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415
2월28일[사순 제1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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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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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dyPspsaEJI0 (박성호 다미아노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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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의 기도를 좀 더 천천히 음미하며 바친다면 거기서 오는 은총이 참으로 클 것입니다!>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는 주님 말씀이 오늘따라 제 가슴을 크게 칩니다. 지난 세월 돌아보니 얼마나 많은 빈말을 되풀이해왔는지 모릅니다. 따지고 보니 주제넘게 여기저기 다니면서 강의를 시작한 지가 25년이 다 되어갑니다.
죽었다 깨어나도 내가 실천할 수 없는 말, 감당하기 힘든 말들을 너무나 많이 내뱉고 살아왔습니다. 말은 그럴듯하지만, 구체적인 삶은 전혀 뒷받침되지 않는 제 이중적인 모습을 보시고 하느님께서 얼마나 슬퍼하실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습니다.
이토록 부끄러운 저를 위해 오늘 주님께서는 작은 지침 하나를 내려주십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그러니 그들을 닮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주님의 기도는 짧고 간략하지만 한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 기도 안에는 한 신앙인이 어떤 지향으로 기도하고, 어떤 청을 드릴 것이며,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잘 소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기도는 기도 중의 기도, 기도들 가운데 으뜸인 기도, 기도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주님의 기도’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우리보다 앞서 사셨던 성인성녀들께서 힘주어 강조하셨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복음서 전체의 요약입니다.”(테르툴리아노 교부) “주님의 기도는 복음서 전체의 종합입니다.”(마르티니 추기경) “주님의 기도는 가장 완전한 기도입니다.”(토마스 아퀴나스)
“그 어떤 책보다도 훌륭한 주님의 기도를 정성스런 마음으로, 겸손한 자세로 묵상한다면, 다른 책이 아쉽지 않을 것입니다.”(아빌라의 데레사)
예수님께서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쳐달라는 제자들에게 단순히 ‘이렇게 기도하라!’라고만 가르쳐주시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기도하는 동시에 ‘이렇게 살아라!’라고 구체적인 행동강령까지 제시해주셨다고 생각합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바치는 주님의 기도가 입술에서만 머무는 기도가 되어서는 곤란하겠습니다. ‘주님의 기도’ 내용이 우리 매일의 구체적인 삶 안에서 적용되고 실현되는 것이 필요하겠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우리의 삶과 결부되고 병행되는 것이어야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직접 가르쳐주신 주님의 기도마저 타성에 빠져 건성건성, 아무런 생각 없이 바친다면, 정말이지 예의가 아닐 것입니다.
다른 기도도 좋지만, 우리가 하루에 열두 번도 더 바치는 ‘주님의 기도’를 좀 더 지극정성으로 바친다면, 좀 더 천천히 음미하며 바친다면 거기서 오는 은총이 참으로 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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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uuhKK0M4e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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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용서하면 내 기도를 더 빨리 들어주실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주님의 기도를 알려주십니다. 그러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예수님은 주님의 기도를 우리가 청하는 어떤 것을 들어주시기 위한 준비작업처럼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미리 알고 계시며 주님의 기도만 바치면 그 원하는 바를 들어주실 것입니다. 그러며 특별히 강조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용서’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미운 마음이 있는 상태로 기도하면 아무리 기도해도 안 들어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래도 들어주시면 그것은 그 미워하는 마음을 긍정하는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암 그들은 이렇게 치유되었다”(Radical Remission: Surviving Cancer Against All Odds)라는 책을 소개합니다. 저자 캘리 터너는 의학 저널에 실린 치유 불가능한 말기 암 환자가 자연 치유된 1,500건 이상의 근본적 치유 사례를 분석하는 한편, 전 세계 수백 명의 암 및 난치병 완치자들과의 심층 인터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다이 포스터라는 여인은 유방암 4기로 살날이 12개월이었지만 365일 매일을 행복하게 살자는 마음으로 살았더니 암이 완전히 완치되었습니다. 이것은 그녀가 한 말입니다. “‘걱정하지 말자. 답을 알아낼 시간이 365일이나 남아 있어.’ 그리고 나는 매일 행복하기, 자연스러워지기, 감사하기 세 가지를 실천하자고 마음에 새겼고 매일 그것들을 연습했어요. 그 중에서 365일 동안 ‘행복하기’는 365일 동안 ‘그 순간에 존재하기’로 바뀌었네요. 이것은 화가 나거나 울고 싶거나 이불 속에 숨어 세상을 향해 나를 내버려 두라고 말하고 싶을 때는 그냥 그렇게 했다는 걸 의미해요. 나는 정말로 그 순간에 존재했어요.”
사람들은 마음과 물질이 별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몸과 영혼은 하나로 이어져 있습니다. 영혼이 불안한데 몸이 건강할 수 있을까요? 주님의 기도가 이것입니다. 우리가 보통 청하는 것은 병의 치유나 어떠한 일이 해결되는 등의 물질적인 변화입니다. 그러나 은총은 영적인 세계를 통과해야 물질에 영향을 미칩니다. 이 영적인 막힘을 뚫어주는 기도가 주님의 기도인 것입니다.
한 환자도 갑작스러운 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수술, 방사선 치료, 화학요법 등을 시도하였지만, 암이 계속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그녀는 용서의 힘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녀는 그녀의 지혜롭고 자비로운 대학교수님과 함께 용서에 관해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용서해야 할 상대방들의 사진들을 보면서, 자신에게 내재된 분노와 증오를 받아들이고 이를 떨쳐냈습니다. 이 과정에서 큰 슬픔과 아픔을 느꼈지만, 이를 극복하고, 용서의 힘으로 인해 건강한 마음과 몸을 찾게 되었습니다.
