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건희 컬렉션 Ⅸ -외국화가작품』-▣피사로▣로스코▣미로▣모네▣달리▣샤갈▣르누아르▣고갱▣베이컨▣쿠닝▣바스키아▣피카소▣마그리트▣리히텐슈타인▣앤디워홀▣트웜블리▣리히터▣자코메티▣로댕
이건희 컬렉션 Ⅸ-외국작가편
모네, 샤갈, 미로, 피카소, 르누아르 등 19세기 말~20세기 초 인상주의 이후 서양 근대 걸작들도 대거 기증됐다.
클로드 모네의 '수련이 있는 연못', 호안 미로의 '구성', 살바도르 달리의 '켄타우로스 가족',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책 읽는 여인' 등이 대중 공개를 기다리고 있다.
모네의 작품은 2018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이번 기증품과 비슷한 크기가 940억원에 낙찰된 바 있다. 이 작품들을 기증받기로 한 국립현대미술관은 그동안 앤디 워홀, 장 미셸 바스키아 등 2차 세계대전 이후 서양미술 작가 작품만 소량 소장하고 있었을 뿐이다. 모네와 피카소 작품이 단 한 점도 없었던 국립현대미술관으로선 단번에 위상이 올라가게 됐다.
클로드 모네의 대표작인 수련 연작 중 ‘수련이 있는 연못’(1919∼1920년)도 눈길을 끈다. 말년에 백내장으로 시력을 거의 잃은 모네가 그린 대작(가로 2m 세로 1m)으로 미술계에선 400억 원대의 가치를 지녔다는 추정이 나온다. 이로써 미술관은 이중섭의 황소와 모네 그림을 처음 소장하게 됐다.
미술관은 올해 8월 서울관에서 ‘고 이건희 회장 소장 명품전’(가제)을 시작으로 9월 과천관, 내년 청주관에서 전시를 연다.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은 “역사에 비해 소장품이 적은 국가미술관 입장에서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작품들을 기증받아 감격스럽다”면서 “예술적 국격을 올려주는 일이며, 유족들이 큰 결심으로 국민에게 통 큰 선물을 줬다”고 말했다.
“이런 수준의 컬렉션이 국가 미술관에 들어오는 것을 내 생에 이어 두 번 볼 수는 없을 것”이라며 “그 보답으로 국립현대미술관은 보존과 연구, 전시의 책무에 온 역량을 쏟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국립현대미술관은 69년 개관 이래 이번 기증품을 포함해 총 1만200여 점의 작품을 갖게 됐다. 이 중 5400여 점이 기증품인데, 이번 1400여 점은 역대 최대 규모다.
이호재 가나아트·서울옥션 회장은 “이건희 회장의 미술품 구입에 대한 관심과 열정, 엄청난 공도 기록돼야 한다”며 “나중에 돈이 되느냐는 고민의 대상이 아니었고 사람들이 후에 그것을 볼 가치가 있느냐를 염두에 두었다”고 했다. 이어 “작품 구입 회의를 할 때 4~8시간 했고, 늘 치밀한 공부로 만나는 화상들을 긴장시킨 분”이라고 돌이켰다.
‘이건희 컬렉션’의 기증을 문화예술계는 크게 반기고 있다. 뛰어난 미술품의 해외 유출을 막고, 국공립 기관 소장품 수준을 한껏 높이게 됐다는 점에서다. 양정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이번 기증으로 삼성가는 ‘한국의 메디치가’라는 영예로운 타이틀을 한동안 가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번 기증은 우리 문화예술계가 받은 큰 선물인 동시에 도전이 될 것”이라며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전례 없는 규모의 기증을 어떻게 가꿔 나갈지 무거운 숙제를 떠안게 됐다”고 말했다.
삼성가의 미술품 컬렉션 규모는 한국 고미술과 근현대미술품, 서양 근현대미술품을 망라해 1만2천점이 넘는 것으로 전해진다. 핵심인 서구 근현대미술 거장 작품은 900여점 정도로 추산한다. 현 시세로 100억~300억원대의 작품이 수십점, 500억~1000억원대 초고가 작품도 상당수다.
이 부문 작품 총액만 2조~3조원에 이를 것이란 추정이 나온다. 미술인들의 전언을 종합하면 경기도 용인 창고, 리움 수장고·전시장, 서울 한남동 자택의 거실 등에 소장 중인 작품은 서양의 근현대미술사를 두루 아우른다.
추상표현주의 거장 마크 로스코의 작품 중 최고로 꼽히는 1950~60년대 작품이 수십점, 시장가 1천억원 이상이라는 프랜시스 베이컨의 대표작을 비롯해 고갱·모네·마네 등 인상파 화가의 작품, 국립현대미술관에도 없는 피카소 회화와 판화, 샤갈의 명작 수십점 등이 있다고 알려진다.
앤디 워홀의 인물 초상 시리즈, 재스퍼 존스, 루이즈 부르주아, 칼 앤드리, 사이 트웜블리, 도널드 저드 등 미니멀·팝아트 작가의 대표작도 빠지지 않는다.
이 전 회장 컬렉션을 잘 아는 한 문화계 인사는 “2018년 세기의 경매로 불리며 미국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1조원에 육박하는 금액으로 팔린 록펠러 3세의 컬렉션을 능가하는 수준이라 보면 된다”고 전했다.
모네, 피카소, 고갱, 샤갈, 르누아르, 마티스 등 19세기 말 20세기 초 인상파·야수파·입체파 등 주요작가부터 게르하르트 리히터, 마크 로스코, 프란시스 베이컨 등 추상표현주의 작품까지 총망라한다.
특히 피카소의 경우 여러 여인을 그린 인물화가 여러점이다. 대부분 230억~280억원 가량으로 추산된다. 마크 로스코 색면 추상은 작가의 기량이 최고조에 오른 50~60년대 대작이 포함돼 있다.
르네 마그리트도 ‘빛의 제국’을 비롯 여러점, 살바도르 달리의 작품도 있다. 이외에도 앤디 워홀, 제프 쿤스, 데미안 허스트 등 팝아트 거장의 작품도 여러점 소장하고 있다. 조각작품은 로뎅, 자코메티를 비롯 루이스 부르주아의 거미작품(약 350억원)도 있다.
