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황해도 - 연암 박지원이 살던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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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4.01.03. 20:06조회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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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 박지원이 살던 곳
금천군 연암협(燕巖峽)은 연암 박지원이 한때 살았던 곳이다. 당시는 홍국영이 권력을 잡아 집권하고 있었다. 그때 연암은 홍국영과 반대당인 벽파에 속해 의심을 받게 되며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게 되었다. 결국 박지원은 1771년(영조 47)에 과거를 포기하고 백동수와 함께 개성을 유람하다가 그 근처인 황해도 금천군의 연암협을 답사한 뒤 장차 그곳에 은거할 뜻을 굳혔고, 결국 식구들을 다 데리고 그곳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영숙이 일찍이 나를 위해서 금천의 연암협에 집터를 살펴준 적이 있었다. 그곳은 산이 깊고 험해서 하루 종일 걸어가도 사람 하나 만나지 못할 정도였다. 갈대숲 속에 둘이 서로 말을 세우고 채찍을 들어 저 높은 언덕을 구분하며 “저기는 울을 쳐 뽕나무를 심을 만하고, 갈대에 불을 놓아 밭을 일구면 1년에 조 1000석은 거둘 수 있겠다” 하면서 시험 삼아 부시를 쳐서 바람 따라 불을 놓으니 꿩이 깍깍 울며 놀라서 날아가고 노루 새끼가 바로 앞에서 달아났다. 팔뚝을 부르걷고 쫓아가다가 시내에 가로막혀 돌아와서는 나를 쳐다보고 웃으며 “인생이 100년도 못 되는데, 어찌 답답하게 나무와 돌 사이에 거처하면서 조 농사나 짓고 꿩, 토끼나 사냥한단 말인가?” 하였다.
그래도 연암은 그곳에 정착하여 벌집도 100여 통으로 늘릴 생각이었고, 주변에 양어장을 만들려고 했으며, 과일나무도 많이 심고자 하였다. 그러나 겨우 초가삼간을 짓고 몇 뙈기의 밭을 일구었을 뿐인데 손이 부르트고 발바닥이 갈라졌다. 그때 남긴 연암의 글은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제가 산골짜기로 들어와 살려고 마음먹은 지가 벌써 9년이나 되었습니다. 물가에서도 잠자고 바람도 피하지 않고 밥 지어 먹으며 그저 양손을 불끈 쥐고 마음은 고달프고 재주조차 없으니 어디 성취한 것이 있겠습니까? 겨우 자갈밭 몇 이랑에 초가삼간을 마련했습니다. 그런데 낭떠러지 절벽과 감싸 안은 골짜기에는 초목만 무성하여 산으로 들어가는 좁은 길조차 없습니다.
골짜기 입구에 들어서면 산자락은 다 숨어버리고 길조차 찾을 길 없습니다. 산등성이는 평평하고 기슭은 야트막하여 흙 빛깔은 희고 깨끗하며 모래알은 투명하고 지세(地勢)는 넓게 트여 집터의 형국을 완전히 갖추었습니다. 그래서 남쪽을 향해 조그만 집을 지었는데 그 집터가 아주 비좁기는 하지만 그래도 쉴 만한 공간으로는 아주 적당합니다. 집 앞 왼편으로 깎아지른 듯 푸른 벼랑이 병풍처럼 서 있고, 깊숙한 바위틈 사이가 동굴처럼 되어서 그 속에 자연스럽게 제비들이 둥지를 틀었으니, 이것을 바로 연암(燕巖), 즉 제비바위라고 부릅니다.
그 집 앞으로 100여 걸음을 걸어가면 평평한 대(臺)가 있습니다. 그 대는 바위들이 겹겹이 쌓여서 우뚝 솟은 것인데, 그 아래로 시냇물이 흐릅니다. 그곳이 바로 나의 조대(釣臺, 낚시터)입니다. 그 냇가를 거슬러 올라가면 하얀 바위들이 마치 먹줄을 대고 깎은 듯하기도 하고, 어떤 곳은 호수 같기도 하며, 맑고도 깊은 소를 이루기도 한 그곳에 물고기들도 제법 많이 있습니다.