저자 캘리 터너가 기적의 암 치유자들에게 공통으로 발견된 ‘10가지 치유 요소’는 이러합니다. ① 식단의 근본적인 변화, ② 자신의 건강을 주도적으로 다스리기, ③ 자신의 직관을 따르기, ④ 허브와 보조제 사용, ⑤ 억눌린 감정 풀어주기, ⑥ 긍정적 감정 키우기, ⑦ 사회적 지지를 받아들이기, ⑧ 영적 연결을 강화하기, ⑨ 살아야 할 강력한 이유 찾기, 그리고 ⑩ 운동입니다. 한 가지 놀라운 것은 이 10가지 요소들 중에 신체와 관련된 것은 식이 요법, 보조제, 운동 세 가지뿐이고 나머지 일곱 가지는 정신적⋅감정적⋅영적인 요소들이라는 점입니다. 이는 우리가 몸‒마음‒영이 서로 밀접하게 연결된 전인적 존재이며, 따라서 병의 치료에 전인적인 접근 방식이 실제로 큰 효과를 발휘함을 보여줍니다.
누군가를 용서하면 내 청을 더 빨리 들어주실까요? 당연합니다. 분명 영과 물질적 세계는 연결되어 있습니다. 물질적 세계를 변화 시키려면 먼저 더 깊은 영적 세상을 변화 시켜야 합니다. 마음이 편안해지면 세포도 호전됩니다. 이러한 감정을 갖게 하는 기도가 주님의 기도입니다. 만약 내가 사면장을 주면 그 사람이 아직도 증오심이 남아서 나가서 또 누군가에게 피해를 입힐 것이라면 어떻게 그 사면장을 줄 수 있을까요?
먼저 감정의 평화가 우선입니다. 그 평화를 얻는 방법이 주님의 기도입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만큼 마음이 평화로울 수 있을까요? 그러니 먼저 주님의 기도로 마음을 평화롭게 합시다. 아니 주님의 기도만 그 뜻을 마음으로 새기며 기도합시다. 그러면 청하지 않은 것도, 청했어야만 하는 것도 모두 알아서 다 들어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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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1)
예수님께서 복음에서 이런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었다. 큰 아들에게 밭에 가서 일을 하라고 했는데 큰 아들은 안 가겠다고 했다. 그러나 마음을 바꾸어서 밭에 나가서 일하였다. 둘째 아들에게도 밭에 가서 일을 하라고 했는데 둘째 아들은 가겠다고 했다. 그러나 마음이 바뀌어서 밭에 나가지 않았다. 어떤 아들이 아버지의 마음에 들겠느냐?” 제자들은 당연히 밭에 나가서 일을 한 큰 아들이 아버지의 마음에 들것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비슷한 이야기를 유대인들에게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을 유대인들에게 먼저 전하였지만 유대인들은 하느님께 선택 받은 민족이면서도 하느님의 아들이 선포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제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전하겠다고 합니다. 누가 하느님의 마음에 들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나라를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도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부른다고 모두 하느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 하느님나라에 들어갈 것이다. 누가 형제요! 어머니이냐?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나의 형제이며 어머니이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셈’을 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기준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이웃의 아픔을 외면하는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독서는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 이냐시오 성인은 ‘세 가지 유형의 사람들’을 이야기합니다. 첫 번째 유형의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겠다고 다짐하지만 곧 세상의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 유형의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겠다고 다짐하지만 시련과 고통이 다가오면 쉽게 포기하는 사람입니다. 세 번째 유형의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겠다고 다짐하였고 온갖 시련과 고난이 다가와도 끝까지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마치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이 풍성한 열매를 맺는다는 예수님의 말씀과 비슷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그러니 그들을 닮지 마라.” 그리고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님의 기도 지향은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야 한다고 하십니다. 나에게 잘못한 이를 먼저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유혹에 빠지지 말고, 악에서 구해 달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일용할 양식을 청하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기도에서 우선순위는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느님께서 나머지 것들은 모두 채워주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2월의 마지막 날을 지내면서 예전에 들었던 노래 “모두 다 사랑하리.”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하늘에 구름 떠가네. 보라색 그 향기도/ 이 몸이 하늘이면 얼마나 좋을까/ 내 곁에 사랑도 가네. 빨간 입맞춤도/ 시간이 멈춰지면 얼마나 좋을까/ 비 맞은 태양도 목마른 저 달도/ 내일의 문 앞에 서 있네/ 아무런 미련 없이/ 그대 행복 위해 돌아설까나/ 타오르는 태양도 날아가는 저 새도/ 다 모두 다 사랑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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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국에서는 한국 브랜드의 차를 많이 보았습니다. 현대, 기아, 쌍용, 삼성 브랜드의 차가 많고, 외국차는 그렇게 많지는 않은 편입니다. 이곳 뉴욕의 거리는 자동차의 전시장과 같습니다. 여러 나라의 차를 볼 수 있습니다. 거리에서 많이 보는 차는 일본 브랜드의 차지만 한국 브랜드의 차도 볼 수 있습니다.
한국 브랜드의 차 중에 ‘텔루라이드(Telluride)’는 현지인들 사이에도 평가가 좋다고 합니다. 차를 사려면 기다려야 하고, 판매가격보다 더 높은 가격을 주어야 살 수 있다고도 합니다.
