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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경훈목사의 설교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마경훈목사
새 술에 취하라/ 행 2:13
(설교자: 마경훈목사, 비전교회)
https://www.youtube.com/watch?v=CPm963z2ThY
오늘은 술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술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하니 생각나는 사건이 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할머니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장례 마지막 날 저는 할머니 장지까지 갔습니다. 저는 장지에서 목이 말라 주전자에 있는 물을 마셨는데 그게 술이었습니다. 저는 주전자에 있는 무엇인가를 마신 기억 이후에 필름이 끊어졌습니다. 깨어보니 큰 집 안방에 누워있더군요. 지금 생각해도 상당히 황당한 사건입니다.
성경에서는 술을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하기도 하고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긍정적인 면을 보죠. 딤전 5:23입니다.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위장과 자주 나는 병을 위하여는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 디모데는 위장병이 심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속이 좋지 않은 디모데에게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고 했습니다. 약으로 마시라는 것이죠. 시 104:15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와...” 포도주를 먹으면 사람의 마음이 즐거워진답니다.
술의 부정적인 면을 보겠습니다. 엡5:18입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술 취함은 방탕입니다. 제가 방탕이라는 단어를 설명하지 않아도 여러분은 그 단어가 부정적인 단어라는 것을 잘 아시죠? 잠 21:31입니다. “포도주는 붉고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 이 말씀에서는 술을 보지도 말라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부정적인 면이 크기 때문이겠죠. 잠언 20:1입니다. “포도주는 거만하게 하는 것이요 독주는 떠들게 하는 것이라 이에 미혹되는 자마다 지혜가 없느니라” 포도주는 사람을 거만하게 만들고 독주는 떠들게 합니다. 그리고 술을 마시는 자는 지혜가 없습니다. 여기서 가장 문제가 되는 단어가 거만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거만이라는 단어의 원어를 보면 ‘경멸하는 자’라는 의미인데, 이는 ‘교만한 자, 무뢰한 자, 완고한 자, 모든 비판에 대해 거부하는 자, 책망을 싫어하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거만한 자를 싫어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굳이 거만하게 하는 술을 마실 필요가 있을까요?
저는 목회자로써 여러분에게 술에 관해서는 몸의 치료 목적 외에는 사용하지 않기를 권합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술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아담이 포도나무를 키우고 있었는데, 그때 악마가 찾아와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아담이 “지금 근사한 식물을 키우고 있다.”고 말하자. 악마는 이런 식물은 처음 보는 것이라며 놀라워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악마에게 “이 식물에는 아주 달콤하고 맛있는 열매가 열리는데, 익은 다음에 그 즙을 내어 마시면 아주 행복해진다.”고 설명했습니다. 악마는 자기도 꼭 한몫 끼워 달라고 애원하고는 양과 사자와 원숭이와 돼지를 죽여 그 피를 거름으로 썼습니다. 이렇게 해서 포도주가 세상에 처음 생겨났는데, 그래서 술을 처음 마시기 시작할 때에는 양처럼 순하고 얌전하다가 술을 조금 더 마시면 사자처럼 사납게 되고, 조금 더 마시면 원숭이처럼 춤을 추거나 노래를 부르게 되고, 더 많이 마시게 되면 돼지처럼 토하고 뒹굴며 추하게 됩니다. 그래서 술은 악마가 인간들에게 준 선물이이라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술의 부정적인 면을 강조한 이야기입니다.
성경 전체에서 부정적으로 말하고 있는 술을 가지고 영적인 진리를 말하는 성경구절도 있습니다. 엡 5:18입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우리 그리스도인은 술에 취하면 안 됩니다. 그 대신에 성령의 술에 취해야 합니다. 세상의 술은 취할수록 위험하지만 성령의 술은 취할수록 유익합니다.
본문은 오순절에 120명의 성도에게 성령님께서 임하시자 그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방언을 하는 모습을 본 사람들 중에 어떤 이들이 조롱하며 한 말입니다.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베드로는 그들에게 지금이 오전 9시이니 술에 취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성령님의 역사와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했습니다. 성령의 역사를 잘 알지 못했던 사람들의 눈에는 성령충만한 사람들이 마치 술에 취한 사람들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오늘 설교는 술 취한 사람들의 모습과 비교해서 성령충만한 사람은 어떤 모습인지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 성령의 새 술에 취하면 감정이 변화됩니다.
