 고인류는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주먹도끼는 연천 전곡리에서 출토된 것입니다. 1940년대 초반 미국 고고학자 모비우스(H. L. Movius)는 구석기문화를 유럽의 주먹도끼 문화권과 아시아의 찍개 문화권으로 분류하고, 동아시아 지역에는 주먹도끼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의 학설은 동아시아 지역이 주먹도끼가 발견되는 유럽・아프리카・중동 지역에 비해 문화적・인종적으로 뒤처졌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러나 1978년 전곡리에서 동아시아 최초로 주먹도끼가 발견되자 세계 고고학계는 크게 놀랐고, 이러한 이분법적 이론은 폐기되었습니다.
2빗살무늬토기
신석기시대 새로운 발명품 '빗살무늬 토기'
선사고대관 > 신석기실
빗살무늬 토기는 우리나라 신석기시대의 대표적인 토기로, 지금으로부터 약 6,000년 전 무렵에 만들어졌습니다. 전체적으로 V자 모양이고, 아가리・몸통・바닥 세 부분으로 구분해 다양한 무늬를 채워 넣었습니다. 신석기시대 토기에는 기하학무늬, 식물무늬, 동물무늬 등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무늬를 장식할 때는 토기 겉면에 그리거나 새겨 넣거나 점토 띠를 덧붙이는 방식을 이용했습니다. 중국 화중華中 이남, 인도,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동식물이나 기하학무늬가 주류를 이룹니다. 이와 달리 우리나라와 중국 동북 지역, 시베리아, 북유럽 등지에서는 무늬를 새겨 넣는 방식을 주로 사용했습니다. 점토 띠를 붙이는 방식은 우리나라와 시베리아, 일본열도에서 확인됩니다. 좌우 대칭과 균형감을 고려한 무늬 구성은 신석기인의 뛰어난 공간 구성력과 미적 감각, 수준 높은 정신세계를 보여 줍니다. 특히 빗살무늬 토기에서 볼 수 있는 여러 기하학무늬는 신석기인의 자연관이 추상적으로 표현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신석기인은 우연한 기회에 점토를 불에 구우면 단단해진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러한 성질을 이용해 토기를 발명해 냈습니다. 토기를 사용하면서 음식을 저장하고 조리할 수 있게 되었고, 정착 생활을 하며 이전까지 이용하지 않던 새로운 식물 자원을 활용하는 등 인류의 생활 방식에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3농경문 청동기
청동기시대 농경문화가 담긴 '농경문 청동기'
선사고대관 > 청동기/고조선실
농경문 청동기에는 청동기시대의 농사짓는 모습이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기원전 15세기를 전후해 한반도는 벼농사를 중심으로 한 농경農耕 사회가 되었습니다. 농경이라는 새로운 생계 경제가 등장하면서 마을의 규모나 입지, 생활 도구, 의례 등 사회 전반에 많은 변화가 생겼습니다. 그동안 청동기시대 농경의 구체적인 모습은 유적의 입지나 유적에서 출토된 석기의 기능으로 살펴보는 간적접인 방법을 주로 사용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대전 지역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하는 농경문 청동기는 문자 기록이 없던 당시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 주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농경문 청동기의 고리가 달린 면에는 나뭇가지 위에 새가 마주 보고 앉은 모습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반대 면에는 오른쪽에 머리에 긴 깃털을 꽂고 벌거벗은 채 따비로 밭을 가는 남자와 괭이를 치켜든 사람, 왼쪽에는 곡식을 항아리에 담는 모습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는 봄에 농사를 시작해 가을에 수확하기까지의 과정을 시간 순서대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처럼 농경문 청동기는 벌거벗은 채 농사짓는 모습과 나뭇가지 위에 앉은 새가 의미하는 바를 통해 한 해의 풍요와 안녕을 기원하는 의례에 사용된 도구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아랫부분이 깨져 정확한 모습은 알 수 없으나, 전체적인 형태가 대전 괴정동 유적과 아산 남성리 유적에서 출토된 방패 모양 청동기와 매우 유사해 이 농경문 청동기 역시 기원전 5세기~기원전 4세기경 한국식 동검문화가 발전하기 시작한 단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4한국식 동검
지배자의 상징 '창원 다호리 1호 무덤 출토품'
선사고대관 > 부여/삼한실
창원 다호리 유적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이른 목관묘군의 하나로 고대국가 형성에 관한 새로운 자료를 제공했습니다. 다호리 유적 널무덤〔木棺墓〕의 가장 큰 특징은 관 아래 무덤 바닥 한가운데 부장품을 넣기 위한 구덩이〔腰坑〕를 판 것인데, 이는 다호리 유적에서 처음으로 확인되었습니다. 1호 무덤의 구덩이에서 발견한 바구니에서는 옻칠한 칼집이 있는 한국식 동검과 철검・청동 투겁창・쇠 투겁창・화살 같은 무기류와 따비・쇠도끼 등 철로 만든 농공구류, 중국 거울과 허리띠 고리・구슬 같은 장신구, 다양한 칠기와 그 안에 담긴 곡식, 부채, 말방울, 오수전, 붓, 노끈 등 엄청난 유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중국 거울과 중국 화폐인 오수전이 나온 것으로 보아 이 무덤은 기원전 1세기 후반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역사 기록에는 풍부한 철광산과 제철 기술을 보유한 변한이 낙랑과 왜에도 철을 공급했으며, 철을 화폐처럼 사용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다호리 유적에서는 화폐처럼 사용할 수 있도록 2개씩 묶은 주조철부와 중국계 유물, 야요이 토기 같은 왜계倭系 유물도 출토되었습니다. 즉 당시 변한의 지배 세력들은 철의 생산과 통제, 교역으로 부를 축적하고 이를 토대로 권력을 유지, 확대해 나갔습니다. 다호리 유적은 이런 변한 사회 지배층의 집단 묘지이며, 그중 가장 다양하고 많은 부장품이 출토된 1호 무덤의 주인공은 변한의 지배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5호우총 청동그릇
'호우' 글자가 있는 청동 그릇
선사고대관 > 고구려실
경주 노서동 140호분의 남쪽 무덤은 고구려 광개토대왕과 관련한 청동 그릇이 출토되어 ‘호우총壺衧塚’이라 불립니다. ‘호우壺衧’는 반구형의 몸체에 납작한 형태의 뚜껑으로 이루어졌으며, 굽이 있는 바닥에는 ‘乙卯年國罡上廣開土地好太王壺杅十을묘년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호우십’이라는 글자와 ‘#’가 돋을새김되어 있습니다. ‘국강상’은 왕의 무덤이 있는 지역을 나타내며, ‘광개토지호태왕’은 광개토대왕이 죽은 뒤 영토를 널리 개척한 업적을 칭송해 붙인 시호諡號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을묘년’은 415년(장수왕 3)으로, 3년 전에 돌아가신 광개토대왕을 추모하기 위해 만든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십十’ 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열 개 혹 열 번째를 의미하는 것으로, 적어도 10개의 호우를 만들었다고 추정하기도 합니다. 위쪽 중앙의 ‘#’ 역시 아직까지 의미를 정확히 알 수 없는 표식입니다.
