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독일 등 서방 진영은 20일 독일 람슈타인 미 공군기지에서 열린 '우크라이나 안보 지원을 위한 연락 그룹'(UDCG) 회의에서 독일 레오파드2 탱크의 우크라이나 지원 합의에 실패했다. 마크 밀리 미 합참의장은 "군사적 관점에서 올해 러시아군을 우크라이나 영토에서 몰아내기는 매우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페스코프 크렘린 대변인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나토(NATO)의 대규모 추가 무기 지원에 대해 "전장에서 근본적으로 아무 것도 바꾸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CNN:오스틴 미 국방장관, 탱크의 키예프 제공 문제에 독일 등과 합의 못이뤄/젠(dzen.ru) 노보스티 캡처
러-우크라 언론에서 오늘의 이슈를 찾아내 뒤늦게 올리는 '우크라 이슈진단-20일'자/편집자 주
◇ 독일이 탱크 지원에 주저하는 까닭
20일 열린 '우크라이나 안보 지원을 위한 연락 그룹' 회의에서 독일은 레오파드2 탱크의 우크라이나 지원을 사실상 거부했다. 장거리 미사일과 탱크가 러시아군의 견고한 방어선을 뚫고 분쟁을 종식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하는 우크라이나와 폴란드 등 반러 강경국가들의 압력을 일축한 것이다.
그 배경에는 독일의 정치·군사적, 경제적 고민이 숨어 있다. 가장 큰 요인은 역시 '혼자 우크라이나 확전을 초래한 독박을 쓸 수 없다'는 피해 의식이다. 독일이 미국과의 탱크 지원 논의에서 미국 에이브럼스 탱크의 우크라이나 지원을 전제 조건으로 내건 이유다.
지난해 독일 람슈타인 미 공군기지서 열린 UDCG의 2차 회의 모습/사진출처:우크라이나군 텔레그램
독일의 레오파드 전차(탱크)/사진출처:위키피디아
2차 세계대전 전범국인 독일은 그동안 분쟁 국가에는 무기 지원(혹은 판매)을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고수해 왔다. 특히 ‘국제 홀로코스트 희생자 추모의 날’(27일)을 눈앞에 두고 있다. 우크라이나에 제공되는 탱크들이 러시아군을 겨냥한다는 점도 부담스럽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희생된 러시아인은 무려 2,400만~2,700만명. 또다시 자국의 탱크가 러시아인을 향해 불을 뿜는 모습을 가능한 한 피하고 싶어할 만하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에 따르면 베를린이 모스크바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으려는 의지가 없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지난해 가혹한 대러 제재조치에도 불구하고, 독일 엘리트 계층과 기업(적어도 상당한 수)들은 조만간 러시아와의 관계를 다시 회복할 기대를 접지 않고 있다는 외신 보도도 나왔다.
독 DPA 통신:(숄츠 총리가 속한) 독일 사회민주당, 러시아와의 관계 재고 촉구/젠(dzen.ru) 노보스티 캡처
경제적인 이유도 있다.
스트라나.ua에 따르면 스위스 일간지 노이에 취르허 차이퉁(Neue Zürcher Zeitung)은 "독일이 다른 국가에 레오파드2를 우크라이나로 재수출할 수 있는 권한을 주면, 나중에 미국의 에이브럼스 탱크로 보충하게 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독일 군수 산업계에서는 유럽 국가들이 레오파드를 에이브럼스 탱크로 바꾸라는 미국의 제안을 기다리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다"며 "그것은 독일이 현재 시장을 잃게 된다는 뜻"이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우크라이나에 레오파드 탱크를 지원할 의사가 있는 유럽 국가들은 보상 차원에서 미국으로부터 에이브럼스 탱크의 공급과 장기적인 산업 협력을 기대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자칫하면 독일이 방산시장의 텃밭은 물론 주변국에 대한 안보 영향력마저 잃을 우려가 제기된 셈이다.
스트라나.ua에 따르면 지난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을 놓고 친러 vs 반러로 갈려 첨예한 의견 대립을 보인 독일과 폴란드는 양국관계의 악화라는 최악의 상태로 빠졌고, 급기야는 독일 탱크의 폴란드 공급이 중단됐다. 이에 마리우시 블라자크 폴란드 국방장관은 2021년 7월 총 88억5,000만 유로 상당의 에이브럼스 탱크 구매(M1 에이브럼스 신형 250대와 중고 116대) 의사를 표명했고, 지난해 여름에는 한국산 전차 1,000대 구매 의사를 밝혔다.