술 마시기 전에는 늘 슬픔에 잠겨 있던 사람이 술을 먹고 나니 마음에 흥이 생겨서 노래를 부르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술을 마신 후에는 별일 아닌데도 깔깔대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려운 일이 많아서 침울하던 사람도 술의 힘에 의해서 기쁨이 솟아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술이 그 사람을 지배하니 감정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성령충만하면 이런 현상이 나타납니다. 환경과 상관없이 성령이 주시는 기쁨이 샘솟습니다. 기도를 하다가 성령으로 충만하면 생각지 않았던 기쁨이 넘칩니다. 빌 4:4입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사도바울은 빌립보서를 쓸 때 감옥에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그는 감옥에 갇혔는데도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성령충만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만 기뻐했던 것이 아닙니다. 빌립보 교우들에게 기뻐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다윗의 고백입니다. 시 4:7을 봅니다.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다윗의 마음에 하나님께서 기쁨을 주셨습니다. 다윗이 성령충만했던 것이죠. 다윗의 마음의 있는 기쁨은 농부가 한 해 농사를 마무리하고 소출을 거둬드리고 기뻐하는 것보다 더 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상황은 아들 압살롬의 반역 때문에 도망 다닐 때였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어떻게 이런 기쁨이 넘칠 수 있습니까? 성령충만한 결과입니다. 성령의 열매인 희락이 충만했던 것입니다.
술에 취하여 흥이 나면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오래 전에 제 친구 중에 한 명은 술만 먹었다하면 노래를 부르는데 어떤 때는 밤새워 노래를 불렀습니다. 어떤 때는 부른 노래를 또 부르고 또 부르고 또 부르기도 하더군요. 말려도 소용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이 성령충만한 사람들에게도 나타납니다. 성령충만하면 기쁨이 넘쳐서 노래합니다. 우리가 주일 오후, 수요일, 금요일 예배 때는 30분 정도 찬양을 하는데, 성령님이 역사하시니 그 시간도 부족하게 느껴집니다. 찬양을 마치려고 하면 아쉽습니다. 어떤 때는 부른 찬양을 부르고 또 부르고 또 불러도 지루하지 않습니다. 저와 아내는 차를 타고 가다가 함께 찬양하면 은혜가 되는 찬양은 몇 십 번도 반복해서 부릅니다. 절대 지루하지 않습니다.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기쁨이 충만해서 찬송합니다. 성령충만해서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마음에 기쁨이 있습니까? 혹시 마음에 기쁨을 잃어버린 것은 아닙니까? 그 원인이 환경이 되었든 사람이 되었든 아니면 자신의 어떤 불만족 때문이든 마음에 기쁨이 사라졌다면 여러분은 성령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술만 먹으면 슬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별일 아닌데 슬퍼하고 남의 일에도 괜히 슬퍼합니다. 제가 알고 있는 한 사람은 술만 먹으면 웁니다. 어려운 친구를 생각하니 불쌍해서 울고, 가족들을 생각하니 서러워서 울고 또 울고 또 웁니다.
성령으로 충만하면 눈물이 회복됩니다. 울 수 있다는 것은 순수하다는 것입니다. 성령충만한 사람은 작은 감동에도 눈물이 납니다. 그리고 범사에 감사해서 눈물이 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니 너무나 감사해서 울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충만하면 회개의 눈물이 터집니다. 죄에 대하여 그리고 자신의 부정함에 대하여 애통하며 회개합니다. 전에는 문제가 되지 않던 죄도 크게 느껴져서 통곡하며 회개합니다. 어떤 때는 밤을 새워가며 울고 또 웁니다. 술에 힘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감정적인 변화는 좋은 것이 아닙니다. 반면에 성령의 새 술에 취한 감정적인 변화는 꼭 필요한 축복입니다.
2. 성령의 새 술에 취하면 말이 변화됩니다.