호우총에서 금관은 나오지 않았지만, 시신의 머리 오른쪽에 바르게 놓여 있던 청동 그릇은 고구려와 신라 역사의 중요한 단서를 품고 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광개토대왕은 신라 내물왕의 구원 요청을 받고 5만 대군을 보내어 주변국의 위협으로부터 신라를 구했습니다. 따라서 광개토대왕을 기념하기 위한 물건을 신라에 보냈을 개연성은 충분합니다. 어쩌면 을묘년(415)에 거행된 광개토대왕의 추모 행사에 참석했던 신라 사신이 이 그릇을 받아 와 대대로 간직하다가 무덤에 넣은 것은 아닐까요?
6무령왕비 금제관식
백제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관 꾸미개'
선사고대관 > 백제실
백제의 지배층은 화려한 금속공예품과 중국에서 수입된 자기와 같은 위세품을 통해 권위를 나타내고자 했습니다. 백제 왕릉 중 유일하게 무덤 주인이 확인된 무령왕릉에서는 당대 최고 수준의 유물들이 확인되었습니다. 그중 왕과 왕비의 머리에 쓴 관 꾸미개는 백제 고유의 우아하고 정교한 특징이 잘 나타납니다.
7갑옷·투구
뛰어난 철기 제작기술을 보여주는 '가야 갑옷'
선사고대관 > 가야실
고령 지산동 32호 무덤에서 출토된 갑옷과 투구입니다. 갑옷은 가로로 긴 조금 넓은 판과 좁은 판을 못으로 고정한 뒤 몸의 곡선에 맞춘 횡장판갑옷입니다. 투구는 복숭아씨앗 모양을 닮았는데 목 부분을 가리는 긴 철판이 투구 뒷부분에 붙어 있습니다. 이와 별도로 어깨를 가리는 갑옷도 출토되었는데, 당시 대가야 지역 판갑옷의 정수를 볼 수 있습니다.
8금관
황금의 나라, 신라의 상징 '금관과 금허리띠'
선사고대관 > 신라실
금관은 왕족의 힘과 권위를 상징합니다. 이 금관과 금허리띠는 황남대총 북분에서 출토되었습니다. 금관을 장식하는 나뭇가지 모양 장식은 관테 안쪽에 덧대어져 금못으로 고정되어 있습니다. 관테의 아래위 가장자리에는 두 줄의 연속 점무늬와 한 줄의 파도무늬가 새겨져 있고 그 사이에 곱은옥들이 매달려 있습니다. 출토 당시 관테의 앞면에 굵은 고리 귀걸이 여섯 개가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금허리띠에는 약통, 물고기, 숫돌, 족집게, 곱은옥, 손칼 등이 달려 있습니다. 숫돌과 족집게는 철기를 만들 때 사용했던 도구이고 약통은 질병 치료와 관련 있습니다. 또한 곱은옥은 생명을, 물고기는 식량을 상징합니다.
9개성 경천사 터 십층석탑
고려 사람들이 생각한 불국토의 모습 '경천사 십층석탑'
역사의 길 > 역사의 길
부처, 보살, 사천왕과 신중들, 나한. 이들을 한자리에 모아 부처의 세계를 그려낸다면 어떻게 표현해볼 수 있을까? 수평적인 모습일까, 아니면 수직적인 모습일까? 시대마다 국가마다 사람들이 생각했던 불국토의 모습은 달랐을 것이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자리한 국보 경천사 십층석탑은 약 13.5m의 웅장한 규모의 석탑으로, 석탑 전체에 불, 보살, 사천왕, 나한, 그리고 불교 설화적인 내용이 층층이 가득 조각되어 있다. 이는 모든 불교의 존상을 모은 일종의 불교적 판테온으로 고려시대 사람들이 생각한 3차원적인 불국토의 세계를 보여준다.
경천사 십층석탑의 조성배경
경천사 석탑은 1348년(충목왕 4년) 건립된 석탑으로 원래는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중연리 부소산에 위치해 있었다. [고려사] 기록에 따르면 경천사는 고려 왕실의 기일에 종종 추모제를 지냈던 곳으로 왕실의 왕래가 잦았던 사찰이다. 경천사가 폐사된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20세기 초에는 이미 폐사되어 석탑만 남아 있었다. 비록 일부 글자가 파손되거나 마모되었지만, 석탑의 1층 탑신석 상방에는 건립 연대와 발원자, 그리고 조성배경을 알려주는 명문이 남아있다. 명문에 따르면 석탑은 대화엄 경천사에서 1348년 3월 조성되었고, 발원자는 대시주 중대광 진녕부원군 강융(姜融), 대시주 원사 고룡봉(高龍鳳), 대화주 성공(省空), 시주 법산인 육이(六怡)였다. 이들은 왕실의 안녕과 국태민안을 기원하고 불법이 빛나고 석탑 건립의 공덕으로 일체 중생이 모두 성불하게 되기를 기원하였다. 강융은 원래는 관노 출신으로 충선왕의 측근이 되어 공을 세운 인물이며, 그의 딸은 원(元)의 승상 탈탈(脫脫)의 애첩이 되어 권세를 누렸다. 고룡봉은 고려 환관으로 원에 가서 황제의 신임을 얻어 출세한 인물이다. 그는 충혜왕대에 공녀로 간 기자오의 딸이자 기철(奇轍)의 여동생을 원의 황제인 순제에게 선보여 황후에 오르게 한 인물이다. 자정원사(資政院使)로 봉해졌는데 자정원은 기황후의 부속관청이었기에, 그는 고려에서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이처럼 석탑 발원자의 면모를 보면 친원 세력이 석탑 건립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발원자의 성격 때문인지 공교롭게도 경천사 석탑의 형태는 기존의 간결한 전통적인 석탑의 외형과는 매우 다르다. 석탑의 기단부와 탑신석 1층에서 3층까지의 평면은 소위 한자의 아(亞)자와 같은 형태로, 사면이 돌출되어 있다.
이러한 평면은 원대에 유행한 몽골, 티베트계 불교인 라마교 불탑의 기단부나 불상 대좌 형태와 유사한 외래적 요소이다. 반면 탑신부 4층부터 10층까지의 평면은 방형 평면으로, 경천사 석탑은 전통적인 요소와 외래적 요소의 조화 속에 탄생한 이형 석탑임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경천사에 관한 몇몇 조선시대 문헌 기록에는 원의 승상 탈탈이 경천사를 원찰로 삼고 강융이 원에서 공장(工匠)을 뽑아 탑을 만들었다고 전하며, 당시에도 승상 탈탈과 강융의 초상화가 남아있었다고 기록했다. 비록 이를 모두 그대로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발원자의 성향이나 석탑의 형태로 미루어 볼 때 원대 장인이 참여했을 가능성도 있다.