근대기 미술인들의 글을 읽다 보면 “피카소의 그림 한 장 없는 나라”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미술 인프라가 갖추어지지 않았다는 말이자 세계미술계에서 소외감을 토로하는 관용어였다. 여전히 국립미술관에도 피카소는 소장되지 못한 상황인데, 한 해 구입예산으로는 턱없이 높은 가격 때문에 구입할 엄두를 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건희 컬렉션에는 피카소, 달리, 모네, 르누아르, 피사로, 샤갈, 고갱, 클레 등 근대기 대가들의 작품도 속해 있다.
피카소의 작품을 단 한 점도 소장하지 못하였던 국립현대미술관은 피카소의 도예작품 박스로 가득할 것이고, 어느 조용한 전시실에서 우리는 모네의 [수련] 앞에 끌어다 놓은 의자에 정좌할지도 모른다.
작가의 이름으로 작품을 평가하는 시대에 이건희 컬렉션은 그 이름 안에서도 최고의 것들을 넣으려 했던 노력과 시간이 담겨 있다. 컬렉터가 시간을 들여서 작품을 소장한 것처럼 그 작품은 시간을 들여서 분류하고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전시실에서 오롯한 자신의 가치로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작품 하나하나는 단순한 자산적 가치를 넘어선 정신과 문화의 가치를 가시화한 것이기 때문이다.
▣카미유 피사로
색채의 광학적 효과에 기반을 두어 작품을 제작한 신인상주의자 카미유 피사로(Camille Pissarro, 1830~1903)는 후에 신인상주의를 포기했다. 감각의 자유, 자발성, 신선함을 표현하기에 과학은 이미 “감각을 따르기에는 불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색채에 대한 감각을 표현했다. [퐁투아즈 시장] 시리즈는 도시 안에서 다양한 옷을 입은 농부들의 모습을 표현함으로써 색채의 자율성을 실험적으로 보여주었다. 사실 인상주의자들의 작품 안에서 부르주아는 무채색 혹은 짙은 색채의 옷을 입은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전통적으로 그들이 옷 색깔을 제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시 근로자, 농부들은 색깔 있는 옷을 입었다. 풍부하고 다양한 옷 색깔은 노동계급의 미학을 반영한다. 이건희 컬렉션의 1893년작 [퐁투아즈 시장]은 그러한 다양한 옷 색깔 속에서 평화로운 협동의 사회에 속하는 여성들을 그려낸 비교적 이른 시기의 작품이다.
도시를 배경으로 한 자기 텃밭에서 키운 곡물을 파는 여성들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깊은 진실을 추구하는 피사로의 마음을 감각적으로 전달한다.
카미유 피사로, 『퐁투아즈 시장(Marché de Pontoise)』, 1893. 59 × 52cm, 국립현대미술관
초기 인상주의 창시자로 알려진 카미유 파사로가 점묘법과 유사한 짧은 붓터치로 그린 작품. 물건을 판매하는 상인과 구경하는 사람들로 가득 찬 시장의 풍경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카미유 피사로(1830~1903)가 그려낸 퐁투와즈 시장의 전경이다. 피사로는 보불 전쟁이후 이사간 퐁투와즈의 전경을 다수 그려냈다. 인상파의 장로가 불리는 피사로는 여느 인상파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소재를 두고 여러 점의 작품을 남기면서 사실적인 묘사를 위해서가 아닌 빛의 변화에 따른 색의 변화를 추적하기 위해 성실한 관찰자로서 살았다.
풍경화를 주로 그렸던 그는 말년이 되자 파리 근교의 퐁투아즈시장(Marche de Pontoise) 에 나가 시장에서 지지고 볶고 사는 일반 서민들의 모습 특히 시장에서 장사하는 여인들을 주목해 유화는 물론 판화와 과슈, 파스텔화 등 다양한 자료를 사용해 많은 연작을 남겼다.
말년에도 그림 팔리지 않아 곤궁한 삶을 살았지만 그는 1885년 경부터 점묘파인 쇠라와 시냑의 영향으로 점묘법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세상은 여전히 그의 그림을 외면했다.
하지만 그는 세상으로부터 외면 당하면서도 세상 사람들 특히 가난한 서민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의 점묘법이 변형되어 일궈내는 부드러운 파스텔톤의 화면은 세상이 그래도 살만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 하다.
▣마크 로스코(1903~1970)
마크 로스코(1903~1970),‘무제’(1962년)(붉은 바탕위의 검정과 오렌지)
마크 로스코가 1956년 그린 색면추상 그림 <무제>. 붉은색 위에 흰색(500억원 이상)
로스코의 작품 가운데 손꼽히는 걸작으로 알려져 있다. 이건희 회장이 생전 각별히 아꼈던 작품으로 지난달 국립기관 기증 컬렉션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내 관심은 오로지 비극, 황홀경, 파멸 등 인간의 기본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내 그림 앞에서 무너져 울음을 터뜨린다는 사실은 내가 인간의 기본 감정과 소통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마크 로스코(1903~1970)는 미국을 대표하는 추상표현주의 거장이다. 그의 작품은 난해하다. 거대한 캔버스에 형체를 분간할 수 없는 색의 덩어리 몇 개가 단순하게 배치돼 있을 뿐이다. 하지만 관객은 작품을 가슴으로 받아들인다. 그림을 직접 본 사람의 20~30%가 눈물을 흘렸다는 설문조사 결과도 있다.
최근 로스코의 전성기 작품인 ‘무제’(1962년)가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린다. 이 작품이 지난해 10월 타계한 이건희 삼성 회장이 수집한 미술품과 문화재, 이른바 ‘이건희 컬렉션’ 중에서도 대표작으로 거론되면서다.
“그림도 머리(대표작)를 잡아야 한다. 세계 미술사에서 손꼽히는 주요 작가의 대표작이 한국 땅에 있어야 한다”는 게 이 회장의 지론이었다고 한다.
고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유족이 26조 원에 달하는 유산 중 60%를 사회에 기부하거나 세금으로 납부한다. 상속세 12조 원을 포함해 의료 기부 1조 원, 미술품 2만3000여 점을 포함해 총 15조∼16조 원에 달하는 규모다.
