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적내용 |
황해도 평산(平山) 사람이다.이진룡(李鎭龍) 의진에 가담하여 황해도 평산 일대에서 활약하였다.1904∼5년간의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제는 1905년 「을사륵약(乙巳勒約)」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우리의 내정을 속속 장악하여 갔다. 이후 1907년에 이르면 다시 헤이그 특사사건에 대한 책임을 물어 광무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는 한편 「정미7조약(丁未7條約)」을 체결하고 군대를 해산시키는 등 식민지화를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전국 각처의 뜻있는 애국지사들은 의병을 다시 일으켜 무장투쟁을 통해 국권회복을 달성하고자 분투하였다.이러한 시기에 민수현은 일본군을 축출할 목적을 가지고 이진룡 의진에 투신하여 활약하였다. 이진룡 의병장은 의암 유인석(柳麟錫)의 문인으로 1905년 을사륵약이 체결되자 평산에서 의병을 일으켜 선봉장이 되어 일본군과 수많은 전투를 전개하였다. 그리고 1910년 경술국치 이후에는 국내에서 의병운동을 더 이상 전개할 수 없음을 알고 만주로 망명하여 홍범도(洪範圖) 등과 함께 군사양성에 주력하던 인물이었다.민수현은 이같은 이진룡 의진에서 종군하면서 의병활동 자금을 확보하기 위한 비상 수단으로 1909년부터 동지 추칠성(秋七星)과 더불어 황해 평산군 한포역(汗浦驛)에서 수차례 군자금을 징수하였다. 그러다가 1910년 1월 7일 농부로 변장한 일본 순사 및 보조원에게 발각되어 동군 석교동(石校洞)에서 이들과 격투를 벌이다가 피살, 순국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註·창의록 정미의요, 황해도(1947) 17면 ·매천야록(국사편찬위원회) 520면 ·한국독립운동사자료(국사편찬위원회) 제17집 83·84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