석탑 전체에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는 불보살이 백미
경천사 석탑에는 목조건축의 기둥과 공포, 난간과 현판이 잘 표현되어 있고, 특히 기와가 정교하게 표현된 옥개석은 마치 고려시대 목조건축의 생생한 모습을 반영한 듯하다. 그러나 경천사 석탑의 백미는 역시 석탑 전체에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는 불보살의 모습이다. 전체 구성을 살펴보면 기단부에는 불법을 수호하는 존재들, 즉 밑에서부터 사자, 용, 연꽃, 소설 [서유기]의 장면, 그리고 나한들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1층부터 4층까지의 탑신부에는 부처의 법회장면, 즉 불회(佛會) 장면이 총 16장면으로 새겨져 있고 그 사이사이 불교 존상들이 새겨져 있으며, 5층부터 10층까지는 선정인 또는 합장을 한 불좌상이 새겨져 있다. 이는 불교의 존상들을 불교적 위계에 따라 층층이 표현한 것이다.
기단부에 새겨진 [서유기]는 송대에 이미 설화가 된 중국 당대 승려 현장(玄奘)의 인도로의 구법행이 명대에 소설로 간행된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기단부 부조 20장면을 살펴보면 이미 원대에 명대 [서유기]에 사용되었던 판화와 유사한 장면이 존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서유기] 장면은 이를 바라보는 불자들에게는 현장의 구법행을 통해 공덕과 깨달음에 대한 불교적인 교훈을 전하고, [서유기]의 등장인물들로 하여금 내부에 안치된 사리를 수호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기단부에 새겨졌다고 추정된다. 탑신부의 조각은 1층부터 3층까지의 불회(佛會) 장면만을 일컬어 12회라고 하기도 하고, 때로는 4층의 불회 장면을 포함하여 16회로 보기도 한다. 불회 장면 위에는 현판 모양에 각 불회의 이름이 명시되어 있다.
이러한 불회 부조의 조성 배경으로는 여러 견해가 제기되었다. 우리 전통 불교와 관계 깊은 경전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기도 하고, 층별로 도상의 특징을 구분하여 1층은 우리나라 불교 신앙을, 2층은 사상을, 3층은 밀교 관련으로 보기도 한다. 또한 사방불회로 추정하기도 하고 1층 남면의 삼세불회에 주목하여 새로운 개념의 삼불 도상이 출현한 것에서 도상적인 의의를 찾는 연구도 있다. 경천사 석탑의 정교한 조각 표현이 가능했던 이유는 경천사 석탑이 전통적인 불상이나 석탑의 재질인 화강암이 아니라 조형 작업이 쉬운 무른 재질의 대리석이기 때문이다. 경천사 석탑이 건립된 뒤 약 120여 년이 흐른 후, 조선 왕실 발원으로 만들어진 원각사지 십층석탑에는 경천사 석탑의 형태와 도상이 그대로 재현되기도 하였다.
경천사 십층석탑의 수난사
경천사 석탑이 중요한 또 하나의 이유는 석탑 자체가 한국 문화재 수난사를 대표하기 때문이다. 1907년 순종의 가례에 일본 특사로 온 궁내대신 다나카 미스야키(田中光顯)가 석탑의 무단반출을 시도했다. 당시 주민들이 이를 저지했으나 헌병들이 총칼로 위협하여 수레로 부재들을 반출하였고, 다시 군수가 이를 제지 했지만 결국 한밤중에 밀반출되었다. 석탑 반출은 즉시 문제가 되어 <대한매일신보>에는 10여 차례 이상의 기사와 논설이 게재되어 석탑 반출의 불법성을 알렸다. 석탑 반환의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은 월간지 <코리아 리뷰(Korea Review)>의 발행인 미국인 헐버트(Homer B. Hulbert)와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 데일리 뉴스(Korea Daily News)>의 발행인인 영국인 베델(Ernest T. Bethell)의 지속적인 기고 덕분이었다. 특히 베델은 일본의 영자 신문과 <뉴욕 포스트(New York Post)>에도 불법 약탈을 알렸으며,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밀사로 파견되었을 때도 현지 신문에 석탑 밀반출을 폭로하였다. 결국 계속된 반환 여론 조성에 1918년 11월 15일 석탑은 국내로 돌아오게 되어 1919년 박물관에 귀속되었다.
국내에 반환된 경천사 석탑은 당시 기술로는 재건립이 어려웠기에 1960년까지 경복궁 회랑에 보관되었다. 1960년 국립박물관의 주도하에 경천사 십층석탑의 훼손된 부재가 수리되어 경복궁에 세워졌고, 1962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정밀한 보존처리가 요구되었기에 1995년 석탑은 다시 해체되었고 문화재연구소에서 약 10여 년에 걸쳐 보존처리되었다. 이후 2005년 국립중앙박물관의 용산 재개관 시 현재의 전시실에서 재조립되어, 100여 년 만에야 비로소 석탑의 그 웅장한 위용을 다시 드러낸 것이다.
경천사 석탑은 전통과 외래적 요소를 조화롭게 만들어 새로운 양식을 만든 우리 문화사의 기념비적 석탑이며, 동시에 굴곡진 우리의 근대사를 반추해보게 한다는 점에서 우리 문화재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지표라 할 수 있다.
10철불 좌상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철불'
선사고대관 > 통일신라실
크기 : 높이 150cm, 무릎너비 118cm, 두께 86cm
이 철불 좌상은 머리는 나발에 육계는 크고 넓적하다. 둥근 얼굴에 턱은 작으며, 볼에는 살이 올라 있다. 이마의 선은 반듯하고, 이마에는 백호 구멍이 크게 뚫려 있다. 눈썹이 가늘고, 가늘게 뜬 눈의 눈꼬리는 올라가 있다. 입술은 작고 얇으며, 귀는 큼직하다.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며, 양손은 따로 제작하여 팔목에 끼운 듯하나 지금은 유실되고 없다. 가슴은 넓고 당당하며, 오른쪽 어깨를 노출한 편단우견식의 옷차림이다. 가슴 근육과 젖가슴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었으며, 옷자락의 주름도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사실적인 통일신라 불상 양식의 전통을 잘 계승한 철불로, 이후 고려시대에 많이 제작된 철불의 모본이 되는 작품이다.
11백지묵서대반열반경
최고 수준의 고려 인쇄 문화 '재조대장경 경판으로 인쇄한 경전'
중근세관 > 고려2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로도 알 수 있듯이, 고려는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만들어 책을 찍어 냈습니다. 그런데 고려는 금속활자가 나오기 전에도 인쇄문화 분야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목판에 새겨서 먹을 칠해 종이에 찍어 낸 이 대장경大藏經이 그 같은 사실을 잘 보여 줍니다. 대장경은 부처님의 말씀을 담은 경장經藏, 교단의 계율을 모은 율장律藏, 고승高僧과 불교 학자들이 남긴 경전에 대한 해설과 주석을 실은 논장論藏으로 구성되며, 불교 경전인 동시에 여러 분야에 걸친 지식을 풍부하게 담아내 ‘중세의 백과사전’이라고도 불립니다. 중세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가 자신들의 언어를 사용해 대장경을 만들었는데, 그중에서도 고려의 대장경은 내용이 충실하고 목판의 새김이 섬세해 으뜸으로 꼽힙니다. 1011년(현종 2) 거란군이 개경을 침범하자, 고려 조정은 부처의 힘으로 이를 물리치기 위해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1232년(고종 19) 몽골군의 침입으로 불타 버리고 맙니다. 그러자 당시 집권자였던 최이崔怡는 몽골군을 부처의 힘으로 몰아내기 위해, 1236년(고종 23) 대장도감大藏都監을 설치하고 16년에 걸친 노력 끝에 대장경을 다시 만들었습니다. 이것을 재조대장경再雕大藏經 또는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이라고 합니다. 현재 합천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는 팔만대장경 목판으로 인쇄한 이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은 석가모니의 열반 당시 모습과 가르침을 기록한 경전입니다. 이는 고려 불교의 수준을 알 수 있는 자료인 동시에, 고려의 인쇄문화가 당시 최고 수준에 이르렀음을 보여 주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12한글 금속활자 소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조선시대 활자 '을해자와 함께 쓴 한글 금속활자'
중근세관 > 조선2실
1461년에 간행된 『능엄경언해楞嚴經諺解』에 사용한 한글 활자입니다.