28일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장,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 등 유족은 삼성이 발표한 보도자료를 통해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상생 노력을 거듭 강조한 고인의 뜻에 따라 다양한 사회환원 사업을 지속적으로 이어가겠다”며 기부 계획을 밝혔다.
이번을 계기에 인식 전환과 제도 정비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온다. 정준모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은
“무엇보다 미술품 수집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왜곡된 시각이 교정돼야 한다”며 “이건희 컬렉션 규모만큼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많은 분이 소장품을 기증해 왔다. 그런데 우리가 이 기증받은 작품을 어떻게 예우했는지 돌아봐야 한다”고 말했다.
▣호안 미로(Joan Miro)
호안 미로(Joan Miro), 《구성》, 1953, 96 x 377 cm,국립현대미술관
고향 카탈루냐의 밤 풍경을 묘사했다. 새·달·별·원·눈을 모티브로 몽환적인 우주의 풍경을 담고 있다. 호안 미로는 야수파 경향이 큰 그림을 그리다 1920년 파리에서 피카소와 친분을 쌓은 뒤 입체파가 됐다. 헤밍웨이와 어울리면서 초현실주의에도 빠져들었다.
호안 미로 이 페라(호안 미로, 1893~1983)가 1953년 그린 『구성』이다. 호안 미로는 고향을 떠난 이방인으로 현대미술을 개척한 사람이다.
미로의 마음속에는 항상 그의 고향 카탈루냐의 풍경들이 남겨져 있었다. ‘구성’에 나타나는 새와 달, 별은 미로의 주요 모티브로 몽환적인 우주의 풍경을 담고 있는데, 이 역시 그의 고향 카탈루냐의 밤 풍경을 묘사한 작품이다.
호안 미로에 대해 설명할때는 입체파의 거장 ‘파블로 피카소’, 대문호 ‘어니스트 헤밍웨이’와의 만남을 빠트릴 수 없다. 호안 미로가 입체파가 된 것은 파블로 피카소와의 인연 때문이다.
그는 피카소와 만나기 전까지는 야수파의 경향이 큰 그림을 그렸지만, 1920년 파리에서 피카소와 친분을 쌓고 난 뒤에 입체파가 됐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호안 미로의 팬이었다. 둘의 만남이 상당히 극적인데, 호안 미로가 작품을 전시할 곳이 없어 카페에 전시한 그림을 파리 특파원으로 있던 헤밍웨이가 거금을 주고 구매하면서 인연을 맺게 된것이다.
그가 구입한 작품은 호안 미로의 ‘농장’인데, 이는 호안 미로가 사실주의 시기 그린 걸작품 중 하나로 뽑히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호안 미로는 헤밍웨이와 어울리며 초현실주의에 빠져들게 되며 독자적인 초현실주의 화풍으로 이름을 크게 알리게 됐다.
▣마르크 샤갈
마르크 샤갈, 붉은 꽃다발과 연인들,1975, 92 × 73 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푸른색의 배경과 붉은색의 꽃이 강렬한 대비을 통하여 몽환적이고 밝은 작가 특유의 스타일이 돋보인다.
러시아 태생 프랑스 화가 마르크 샤갈의 화풍이 잘 드러나는 작품.
'색채의 마법사' 마르크 샤갈의 작품에는 연인과 꽃이 자주 묘사된다. 화병에 붉은 꽃들이 꽂혀 가운데 크게 놓여 있고 양옆으로 평화롭게 보이는 연인, 마을 풍경, 과일바구니와 와인병 등이 작게 묘사돼 있다.
푸른 배경과 빨간 꽃으로 대비를 강조했다. 밝고 강렬한 색채로 몽환적 분위기를 살렸다.
마르크 샤갈(1887-1985)이 1975년 그린 『붉은 꽃다발과 연인』이다. 샤갈의 작품은 고액에 거래되는 것으로도 많이 알려져 있다. 최근 서울 케이옥션에서는 샤갈의 ‘생 폴 드 방스의 정원’이 매물로 나왔는데 이 작품은 ‘붉은 꽃다발과 연인’과 비슷한 시기 비슷한 화풍으로 그려진 작품이다.
‘생 폴 드 방스의 정원’은 42억원에 낙찰됐다. 지난 2019년 거래된 샤갈의 ‘파리의 풍경’이 37억 여 원에 거래됐다는 점으로 볼때 샤갈의 작품이 상당히 고가임을 알 수 있다.
재밌게도 그가 제작한 판화는 그 명성과 걸맞지 않게 저렴하게 구할 수 있다. 판화의 특성상 작품을 다수 찍을 수 있기 때문이다.
‘붉은 꽃다발과 연인들’에는 붉은색의 꽃들이 꽂혀 있는 화병이 화면의 중앙에 크게 그려져 있고 양옆으로 평화로워 보이는 연인 한 쌍과 마을의 풍경, 과일바구니와 와인병 등의 정물이 작게 묘사되어 있다. 연인과 꽃이 함께 묘사된 도상은 샤갈의 작품에 자주 등장한다.
전체적으로 푸른 색조의 배경과 빨간 꽃의 색채 대비가 강조되며, 몽환적인 분위기와 밝고 강렬한 색채의 사용 등에서 샤갈 작품 특유의 스타일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샤갈은 입체파의 영향을 받았지만 입체파와는 거리를 두고 작품을 완성했다. 그는 아내를 잃은 3년뒤인 1947년 프랑스에서 밝고 사랑에 넘치는 명작들을 많이 만들어냈다.
▣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책 읽는 여인(La Lecture)』, 1890년대, 44 × 55cm. 국립현대미술관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는 독서하는 여인의 모습을 즐겨 그렸는데 이 그림도 그중 하나다.
부드러운 붓자국과 화사한 색채감이 드러나며 자연광을 보이는 대로 담아냈다.
밝고 편안한 여인의 모습에서 "그림은 유쾌하고 아름다운 것이어야 한다"는 예술관이 드러난다.