차의 이름이 미국 콜로라도주에 있는 도시 이름과 같다고 합니다. 차의 이름, 기능, 디자인, 안전성, 연비가 좋으므로 사람들이 선호하는 것 같습니다. 한국 브랜드의 차가 가격 경쟁력 때문에 팔리기보다는 우수한 성능과 디자인 때문에 많이 팔리면 좋겠습니다.
예전에 신학교에서 모임이 있을 때입니다. 신학교 뒤에는 낙산이 있는데 낙산 꼭대기에 허름한 집이 있었습니다. 그 집에서 냉면을 팔았습니다. 간판도 없었습니다. 집 앞에 국기를 거는 깃대가 있었기에 사람들은 냉면 집을 ‘깃대봉’이라고 불렀습니다. 간판도 없었고, 집도 허름했고, 산에 올라가야 했는데도 사람들이 자주 찾았습니다. 냉면이 맛있었기 때문입니다.
몇 년 뒤에 깃대봉 냉면집은 산 아래에 ‘깃대봉 냉면’이라는 이름으로 식당을 차렸습니다. 살얼음이 떠있는 알싸하게 매운 냉면 맛이 생각납니다. 문득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이 생각납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오 복음 7장 21절) 중요한 것은 아버지 뜻을 삶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행동하는 양심입니다.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가면 ‘주기도문 성당’을 방문하곤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알려주신 장소입니다. 그곳에는 각 나라의 언어로 된 ‘주님의 기도’를 볼 수 있습니다. 한국어로 된 주님의 기도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는 제자들에게는 박해를 이겨낼 힘이 되었습니다. 어둠 속에서도 희망을 볼 수 있는 등불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2,000년 교회의 역사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직접 가르쳐주신 기도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미사 중에도 함께 바치는 기도가 되었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바라는 청원의 기도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청합니다. 일용할 양식을 청합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기를 청합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기를 청하며, 악에서 구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우리의 자세를 성찰하는 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하늘에 계신”이라고 하지마라. 매일 매일 땅에 것만 생각하면서 “우리”라고 하지 마라. 언제나 너 혼자만 생각하면서 “아버지”라고 하지 마라. 전혀 아들, 딸답게 살지 않으면서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라고 하지 마라. 제 이름만 내려고 발버둥 치면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라고 하지 마라. 오로지 황금만능의 나라를 원하면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고 하지 마라. 모든 것이 네 뜻대로 되기를 바라면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고 하지 마라. 죽을 때까지 먹을 양식을 쌓아두려고 하면서.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하듯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라고 하지 마라. 여전히 아직도 마음 한 구석에 앙심을 품고 있으면서.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시고”라고 하지 마라. 죄인 줄 알면서도 매일 죄 지으면서 “악에서 구하소서.”라고 하지 마라. 악을 빤히 보면서도 피하려 하지 않으면서 “아멘”이라고 하지 마라. 주님의 기도를 진정 나의 기도로 바치지 않으면서.
주님의 기도는 정말 아름다운 청원의 기도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통해서 우리들의 마음을 깨끗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를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을 이웃에 실천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매일 거울을 보는 것처럼, 기도를 열심히 한다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더욱 많은 사랑을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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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6,7-15: 기도할 때에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더 잘 아시며, 우리가 말하기도 전에 우리가 무엇을 청할지 아시는 분이시다. 우리가 그분께 항상 감사를 드리며 그분의 마음에 드는 삶을 살려고 노력한다면 그분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항상 제때 내려주실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래서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신다.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9절)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아들을 믿는 이들의 특권이며, 믿음의 어머니인 교회에서 우리가 받고 그분에 대해서 배울 수 있는 특권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하느님을 찬미하는 말이며 우리의 믿음을 드러내는 말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찾는 우리에게 든든한 확신을 주실 수 있도록 아버지라 불리기를 원하신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9절) 이는 거룩하신 하느님께서 우리의 기도로 더욱 거룩해지시기를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거룩한 이름이 우리 안에서 나날이 거룩해지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도록 기도하는 것은 우리가 흠 없이 열심히 살아 우리의 삶으로 모든 사람이 하느님을 찬미하게 되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10절) 하느님의 나라가 오기를 기도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가 먼저 우리 안에 서고 하느님께서 그 나라에서 다스리시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이 나라의 시민들은 이미 하느님께서 다스리시는 그 안에 사는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의 삶의 모습에 따라 나와 함께 있을 수도 있고 잃어버릴 수도 있다. 또한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와 있지만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하느님의 뜻을 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10절) 이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우리의 기도가 필요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는 우리의 모든 것 안에서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것을 말하며, 당신의 뜻이라는 힘과 그 뜻을 실행하는 능력을 주십사 청하는 것이다. 그분의 뜻은 그분께서 자녀로 삼으신 이들의 구원이기 때문이다.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11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아시는 하느님께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청한다. 이것은 구원의 양식으로 성체를 받아 모시는 우리가 죄로써 그리스도와 떨어지는 일이 없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양식으로 주님의 신성에 참여한다. 이 양식은 딱 하루에 충분한 만큼 주어진다. 이 양식은 ‘내일을 위한’, ‘영원을 위한’ 양식을 뜻하며 물질로 바뀌지 않는 양식을 말한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12절) 우리는 매일 죄를 지으며 산다. 그러기에 죄의 용서를 청하라고 하신다. 그러나 죄를 용서받기 위한 조건은 다른 사람을 먼저 용서하는 것이다.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는 이 청원은 우리가 우리에게 용서를 청하는 이들을 용서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전제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용서를 청하는 이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느님 아버지께 용서를 받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말로는 용서한다고 하면서 용서하지 않는 사람은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이미 용서받았으므로, 용서에는 하느님과의 확고한 계약이 담겨있다. 그것은 소홀히 할 때 앞에서 한 청원이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 있을 만큼 중요한 계약이다.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13절) 또한 우리는 이미 저지른 죄의 용서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새로운 죄를 짓지 않도록 도와주십사고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탄에게 이끌려 가도록 두지 마십사고 청하는 것이다.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13절) 이 기도는 앞의 모든 청원과 기도를 간결하게 요약하는 기도이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해주신다면, 우리는 모든 어려움에서 확실하게 보호받을 수 있다. 이 기도를 하면 더 청할 것이 없다. 악에 대해 하느님께 보호를 청하고 그것을 받게 되면 세상에서 하느님을 보호자로 둔 셈이니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주님의 기도를 잘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
주님께서는 주님의 기도 중에서 용서에 관한 것을 특별히 강조하신다. 주님께서는 이 기도로 우리가 자비로워지기를 바라신다. 사실 이 용서는 주님과 계약을 맺는 듯한 말로 청하고 있다.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계약을 지키지 않는다면, 청원 전체가 헛일이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14-15절) 하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용서는 그래서 잘못한 상대를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나를 위한 것이다. 이제 용서하면서 하느님과의 이 계약을 성실히 지키도록 하는 사순시기가 되도록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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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기도, 주님의 기도>
우리는 ‘기도’를 ‘주님께 말씀드리는 일’로만 생각할 때가 많은데, 만일에 그렇게만 생각하면,
주님은 늘 인간의 말에 응답만 하시는 분이라는 잘못된 고정관념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런 잘못된 고정관념에서 “왜 내 기도를 안 들어주시는가?” 라는 불평이 생깁니다.
