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때 사왓티에 아들 하나를 둔 부모가 있었는데, 그 아들이 가정을 떠나 빅쿠가 되었다. 그러자 아버지도 아들을 뒤따라 빅쿠가 되었고, 마지막으로 어머니도 집을 떠나 빅쿠니가 되었다.
이들은 그렇게 출가는 했지만 서로 간 애착이 대단했기 때문에 같은 수도원 안에서 함께 생활했다. 그리고 음식도 함께 먹고 잠자리까지도 같은 건물 안에 마련했다. 그랬으므로 수행을 한다기보다 그저 생활하는 장소를 수도원으로 옮긴 데 불과했다.
마침내 빅쿠들은 그들에 대해 부처님께 보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그들을 부르시어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너희가 일단 가정을 떠나 빅쿠와 빅쿠니가 되었으면 더 이상 같은 장소에서 살아서는 안 되느니라. 무릇 사랑하는 이를 보는 것도, 사랑하는 이를 보지 못하는 것도 괴로운 일이니라. 그러므로 수행자는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되느니라.”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다음 게송 세 편을 읊으시었다.
행해서는 안 될 것을 행하고
행해야 할 것은 행하지 못하는 자들은
감각적 쾌락에 얽매여
깨달음이라는 목표를 저버리나니
헛되이 남이 이루어 놓은 선정만 탐낸다.
사랑하는 사람과 어울려 사귀지 말라.
사랑치 않는 사람과 어울려 사귀지도 말라.
사랑하는 사람을 보지 못함은 둑카
사랑치 않는 사람을 봄 또한 둑카이기에.
그러므로 아무에게도 사랑을 갖지 말라.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짐은 괴로운 일이기에.
사랑도 미움도 아예 없는 사람에게는
그 아무런 고통도 없으리. |
첫댓글 법사님, 우선 이렇게 법을 전해주심에 큰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불교를 잘 모르지만 예전부터의 의문을 올려봅니다. '사랑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고귀한 특성같은데 (대승불교의 참나, 또는 티벳불교에서 말하는 참본성의 본질?) 부처님은 그 마저 버리라고 하시는 구나 -- 결국 윤회를 끝내고 열반에 가려면 4성제의 첫번째 진리인 존재 자체가 괴로움이란 것을 통찰해서 삶에 대한 염오가 일어나야 하는 것인가 부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4성제를 우리가 닦아가는 과정에서 타인에 대한 사랑이나 자비는 '논리적으로' 어디에 위치하게 되는지 갸우뚱합니다. 초기 불교에서는 참나 나 본래면목은 부정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대로, 우리의 참본성이 사랑이라면, 이를 수행으로 깨닫고 보살도를 실천하면 되겠지만, 초기 불교에 따르면, 존재를 염오하여 윤회를 끝내고 아라한이 되는 과정에서 타인에 대한 자비와 보살도는 '어떤 구조안에서' 설명되는지 의문이 듭니다. 깨우쳤다는 선사님이나 큰스님들, 또는 라마나 마하리쉬 같은 성자는 초기 불교 구조에서 어떻게 설명되나요? 아라한? 벽지불? 초기불교와 대승의 엇박자가 답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