프랑스의 대표적 인상주의 화가로 빛과 색채를 조합해 일상의 풍경과 여성, 아이들을 주로 그렸다.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1841~1919)가 1890년대 그린 『책 읽는 여인』이다. 인상파 화가들이 대부분 불행한 삶을 살았다고 하지만 르느아르는 가장 행복하게 화가로서, 인간으로서 삶을 살았던 사람이다.
그의 그림은 언제나 풍요롭고 등장하는 인물들은 그윽하고 안온하며 부드럽고 즐겁다. 물론 그 즐거움이 호들갑스럽다기 보다는 조용하고 그윽해서 보는 이를 편안하게 해준다. 이 작품도 특유의 노란색 톤에 부분부분 붉은 꽃과 청색 녹색이 비쳐 나오면서 화면에 변화를 주고 있다.
산업혁명 이후 풍요로운 삶을 구가하게된 중산층(petit bourgeois)의 모습이 르느아르의 작품의 주인공이다. 그리고 그들이 교양인으로 거듭나기 위해 독서와 피아노, 만돌린 같은 악기연주를 배우는 모습들을 그려내면서 즐거운 인생(Les choses de la vie)을 그림에 담고있다.
말년에 류머티스 관절염으로 온몸에 마비가 오는 고통을 참으며 그림을 그렸다. 르누아르의 친구가 왜 그리 고통스러워 하면서까지 그림을 그리냐는 물음에 그는 "고통은 지나가지만 아름다움은 남기 때문이네." 라는 명언으로 답한 적이 있다.
▣끌로드 모네
10여년 전, 일본 도쿄 우에노공원에 있는 국립서양미술관에 갔을 때였다. 그 어떤 그림보다 인상주의 화가 클로드 모네(1840∼1926)의 '수련'이 강렬하게 다가왔다. 연못의 물과 그 물에 비친 하늘, 빛을 반사하는 수련 등 어느 것도 형태가 분명치 않아 마치 시선이 사방으로 떠돌기를 원하는 것 같았다.
그림을 감상한 뒤 묘한 열패감을 느꼈다. 프랑스 파리 오르세미술관 같은 데 가야 볼 수 있는 모네의 작품을 일본이 소장했다는 사실이 한국보다 먼저 근대화한 일본의 상징처럼 다가왔기 때문이다.
도쿄의 ‘수련’은 가와사키조선소(가와사키중공업의 전신) 사장이던 마츠카타 고지로(松方幸次郞)가 1916년부터 10여년간 런던과 파리 등지에서 미술품을 수집하던 시절 구입해 후일 기증한 것이다.
삼성가가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한 이건희 컬렉션에 모네의 ‘수련’ 연작이 포함됐다. 모네뿐 아니라 폴 고갱, 카미유 피사로,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마르크 샤갈의 작품도 있다.
이전까지 한국의 국공립미술관에선 이런 서양 근대 미술품을 본 적이 없었다. 값이 너무 올라 접근하기 힘들다고 여겨지던 19세기 후반∼20세기 전반의 서양근대미술품을 소장한 ‘파워 컬렉터’가 한국에도 있었던 게다.
삼성가가 이들 그림을 소장한 경위와 사연은 베일에 싸여 있다. 한 관계자는 16일 “이병철 선대 회장 때부터 모네든 샤갈이든 서양 근대 명화에 대한 수장 욕심이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모네는 인상주의를 이끈 수장이다. 그는 시슬레, 르누아르, 피사로, 바지유 등과 함께 관전인 살롱전을 거부하며 새로운 미술을 이끌었다. 모네는 이들과 함께 1874년 첫 전시를 열었다. 그가 출품한 ‘인상, 해돋이’를 한 비평가가 조롱하며 부른 ‘인상주의’가 이들 그룹의 이름이 됐다.
이들이 추구한 그림은 이전의 사실주의와 달랐다. 휴대용 튜브 물감이 개발된 덕에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햇빛 아래서 본 대상은 실내에서 본 것과 달랐기 때문이다. 모네가 추구한 것은 ‘빛으로 그린 찰나의 세상’이다. 모네는 색을 섞지 않고 순색 그 자체의 작은 터치로 칠해서 시간과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빛의 반사를 생생하게 표현했다.
조롱받던 회화적 실험은 마침내 세상의 인정을 받았다. 성공한 화가가 된 그는 50세가 되던 1890년 파리 근교 지베르니에 집을 사서 이주했다. 지베르니 자택에 연못을 만들고 수련을 심은 뒤 인생의 마지막 29년을 정원과 연꽃을 그리는 데 바치며 수백 점의 연작을 남겼다.
지난 12일(현지시간)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는 이건희 컬렉션 작품과 같은 크기의 ‘수련’(100×200㎝, 1917∼
1919년 작)이 7040만 달러(약 798억원)에 낙찰됐다.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된 이건희 컬렉션의 ‘수련’은 이보다 늦은 1919∼1920년에 제작됐다.
백내장으로 시력 저하 문제가 가장 심각했던 시기에 그려진 탓에 원색의 대비가 강렬한 전작들에 비해 색이 가라앉아 있다.
“색채가 동일하게 다가오지 않기 때문에 이전처럼 빛의 효과를 재현할 수 없었다. 나는 중간 색조와 가장 짙은 색조를 구별하는 데 완전히 실패했다.” 그림에서 좌절감에 빠진 모네의 독백이 들려오는 듯하다.
[출처 :손영옥 국민일보 문화전문기자 : 명작 in 이건희 컬렉션> / 국민일보, 2021. 5. 16.
끌로드 모네, 『수련이 있는 연못(Le Bassin Aux Nympheas)』,1919~1920, 100×200cm.국립현대미술관
수련은 모네의 트레이드 마크 같은 소재다. 모네의 작품은 멀리서 보면 수련이 있는 연못을 그린 풍경이지만 가까이 다가가 보면 연두색과 노랑, 푸른색, 붉은 색들이 서로 따로 있는 것 같은 추상화가 된다.
이렇게 그의 작품은 시지각적인 측면이 강한 동시에 과학적인 원리 즉 광학, 색채학에 관심을 가졌으며 본다는 원론적인 행위에 대해 깊은 성찰을 통해 그림을 그렸던 화가다.