우리 신앙의 역사를 보면, 항상 주님께서 먼저 인간을 부르셨고, 주님께서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기도는 주님과 나누는 대화입니다. 대화는 일방적으로 말하는 일이 아니라 잘 듣고 응답하는 일입니다.
특히 기도는 우리가 주님께 말씀드리는 일보다 주님의 말씀에 응답하는 일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일입니다. 응답을 잘하려면 먼저 잘 들어야 하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고, 주님의 뜻을 실천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그러니 그들을 닮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7-8)
미신과 우상을 믿는 사람들도 간절하게, 정성을 다하여 기도합니다. 그 ‘간절함’과 ‘정성’이 신앙인들보다 앞서는 경우도 많습니다. 또 신앙인들보다 더 착하게 살면서 선행과 사랑 실천을 잘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미신과 우상을 믿는 사람들은 대부분 소원을 비는 일은 잘하지만, 그냥 그것으로 그칩니다. 그저 ‘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만 생각합니다. 무엇인가를 많이 바치면 복을 많이 받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도 미신과 우상숭배의 문제점입니다.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 신을 ‘종으로 부리는 일’입니다.
미신과 우상숭배는 인간의 말을 잘 듣는 종을 찾는 헛된 일이고, ‘참 신앙’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 기도는 기도가 아니라 ‘빈말’입니다.
듣지 못하는 우상에게 하는 말이니 ‘빈말’이고, 자기 소원만 말하기 때문에 ‘빈말’이고, 많이 바치면 그만큼 복을 많이 받을 것이라고 헛된 기대를 하기 때문에 ‘빈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만일에 우리가 우상숭배자들처럼 하느님께 ‘빈말’로 기도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를 짓는 일이 됩니다.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라는 말씀은, 하느님은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는 분이고,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라는 뜻인데, 알고 계시고 그것을 주시니까 기도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을 잘 받으려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고, 그것을 어떻게 받아야 하는지도 알게 되고, 받은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이 말씀에는, 하느님께서 먼저 말씀하시니 그 말씀을 잘 들어야 한다는 뜻도 들어 있고, 그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빈말’이 아닌 기도, 즉 ‘참말’인 기도로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그런데 ‘주님의 기도’ 라고 해도 제대로 바치지 않으면 ‘빈말’이 되어버립니다. ‘주님의 기도’는 제대로 바칠 때에만 ‘참말’이 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마태 6,9-15)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라는 기도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라는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고,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라는 신앙고백이고, 자녀로서 충실하게 살겠다는 다짐입니다.(신앙인답게 살면서 충실하게 하느님만 섬기는 것이 자녀로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르 7,27) 신앙인답게 살지 않는 것은 자녀의 자격을 버리는 것이고, 혹시라도 미신에 빠진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을 강아지로 전락시키는 것입니다. 둘 다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거스르는 큰 죄입니다.
하느님을 ‘나의’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 그리고 용서에 관한 기도는, 우리가 모두 하나로 일치하기를 바라시는 주님의 뜻에 대한 응답이고, 하나가 되겠다는 다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특별히 ‘용서’를 강조하셨는데, ‘용서’는 우리가 하나로 일치하기 위한 필수 조건입니다.
‘아버지의 이름, 아버지의 나라, 아버지의 뜻’에 관한 기도는, 인류 구원과 하느님 나라 건설에 동참하고 협력하라는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고, 그렇게 하겠다는 다짐입니다.