술에 취한 사람을 잘 살펴보십시오. 평상시에 말이 없던 사람이 말이 많아지기도 합니다. 한 말을 또 하고 또 합니다. 듣는 사람이 지겨워해도 아랑곳하지 않고 또 하고 또 합니다. 성령충만한 사람에게도 이런 현상이 있습니다. 성령충만한 사람은 은혜 받은 얘기를 하고 또 합니다. 만약 우리 주변에 그런 사람이 있다면 이해해야 합니다. 이런 일은 사람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행 2장에 보면 성령께서 가장 먼저 사람들의 입을 장악하셨습니다. 그래서 성령 받은 사람들은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했습니다. 성령충만하면 말도 잘합니다. 행 4:13입니다.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성령님의 역사로 나면서부터 걸어본 적이 없는 장애인이 일어나 걷기도하고 뛰기도 했습니다. 그 일로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들이 남자만 5천이나 되었습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는 그것이 상당히 위험해보였습니다.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잡아서 심문하려고 하는데, 두 사도가 그들에게 반론을 했습니다. 그들은 두 사도들의 말을 듣고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성령님께서 두 사도의 입을 붙잡으시니 그들이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불신자를 만나면 예수 믿으라는 얘기를 또 하고 또 합니다. 상대가 싫어해도, 상대가 그만 좀 하라고 해도 절제하지 못하고 복음을 전합니다. 이는 마치 술 취한 사람이 밤새 떠드는 것과 같습니다. 술 취해서 말하는 사람을 절제시키려고 해도 절제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상황이 비관적인데도 술을 먹으면 무엇이든지 긍정적으로 보고 “괜찮아, 괜찮아”합니다. 성령충만한 사람도 그렇습니다. 상황이 아무리 어려워도 믿음의 말을 합니다. 상황이 어려운데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하나님을 믿으니 믿음으로 말을 하는 것입니다. 범사를 긍정적으로 해석합니다.
어떤 사람은 평상시에는 말이 많은데 술만 취하면 입을 닫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절대 입을 열지 않습니다. 성령충만하면 이런 현상도 나타납니다. 전에는 입만 열었다하면 부정적인 말, 세속적인 말을 쏟아놓던 사람이 성령으로 충만하면 그런 말에 대해서는 입을 닫습니다. 부정적인 말. 불신앙의 말이 쏙 들어갑니다. 어떤 사람은 입만 열면 쌍욕을 했습니다. 그 사람의 접속사는 욕이었습니다. 욕이 아니면 문장을 연결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성령충만하면 욕이 사라집니다. 절대로 욕하지 못합니다.
성도는 입술의 열매를 먹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어떤 말을 하느냐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축복 받을 말을 하는 사람은 축복을 받습니다. 망할 말만 골라서 하는 사람은 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정적인 말을 버리고 긍정적인 말, 믿음의 말을 해야 합니다. 다윗은 그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시141:3에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여호와여 내 입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 성령님은 우리의 입을 변화시키십니다.
사람들은 말을 통제하지 못합니다. 믿음의 말, 긍정적인 말을 해야 인생이 복되지만 그게 잘 안 됩니다. 불신앙적이고 부정적인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지만 마치 고장난 브레이크처럼 통제가 안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하면 믿음의 말, 긍정적인 말은 자동차의 엑셀을 받는 것처럼 잘 됩니다. 불신앙적이고 부정적인 말은 자동차의 브레이크를 밟는 것처럼 절제하게 됩니다. 성령의 새 술에 취하면 말이 변화됩니다.
3. 성령의 새 술에 취하면 얼굴이 변화 됩니다.
술에 취한 사람들을 보면 얼굴이 변합니다. 어떤 사람은 얼굴색이 하얗게 혹은 벌겋게 변합니다. 술이 그 사람 속에 들어가니 몸에 영향을 미쳐서 얼굴색이 변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의 새 술에 취하게 되면 그 사람 속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영향력으로 인하여 얼굴빛이 달라집니다. 은혜가 넘치는 얼굴, 사랑이 넘치는 얼굴, 행복한 얼굴로 변합니다. 그 사람의 얼굴이 잘생기고 못 생기고를 떠나서 그 사람에게 풍겨지는 모습이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얼굴은 미인이고 어떤 사람은 핸섬합니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그들의 얼굴에서는 찬바람이 휭휭 불고, 험악한 느낌이 납니다. 예수님을 믿고 성령의 새 술에 취한 사람은 못생긴 얼굴도 평화롭고 사랑이 넘치고 은혜롭게 보입니다.