이 작품은 70대에 그린 작품으로 화면이 이전의 작품에 비해 단순하고 정제된 느낌의 작품이다. 1908년 시력이 나빠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1912년 백내장 진단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고집스럽게 수술 받는 것을 꺼려했다. 이 작품은 그가 백내장을 가장 심하게 앓던 시기의 작품이다.
이때 그는 더 이상 색을 정확히 구별하기 어려웠고 사물도 정확하게 묘사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작품을 보면 오히려 모네가 평생을 통해 구현하려고 했던 회화의 절정 즉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닌 자연에 대한 범 우주적인 시선으로 재창조된 자연을 보여준다. 절제되고 단순화한 연못은 하늘이 됐다.
프랑스 인상주의 화풍의 창시자 중 한 사람인 클로드 모네가 지베르니 자택 연못에 핀 수련을 주제로 그린 수련 연작 250점 중 하나. 이 작품은 모네가 백내장으로 시력을 거의 잃은 후 그린 작품으로 추상화가 많이 진행됐다.
가로로 긴 화폭에 흰색·초록·보라를 겹쳐 화면 가득 연못의 수면과 수련만 묘사했다.평면적 구성으로 수면에 반사된 빛만 표현하고자 한 의도를 확인할 수 있다. '수련' 연작은 제작 시기에 따라 조금씩 다른데 이 작품은 클로드 모네가 백내장으로 시력을 점차 잃게 된 후기에 그려 추상적이다.말년까지 인상주의의 원칙을 고수하며 작업을 지속했다.
인상주의 화가 모네가 1919~20년에 그린 ‘수련이 있는 연못’은 모네 후기를 대표하는 명작 중 하나로 꼽힌다. 이번 기증작과 구도·크기가 거의 같은 모네의 다른 작품이 다음 달 미국 뉴욕 소더비 경매에 시작가 4000만 달러(약 445억원)로 나올 예정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연간 소장품 구입비는 올해 기준 48억원. 10년치를 모아야 모네의 이런 작품 하나를 살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살바도르 달리
스페인 작가 살바도르 달리(1904∼1989)는 시계가 마치 치즈처럼 축 늘어져 있는, 그 유명한 그림 ‘기억의 지속’(1931년 작)으로 우리에게 익숙하다. 이 작품이 보여주듯 초현실주의 작가로 분류된다.
시인 앙드레 브르통이 이끄는 초현실주의는 지그문트 프로이트(1856∼1939)의 정신분석학에 영향을 받아 무의식의 세계나 꿈의 세계를 형상화한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이듬해인 1919년에 시작돼 1939년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직후까지 약 20년간 프랑스를 중심으로 성행했다.
참혹한 전쟁을 겪으며 현실 세계에 대한 불신과 문명에 대한 혐오가 커지자 이성이 아닌 상상력이 예술과 사회를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초기에 인상주의 입체주의 미래주의 등을 섭렵하던 달리는 1929년부터 초현실주의 운동에 가담했다. 이 해 그는 초현실주의의 대표적인 시인 폴 엘뤼아르와 함께 그의 부인 갈라를 동시에 만났는데 그만 갈라와 불륜에 빠졌다.
‘기억의 지속’은 불륜 사실이 알려져 아버지에게서 쫓겨나 고향 근처에 살던 시절에 그린 작품이다.
파티가 끝난 후 두통으로 혼자 집에서 쉬던 그는 잠이 들었다 깨어나 시계를 보게 됐다. 너무 느리게 흐르는 시간이 카망베르 치즈처럼 녹아 흐른다는 생각이 퍼뜩 들며 이 작품을 구상하게 됐다고 한다. 녹아내리는 시계를 걸쳐둔 상자는 계단의 또 다른 이미지다.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1900)에서 계단이나 사다리를 오르내리는 것은 성행위를 뜻한다. 프로이트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달리의 그림에는 이 계단이 많이 등장한다.
이건희 컬렉션에 포함된 ‘켄타우로스 가족’(1940)은 초현실주의가 아니라 르네상스 미술의 고전주의를 지향하며 그린 것으로 해석된다. 초현실주의 운동은 무의식을 표현하는 게 핵심이고 그림에서도 의식의 개입을 최소화해야 하는데, ‘켄타우로스 가족’은 매우 의식적으로 르네상스 대가들이 사용한 삼각형 구도와 균형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내용은 그리스 신화의 반인반마(半人半馬) 종족인 켄타우로스에게 캥거루처럼 육아낭이 있어서 거기로부터 아기들이 빠져나오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달리는 프로이트의 제자인 심리학자 오토 랑크의 이론에 영향을 받아서 이 그림을 제작했다.
랑크는 인간이 출생할 때 겪는 육체적 고통과 어머니의 자궁으로부터 분리되는 정서적 고통이 최초의 트라우마이며, 이러한 출생 트라우마가 인간의 불안과 신경쇠약의 근원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래선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반영한 작품을 여럿 남겼던 달리는 “낙원 같은 어머니의 자궁에서 나왔다가 다시 들어갈 수 있는 켄타우로스가 부럽다”고 했다.
그는 이 그림에서 왜 초현실주의를 버리고 고전주의를 택했을까. 우상 프로이트를 만난 경험이 작용했을 것이다. 1938년, 달리는 죽기 1년 전의 프로이트를 런던에서 만났다.
프로이트는 “사실 지금까지 나를 수호성인쯤으로 여기는 초현실주의자들을 어릿광대쯤으로 생각해왔네. 하지만 이 에스파냐 젊은이가 내 생각을 재검토하게 했다네”라며 극찬했다.
그러면서 한마디를 더 했다. “당신 그림에서 내 관심을 끄는 건 무의식이 아니라 의식이군요.”
이 시기는 초현실주의 동료들로부터 배척당하던 때였다. 달리의 그림 속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성적인 암시가 지나치게 반동적이며, 사회 비판이라는 초현실주의의 정치적 이상을 상실했다는 비난을 받자 그는 초현실주의자와 결별했다.