오늘 일용할 양식에 관한 기도는 서로 사랑하고 나눔을 실천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대한 응답이고, 그렇게 하겠다는 다짐입니다. <그래서 이웃의 사정에는 관심도 없이 자기 혼자서만 잘 먹고 잘살기만 바라는 이기적인 사람은 주님의 기도를 바칠 자격이 없습니다.>
‘유혹’과 ‘악’에 관한 기도는, 온갖 유혹과 악에서 우리를 지켜 달라는 청원기도인데, 단순한 청원이 아니라, 온갖 유혹과 악에 맞서서 싸울 테니 도와달라는 청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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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청주교구 정용진 요셉 신부님]
사순 시기는 기도(祈禱)의 시간입니다. 교회는 이 시기를 시작하며 우리가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기도를 통하여, 특히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를 통하여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와 아주 특별한 관계를 맺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주님의 기도’를 보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창조주이시기만 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아버지이시기를 바라심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무엇보다 먼저 하느님 아버지를 신뢰하며 바치는 자녀들의 기도입니다. 그래서 아버지께 드리는 이 기도는 말을 많이 하고 자신이 바라는 것을 얻고자 자기만의 비법으로 하는 다른 민족 사람들의 기도와는 매우 거리가 멉니다. 주님의 기도는 우리에게 어떠한 걱정이나 두려움도 가지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너무도 잘 알고 계시는 아버지를 모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 원문의 순서를 따라가면 주님의 기도의 첫 번째 말은 “아버지”입니다. “아버지!” 하고 자녀가 아버지를 부르는 말입니다. 두 번째 말은 “우리(의)”입니다. 아버지가 나만의 아버지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다음에 “우리(의)”라는 말을 주셨습니다.(Pater noster) 그래서 주님의 기도는 자녀의 기도이며 형제들의 기도입니다. “우리 아버지”라는 말은 우리가 그분의 자녀들이라는 사실과 우리가 모두 형제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게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그토록 용서를 강조하시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형제들의 잘못을 용서하지 못하면 우리는 그분의 자녀도 서로의 형제도 되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기도는 아버지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믿음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바칠 수 없는 기도입니다.
이 신뢰를 바탕으로 우리는 아버지께 빵을 달라고 청합니다. 이 빵은 나만의 빵이 아니라 ‘우리’의 빵이고 ‘일용할’ 빵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기도는 우리가 아버지와 형제들 앞에서 ‘부족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기도입니다. 우리가 호화로움과 부유함을 요청하지도, 인생의 모든 부분을 걱정 없이 살 만큼 채워 달라고 요청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이 빵이 우리의 영혼과 육신을 위하여 날마다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이것이 미사 때마다 영성체 전에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이유일 것입니다. 말씀의 식탁과 성찬의 식탁에서, 말씀과 성체로 언제나 우리를 먹이시고 기르시는 하느님 아버지를 찬미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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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박형순 바오로 신부님]
어린 시절에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주일 미사에 참례하면, 미사가 참으로 재미없고, 지루하고 따분하기만 하였습니다. 그런 저에게 유일하게 기쁘던 시간이 있었는데, 바로 주님의 기도를 봉헌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유일하게 아는 기도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성호경도 제대로 긋지 못하고, 다른 기도문은 물론이고 신자들이 응답하는 부분의 기도는 제대로 하는 것이 하나도 없었는데, 어떤 연유인지 주님의 기도만은 누구보다 큰 소리로 외워서 바칠 수 있었습니다.
그 사실을 알고 계시던 부모님께서는 주님의 기도를 봉헌할 때가 되면 늘 제게 주님의 기도를 외우는 시간이라고 알려 주셨습니다. 그리고 제가 위풍당당하게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 부모님께서는 매우 기쁘게 웃으시며 그 모습을 바라보셨던 기억이 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를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예수님께서 기도는 빈말의 되풀이가 아니며, 말을 많이 해야 하느님께서 들어주시는 것이 아니라고 하시면서 기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빈말의 되풀이가 아니요 기도의 핵심이 담긴 기도,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입니다. 이 기도에 담긴 신학적 의미를 하나하나 되새기면서 기도할 수 있다면 참 좋은 일일 것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고,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고,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시고 …….”
그런데 막상 주님의 기도를 봉헌하다 보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고 시작한 기도는 어느새 “악에서 구하소서.” 하고 끝이 나고 말지요. 주님께서 직접 제자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알려 주신 기도가 형식적인 기도가 되는 듯한 기분이 드는 순간입니다. 그래도 희망과 용기를 잃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바친 어린이의 기도를 웃으면서 기쁘게 쳐다보던 부모의 마음을 생각한다면, 하느님 앞에 어린이요 자녀인 우리가 기도를 바치면, 부모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하느님께서도 웃으시면서 우리를 기쁜 마음으로 바라보아 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의탁하는 마음으로 “아빠, 아버지”께 우리의 기도로 웃음을 드려 보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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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강동진 알로이시오 신부님]
<올바른 청원기도>
주님께 사사로이 무언가를 청하면서 자꾸만 같은 청을 되풀이하는 것은 욕심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이 나의 구원에 꼭 필요한 것인지, 주님께서도 그것이 내게 필요하리라고 생각하시는지 충분히 헤아려보지 않고 내 욕심대로만 청하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청원기도는 쓸데없이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빈말이 되고 맙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구하기도 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알고 계십니다.
따라서 청해도 얻지 못한다면 그것이 지금 당장은 나에게 필요 없는 것일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먼저 청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는 주님께서 직접 가르쳐주셨습니다. 바로 주님의 기도입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길 진심으로 청하고 있습니까?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길 마음을 다해 청하고 있습니까? 우리 죄를 용서받기 위해 우리에게 잘못한 이들을 용서하려고 애쓰고 있습니까? 유혹에 빠지지 않기를, 그래서 악에서 구원받기를 온 힘을 다해 청하고 있습니까?
