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12월 19일 목요일
판관기 13,2-7.24-25 루카 1,5-25
오늘 독서는 ‘삼손’의 출생에 대한 신비로운 이야기입니다. 아이가 없던 마노아와 그의 아내는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하여 아들 삼손을 얻습니다. 그러나 오늘 독서에는 하느님의 사람이
아내에게 전한 약속을 마노아가 어떻게 의심하다가 믿게 되었는지에 대한 부분이
생략되어 있습니다(판관 13,8-23 참조).
아내의 임신을 알게 된 마노아는 주님께 다시 기도드리며 하느님의 사람을 다시 보내 주시기를
청합니다. 다시 온 그분이 주님의 천사인지도 모른 채 마노아는 그분의 이름을 묻습니다.
그러나 천사는 이름 대신 “그것은 신비한 것”(13,18)이라는 답을 주었고,
그제야 마노아는 “‘신비한 일을 하시는 분’ 주님께”(13,19) 제사를 바칩니다.
제단의 불길이 하늘로 타오르는 것을 보고서야 하느님을 믿게 된 마노아와 그의 아내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오늘 복음 속 즈카르야의 의심과 연결됩니다. 의롭고 흠 없이 살아온 즈카르야와
그의 아내 엘리사벳은 마노아 부부처럼 아이를 가지지 못하였고 나이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즈카르야가 사제로서 성전에서 분향하려는 순간, 천사가 엘리사벳의 잉태 사실과
아이의 소명을 계시합니다. 그러나 즈카르야는 자신이 늙었고 아내 엘리사벳도 나이가 많다는
현실적인 이유로 천사의 말을 의심합니다.
결국 그 의심의 대가로 즈카르야는 벙어리가 되었습니다.
제사 때 하늘로 올라가던 불길을 보고 믿게 된 마노아와 달리, 즈카르야는 혀가 굳어
하느님의 말씀을 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신비한 일을 하시는 주님’께서 말씀하실 때
사람은 잠잠히 있어야 한다는 것을 주님 탄생을 앞두고 배웁니다.
하느님 말씀을 귀 기울여 듣고 마음에 새기며 조건 없이 따른다면 참된 행복이 주어집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루카 1,45)
서울대교구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
정진만 안젤로 신부
12월 19일 목요일
판관기 13,2-7.24-25 루카 1,5-25
세례자 요한의 탄생 예고는 루카 복음서에서 예수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첫 번째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탄생 예고에 앞서 세례자 요한의 탄생 예고를 배치한 까닭은
역사적 사실을 증명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배열 순서는 하느님의 구원 역사 안에서
세례자 요한의 위치와 역할을 반영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길을 마련하고자
파견된 예언자입니다.
오늘 복음의 중심 구절은 13절입니다. 즈카르야는 주님의 천사에게서 아내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아 줄 것이라는 예언을 듣습니다. 이어서 천사는 즈카르야에게 아기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부르도록 지시합니다.
‘요한’은 “하느님께서 자비를 보여 주셨다.”라는 뜻을 가진 ‘요하난’에서 유래합니다.
천사를 통하여 전달된 ‘요한’이라는 이름은 하느님의 자비가 구체적으로 실현될 것임을
암시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먼저 아이를 못낳는 여자 엘리사벳에게 자비를 베푸실 것이고
(1,58 참조), 그분의 자비는 더 나아가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게도 베풀어질 것입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과 역할 수행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천사의 예고에 따르면, 태어날 아기는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 이스라엘 백성을
회개로 인도하는 설교자,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자 파견된 예언자입니다(1,15-17 참조).
그 아기는 주님 앞에서 큰 인물이 될 것이므로 그의 출생은 많은 이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주지만,
그 기쁨과 즐거움은 메시아의 탄생을 준비하는 성격을 지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선포된 탄생에 관한 천사의 예고는 이성적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천사의 선포를 거부한 즈카르야의 부정적 반응은 우리 각자의 모습을 반영할 수 있습니다.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하느님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있나요?
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12월 19일 목요일
판관기 13,2-7.24-25 루카 1,5-25
말문이 막혀야!
오늘은 주님의 오심을 가까이서 준비하는 또 한사람, 즈카르야의 얘기입니다.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요한의 아버지가 됨으로서 즈카르야도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게
된 것이고 그래서 구원의 역사에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는 직접 예수님의 아버지가 되는 것이 아니기에 어찌 보면 구원의 역사에서
한 발자국 벗어나 있는 객관자입니다. 그런 객관자가 어느 날 느닷없이 자기도 모르게
구원의 역사에 편입이 되고 그 위대한 역사를 뒤늦게 알고 찬미하게 됩니다.
이런 점은 우리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 하느님 구원의 도구가 되고
나중에서야 그것을 깨닫고 하느님을 찬미하곤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아침 성무일도에서 우리를 대표하는 그의 찬미가를 노래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해하기 힘든 것이 있습니다. 인간적으로는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을 목도하고
즈카르야와 마리아 모두 그 의문을 얘기하는데 어찌해서 마리아는 벌을 받지 않고
즈카르야는 오늘 보듯이 말문이 막히는 벌을 받는가 하는 점입니다.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
는 즈카르야의 물음이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는 마리아의 물음보다 더 불경스럽기 때문일까요?
‘왜?’라는 물음이 말은 같지만 두 가지 ‘왜?’가 있습니다.
왜 그렇게 했는지 그 의도를 알려고 들지도 않고 이미 한 행위에 대해 비판적으로
따지는 것이 그 하나이고, 왜 그렇게 했는지 그 의도를 모르기에 알기 위해 그 의도를
곰곰이 생각하는 것이 다른 하나입니다.
‘어떻게?’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습니다. 왜가 행위의 원인적인 의문이라면
어떻게는 행위의 과정적인 의문이고, 왜가 행위의 의도가 무엇이냐의 의문이라면
어떻게는 그런 행위가 어떻게 가능하냐의 의문입니다.
그러므로 ‘왜?’와 마찬가지로 그것이 가능함을 불신하는 ‘어떻게?’와
그것이 가능한 이치를 알고 싶어 하는 ‘어떻게?’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마리아는 그 이치를 알고 싶어서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지를 물었던 것이고
오늘 복음에서 천사의 응답을 보면 즈카르야는 믿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보라, 때가 되면 이루어질 내 말을 믿지 않았으니,
이 일이 일어나는 날까지 너는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하게 될 것이다.”
믿게 될 때까지는 말문이 막힙니다. 불신의 말은 더 이상 꺼내지도 말라는 뜻입니다.
나의 입에서 불신의 말은 싹둑 잘라내야 합니다.
우리의 입에서 불신의 말은 아예 입에 담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 서로 간에 불신이 유포되어서도 아니 되지만 하느님 능력에 대한 불신이
우리 안에서 자라게 해서는 안 됩니다.
요즘처럼 “I can do it!"이라는 말이 유행인 세상에
“God can do any thing!"
"Impossible is nothing to God"이라는 말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 되기 위해서
“어찌 그런 일이?”라는, 불신의 말을 토해 내는 말문은 막혀야 하겠습니다.
작은 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에서
가톨릭사랑방 catholics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