[출처 :손영옥 국민일보 문화전문기자 :<명작 in 이건희 컬렉션> / 국민일보, 2021. 5. 30.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켄타우로스 가족』, 1940 oil on canvas, 35 × 30.5cm, 국립현대미술관
스페인의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1904~1989)가 1940년 그린 작품으로 국내에서는 한번도 공개되지 않았던 작품이다. 이 작품은 오스트리아 출신 정신분석학자 오토 랑크(Otto Rank·1884~1939) 학설의 영향을 받아 그려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랑크는 ‘인간은 출생 자체가 심리적 트라우마’라는 이론을 제기했으며 그 이론 자체를 회화로 옮긴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리스 신화에서 등장하는 반인반마 종족인 켄타우로스가 복부에 난 둥근 구멍속에서 차례로 아기들을 꺼내는 장면은 살바도르 달리가 "엄마의 자궁이라는 낙원에서 나올 수도 되돌아갈 수도 있는 켄타우로스가 부럽다"고 자서전을 통해 한 말을 이해 할 수 있다.
김진엽 수원시립미술관장(한국미술평론가협회장)은 "고전주의 원칙에 입각하여 장엄함과 깊이있는 심미감을 작품의 기본 구성으로 삼고있지만, 탄생이라는 주제를 초현실주의적으로 해석함으로써 달리가 추구하는 내면의 심층 세계를 잘보여주는 걸작품"이라고 평가했다.
초현실주의자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í, 1904~1989)의 1940년작 [켄타우로스 가족 Family of marsupial Centaurs], 정확히는 ‘육아낭을 가진 켄타우로스 가족’은 달리의 작품세계 진행에서 주요한 터닝 포인트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달리재단의 ‘카탈로그 레조네’에 따르면 ‘개인소장’이며 1941년 시카고에서 발표된 뒤에 뉴욕에서 전설적인 줄리안 레비 갤러리(Julien Levy Gallery)에서 소개되었고 이후 미국의 여러 미술관에서 전시되다가 1964년에 일본 도쿄프린스호텔갤러리에서 전시한 후, 1970년 파리의 갤러리에서 [달리]전을 한 뒤로 전시 이력은 없다.
하지만 달리에 대한 연구서에서는 반드시 언급되는데, 신화적인 주제로 회귀한 것뿐만 아니라 기법에서도 고전적인 형식을 따르는 전환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달리는 초현실주의자답게 “엄마의 자궁이라는 낙원에서 나올 수도 되돌아갈 수도 있는 켄타우로스가 부럽다”고도 했다.
캥거루처럼 육아낭에서 아기를 꺼내기도 하고 집어넣기도 하는 자궁은 생명에 대한 심층 세계의 내면을 보여준다.
▣폴 고갱
폴 고갱, 『무제(센간 풍경)』, 1875, oil on canvas, 114.5×157.5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후기인상주의자 고갱(Paul Gauguin, 1848~1903)의 [무제](1875)는 1871년 파리에서 증권회사를 다니며 회화를 공부하던 시기의 작품이다. 1879년 그의 수입은 연간 3만 프랑의 엄청난 봉급자였으며 미술품 거래에도 능하여 많은 돈을 벌었다.
파리에 정착한 지 4년 만에 그린 이 그림은 충실한 데생과 관찰을 보여준다. 1874년 피사로를 만나 인상파에 공감하면서 그림에 대한 생각을 바꾸던 시기이기도 하다. 그의 초기 작품은 색상이 지저분하였는데 배 부분 등에서 그러한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1982년 증권시장 붕괴로 전업작가가 되기 전 그의 충실한 학습과 세계를 바라보는 눈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넓은 하늘과 자연에 존재하는 인간의 모습은 원시적인 생명성을 추구하였던 그의 성향이 생래적인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쿠르베풍의 세부 묘사와 함께 하늘과 강둑에는 인상주의적 표현이 중첩됐다. 후기 인상주의 대표 화가 폴 고갱이 전업 화가로 전향하기 전 그린 작품. 고유의 인상주의 화풍을 익히기 전 시기인 만큼, 사실적인 묘사가 돋보인다.
폴 고갱(1848~1903)이 1875년 그려낸 센 강의 풍경이다. 이 작품은 우리가 아는 고갱의 상징주의적이며 신비주의적인 이국풍의 작품과는 거리가 있는 작품이다.
고갱이 24세가 되던 해에 그린 작품으로 파리에서 증권회사에 다니던 그가 일에 싫증을 느끼면서 그림에 취해 공부하던 학습기에 그린 그림이다. 그는 당시 일요화가로 취미로 그림을 그리며 코로나 쿠르베 풍의 사실적인 그림을 주로 그렸다.
그러다 1874년 피사로를 만나 당시 파리 화단에 처음 등장한 인상파에 공감을 하면서 새롭게 그림에 대한 생각을 바꾸던 시기이다. 따라서 이 작품에는 쿠르베 풍의 세부 묘사와 함께 하늘이나 강 둑에는 인상주의 적인 표현이 중첩되어나타난다.
특히 지적으로 불안하고 독립적인 ‘우아한 야만인’ 고갱의 성정이 조심스럽게 드러나면서 후일 그가 성취하게 될 표현주의적이면서 상징주의적인 경향을 예고하고 있다.
재밌게도 이 당시 고갱은 안정된 결혼생활로 피사로의 그림을 팔아줄 정도로 여유가 있었으며, 피사로와의 교류도 지속하기도 했지만 훗날 피사로가 고갱을 비난 하는 등 사이가 멀어지기도 했다.
▣프란시스 베이컨
프란시스 베이컨의 『방안에 있는 인물』, 1962, oil on canvas,
▣윌렘 드 쿠닝
Willem de kooning, 『무제 ⅩⅣ』, 1947, Oil on panel,
윌렘 드 쿠닝은 잭슨 폴록과 함께 미국의 추상표현주의를 확립한 화가로 형태의 추상화된 파편들이 바탕과 혼합되어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해내는 이 작품은 공간감이 사라지고 평면화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는 1950년대 보이는 표현적 추상회화의 등장을 예고한다.
▣장 미쉘 바스키아
장 미쉘 바스키아의 『무제』(검은 색 인물)
▣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소장했던 『도라 마르의 초상』
피카소가 특유의 화풍으로 그린 도예 그림들.