구원에 꼭 필요하고 그래서 반드시 청해야 할 것을 먼저 청하지 않는다면 다른 사사로운 청들은 욕심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를 정성 들여 바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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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우리 아버지 뜻대로>
마태오 6,7-15 (올바른 기도, 주님의 기도)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그러니 그들을 닮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우리 아버지 뜻대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뜻대로
땅에서
나와 그대는
아버지의
아들이요 딸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뜻대로
땅에서
나는 그대에게
그대는 나에게
형제요 자매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뜻대로
땅에서
나와 그대가
하나 되어 우리는
거룩한 아버지의 이름이 되고
아버지의 나라가 되고
아버지의 뜻이 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뜻대로
땅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일용할 양식이 되고
용서가 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뜻대로
땅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유혹에 맞설 힘이 되고
악을 이겨낼 선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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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기도는 하느님과의 소통입니다>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기도한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누군가가 기도해 준다고 하면 마음의 위로를 받습니다. 본인은 기도에 소홀히 하면서도 남에게는 기도해 준다고 말하고 또 기도해 달라고 청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기왕 기도할 바에야 효과 있는 기도, 올바른 기도를 해야 하겠습니다. 그저 입으로 하는 기도가 아니라 되는 기도, 열매를 맺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빈말을 되풀이 하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6,7-8)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청하기도 전에 알고 계신다니 청하는 바가 하느님 마음에 드는 것인지를 먼저 살펴야 합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기도의 본질적 요소는 많이 생각하는 데에 있지 않고, 많이 사랑하는 데 있다. 기도란 사랑의 행위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고 하였습니다. 더 많이 사랑함으로써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 마음을 잘 살아가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고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있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사랑함으로써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과 잘 통할 수 있습니다. 기도란 하느님과의 소통입니다.
많은 분이 묵주기도, 9일기도, 15기도, 33일 봉헌기도, 자비의 기도,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 등등. 성인 성녀들이 즐겨 봉헌하였던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 기도에 따르는 삶의 쇄신과 실천 없이 목표한 바를 채우기에 급급해하면서 꼭 들어주실 것이라고 믿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기도는 사랑으로 가득 차 있을수록 그만큼 더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모든 기도의 기초입니다. 많이 하는 것보다, 깊이 기도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루이 에블린은 “사람에게 비는 하느님”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고 열심을 다해 공덕을 쌓고, 많은 것을 청하지만 실제로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구원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기를 빌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먼저, 더 많이, 더 깊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한상봉) 그러므로 구하기도 전에 우리의 뱃속까지 환히 꿰뚫어 보시는 아버지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때때로 기도가 들어지지 않는다고 생각될 때 이사야서 말씀을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시온은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다. 나의 주님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고 말하였지.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이사49,15) 들어주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직 때가 되지 않았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요한14,14)
그러나 “결코 의심하는 일 없이 믿음을 가지고 청해야 합니다. 의심하는 사람은 바람에 밀려 출렁이는 바다 물결과 같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주님에게서 아무것도 받을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야고 1,6-7) 나보다 나를 더 환하게 아시고 필요한 모든 것을 예비하시고 채워주시는 하느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내가 원하는 때 내가 원하는 방법으로 주시지 않고 더 좋은 것을 당신께서 주시고자 하는 때 당신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주심을 믿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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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7~8년 전에 해외로 특강 나갔던 적이 있습니다. 그곳의 한인 교회공동체의 초대로 특강을 하게 된 것이었지요. 특강을 마친 다음 날, 저를 초대해 준 신부님과 신자들과 함께 점심 식사를 위해 도심지 레스토랑에 들어갔습니다. 날이 너무 좋아서 야외 테라스에서 햇빛을 받으며 식사하는데, 한 신자분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즘에는 한국 관광객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습니다. 모두 등산복을 입고 오시거든요. 유행만 따르는 잘못된 모습이라고 봅니다.”
당시에 ‘노스페이스’라는 상표가 큰 유행을 주도했고, 그래서 가격이 만만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젊은이나 어른이나 상관없이 이 옷을 사 입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외국에서는 이상하게 보였을 것 같습니다. 다 똑같이 알록달록한 등산복을 입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이 역시도 개인의 취향이 아닐까요? 무조건 잘못이라고 말할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예전에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서 ‘모나리자’를 봤던 기억이 납니다. 그곳에도 한국 사람이 참 많았는데, 작품 감상보다 유명한 그림 앞에서 사진 찍겠다는 마음이 더 커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잘못된 것일까요? 그림 볼 줄도 모르는데, 굳이 세세하게 쳐다보기보다는 사진이라도 남기는 것이 더 의미 있어 보이지 않습니까?
나와 다른 생각을 하고 또 다른 행동을 한다고 해서 틀린 것은 아닙니다. 말 그대로 나와 다를 뿐입니다. 다르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면 다양성 안에서 일치를 볼 수 있겠지만, 틀렸다고 단정하는 순간에 일치는 전혀 찾아볼 수 없게 됩니다.