독일이 폴란드가 보유한 레오파드 탱크의 우크라이나 제공을 허락하면, 폴란드 주력 탱크의 교체 과정은 더욱 빨라지고, 유럽에서 운용되는 레오파드 탱크들이 미국산 탱크로 교체될 것이라고 우려할 수 밖에 없다. 레오파드 탱크는 현재 유럽에서 약 2,500대가 운용중이라고 한다. 가장 많은 곳은 그리스(500대)로, 레오파드 2A4(183대)와 레오파드 2A6(170대)가 주력을 이룬다. 또 독일(98대), 덴마크(44대), 헝가리(44대)는 가장 현대적인 레오파드 2A7을 보유하고 있다.
미국 에이브럼스 탱크/사진출처:위키피디아
발레리 잘루즈니 우크라이나 총참모장(합참의장 격)은 우크라이나가 특정한 한 방향으로 반격을 시작하려면, 최소 300대의 서방 탱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유럽에서 운용중인 레오파드 탱크의 12%에 불과하다.
물론, 탱크나 장갑차는 유지및 보수라는 또 다른 문제를 안고 있다. 프랑스 국방부는 우크라이나에 공급된 많은 프랑스 '케사르 자주포'가 "워낙 많이 사용하는 바람에 제공한 18문 중 1문이 완전히 고장났다"고 털어놨다. 수리를 하려면 유럽으로 보내야 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고 불필요한 위험에 노출된다.
이와 관련, 프랑스 일간지 르 피가로는 프랑스가 주력 탱크의 우크라이나 공급을 꺼리는 이유중 하나로 유지및 보수의 문제를 들기도 했다. 탱크는 곡사포와 달리 공격용 무기이며, 최전선에서 직접 전투를 하기 때문에 더 자주, 그리고 더 많이 고장날 가능성이 높은데, 주변에 대규모 수리 기지가 없다면, 탱크 배송은 그 의미가 곧바로 사라진다. 수리 보수에는 적어도 기술자 수백명을 우크라이나로 파견해야 한다. 그들은 러시아군의 공습 대상이 될 수도 있다.
오스틴 미 국방장관,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에 관한 동맹국들과의 새 합의 발표/젠(dzen.ru) 노보스티 캡처
- 로이드 오스틴 미 국방부 장관은 20일 "지금은 우크라이나에 결정적 순간"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우크라이나 안보 지원을 위한 연락 그룹'(UDCG) 회의'의 모두 발언에서 "필요할 때까지 우크라이나에 모든 지원을 지속하겠다"면서 이같이 말했다. UDCG는 우크라이나 지원 공조 방안을 논의하기 위한 50여개국 국방장관 내지 당국자들의 임시 협의체로, 지난해 4월 출범했다. 이 회의에는 우리나라 국방부 당국자도 화상으로 참여한다.
오스틴 장관은 또 회의에서 25억 달러(약 3조원) 상당의 신규 지원 패키지를 발표했다. 스트라이커 장갑차 90대, 브래들리 (보병전투)장갑차(IFV) 59대, 지뢰방호장갑차(MRAP) 53대, 험비(HMMWV) 350대 등 전투차량 수백 대가 지원안에 포함됐다.
- 독일을 방문한 마크 밀리 미 합참의장은 람슈타인 미 공군기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군사적 관점에서는 올해 러시아군을 모든 우크라이나 영토에서 군사력으로 몰아내기는 매우 매우 힘들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그게 불가능하다거나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는 아니지만 매우 매우 어려울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이 전쟁이 과거 많은 전쟁처럼 결국 어떤 협상 테이블에서 끝날 것으로 생각한다"며 "그 시점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지도자가 결정할 것"이라고 했다.
- 페스코프 크렘린 대변인은 나토의 우크라이나 추가 무기 지원에 대해 "전장에서 근본적으로 아무 것도 바꾸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러시아의 목표 달성을 막지 못하고 우크라이나 국민에 더 많은 문제만 안길 것"이라며 "탱크 지원 가능성의 중요성이 과장되어서는 안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