지난달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된 이건희 컬렉션의 서양근대 작품들 가운데 일부다.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무제』, 도자기, 국립현대미술관
새의 배에 사람 얼굴이 들어 있다. 파블로 피카소는 올빼미나 물고기, 그리고 신화의 소재를 다루며 재미와 창조성을 보였다. 노년기인 1940년 이후 도자기로 작품을 만들었는데 여생을 흙조각 작품을 만들면서 보냈다.입체파로 시작해 회화·조각·도예 등 현대미술의 모든 장르에서 작업을 시도했다.
피카소의 특징은 어느 한 가지 양식에 머무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입체파를 시작으로 현대미술의 모든 장르를 개척한 인물로, 장르에서도 회화, 조각, 도예 등 현대미술의 전 장르에서 자신의 작업을 시도한 인물이다.
이번 작품도 새의 형태를 바탕으로 얼굴모양이 들어 있는데, 피카소의 도예 작업의 특징은 재미와 창조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올빼미나 물고기 그리고 신화의 내용 등 다양한 소재들을 다루었다.
피카소는 안달루시아 주 말라가 출신으로, 주로 프랑스에서 활동했다. 입체주의의 거장으로 평가받는다. 대표작으로는 ‘아비뇽의 처녀들’과 ‘게르니카’가 유명하다. 현대 미술의 뛰어난 거장을 꼽으라고 할때 빠지지 않고 언급되고 있으며, 또 국내외를 막론하고 천재 화가의 대명사로 꼽혀 대중성과 작품성을 동시에 가진 예술가이다.
그의 대표 작품 둘이 회화다 보니 그를 그림그리는 작가로만 보는 경향이 있지만, 피카소는 다방면에서 자신의 예술성을 드러냈으며 이 작품도 그중 한 일면중 하나로 볼 수 있다.
피카소는 노년기인 1940년 이후 도자기로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으며 이후 여생의 대부분을 흙조각 작품을 만들면서 보냈다.
▣마그리트
마그리트, 『빛의 제국』, 1952.
마그리트, 1952년, oil on canvas, The Listening Room”, 100억~120억원
거대한 초록 사과가 방을 가득 채운 마그리트 1952년 유화 '리스닝 룸'(45x55cm) 추정가는 100억~120억원이며, 그 보다 규모가 큰 1952년작 '빛의 제국'(100x80cm)은 2002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1265만달러에 낙찰된 바 있다.
사과는 <인간의 아들>,<이것은 사과가 아니다>와 같은 마그리트의 작품에서 종종 보이는 소재중 하나이다.
마그리트는 몽환적 이미지나 추상적 이미지를 섞은 다른 초현실주의 화가들과 달리 연두빛 사과를 방 전체를 채울 정도의 크기로 묘사한 것 처럼 '초현실적 상황에 놓인 정상적인 이미지'를 만든다.
▣ 로이 리히텐슈타인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
지난 28일 삼성가는 이 회장이 평생 수집해온 미술품 2만1600여점을 사회에 기증한다고 밝혔다. 이 중 국보가 14점, 보물 46점이 포함돼 국내를 넘어 세계적으로도 '사상 최고의 기증'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다만 이번 목록에 포함되지 않은 미술품들이 있다. 주로 서양 현대미술 작품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때문에 세간에선 "미공개 작품이 진짜 '이건희 컬렉션'"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대표적으로 2007년 언론에 자주 등장했던 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이 꼽힌다. 당초 이건희 회장의 개인 소유로 알려졌으나 당시 삼성 측이 그림 구매 사실을 부인했고, 홍송원 서미갤러리 대표가 자신이 구매해 보관하고 있다며 공개까지 하면서 현재는 삼성가의 작품은 아닌 것으로 결론이 났다. 현재 이 작품이 어디에 있는지 정확하게 알려진 것은 없고 당연히 이번 기증 목록 대상에서도 빠졌다.
미술계가 기대했던 작품들은 또 있다. 시가 1000억원 이상으로 추정되는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거대한 여인 III', 삼성전자 평생의 라이벌이었던 스티브 잡스, 그가 생전 가장 좋아한 것으로 전해진 미국 현대미술 거장 마크 로스코의 '무제', 사진과 회화의 경계를 넘나들었다는 평가를 받는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두 개의 촛불'. 이 작품들은 소장자가 이 회장 개인이 아닌 삼성문화재단으로 돼 있어 애초부터 상속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
▣앤디 워홀
앤디 워홀 1979년작 마흔다섯 개의 금빛 마를린(250억 300억원)
▣사이 트웜블리
트웜블리는 2011년 7월 5일 작고 이후에도 프랑스 파리 퐁피두센터에서 최장기간의 학예 연구를 거쳐 회고전을 이뤄낸 명망 있는 작가다. 생전에도 휴스턴의 멘닐컬렉션, 로스앤젤레스의 브로드컬렉션 등에 포함되며 유수 컬렉터들의 지지를 받아왔다.
흥미롭게도 트웜블리는 한국전쟁에 미군으로 참전했다. 당시 통신보안 암호 분석 및 코드 해독가로 복무했는데 이와 같은 과거의 이력이 그를 대표하는, 마치 어린아이가 칠판에 낙서를 한 듯한 회화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그는 언뜻 주변의 그래피티를 연상시키는 낙서 기법을 통해 사적인 이야기들을 기록했다. 이뿐만 아니라 매우 극단적인 단순성을 추구했으며, 기술 발전에 아랑곳하지 않고 아날로그적인 접근 방식을 고집했다. 미국의 추상표현주의나 원시주의와 같은 문맥에서 회자되는 이유다.
트웜블리는 아주 어렸을 적부터 전통적인 회화를 교육받았고, 이탈리아 로마 유학시절 역사와 고대신화, 고전문학에 매료됐다. 추상표현주의 작품에서 이례적으로 고대 기록화나 르네상스 시기 혼돈기의 정서가 읽히는 이유이기도 하다.
특히 그의 문제적 작품으로 회자되는 로마의 폭군 콤모두스황제에 대한 아홉 가지 담론(사진) 연작을 살펴보자. 1963년 제작돼 뉴욕의 전설적 화랑 네오카스탈리 갤러리에 전시됐다.
당시 이 작품은 미국 미니멀리즘의 대표 작가이자 평론가로도 활동했던 도널드 저드의 엄청난 혹평을 받았다.