다른 이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주님께서는 ‘하나 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는 과연 다양함을 지니신 주님과 하나 되고 있나요? 사람과도 하나를 전혀 이루지 못하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마태 6,9)면서 가르쳐주신 ‘주님의 기도’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마태 6,12)
주님의 용서보다 먼저 우리의 용서가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다음 구절에서 이렇게 설명해주시지요.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마태 6,14)
용서는 틀렸다고 단정해서는 할 수 없는 덕목입니다. 그 사람의 다양성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용서를 통해서만 주님의 용서가 우리를 향해 펼쳐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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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아버지께서는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8)
우리가 하느님 앞에 다가오는 순간, 이미 그분은 우리가 온 까닭을 알고 계십니다. 밥이 필요한지, 능력이 필요한지, 알고 싶은 게 있는지, 아니면 그저 당신과 사랑을 나누고 싶은지... 마치 자신을 향해 엉금엉금 기어오는 아기에게 지금 젖이 필요한지, 기저귀를 갈고 싶은지, 뭐가 무서운지, 그저 안기고 싶은지 한 눈에 아는 엄마처럼 말입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마태 6,7)
그러므로 기도할 때 많은 말이 필요치 않습니다. 아니, 그분께는 필요치 않다고 해야 정확할 것 같습니다. 오히려 말이 필요한 건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의 입을 통해 발설되는 우리의 욕구, 슬픔, 좌절, 청원 들을 통해 자신을 깨닫고 정화하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주님의 기도에는 인간으로 살아가면서 하느님께 바라야 하는 내용이 충만히 들어 있어 가장 완전한 기도라 하지요. 아버지의 이름과 나라와 뜻, 우리가 살아갈 양식과 관계성과 죄악에서의 보호. 예수님께서 알려 주신 것 외에 더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건 탐욕이고 이기주의일 겁니다. '하느님 앞의 인간'으로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본질을 아직 깨닫지 못한 것일 수도 있고요.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이사 55,11)
하느님 말씀의 힘이 드러나는 구절입니다. 그 말씀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또 이루어진 모든 것에게 "보시니 좋다"고 말씀하셨지요. 이미 자연과 모든 피조물은 그 자체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진 작품입니다.
뭔가 한참 모자라는 것 같아 자꾸만 하느님께 더 청하고 더 조르고 싶어하는 우리도 실은 있는 그대로 하느님 말씀의 결과물이기에 그분 뜻이 완수된, 완수되고 있는 존재입니다. 완수되어 가는 과정이라면 누구보다 완수에 관심을 기울이실 분은 바로 하느님이시기에 그 또한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반드시 완수하고야 만다." 이 말씀 안에 깃든 하느님 의지가 느껴지십니까? 이는 전지전능하신 절대자 하느님의 강력한 바람이고 신념입니다. 그 의지가 곧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과 시간 안에 함께 현존하며 그분과 현재를 공유하고, 오로지 그분 뜻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것이 오늘 가르쳐 주시는 기도의 골자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다해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그 자체로 하느님의 말씀이 완수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여러분은 기도를 잘하십니까? 기도를 많이 하십니까? 주로 어떤 기도를 하시나요?
어떤 장로님은 정말 기도를 멋지게 하시더군요. 하시는 기도를 듣고만 있어도 '아멘'이 저절로 나옵디다. 어떤 자매님은 묵주기도를 하루에 백 단을 바치더군요. 참으로 부럽습니다. 어떤 형제님은 절을 삼천 배 올렸다고 하더군요. 저는 가끔 33배를 하는데도 힘들던데….
예수님은 오늘 기도할 줄 모르는 우리에게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시네요.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기도는 양에 비례하지 않는다네요. 오히려 마음을 담아 단순하게 기도하라네요.
쓸데없는 것 주절주절 청하지 마라네요. ‘하느님이 이미 필요한 것 다 알고 계신다’고요. 그냥 하느님께 찬미와 칭송을 드리고 소박하게 이 험난한 세상에서 하느님의 착한 자녀로 살아갈 은혜만 청하라네요. 그 나머지는 사실 다 우리의 욕심이지요.
오늘 단순하게 그분께서 가르쳐주신 주님의 기도를 각자 벗님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정성껏 세 번만 바쳐 보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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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의 기도>
-기도와 삶-
“주님, 당신은 대대로 저희 안식처가 되셨나이다. 당신은 영원에서 영원까지 계시나이다.”(시편 90,1.2)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해야 삽니다. 살기 위하여, 영혼이 살기 위하여 기도합니다. 인간 무지와 허무에 대한 궁극의 답도 기도뿐입니다. 잘 바르게 기도하고 싶은 깨끗한 욕심, 청정욕은 얼마든지 좋습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하는 대로 살고 사는 대로 기도합니다. 기도와 삶은 함께 갑니다. 기도 없는 삶은 공허하고 삶이 없는 기도는 맹목이, 광신이 될 수도 있습니다. 결국 기도와 삶은 하나라는 말입니다.
기도는 간절하고 항구해야 합니다.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것은 교회의 한결같은 가르침입니다. 또 오늘 복음의 주님 말씀처럼, 기도할 때에 빈말을 되풀이하지 말아야 합니다. 때로 말을 많이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하지만, 절대 그러지 말라 하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알고 계셔도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것은 기도를 통해 정말 무엇이 필요한지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원하는 것’이 아닌 참으로 ‘필요한 것’을 청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베네딕도 성인의 기도에 대한 가르침도 잘 기억하실 것입니다.
“많은 말로서가 아니라. 마음의 순결함과 통회의 눈물로써 우리 간청이 들어 허락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기도가 하느님의 은총에서 영감을 받은 경우가 아니라면 기도는 짧고 순수해야 한다. 모든 이가 모여 있을 때, 기도는 짧게 해야 한다.”(성규 20,4-5ㄱ)
기도와 더불어 얼마 전 로마교구 전례 담당자들에 대한 교황님의 강론에 대한 즉석연설에 공감했습니다.
“길고 추상적인 강론은 재난이며 강론은 반드시 10분 이내가 되어야 한다. 종종 사람들이 40분이 넘는 철학강의를 듣는다고 말한다. 강론은 학술 발표문이 되어서는 안된다. 강론은 8-10분 정도가 적당하며 신자들이 가정으로 돌아가 다시 곱씹을 수 있도록 생각과 느낌, 이미지를 포함한 강론이 되어야 한다.”