사도행전 6,7장에 보면 스데반집사님이 나옵니다. 그는 예수님을 전한다는 이유로 사람들에게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신약시대 최초의 순교자입니다. 그때 스데반의 모습은 어땠을까요? 행 6:15입니다.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놀랍지 않습니까? 죽음을 앞둔 순간에 천사의 얼굴과 같았습니다. 무엇이 스데반의 얼굴을 빛나게 했을까요? 스데반이 죽음 앞에서도 천사의 얼굴처럼 기쁨으로 가득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행 7:55에 답이 나옵니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스데반은 성령충만했습니다. 그는 영적인 눈이 열려서 하나님의 영광을 봤고 예수님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서신 것을 봤습니다. 스데반이 성령충만하니 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났던 것입니다.
출 34:29입니다.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모세의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하였음으로 말미암아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모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났습니다. 그 빛이 너무 강해서 사람들이 모세의 얼굴을 보지를 못하니 모세는 자신의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습니다. 성령충만하여 그런 것입니다.
마 17:2입니다.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기도하시다가 변형되셨습니다. 주님의 얼굴은 해 같이 빛났습니다.
저와 아내가 지난 주 중에 어떤 분에게 “두 분은 세상에 때가 하나도 묻지 않은 얼굴입니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저는 잘 모르겠는데 그분이 볼 때 일반인들과는 다른 인상을 받은 것 같습니다.
술을 마시면 얼굴색이 변하는 것처럼 성령충만하면 외모에도 변화가 일어납니다. 못생긴 얼굴이 잘생겨진다는 말은 아닙니다. 성령충만하면 내면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내면이 변하면 인상도 달라집니다. 성령충만하면 외적인 부분에도 분명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4. 성령의 새 술에 취하면 담대해집니다.
평소에는 두려움이 많던 사람이 술에 취하면 없던 용기가 생겨서 큰 소리도 칠 줄 알게 됩니다. 평소에는 사람들 앞에서면 주눅 들려서 자신의 권리도 주장하지 못했던 사람이 술에 취하면 당당하게 자신이 할 말을 다합니다. 제 어릴 적 동네 친구 중에 겁이 많은 친구가 20대 초반에 술을 먹고는 온 동네가 떠나가도록 소리를 지르고 다녔습니다. “북아현동 다 나와!” 겁쟁이 친구가 술의 힘으로 담대해졌습니다.
성령의 새 술에 취하면 성령의 힘으로 담대해집니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본문 이전에는 두려움에 눌려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잡히시자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그들은 두려워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골고다 언덕에 올라가지 못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그들을 찾아오셨 때에도 두려움 때문에 문들을 꽁꽁 닫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순절날 성령께서 그들에게 임하시자 그들은 새 술에 취한 것처럼 되어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담대하게 복음을 외쳤습니다. 성령님께서 그들에게 역사하시자 그들은 시끄럽게 기도한 것 같습니다. 그 소리에 놀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 때 모인 사람들은 최소 3000명 이상입니다. 얼마 전 같으면 베드로 사도는 두려워서 숨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은 베드로는 담대해져서 사람들 앞에 서서 설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고 너희들이 그분을 죽였다고 외쳤습니다. 놀라운 변화입니다. 이런 담대함은 베드로에게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새 술에 취하니 담대해진 것입니다.
성령의 새 술에 취하면 담대함이 생겨서 어떤 환경이 와도 두렵지 않습니다. 어떤 핍박 앞에서도 당당합니다. 그리고 그 담대함을 통해서 믿음의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우상 앞에 절하라는 왕명을 어기면서 믿음을 지켰습니다. 평소보다 7배나 뜨거운 풀무불 앞에서도 담대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풀무불 속에 던져 졌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주님이 풀무불 속에 나타나셔서 보호해주시니 그들은 머리털 하나 상하지 않았습니다. 성령의 새 술에 취하면 담대해집니다. 만용이 아니라 진정한 용기가 생깁니다.