"몇몇 흘려지고 뚝뚝 떨어진 물감 자국과 불규칙한 연필선…. 거기에는 그 외의 어떤 것도 발견할 수 없다."
냉혹한 평가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트웜블리는 생전 언론 노출이나 인터뷰 기회를 극구 피했다. 비평가들의 극단적인 평가를 견딜 뿐이었다.
그의 회고전을 기획한 필라델피아 미술관 큐레이터 콜로스퍼스 월도는
"비평과의 거리두기로 트웜블리의 작업 태도는 보다 독립적이고 무정부적인 방식으로 형성됐다"고 평했다.
어쩌면 시류에 흔들리거나 관심을 좇지 않는 그의 회화세계는 언뜻 불완전한 회화적 이미지로 보일 수 있으나 오히려 그러한 불완전성이 작품을 소장하거나 경험하는 관객에게 매력 요소로 작용할지도 모른다.
다시 작품으로 돌아가서 총 9개 캔버스로 구성된 이 회화 연작은 그가 1957년 로마로 이주하면서 마주한 이탈리아 역사에 뿌리를 두고 있다. 로마 제국에 대한 혈통주의와 폐단으로 얼룩진 암흑기를 연구하면서 영감을 얻었다.
조선의 연산군에 버금가는 피바람과 황음(荒淫)으로 정국을 쇠퇴기로 몰아넣었던 콤모두스황제의 비극은 트웜블리가 살아온 1960년대 초 미국 정세와 닮았다. 쿠바 미사일 위기와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사건 등 당시 사회가 겪은 불안과 시대적 고통을 로마의 흑역사에 반추한 것이다.
작가의 의도는 특정적인 지식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쉽게 이해하거나 알아채기 어려운 면도 있다. 특히 소장가의 입장에서는 특정 작품의 미적인 가치 너머 이 작품과 함께하고 싶은 결정적인 요인을 따지기 마련이다. 트웜블리의 낙서와 같은 반복된 선 혹은 붓질의 이미지들은 해독이 불가하다.
그러나 청자의 입장에서 다양한 해석을 시도해볼 수 있고, 짐작을 할 수도 있다. 이런 일련의 접근이 트웜블리의 회화를 더욱 풍성하고 유기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어린아이의 낙서 같은 그림이 실로 지난한 작가의 시대적 고민을 안고 있을지도 모른다.
현대미술이 난해하다는 고충을 종종 듣게 된다. 하지만 작품이 작가의 일방적인 소통이 아닌 관객을 향한 상대성을 함의하고 있다면 그 상대성의 가치를 최대로 경험해볼 것인지 혹은 최소한으로 경험해 볼 것인지는 관객의 선택이 아닐까?
[출처 : 전민경 국제갤러리 대외협력 디렉터 :<[현대미술가 열전] 사이 트웜블리의 낙서같은 붓질…현대미술을 바꾸다> / 매일경제, 2017. 5. 16.
트웜블리, 1968년작 『무제』. 최소 500억원
▣ 게르하르트 리히터
독일 화가. 2007년 쾰른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창 하나를 디자인했다. 11,200개의 색유리판을 무작위적인 배열 방식으로 사용해 추상적인 작품을 만든 것으로, 우연의 도상학은 그의 작품의 특징이다. 관람자들이 회화 대 사진, 기록 대 재현의 관계에 대해 고민할 것을 요구한 작가이다.
게르하르트 리히터는 1960년대에 사진을 모으기 시작했다. 사진은 그 자신의 것도 있었고, 신문이나 잡지, 책에서 스크랩한 것도 있었다. 그는 '사진 회화'의 제작을 위해, 프로젝터로 캔버스 위에 사진을 비춰 대상의 형태를 그렸다. 또 원본을 기준으로 삼아 색채를 선택했다.
안료를 얇게 발라서 대상의 이미지는 핀트가 안 맞는 것처럼 흐릿하게 표현되었다. <엘리자베트 Ⅰ>(1966)처럼 그 결과 덧없는 순간에 대한 향수를 기록한 듯 보이는 작품이 탄생했다. 이 작품들은 낭만적인 그림(고급 미술)과 가족의 스냅사진(저급 미술) 사이에 위치한 듯하다.
리히터의 사진 목록집 『아틀라스』는 그의 사진 회화를 위한 광범위한 모티프 모음이 되었다. 리히터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거부는 사회주의 국가, 그리고 그 다음에는 동독의 공산주의 치하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던 데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그는 1961년에 서독으로 넘어왔다. 1963년에 리히터는 소비문화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미술가 지그마르 폴케와 콘라트 피셔와 함께 '자본주의 사실주의 운동'을 벌였다. 같은 해 뒤셀도르프에서 그의 첫 개인전이 열렸다.
우연의 도상학은 그의 작품의 특징이다. 1960년대 중반부터 리히터는 추상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의 초기 작품들은 '기존의'(found) 색표에 의존한 것이다. 그 후 그는 <회색>(1974)이 포함된 회색의 단색조 회화 연작을 제작했고, 다시 사진같이 마감한 채색 추상 작품을 그렸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추상화 439번>(1978)이 있다. 리히터의 후기 작품들은 추상화에서 <바다풍경>(1988) 같은 풍경화로 방향을 수정했다. 그는 관람자가 회화 대 사진, 기록 대 재현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도록 촉구했다.
믿음의 문제
리히터는 2007년에 쾰른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창 하나를 디자인했다. 원래의 스테인드글라스가 1944년 공습으로 파괴된 후, 그 창에는 투명한 유리가 끼워져 있었다.
그는 11,200개의 색유리판을 무작위적인 배열 방식으로 사용해 추상적인 작품을 만들었다. 이는 조화되어 보이는 것은 신적인 디자인의 일부임을 보여준다.
모든 사람들이 이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을 좋게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로마 가톨릭의 추기경인 요아힘 마이스너는 성 막시밀리안 콜베와 에디트 슈타인(둘 다 나치에게 처형당함)이 포함되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것은 모스크나 다른 종교의 신전 같다"라고 했다.
[501 위대한 화가, 2009. 8. 20., 스티븐 파딩, 위키미디어 커먼즈)]
게르하르트 리히터, 두 개의 촛불, 19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