기도중의 기도가, 기도의 모범이 바로 오늘 복음인 주님의 기도입니다. 아주 간절하고 절실한, 단순하고 본질적인 기도로 예수님의 삶이 압축 요약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서 우리도 주님을 닮아 오늘 지금 여기서 단순한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살게 됩니다.
기도 또한 평생과정이며 평생 훈련입니다. 기도의 훈련입니다.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가 아쉬워, 참으로 살기 위해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것입니다. 참 중요한 영성훈련이 기도의 훈련입니다. 주님 친히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신 다음 당신의 기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앞서 세 청원은 하느님 중심의 청원입니다.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라는 서두의 말마디처럼 하느님은 우리 모두의 아버지이며 우리는 아버지의 자녀로서 서로 형제임을 확인합니다.
아버지의 이름, 아버지의 나라, 아버지의 뜻이 언제나 우선적 관심사가 되고 우리 삶의 중심인 아버지를 향하게 합니다. 그리하여 ‘아버지의 자녀답게’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도록, 아버지의 나라가 오도록,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우리 또한 최선의 노력을 다해 협조해 드리며 책임을 다하게 됩니다.
어제 수도원 23년도 예결산회의를 하면서 순간, “위로는 하느님, 아래로는 돈”이라는 생각이 불연 듯 들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하느님 중심”의 하늘을 잃어버리면 곧장 “돈 중심”의 비인간화의 삶이 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아주 오래전 신학교 때 문세화 신부님의 강의 중 “아버지의 자녀답게” 살라는 말씀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인간답게 너무 추상적이다, 아버지의 자녀답게 아주 구체적이고 분명하다. 그러니 아버지의 자녀답게 존엄한 품위의 삶을 살아야 한다.” 바로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게 해주는 기도가 주님의 기도입니다. 그래서 사제는 미사시 주님의 기도를 바치기 전 “하느님의 자녀되어, 구세주의 분부대로 삼가 아뢰오니” 권고합니다.
이어 우리가 땅에서의 현실 생활에 절대적 필수 요소인 넷입니다. 일용할 양식에 대한 청원이요, 용서해달라는,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는, 악에서 구해달라는 간절한 청원입니다. 간절한 네 청원과 더불어 우리의 협조도 필수입니다. 일용한 양식을 위해, 용서를 위해,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해, 악에서 구함받기 위해 우리 또한 최선을 노력을 다해 응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어 주님의 기도에 더하여 주님은 용서를 다시 강조하십니다. 용서를 청하기전 우선 다른 이들을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다른 이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용서하지 않는다 하십니다. 용서도 의식적, 의도적 훈련입니다. 기도의 훈련이듯, 용서의 훈련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주님의 기도를 진지하게 바칠 때 제1독서 이사야서 말씀대로 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말그대로 하느님 말씀의 위력입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와 눈이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
그대로 주님의 기도를 두고 하는 말씀 같습니다. 무엇보다 주님 기도의 자리는 미사전례입니다. 우리는 미사전례 중 영성체 예식 시 다 함께 아버지의 한 가족, 한 자녀들이 되어 주님의 기도를 정성껏 바친 후 일용할 양식인 성체를 모십니다. 바로 한마음으로 바치는 주님의 기도와 더불어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충실한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하느님의 나라를 살게 하십니다.
“주님, 저희가 받아 모신 이 성체로 현세의 욕망을 억제하며, 천상 것을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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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마태6,7.9)
<구원의 절대적 행위요 이유인 용서!>
오늘 복음(마태6,7-15)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직접 가르쳐 주신 유일한 기도이자, 가장 완전한 기도인 주님의 기도에 관한 말씀'입니다.
'기도는 주님과 만남이요 대화'입니다. 우리는 다양한 기도의 형태로, 곧 '감사와 찬미기도로, 청원기도로, 그리고 때로는 탄원기도의 형태로' 주님을 만나고 주님과 대화합니다.
'주님의 기도는 청원기도의 완전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 무엇을 청하는 기도를 바칠 때, 우리는 종종 내가 바라는 것을 우선으로, 또 집중적으로 바치곤 합니다. 청원기도를 바칠 때에는 하느님 아버지의 것, 하느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이 이루어지기를 먼저 청하고, 그리고 우리의 것, 나의 것이 이루어지기를 청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이를 다르게 표현하면, 하느님께 먼저 '감사와 찬미의 기도를 바치고, 그 다음에 청원기도와 탄원기도를 바쳐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자유 청원기도의 형태'이기도 합니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6,12)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6,14-15)
용서가 가장 힘들고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용서는 내가 살기 위한, 내가 구원받기 위한 절대적 행위'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또한 '내가 너를 용서해야 하는 절대적 이유'입니다.
혹시 지금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주님께 용서의 은총을 청하고, 이 기도의 힘으로 너를 용서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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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OIOXAPB0B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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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마태 6, 9)
하느님의 사람은
기도로 살아갑니다.
신앙의
사람들은 정말
주님의 기도로
살아갑니다.
모든 생명은
하느님께
기도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기도가 사라지면
용서도 사라집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주님의 기도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가장 따뜻한 이름
그것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입니다.
아버지께서
주시지 않으시면
일용할 양식도
죄의 용서도
힘겨운 유혹도
떨칠 수 없는
우리들입니다.
주님의 기도를
닮아가는
기도의
자녀들입니다.
기도하시는
주님과 함께
우리는
살아갑니다.
기도하는 삶이
은총의 삶이며
구원의 삶입니다.
이제 움켜쥐고
있던 것을 놓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기도드립니다.
우리
삶의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아버지의
뜻입니다.
오늘도
주님의 기도가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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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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