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 한가운데 자리 잡은 부들 군락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순전히 나의 오만이었다. 지상에서 바람을 따라 유유자적 흔들리는 그들의 잎사귀는 한없이 유순해 보였고, 겉으로 보기엔 그저 낫질 몇 번이면 쉽게 넓은 밭을 내어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부드러운 흔들림은 사실 땅속 깊은 곳에 쌓아 올린 견고한 요새를 감추기 위한 위장이었음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처음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삽을 들었다. 한 움큼씩 푹푹 찍어 올리면 금세 뿌리가 들려 나올 줄 알았다. 하지만 삽날은 부들 뿌리의 경계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튕겨 나왔다. 부들의 뿌리는 흙을 붙잡고 있는 수준이 아니라, 흙과 아예 한 몸이 되어 거대한 바위처럼 엉켜 있었다. 뽑아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서야 나는 전략을 바꿨다. 부들 주변으로 삽날 길이의 세 배, 깊이는 두 배에 달하는 거대한 웅덩이를 파 내려가기 시작했다.
땀방울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허리가 뻐근해질 무렵, 마침내 드러난 부들의 실체는 경이롭기까지 했다. 지상의 잎들은 바람 앞에 수줍게 몸을 낮추던 연약한 존재들이었는데, 정작 땅속에 숨겨진 뿌리들은 서로의 몸을 실타래처럼 엮어 단단한 그물을 짜고 있었다. 그들은 고립되어 있지 않았다. 옆 뿌리의 손을 잡고, 그 옆 뿌리의 어깨를 빌리며 거대한 연대(連帶)의 성벽을 쌓아 자신들의 영토를 지켜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 질긴 뿌리 뭉치를 통째로 들어 올리며, 나는 문득 나 자신의 삶을 복기해보았다. 나 또한 세상의 거센 바람 앞에서는 부들처럼 유순하게 흔들리며 살아왔다. 남들이 보기엔 그저 무던하고 무색무취한 삶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남들에게 보이지 않는 내 마음의 밑바닥에는, 나를 지키기 위해 처절하게 흙을 움켜쥐고 버텨온 '뿌리의 시간'들이 있었다.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데, 내가 어떻게 버텨온 삶인데. 남들이 쉽게 던지는 말 한마디에 내 인생의 텃밭이 쉽게 허물어지지 않았던 이유는, 바로 저 부들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스스로를 단단하게 엮어온 고집스러운 생명력 덕분이었을 것이다.
파헤쳐진 커다란 웅덩이 위로 한낮의 뙤약볕이 쏟아졌다. 한바탕 전쟁을 치른 듯한 고단함이 몰려왔지만, 비로소 넓어진 텃밭을 보니 가슴 한구석이 시원하게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부들을 걷어낸 자리는 이제 새로운 씨앗을 품을 준비가 되었다.
부드러움은 약함의 증거가 아니라, 가장 강한 것을 감추기 위한 가장 세련된 외피라는 사실을 나는 오늘 텃밭의 웅덩이 속에서 배웠다. 이제 나도 바람이 불면 부들처럼 가볍게 흔들릴 것이다. 하지만 내 발밑의 흙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쉽게 내어주지 않을 만큼 단단히 쥐고 살아가리라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