『능엄경』은 ‘큰 깨달음을 성취한 부처님이 되기 위해 보살들이 닦는 수행법을 설한 경’이며, ‘언해’란 한문을 한글로 풀어서 쓴다는 뜻입니다. 『능엄경언해』는 세조가 한글로 풀이한 『능엄경』을 간경도감刊經都監에서 간행한 것으로, 불교 경전 가운데 가장 먼저 한글로 번역한 책입니다.
본문의 한문 부분은 1455년에 강희안姜希顔의 글씨체를 바탕으로 만든 을해자乙亥字로 찍었습니다. 이와 함께 쓰인 한글 활자는 ‘을해자 병용 한글 활자’, 즉 ‘을해자와 함께 쓴 한글 활자’라고하며, 『능엄경언해』에 처음 사용해 ‘능엄한글자’라고도 합니다.
이 한글 활자가 만들어진 시기는 을해자가 주조된 1455년과 『능엄경언해』를 인쇄한 1461년(세조 7년) 사이로 추정됩니다. 조선은 고려시대의 금속활자 인쇄술을 계승해 국가 주도로 수십 차례 금속활자를 만들어 다양한 서적을 인쇄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이는 서양의 여러 나라뿐 아니라 중국, 일본 등 다른 한자 문화권 국가와도 다른 조선 인쇄문화의 특징입니다. 조선의 공식 문자는 한자였지만 조선시대에 국가에서 만든 활자 가운데는 한글 금속활자도 있습니다. 특히 『능엄경』을 찍은 이 금속활자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조선시대 활자일 뿐 아니라 한글 활자라는 점에서 우리 문화의 독창성을 잘 보여 줍니다.
13대동여지도 목판
김정호가 만든 대형 전국지도 '대동여지도를 찍어낸 목판'
중근세관 > 조선3실
김정호金正浩가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를 인쇄하기 위해 제작한 목판입니다. 대동여지도가 1861년에 간행되었으니 목판은 그즈음에 완성된 것으로 보입니다. 목판에는 산줄기와 물줄기를 바탕으로 고을, 교통로와 통신 시설, 군사 시설 등 각종 정보를 정교하게 조각했습니다. 목판의 크기는 대개 가로 43cm, 세로 32cm 안팎이며, 목판 하나에는 남북 약 47km(120리), 동서 63km(160리)의 지리 정보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100년쯤 된 피나무를 사용했으며 목판의 앞뒤 양면에 앞뒷면을 모두 사용해 조각했습니다. 대동여지도 전체를 조각하려면 목판 60매 정도가 필요하며, 목판으로 인쇄한 지도를 모두 이어 붙이면 세로 약 6.7m, 가로 약 3.8m 크기의 대형 전국 지도가 만들어집니다. 오늘날 남아 있는 12개의 목판 중 11개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이 목판에는 〈대동여지도〉를 처음 간행한 뒤에도 김정호가 교정과 수정 작업을 꾸준히 진행했음을 보여 주는 흔적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이는 조금이라도 더 나은 지도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 김정호의 열정을 잘 보여 줍니다.
14 외규장각 의궤
조선 왕조의 위대한 기록 유산 '외규장각 의궤'
중근세관 > 조선3실
의궤儀軌는 ‘의식의 본보기가 되는 책’이라는 뜻으로, 왕실의 혼례와 장례, 국왕의 즉위식 등 중요한 의식과 행사를 개최한 뒤 준비, 실행, 및 마무리까지의 전 과정을 글과 그림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의궤를 비롯해 왕실의 중요한 자료들은 정조正祖가 강화도에 설치한 도서관인 외규장각外奎章閣에 보관되어 있었으나 1866년(고종 3) 병인양요 때 대부분 불에 타 없어졌습니다. 그 가운데 의궤 297책은 프랑스군이 약탈해 가져갔다가 145년 만인 2011년에 우리나라로 돌아왔습니다. 외규장각 의궤는 고급 종이에 정성껏 글을 쓰고 천연 안료로 곱게 그림을 그린 뒤 고급 비단으로 표지를 싸서 놋쇠 물림으로 묶었습니다. 우리나라에 돌아온 외규장각 의궤는 대부분 왕이 보기 위한 것으로 당대 최고의 도서 수준과 예술적 품격을 보여 주며, 특히 국내외에 한 점밖에 없는 유일본이 상당수 포함되어 더욱 중요합니다. 의궤는 같은 유교 문화권을 형성했던 중국, 일본, 베트남 등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우리만의 독특한 기록 유산입니다.
15금은제 칙명지보
대한제국 황제의 도장 '칙명지보'
중근세관 > 대한제국실
1897년 10월 고종高宗은 자주독립국임을 세계에 알리고 부국강병을 실현하고자 환구단圜丘壇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고 대한제국大韓帝國을 선포했습니다. 대한제국의 황제 고종은 중국 황제의 책봉을 받는 제후국諸侯國이 아닌 동아시아의 황제국皇帝國으로서 그에 걸맞은 위상을 정립하고자 했습니다. 그에 따라 황제만이 쓸 수 있는 용어인 칙서勅書, 폐하陛下, 짐朕, 만세萬歲 등의 용어를 사용하였고, 황색 곤룡포를 입었으며, 국새國璽와 어보御寶를 다시 만들었습니다. 대한제국을 선포한 뒤 1897년에 새로 만든 황제의 도장인 이 ‘칙명지보勅命之寶’는 손잡이의 거북 장식을 황제를 상징하는 용으로 바꾸었습니다. 도장의 명칭도 ‘인印’에서 ‘보寶’로 바뀌었으며, 대한제국에서는 두 종류의 ‘칙명지보’를 제작했습니다. 금도금으로 사방 11cm 크기에 큰 글자를 새긴 ‘대자大字 칙명지보’는 3-6품의 주임관奏任官 임명장에 주로 사용했습니다. 주임관 임명장에 칙명지보를 찍어 칙명勅命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대자 칙명지보’는 현존하지 않습니다. 이 칙명지보는 은도금을 한 사방 9cm 크기에 작은 글자를 새긴 ‘소자小字 칙명지보’로 황제의 명령인 조칙詔勅 등에 사용했습니다.