날이 저물어 저녁노을이 비치면 그림자가 그 물에 반사되어 바위 위에 어른거리는데, 이것을 바로 엄화계(罨畵溪, 엄화는 채색화라는 뜻), 즉 그림의 골짜기라고 부릅니다. 산이 굽이지고 물이 겹겹이 감싸서 사방에는 어디 마을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큰길로 나가서 7~8리를 가야 겨우 개 짖는 소리와 닭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지난가을부터 사람들을 불러 모아 마을을 이룬 것이 겨우 서너 집에 불과한데 사람들이 대부분 누더기 옷에 귀신 같은 몰골을 하고 오로지 숯 굽는 일에만 종사하면서 농사는 짓지 않으니 저는 오랑캐와 이웃하고 사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호랑이와 표범이 이웃이고 족제비와 날다람쥐를 벗 삼아 사는 것 같아 그 험하고 동떨어져 사는 것이 마음 아프면서도 이곳을 좋아하는 마음이 생기자 그저 편하기만 합니다. 더구나 집 뒤에다 형수님의 묘를 썼으니 이미 옮겨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띠로 지은 집은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서늘하며, 조와 보리로 한 해를 무사히 넘길 수 있으며, 채소와 고사리는 통통하게 살이 올라 한번 캐면 바구니에 가득하답니다.
박지원이 지은 「산중에서 동짓날 이생에게 써 보이다」라는 시를 보면 집을 짓고 살았던 풍경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연암이라 그 아래 집을 지으니
바로 화장산(華藏山) 동쪽이로세.
(······)
해 다 가도 사람은 아니 보이니
적막에 사로잡힌 장지기 신세.
어찌 보면 선(禪)에 든 중과도 같고
공(空)으로 도망간 부처와도 같네.
오죽 살기가 막막했으면 황해도 금천 땅 연암으로 들어갔겠는가. 그곳에 들어간 박지원이 형수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형님이 이제 늙었으니 당연히 이 동생과 함께 은거해야 합니다. 담장에는 뽕나무 1000그루를 심고, 집 뒤에는 밤나무 1000그루를 심고, 문 앞에는 배나무 1000그루를 접붙이고, 시내의 위와 아래에는 복숭아나무와 살구나무 1000그루를 심고, 3이랑 되는 연못에는 1말의 치어를 뿌리고, 바위 비탈에는 벌통 100개를 놓고, 울타리 사이에는 3마리의 소를 매어놓고서, 아내는 길쌈하고 형수님은 다만 여종을 시켜 들기름을 짜게 재촉해서 밤에 이 시동생이 옛사람의 글을 읽도록 도와주십시오.
당시 연암의 형수는 병이 심했으나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서 머리를 손으로 떠받치고 웃으며 “그렇게 사는 것이 바로 나의 오랜 뜻이었소”라고 말했다 한다. 하지만 연암의 형수는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심어놓은 곡식이 다 익기도 전에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연암은 형수의 묘를 연암협에 썼다.
연암 골짜기는 산 곱고 물 맑은데,
여기에 시아주버니가 터를 닦았네.
아! 온 가족 다 함께 은거하려 했더니,
마침내 여기에 몸을 맡기셨도다.
안온하고도 견고하니
후손들을 보호하고 도와주시리라.
그 뒤 박지원은 연암협에 거주하면서 가끔 서울을 다녀갔고, 그의 호가 연암으로 불리게 된 것도 이에 연유한다. 한편 연암은 형 박희원이 죽자 형수 묘에 합장한 뒤 연암협으로 돌아가서 「연암에서, 돌아가신 형님을 생각하며」라는 시를 지었다.
우리 형님 얼굴 수염 누굴 닮았는가?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날 때면 형님을 쳐다보았지.
이제 형님이 생각나면 어디에서 본단 말인고,
시냇물에 내 얼굴을 비추어봐야겠네.
이덕무는 이 시를 읽고 눈물을 흘리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정이 지극한 말이 사람으로 하여금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게 하니 정말 진실하고 절절하기가 그지없다. 내가 선생의 시를 읽으면서 눈물을 흘린 것이 이번이 두 번째인데, 처음은 선생께서 그 누님의 상여를 실은 배를 떠나보내며 읊은 시였다.
