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프리아노는 210년경 카르타고의 이교인 부모에게서 태어났으나 개종하여 사제가 되고 249년 카르타고의 주교가 되었다.
그는 매우 어지러운 시대에 자신의 모범과 저술로써 교회를 탁월하게 다스렸다.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에 유배되었다가 258년 9월 14일에 순교하였다.
치프리아노는 특히 북아프리카에서 3세기의
그리스도교 사상과 관습의 발달에 영향을 미친 아주 중요한 인물이다. 고등 교육을 받았으며 유명한 웅변가인 그는 30여 세에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다.
그는 가난한 이들에게 자기 재산을 분배했으며 세례받기 전에 순결을 맹세함으로써 그의 주위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는 2년만에 서품을 받았으며, 그의 뜻과는 달리 오늘날 튀니스 근처에 있는 카르타고의 주교로 선택되었다.
치프리아노는 교회가 누려 온 평화가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정신을 약화시켰으며,
진정한 신앙을 갖지 않은 개종자들에게도 문을 열어 주었다고 개탄했다.
데치아노 박해가 시작되었을 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쉽게 교회를 떠났다.
이들을 받아들이는 문제가 3세기에 가장 큰 논쟁점이 되었으며,
이것 때문에 교회가 고해성사를 발전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노바투스는 치프리아노가 주교로 선출되는 것을 반대했던 사제로서 치프리아노의 부재중에 스스로 나서서 일했으며 (그는 은밀한 곳으로 물러나서 교회를 이끌었는데 이것이 비난을 사게 되었다)
아무런 교회법적인 참회를 부과하지 않고 모든 배교자들을 받아 들였다. 결국 그는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251년의 카르타고 공의회가 소집되었던 것이다.
이즈음에 그는 저 유명한 저서인 "교회의 일치"를 썼다. 그러나 노바투스는 로마로 가서,
치쁘리아노가 열렬히 지원하는 교황 고르넬리오를 반대하여 반교황이 되는 소동이 일어났다.
치프리아노는 중도의 입장을 취했는데 실제로 우상 숭배를 하던 사람들은 죽음으로써만이 친교를 회복할 수 있었으며, 반면에 우상 숭배를 했다는 증명서만을 산 사람들은 일정 기간의 참회 기간을 거친 후에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이것조차도 새로운 박해 동안에는 완화되었다.
252년~54년 카르타고에 흑사병이 만연하는 동안 치프리아노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의 적과 박해자를 포함한 모든 이들에게 도움을 주도록 촉구했다.
그러나 신자들은 그를 비난하였고, 또 격렬하게 항의까지 하였다.
이런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그는 "윤리에 대하여" 란 책을 저술하였다
고르넬리오 교황의 친구인 그는 다음 교황인 스테파노를 반대했다.
치프리아노와 다른 아프리카 주교들은 이단자와 분리론자들이 행한 세례를 인정하지 않았다.
255년~56년에 열린 아프리카 회의는 이단자로부터 세례받은 사람들에게 재세례를 요구하는 결정을 내렸고,
치쁘리아노는 교황 스테파노와 신랄한 논쟁을 벌이게 되었다.
이것이 교회의 보편적인 견해는 아니었지만 치프리아노는 스테파노의 파문 위협에도 굴복하지 않았다.
그는 황제에게 추방당했고 그 후 재판을 받기 위해 소환 되었다.
그는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이 자신의 순교를 목격해야만 한다는 주장과 함께 도시를 떠나기를 거부했다.
치프리아노는 친절과 용기, 격정과 인내를 함께 지닌 사람이었다.
그는 쾌활하고 진지했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사랑하는 것인지 혹은 존경하는 것인지 모를 정도였다.
그는 세례 논쟁 동안 온화한 태도를 취했다. 그가 참회에 관한 논문을 쓸 당시에 자신의 감정을 염려했음에 틀림없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치프리아노가 영광스러운 순교로 자신의 분노를 속죄했다고 말했다.
그는 교회, 사목, 성서, 동정 그리고 배교자 문제에 관하여 수많은 신학 논문을 남겼다.
참으로 그는 크리스챤의 라틴 문학의 선구자로 추앙받을만 하다.
그 당시의 교회 지도자들과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가르침을 따를 수 있고
우익 또는 좌익의 어떤 과정에 의해서도 전환될 수 없는 가장 옳은 판단을 통해서 힘든 발전을 길을 가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