16태자사 낭공대사 비석
신라 명필 김생의 글씨를 새긴 '태자사 낭공대사 비석'
서화관 > 서화Ⅰ
한글을 창제하기 이전에는 우리나라에서도 한자를 사용해 뜻을 기록하고 전달했습니다. 중국으로부터 한국에 한자가 전래된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창원 다호리 유적에서 기원전 1세기 무렵의 붓이 출토되어 일찍부터 한자를 사용한 기록문화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백제 의자왕 때의 귀족 사택지적이 654년에 세운 사택지적비砂宅智積碑의 글씨는 단정하면서도 힘 있는 해서체楷書體로, 삼국시대의 서예가 높은 수준에 이르렀음을 보여 줍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김생金生(711-?)이 명필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김생은 왕희지王羲之(307-365)와 안진경顔眞卿(709-785) 등 중국 서예가의 필법을 소화했을 뿐 아니라 강하고 활달한 필치로 개성을 드러내며 명필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태자사太子師 낭공대사朗空大師 비석’은 통일신라의 국사國師였던 낭공대사의 행적을 기려 고려 광종 때 세운 비碑로, 김생의 행서行書를 집자集字해 글씨를 새겼습니다. 비문은 최치원崔致遠의 사촌 동생으로 당나라에서 문과에 급제했던 최인연崔仁渷이 지었습니다. 오늘날 김생의 글씨는 거의 전하지 않으므로 ‘신라의 왕희지’, ‘신품사현神品四賢’의 한 사람으로 추앙받은 김생의 글씨를 볼 수 있는 귀중한 비석입니다. 비석 옆면에는 조선 중기의 문인인 박눌朴訥(1448-1528)이 정중한 해서체로 비석을 다시 발견한 감동을 새겨 놓았습니다. 시대가 흘러도 변하지 않는 예술의 가치를 이 비석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17강세황 필 노송도
노송도
서화관 > 서화Ⅱ
다른명칭 姜世晃筆 老松圖
국적/시대 한국 - 조선
재질 종이
작가 姜世晃
분류 문화예술 - 서화 - 회화 - 일반회화
크기 세로 42cm, 가로 102.5cm
소장품번호 신수 15765
老松圖는 노송만을 단독으로 묘사한 것으로, 단폭(單幅)으로 그리기도 하고 각 폭으로 꾸민 병풍화로도 그리며, 일지송(一枝松)을 그려 연결병풍으로 꾸며서 시원하고도 큰 규모의 그림으로 나타내기도 한다. 소나무는 높은 기개와 풍치를 지니고 있고, 또 사계절을 통하여 변하지 않는 푸르름을 간직하고 있어 군자의 덕과 장수를 상징하는 수목으로 비유되었다.
『사기(史記)』에 기록하기를,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가 태산(泰山)에 올랐다가 소나기를 맞아 급히 한 노송 밑에서 쉬었다가 그 소나무에게 오대부(五大夫)의 벼슬을 내렸다고 한다.
이러한 일화 등을 배경으로 노송은 수목의 군자가 되어 오청(五淸 : 竹·梅·菊·松·石)·세한삼우(歲寒三友 : 松·竹·梅)·사우(四友 : 梅·松·蘭·竹)·십팔공(十八公) 등의 하나로 꼽히면서 문인들의 사랑을 받아왔으며, 또한 송수천년(松壽千年)·송백불로(松柏不老) 등의 장생을 상징하는 화제로서 애호되기도 하였다.
노송도의 배경으로는 불로초·아침해·모란·바위 등이 흔히 쓰이고 뜻깊은 화제도 따른다. 민화체(民畫體)의 노송도는 정통화가 묵화(墨畫)인 데 비하여 짙은 채색으로 화려한 화풍을 나타내었고, 문양화(文樣畫)로도 발전하여 설화장식용의 미술로서도 큰 구실을 하였다.
18법화경 그림
부처의 가르침을 그림으로 풀어낸 '변상도'
서화관 > 불교회화
국적/시대 한국 - 고려
재질 종이
크기 : 세로 36.1cm, 가로 12.4cm
화면 오른쪽에 석가모니 부처의 설법 장면을 그리고, 왼쪽 편에 경문(經文)의 설화 내용을 그린 『법화경』 제4권의 변상도이다. 석가 설법 장면은 오른손을 들어 설법에 열중하고 있는 부처와 그 주위를 아난과 가섭존자, 8대보살, 그리고 사천왕이 에워 싼 모습과, 그 앞에 두 손을 모아 합장을 한 청문중(聽聞衆)을 표현하였다. 청문중 위쪽으로는 전각과 같이 생긴 탑이 보이는데, 그 안에 이불병좌상(二佛竝坐像)이 그려져 있어 「견보탑품 見寶塔品」을 표현한 것을 알 수 있다. 그 옆에는 파도 위로 솟아오른 연화좌에 보살 모양을 한 용녀가 앉아있는 모습의 「제바달다품堤婆達多品 」을 표현하였다.
19나전 칠 연꽃 모란넝쿨 무늬 상자
한국 나전칠기의 아름다움 '나전 칠 연꽃 넝쿨무늬 옷상자'
서화관 > 목칠공예
15-16세기 경 조선 전기 나전칠기는 크게 두 가지 계열로 구분됩니다. 하나는 고려시대의 전통을 계승하여 국화나 모란무늬를 사용한 것입니다. 그러나 무늬의 크기가 커지고 줄기는 금속선 대신 자개를 사용하는 차이점이 나타납니다. 다른 한 계열은 조선 나름대로의 무늬 표현을 모색하는 계열입니다. 이 계열은 활짝 핀 꽃무늬와 봉오리무늬를 번갈아 배치하고 잎은 흩날리듯 표현한 것이 특징입니다. 조선 특유의 나전 장식 기법인 타찰법打擦法이 등장한 것도 이 시기입니다. 이 작품은 관복을 담았던 상자로 추정됩니다. 고려 나전칠기의 장식 구성을 계승하면서도 큼직한 자개를 타찰법으로 붙여 오색찬란한 빛의 반사를 극대화했습니다.
20청동제 투구
마라톤 선수 손기정이 기증한 '그리스 청동 투구'
기증관 > 기증문화재실
손기정 선생이 기증한 청동 투구는 기원전 6세기 무렵 그리스에서 만든 것입니다. 눈과 입만을 드러낸 채 머리 전체를 감싸는 ‘코린토스 양식’ 투구로, 목으로 이어지는 아랫부분이 잘록하게 들어가다가 나팔처럼 벌어져 있습니다.
이 투구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의 우승자에게 주는 부상이었습니다. 당시 우승자인 손기정 선수가 받아야 했으나, 전달되지 못한 채 베를린 샤를로텐부르크박물관에 50년 간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이를 안 손기정 선생은 이 투구를 돌려받고자 여러모로 노력했고, 그 결실로 1986년 베를린 올림픽 개최 50주년 기념행사에서 마침내 선생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1987년 정부는 손기정 선생의 올림픽 우승을 표상하는 이 투구를 나라의 ‘보물’로 지정했습니다.