5. 성령의 새 술에 취하면 더 갈급합니다.
술 취한 사람들 중에는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술에 많이 취했는데, 자신은 취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술이 부족하다며 술을 더 찾습니다. 술에 취하면 취했어도 술에 갈급합니다. 만족함이 없습니다. 성령의 새 술에 취한 사람들에게도 이런 현상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이미 성령충만한데 그는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에 갈급합니다. 목이 마릅니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충분한데, 그 사람에게는 아직 부족합니다. 그래서 그는 좀 더 성령으로 충만해지기를 사모하고, 좀 더 성령님께 지배당하기를 원합니다.
시 42:1,2입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2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시 42편은 고라 자손이 지은 시입니다. 그 시가 성경에 기록된 것을 보면 저자는 이미 성령충만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시의 내용을 보면 그는 아직 주를 갈망합니다. 마치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처럼 그렇게 간절하게 하나님을 만나기 원합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며칠간 물을 먹지 못한 사슴이 있습니다. 얼마나 물을 찾기에 갈급하겠습니까? 사막을 횡단하는 사람에게 물이 떨어져서 목마릅니다. 몇 시간 지나면 그의 목마름은 얼마나 심하겠습니까? 이럴 때 신기루도 보이는 것입니다. 고라 자손이 바로 그런 심정이었습니다. 그는 성경을 기록할 만큼 성령충만 했는데도 더 충만함을 원했습니다. 그 상태로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더 사모했습니다. 성령충만하면 더 갈급합니다.
저는 목사입니다. 저는 성령충만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목마릅니다. 저는 하나님의 역사를 많이 경험해 봤습니다. 기적도, 병든 사람을 치유하는 능력도 체험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저의 필요를 놀라운 방법으로 채워주시는 경험도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저의 몸과 영혼을 진동시키시는 체험해 봤습니다. 불도 받아봤고 음성도 들어봤습니다.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고 할 만큼 강력한 체험도 해봤습니다. 그런데 저는 아직도 목마릅니다. 저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도 저를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저는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싶고 하나님의 사랑을 더 받고 싶습니다. 저는 마치 술에 취했으나 만족하지 못하고 또 술을 찾는 사람처럼 그렇게 하나님께 갈급합니다.
세상 술에 갈급한 것은 자기를 망치는 것입니다. 반면에 성령의 새 술에 목말라 하는 것은 자기를 살리고, 가정을 살리고, 교회를 살리고, 이 나라와 이 민족이 살리는 길입니다. 우리는 성령충만해도 더 갈급해야 합니다.
6. 성령의 새 술에 취하면 성령님께 지배당합니다.
술에 취한 한 사람이 길에서 전봇대를 붙잡고 쉬를 했습니다. 그런데 왠지 다리 뒤 쪽이 따뜻하더랍니다. 뒤를 돌아보니 술에 취한 친구가 앞 사람이 담벼락인줄 알고 붙들고 쉬를 하고 있더랍니다. 기가 막힌 일이죠. 이런 말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술을 마시지만 나중에는 술이 술을 마시고, 더 나중에는 술이 사람을 마신다!” 무슨 말인가요? 사람이 술에 취하게 되면 술의 지배를 받는다는 말입니다.
오래 전에 돌아가신 분 중에 제가 아는 한 분 이야기입니다. 그분은 부자였습니다. 양조장을 하셨습니다. 그 당시에 양조장은 큰 사업이었습니다. 그런데 술을 좋아해서 결국 술로 망했습니다. 사기꾼들에게 걸려서 술에 만취가 되어서 양조장문서를 넘기고 거짓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습니다. 아침에 술이 깨고 후회를 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분은 술에 지배를 당해 망한 것입니다.