「큰누님 박씨(朴氏) 묘지명」
백규(박지원의 매형)가 어진 아내를 잃고 난 뒤 가난하여 살 방도가 없어지자, 어린것들과 계집종 하나, 크고 작은 솥과 그릇, 옷상자와 짐이 든 궤짝을 가지고 산골로 가기 위해 상여와 함께 배를 타고 출발하였다. 내가 두포(斗浦)의 뱃전에서 전송한 뒤에 통곡하고서 돌아왔다.
아아! 슬프다. 누님이 시집가기 위해 새벽에 화장하던 모습이 마치 어제 일만 같구나.
내 나이 그때 여덟 살이었다. 내가 장난치며 누워 발을 동동 구르면서 새신랑의 말투를 흉내 내어 말을 더듬거리며 점잔을 빼자, 누님은 수줍어서 그만 빗을 내 이마에 떨어뜨렸다. 나는 화가 나 울면서 먹물을 분가루에 뒤섞고 침으로 거울을 더럽혔다. 누님은 옥으로 된 오리[옥압(玉鴨)]와 금으로 만든 벌[금봉(金蜂)] 따위의 패물을 꺼내어 내게 주면서 울음을 그치라고 달랬다. 그때로부터 벌써 스물여덟 해가 지났구나.
강가에 말을 세우고 강 위쪽을 바라보니 붉은 상여의 명정(銘旌)은 바람에 휘날리고, 뱃전의 돛 그림자는 물 위에 꿈틀거렸다. 곧 기슭을 돌아가 나무에 가려 다시는 볼 수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때 강가의 먼 산들이 검푸른 것이 마치 누님의 쪽 진 머리 같았고, 강물 빛은 누님의 거울 같았으며, 새벽달은 우리 누님의 고운 눈썹 같았다.
눈물을 흘리며 누님의 빗을 떨어뜨렸던 일이 떠올랐다. 유독 어렸을 적 일만 역력하게 떠올랐다. 생각해보면 즐거웠던 기억은 많았는데, 세월은 덧없이 길고 그 사이에는 대부분 이별의 근심을 괴로워하고 가난을 걱정하고 괴로워하면서 보냈으니, 인생이 덧없는 것이 마치 꿈결과 같구나. 남매로 지낸 날들이 어찌 그리도 빨리 지나갔더란 말인가.
떠나는 사람 정녕코 다시 온다 약속을 남기고 가지만
보내는 사람 눈물로 여전히 옷깃을 적시게 하네.
조각배 이제 떠나가면 어느 때 돌아올까.
보내는 사람만 헛되이 강가에서 외롭게 돌아가네.
이러한 박지원의 누이에 대한 묘지명을 두고 연암의 처남이며 오랜 친구였던 이재성은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마음의 정리에 따르는 것이야말로 지극한 예라 할 것이요, 의경을 묘사함이 참 문장이 된다. 글에 어찌 정해진 격식이 있으랴! 이 작품은 옛사람의 글로 읽으면 마땅히 다른 말이 없을 것이지만, 지금 사람의 글로 읽는다면 의심이 없을 수 없으리라. 원컨대 보자기에 싸서 간직했으면 한다
과연 연암이 지은 2편의 글은 읽을 때마다 몇백 년의 시공간이 차이 나는데도 눈시울이 붉어지곤 한다.
구월산 삼성전
구월산에는 환인ㆍ환웅ㆍ단군을 모시는 삼성전과 단군대ㆍ어천석ㆍ사왕봉 등 단군 관련 유적이 남아 있다.
은둔의 땅 연암협 박지원의 호가 연암으로 불리게 된 것은 그가 연암협에 거주한 것에 연유한다. 연암 박지원은 1771년 이덕무, 이서구 등과 함께 나선 송도 유람길에 연암협을 발견하고 이곳에 은거하기를 기약하여 연암이라 자호하였다. 연암협은 황해도 금천군에 있는데 개성에서 30리 떨어져 있고 당시 황폐해서 사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연암 박지원이 살던 곳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6 : 북한, 2012. 10. 5., 신정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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