21감산사 석조아미타불입상
돌아가신 부모님을 위해 만든 '감산사 미륵보살 아미타불'
조각공예관 > 불교조각실
우리나라 불교조각사에서 아주 드물게 불상을 만든 사람과 만든 목적, 제작한 연대를 상세히 기록해 놓은 사례입니다. 돌아가신 어머니와 아버지를 위해 만들었다는 미륵보살과 아미타불의 신체는 탄탄하고 양감量感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몸의 굴곡을 드러내는 데 주저함이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마치 우리 주변의 사람처럼 실재감이 넘칩니다. 이와 같은 신체 표현은 통일신라시대에 발전한 조각 양식이며, 인도의 조각 양식에 민감했던 8세기 초 동아시아의 공통된 추세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이 감산사甘山寺 미륵보살과 아미타불은 광배光背와 하나의 돌로 이루어졌고, 대좌臺座는 따로 만들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불상조각의 재료로 화강암을 적극적으로 사용했습니다. 사실적이고 화려한 장식을 보면 8세기 초 화강암을 다루는 기술이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2금동 반가사유상
석가모니의 생애와 사상이 함축된 '반가사유상'
사유의 방 > 사유의 방
반가사유상(국보 금동미륵보살 반가사유상(1962-1), 金銅彌勒菩薩半跏思惟像) : 옛 지정번호 국보 78호 반가사유상은 반가좌(半跏坐)라는 특이한 자세 때문에 얼굴과 팔, 다리, 허리 등 신체 각 부분이 서로 유기적으로 조화를 이루어야 하며, 치마의 처리도 매우 복잡하고 어렵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반가사유상의 등장은 진정한 의미에서 한국 조각사의 출발점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국보 반가사유상은 풍부한 조형성과 함께 뛰어난 주조기술을 선보이는 동양조각사에 있어 걸작으로 평가되는 작품입니다.
반가사유상이란?
한쪽 다리를 다른 쪽 무릎 위에 얹고 손가락을 뺨에 댄 채 생각에 잠긴 반가사유의 자세는 출가 전에 인간의 생로병사를 고민하며 명상에 잠긴 싯다르타 태자의 모습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인 6~7세기에 크게 유행하였으며, 대다수가 독립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국보 반가사유상은 그 중 석굴암 조각과 더불어 우리나라 불교조각 가운데 최고의 걸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반가사유상은 일본의 아스카(飛鳥), 하쿠호(白鳳)시대의 반가사유상 제작에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반가사유상의 존명에 대해서는 우리나라와 일본에서 미륵보살로 보는 견해가 우세합니다. 이는 미래에 태어나 성불하는 구세주 미륵보살의 행적이 과거 싯다르타 태자의 그것을 비슷하게 따른다는 경전의 내용과 관련되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반가사유상의 조형적 아름다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조각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이 반가사유상은 우선 화려한 보관이 눈에 띕니다. 마치 탑처럼 보이는 장식이 솟아 있는 이 보관은 태양과 초승달을 결합한 특이한 형식으로 흔히 일월식(日月蝕)이라고 합니다. 일월식의 보관 장식은 원래 사산조 페르시아의 왕관에서 유래․발전하여 비단길을 통해 동쪽으로 전파되면서 보살상의 보관으로 차용되었는데, 인도 간다라의 보살상이나 중국 돈황석굴, 운강석굴, 용문석굴 등지에서 다양한 예가 나타납니다. 정면에서 이 반가사유상을 보면 허리가 가늘며 여성적인 느낌이 들지만 측면에서 보면 상승하는 힘이 넘쳐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탄력 넘치는 신체의 곡선이 강조되었고 양쪽 어깨로부터 끝이 위로 올라와 날카로움을 한층 더해주고 있는 천의자락은 유려한 선을 그리면서 몸을 감싸고 있습니다. 양 무릎과 뒷면의 의자 덮개에 새겨진 주름은 타원과 S자형의 곡선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면서 변화무쌍한 흐름을 나타냅니다.
반가좌의 자세도 극히 자연스럽습니다. 그것은 허리를 약간 굽히고 고개는 살짝 숙인 채 팔을 길게 늘인 비사실적인 비례를 통하여 가장 이상적인 사유의 모습을 창출해낸 조각가의 예술적 창의력에서 비롯됩니다. 더욱이 뺨 위에 살짝 댄 오른손 손가락은 깊은 내면의 법열(法悅)을 전하듯 손가락 하나하나의 움직임이 오묘합니다. 한마디로 이 불상의 조형미는 비사실적이면서도 자연스러운 종교적 아름다움, 곧 이상적 사실미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고졸한 미소와 자연스러운 반가좌의 자세, 신체 각 부분의 유기적 조화, 천의자락과 허리띠의 율동적인 흐름, 완벽한 주조 기법 등, 우리는 이 금동불에서 가장 이상적인 반가사유상의 모습을 만나게 됩니다.
이 상은 내부가 흙으로 채워진 중공식(中空式) 주조 기법을 사용하였습니다. 크기가 1m에 가까워서 금동불로는 비교적 큰 상임에도 불구하고 구리의 두께가 2~4mm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얇은 두께를 고르게 유지하기 위하여 머리까지 관통하는 수직의 철심과 어깨를 가로지르는 수평의 철심을 교차시키고, 머리 부분에 철못을 사용하였습니다. 고도의 주조 기술이 뒷받침되었기에 이처럼 아름답고 생명력 있는 불상의 제작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옛 지정번호 국보 제83호 반가사유상과의 비교
옛 지정번호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은 국보 78호 반가사유상과 쌍벽을 이루는 삼국시대에 제작된 대표적인 반가사유상입니다. 그러나 두 상은 조형적인 면에서 뚜렷한 차이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가장 큰 차이는 머리에 쓴 보관의 형태입니다. 국보 83호 상은 머리에 낮은 관을 쓰고 있는데, 이는 삼산관(三山冠) 또는 연화관(蓮花冠)이라고 합니다. 또한 국보 78호 상과 달리 상반신에는 옷을 전혀 걸치지 않았으며, 단순한 목걸이만 착용하였습니다. 단순하지만 균형 잡힌 신체, 자연스러우면서도 입체적으로 표현된 옷 주름, 분명하게 표현된 이목구비로 보아 6세기 후반에 제작된 국보 78호보다 조금 뒷 시기인 7세기 전반에 제작된 것으로 대체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또한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은 크기가 93.5cm로 금동으로 만든 반가사유상 중에서 가장 클 뿐만 아니라, 일본 교토(京都) 고류지(廣隆寺) 목조반가사유상과 매우 닮아, 우리나라 불상의 고대 일본 전래와 관련하여 주목을 받고 있는 중요한 작품입니다.
한편, 국보 78호 반가사유상의 제작국과 관련하여 정확한 출토지가 알려져 있지 않아 백제 혹은 신라의 것이라는 여러 설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또한 최근에는 신체와 천의의 힘찬 기세, 고구려에서 특히 중국의 북위와 동위시대 양식의 불상이 크게 유행한 점, 그리고 고구려 고분벽화의 사신도 양식과 흡사한 점으로 미루어 고구려 불상일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까지의 연구 성과로는 하나의 특정 국가를 지목하기는 상당히 어려운 실정입니다. 이는 이 반가사유상이 특정 지역에 국한되지 않은 범용적 예술성을 가지고 있기에 더욱 그러하다고 하겠습니다.