광주에 사는 53세의 이모씨는 술에 취한 상태에서 모 아파트 주차장에서 잠이 들었습니다. 그날 저녁 8시께 같은 동네에 사는 33살 김모씨가 1톤 트럭을 후진으로 주차하다가 사고가 났습니다. 이모씨의 양다리가 트럭뒷바퀴에 깔렸습니다. 그런데 이모씨는 워낙 술에 많이 취해서 자기 다리가 깔린 것도 모르고, 아픈 것도 모르고 계속 잠을 잤습니다. 다행히 다음 날 새벽 2시에 지나가던 행인에게 발견돼서 병원으로 옮겨졌습니다. 왜 이모씨는 그 지경이 되었을까요? 술의 지배를 당해서죠. 기가 막힌 일이죠.
2009년 마천동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떤 차가 일 가족 4명을 쳤는데, 자동차가 멈추지 않고 슬슬 앞으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보니 운전자가 만취상태라 자동차를 제어하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달려가서 핸드브레이크를 잡아주었습니다. 그 사람은 사람들이 자기 차에 치였는데 쓰러진 사람들을 향해서 계속 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내려서 실실 웃고 있었습니다. 미쳤습니까? 왜 그랬을까요? 술에 지배를 당해서 자기를 통제하지 못한 것입니다. 세상 술의 지배를 당하면 망합니다. 반대로 성령의 새 술에 취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만 생기고, 복이 되는 일만 하게 됩니다.
성령충만은 성령님께 지배를 당하는 것입니다. 마 26:41입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우리가 흔히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는 말을 자주합니다. 이 말은 주로 시험에 들거나 죄를 범함에 대해서 합리화시킬 때 사용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육신 때문에 못 산다는 말입니다. 반면에 성령께 지배를 당하면 성령의 능력으로 할 수 없었던 일들을 하게 됩니다.
성령님께 지배당하면 능력이 달라집니다. 행 1:8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성령님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습니다. 삽을 가지고 땅을 파면 고생은 엄청 하지만 진도가 잘 안 나갑니다. 그런데 포클레인을 가지고 땅을 파면 엄청난 일을 합니다. 산도 평지로 만들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큰 산도 평지로 만들 수 있는 분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큰 산 같은 문제도 성령님이 역사하시면 평지가 될 수 있습니다. 성령님께 지배당하면 능력이 달라집니다.
성령님께 지배당하면 인격이 달라집니다. 자동차를 난폭 운전자가 몰면 그 자동차는 난폭한 자동차가 됩니다. 같은 자동차인데 모범 기사님이 운전하면 그 자동차는 모범 자동차가 됩니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역사하시면 우리는 열매를 맺습니다. 어떤 열매일까요? 갈 5:22,23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성령의 열매 9가지가 나옵니다. 이 열매들을 보세요. 이런 열매를 맺는 인격은 얼마나 훌륭한 인격입니까? 성령님께 지배당하면 인격이 달라집니다.
성령님께 지배당하면 비전이 달라집니다. 인생의 방향이 달라집니다. 같은 자동차인데 예배 후에 같은 윤정순권사님이 운전하면 그 자동차는 답십리 쪽으로 갑니다. 조현옥집사님이 그 자동차를 운전을 하면 그 자동차는 문정동 쪽으로 갑니다. 내가 성령님께 지배당하면 성령님이 내 인생을 운전하십니다. 그러니 내 인생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나의 인생을 운전하시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가장 안전하고 가장 방향성도 좋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러기 위해서 성령충만해야 합니다. 성령의 새 술에 취하기를 바랍니다.
오늘 설교는 “새 술에 취하라”라는 제목으로 세상 술에 취한 사람들의 모습과 비교해서 성령의 새 술에 취한 사람은 어떤 모습인지 나누었습니다.
1. 성령의 새 술에 취하면 감정이 변화됩니다.
2. 성령의 새 술에 취하면 말이 변화됩니다.
3. 성령의 새 술에 취하면 얼굴이 변화 됩니다.
4. 성령의 새 술에 취하면 담대해집니다.
5. 성령의 새 술에 취하면 더 갈급합니다.
6. 성령의 새 술에 취하면 성령님께 지배당합니다.
첫댓글 감사^^&
"성령의 새 술에 취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