석가모니의 생애와 사상이 함축된 '반가사유상'(사유의 방)
[옛 지정번호 국보 78호 반가사유상]
반가사유상(국보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1962-2), 金銅半跏思惟像) : 국보(옛 지정번호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은 우리나라 고대 불교조각사 연구의 출발점이자 6, 7세기 동아시아의 가장 대표적인 불교조각품 가운데 하나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이 상은 일찍이 일본 교토의 고류지(廣隆寺) 목조반가사유상과 형상이 매우 흡사하여 한국과 일본의 고대 불교조각 교류 연구에 있어서도 큰 주목을 받고 있는 작품입니다.
일반적으로 반가사유상은 중국에서는 대개 어떤 주된 불상에 종속되거나 한 부분적인 존재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단독으로 독립되어 예배 대상으로 조성된 예가 드물지만, 백제에 와서는 종속적인 관계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조형성을 획득하게 됩니다. 따라서 반가좌 특유의 복잡한 신체 구조를 무리 없이 소화하여 중국의 반가사유상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자세의 과장과 단순화, 동일한 단위의 옷주름이 반복되는 도식성을 극복하며 우리나라의 삼국시대에 크게 유행합니다.
정교함과 잔잔한 미소가 풍기는 숭고미
반가사유상은 왼쪽 다리 무릎 위에 오른쪽 다리를 올린 이른바 반가(半跏)한 자세에 오른 뺨에 오른쪽 손가락을 살짝 대어 마치 사유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형식의 불상은 인간의 생로병사를 고민하여 명상에 잠긴 싯다르타 태자의 모습에서 비롯된 것으로 인도의 간다라나 중국 남북조 시대의 불전(佛傳) 부조 중에서 종종 등장합니다. 중국에서 반가사유상은 5~6세기에 주로 만들어졌으며, ‘태자상(太子像)’, ‘사유상(思惟像)’, ‘용수상(龍樹像)’ 등의 명칭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6~7세기에 크게 유행하였으며, 일반적으로 미륵(미래의 부처)으로 간주됩니다. 우리나라의 반가사유상은 이후 일본의 아스카, 하쿠호 시대 반가사유상에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우리나라에서 반가사유상을 미륵보살로 보는 인식은 신라에서 특히 성행하였는데, 신라에서는 전륜성왕 사상의 유행과 더불어 화랑을 미래의 구세주인 미륵의 화신으로 여기게 됩니다. 당시 신라에 미륵신앙이 유행하면서 반가사유상이 미륵보살로 만들어졌다는 견해가 설득력을 얻으면서 이와 같이 불려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반가사유상을 미륵보살로 단정 지어 부르는 것은 문헌적 근거가 많이 약하여 ‘반가사유상’으로 칭하는 것이 보다 무난합니다.
이 반가사유상은 크기가 93.5cm로 금동으로 만든 반가사유상 중에서 가장 클 뿐만 아니라, 최상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작품입니다. 단순하지만 균형 잡힌 신체, 자연스러우면서도 입체적으로 처리된 옷 주름, 분명하게 표현된 이목구비, 정교하고 완벽한 주조기술, 여기에 더해 얼굴의 잔잔한 미소는 종교의 예배 대상이 주는 숭고미를 더해줍니다.
머리에는 세 개의 반원이 이어진 삼산관(三山冠) 또는 연화관(蓮花冠)을 쓰고 있습니다. 관의 표면에 아무런 장식도 표현되지 않아 매우 단순하면서도 강렬한 인상을 풍기는데, 이러한 형식의 보관은 인도나 중국의 보살상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풍만한 얼굴에 눈썹 선은 길게 호를 지으며 콧선으로 이어지는데, 작지만 길게 묘사된 눈은 끝이 살짝 올라가 다소 날카로운 인상을 풍깁니다. 그러나 이를 무마하듯 단정하게 다문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가 미소를 짓는 모습은 신비감마저 주고 있습니다.
나형(裸形)의 상체는 가슴근육이 살짝 도드라지고 허리는 잘록합니다. 오른쪽 얼굴에 대고 있는 손가락은 움직임을 표현하여 율동감이 있으며, 이와 대칭되기라도 하는 듯 위로 올린 오른발의 발가락은 잔뜩 힘을 주어 구부린 모습이 생동감을 더합니다. 반가사유상의 제작에 있어 특히 어려운 점은 오른팔의 처리입니다. 오른 팔은 무릎에서 꺾여서 뺨에 다시 닿아야 하므로 길게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 상은 오른쪽 무릎을 위로 살짝 들어 팔꿈치를 받쳐주고 그 팔 또한 비스듬히 꺾어 살짝 구부린 손가락을 통해 뺨에 대고 있어 매우 치밀한 역학적 구성을 보여주며, 이러한 유기적인 관계는 살짝 숙인 얼굴과 상체로 이어집니다.
국보 반가사유상은 크기가 93.5cm로 금동으로 만든 반가사유상 중에서 가장 클 뿐만 아니라, 최상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작품입니다.
출토지가 불명확하여 신라작과 백제작으로 보는 견해가 분분
일제강점기에 발견된 이 상은 출토지가 정확하지 않습니다. 이에 따라 신라작과 백제작으로 보는 견해가 분분합니다. 지금까지 이 상은 일본 교토 고류지 목조반가사유상의 제작지를 근거로 신라작이라는 주장이 많은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두 상은 삼면관의 보관 형태, 가슴과 허리의 처리, 무릎 밑의 옷자락과 의자 양 옆으로 드리운 허리띠 장신구 등이 매우 흡사하여 일찍이 양국의 고대 불교조각 교류에 있어 주목을 받아왔습니다. 고류지의 목조반가사유상은 당시 일본 목조불상 대부분이 녹나무나 비자나무로 제작된 것과 비교하여, 한국의 경상도 일대에서 많이 자생하고 있는 적송(赤松)으로 만들어졌으며, 제작방법에 있어서도 신체의 각 부분을 여러 조각으로 나눈 다음 짜 맞추는 일반적인 방법과 달리 통나무 하나에 상을 그대로 깎아서 조각하였습니다. 또한, 『일본서기(日本書紀)』 623년조에 신라에서 가져온 불상을 고류지에 모셨다는 기록이 있어 이 불상을 목조반가사유상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류지 상이 우리 상에 비해 정적인 느낌이 강하여 서로 다른 조형감각을 풍긴다는 점도 제기되고 있으며, 미술사적으로 조화롭고 균형 잡힌 형태와 우아하고 세련된 조각 기술로 미루어 백제작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견해도 함께 제시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제작국에 대한 문제는 앞으로 새로운 자료의 발굴과 함께 지속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라고 하겠습니다.
석가모니의 생애와 사상이 함축된 '반가사유상'(사유의 방)
[옛 지정번호 국보 83호 반가사유상]
23청동 은입사 물가 풍경 무늬 정병
고려의 뛰어난 금속공예 기술로 만든 '물가풍경무늬 정병'
조각공예관 > 금속공예실
정병은 원래 인도의 승려들이 수행생활을 할 때 휴대하고 다니던 물병이었다. 그런데 한국으로 전해지면서 용도가 조금 바뀌었다. 휴대용 물병으로도 쓰였겠지만, 불교 의식에서 깨끗한 물을 담는 병으로도 사용된 것이다. 이 물가풍경무늬 정병은 고려시대의 뛰어난 금속공예 기술을 잘 보여준다. 금속의 표면을 판 다음 다른 색상의 금속을 끼워 넣는 입사 기법은 한국 삼국시대부터 시작되어, 고려시대에 와서 매우 발달하였다. 버드나무, 갈대, 오리, 기러기, 배에 탄 사람 등 각 무늬대로 홈을 판 다음 여기에 얇은 은선을 끼워 넣어 표현하였다. 마치 붓으로 그림을 그리듯이 가느다란 은선을 자유자재로 사용한 이 정병은 고려의 뛰어난 금속공예 수준을 잘 보여준다.
24청자 투각 칠보무늬 향로
고려청자를 대표하는 '칠보무늬 향로'
조각공예관 > 도자공예-청자실
음각·양각·투각·철화·상감·첩화·상형 등 청자의 모든 장식 기법을 구사하여 완성했습니다. 불교를 상징하는 연꽃이 향로의 몸체로 만들어져서 불교와 관련이 깊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 향로의 백미는 향로를 등에 지고 있는 토끼 세 마리입니다. 크기는 작지만 토끼의 특징을 담아 생동감 있게 표현했습니다.
25분청사기 박지 모란 무늬 자라병
조선의 새로운 감각 '분청사기 모란무늬 자라병'
조각공예관 > 도자공예-분청사기 백자실
둥글넓적한 몸체에 목을 쑥 내민 모습이 자라 같다고 하여 자라병이라는 이름이 붙은 병입니다. 참신한 무늬와 신선한 색감에서 조선 왕조 초기의 활력과 생동감이 느껴집니다. 병목에 끈을 묶어 가지고 다니면서 술병이나 물병으로 사용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릇 표면에 백토를 발라서 흰 바탕으로 만든 후 대칼 같은 날카로운 도구로 무늬를 그리고, 무늬 이외의 부분을 긁어내어 바탕흙의 짙은 색이 드러나도록 해 색감 대비를 극대화했습니다. 이러한 장식기법을 박지剝地기법이라고 합니다. 대부분 박지분청사기의 공정은 여기에서 마무리되지만 이 자라병은 백토를 긁어낸 바탕에 철분이 많은 안료를 칠해 검은색 바탕에 흰색 모란무늬가 더욱 또렷하게 보이도록 시각적 효과를 높였습니다. 등에 장식된 무늬는 부귀영화를 상징하는 모란꽃이 분청사기 특유의 단순화된 모습으로 재해석된 것입니다.
26백자 대호
한국의 정서와 멋, 보름달 같은 '백자 항아리'
조각공예관 > 도자공예-백자실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전반까지 제작한 높이 40cm의 백자 항아리입니다. 몸체의 최대 지름과 높이가 거의 1:1의 비율을 이루는 둥그스름한 형태에 유백색을 띤 항아리의 모습이 보름달을 연상시켜 ‘달항아리’라고 불립니다. 반원형의 몸체를 위아래로 이어 붙여 제작해 중심에 접합 흔적이 남고 전체적으로 이지러진 느낌을 주지만, 자연스럽고 편안한 미감으로 조선 후기 백자의 조형성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27복희와 여와
중앙아시아 미술의 특징을 보여주는 '창조신 복희와 여와'
세계문화관 > 중앙아시아실
중국의 천지창조 신화에 등장하는 복희와 여와를 주제로 한 그림입니다. 가운데 자리한 두 신은 상반신이 사람, 하반신이 뱀의 모습이며 왼쪽이 여와, 오른쪽이 복희입니다. 각각 컴퍼스와 구부러진 자를 들고 있는데 이는 둥근 하늘과 네모난 땅으로 이루어진 우주관과 관련이 있습니다. 배경에는 해와 달, 북두칠성을 비롯한 별자리를 그려 하나의 소우주를 나타냈습니다. 중국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얼굴과 손에 보이는 음영 표현, 해와 달의 형상화 방식에서 중앙아시아적인 특징이 잘 드러납니다.
28석조보살입상
불상의 시작, 간다라 지역 '보살'
세계문화관 > 인도 동남아시아실
간다라 지역은 오늘날 파키스탄에 속하는 페샤와르 분지, 스와트, 탁실라를 비롯하여 아프가니스탄의 카불 분지와 잘랄라바드 일대를 포괄합니다. 이 지역은 서아시아, 남아시아, 중앙아시아를 잇는 교통의 요충지로, 이 지역의 불상에는 인도, 헬레니즘, 로마, 파르티아 등 여러 문화의 영향이 나타납니다. 이 지역에서 1~5세기에 전개된 미술을 ‘간다라 미술’이라고 합니다. 간다라는 마투라 지역과 더불어 인간의 모습을 한 불상佛像이 처음으로 제작된 곳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큽니다. 이 상은 간다라 불상의 특징인 헬레니즘 양식의 영향을 잘 보여줍니다. 이목구비, 머리카락, 옷자락, 장신구 등이 입체적이고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상이 묘사한 ‘보살’은 원래 깨달음을 얻기 전의 석가모니를 가리켰으나, 대승불교의 흥기와 함께 자신의 깨달음을 추구하면서 다른 중생을 구제하는 존재를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29백자 주전자
매혹적인 청화백자 '꽃 과일무늬 주전자'
세계문화관 > 중국실
이 주전자는 반구(盤口)형의 입을 가졌고 몸통은 원형에 가깝다. 어깨와 입둘레와 사이에 두 개의 귀가 달려 있으며 주둥이[注口]는 몸통에 비해 긴 편이며 뀌때 밑에 줄을 묶어 놓은 듯한 무늬[結繩文]를 세 개의 원형으로 그려 넣어 꽃을 겹쳐 놓은 것처럼 표현했다. 손잡이는 짧은 편이고 몸통은 오이 모양의 형태에 여섯 줄의 선이 둘러져 있다. 바닥에는 유약을 바르지 않았고 옥벽저형(玉璧底形)이다. 유약은 회백색으로 고르게 발랐으나 표면의 상태는 좋지 않다.
30도사 미츠오키 필 겐지모노가타리화첩
일본의 대표적인 고전소설을 그림으로 표현한 '겐지모노가타리 화첩'
세계문화관 > 일본실
11세기 초 헤이안(平安) 시대의 여성인 무라사키 시키부(紫式部)가 쓴 소설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를 그림으로 나타낸 화첩이다. 이 소설은 히카루 겐지(光源氏)라는 출중한 외모에 재능은 물론 높은 신분까지 두루 갖춘 귀족 남성을 주인공으로 하여 헤이안 시대 귀족 생활의 실상을 잘 보여주는 일본 고전 문학의 백미이다. 화첩을 그린 것으로 전하는 도사 미츠오키는 일본 특유의 채색 회화인 야마토에(大和繪)의 전통을 계승한 도사파(土佐派)의 화가 중 한 명이다. 에도 시대의 눈으로 바라본 헤이안 시대 귀족의 이미지를 알 수 있으며, 일본 고유의 문자인 히라가나의 아름다움을 동시에 감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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