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다섯 시, 회사 기숙사 샤워실에 들어갔다. 샴푸 꼭지를 한 번 눌러 머리에 문질렀다. 한 번 더 눌렀는데 샴푸가 나오지 않았다. 용기 안을 보니 바닥에 얕게 고인 것이 전부였다. 뒤집어서 탁탁 턴 뒤 샴푸질을 했다. 머리를 말리고 방에 돌아와 남는 샘플이 있나 서랍을 뒤졌지만 보이지 않았다. 월급날은 아직 2주나 남아 있었다.
다음 날 아침, 같은 방을 쓰는 동기에게 샴푸가 갑자기 떨어졌다며 얻어 썼다. 그 다음 날에는 다른 동기에게 같은 말을 하며 다시 한 번 얻어 썼다. 그 뒤로는 더 이상 못 하겠다 싶어서 비누로 머리를 감기 시작했다. 긴 머리카락이 점점 뻣뻣해졌다.
스물여덟, 3월에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쉬지 않는데도 일은 쌓여만 갔다. 침대에 등을 붙이고 자는 시간이 하루에 서너 시간도 안 됐다. 입사한 지 삼 주가 지났을 무렵, 하루 종일 전화벨이 울려댔다. 휴대 전화를 확인하니 외할머니, 이모, 삼촌에게서 부재중 전화가 스무 통 넘게 와 있었다.
가장 위에 보이는 이모의 문자. 'ㅇㅇ아, 네 엄마가 외할머니 건물을 팔아 버렸어. 그러고는 연락이 안 돼.' 갑자기 이게 무슨 말인가 싶었다. 이모가 오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 시간 만에 엄마와 통화한 뒤 문자 내용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엄마는 당장 돈이 필요하다고 했다. 집이 경매로 넘어갔고, 내 이름으로 돈을 빌렸으니 곧 여기저기에서 전화가 올 거라고, 그저 동의만 하면 된다고 했다. 수화기 너머로 엄마의 말소리가 이어졌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한 대부 업체는 내가 직접 가야만 돈을 빌려준다고 하니 꼭 오늘 안에 가서 300만 원을 빌려 오라고도 했다. 전화를 끊자마자 세 통의 전화가 연달아 왔다. 이름을 확인한 후 이것저것 물었지만, 마지막 질문은 모두 같았다. "동의하십니까?" "네, 동의합니다." 나는 이 말만 반복했다.
저녁 일곱 시, 근무 중간에 잠깐 나왔다. 직접 와야 돈을 빌려준다는 대부 업체 사무실에 도착했다. 노란 인형이 조명 아래에서 춤을 추며 걱정 말라고 노래하는 TV 광고는 흥겨웠지만, 사무실의 분위기는 그렇지 않았다. 상담원들이 무표정한 얼굴로 바쁘게 전화를 돌리고 있었다. 한 사람이 미리 연락 받았다며 여러 장의 서류를 들이밀었다. 동그라미 친 곳에 사인만 하면 된다고 했다.
무슨 내용인지, 이자가 얼마인지도 모르고 사인을 하고 또 했다. 나는 당장 300만 원을 빌려야 한다는 사실밖에 몰랐다. 대출을 받으며 개인 정보가 유출됐는지, 이후 거의 1년 동안 매일 여러 대부 업체로부터 전화가 왔다. 20대 젊은 여자가 수천만 원을 빌렸으니 절박한 상황이라고 소문이 난 걸까, 다들 돈을 빌려주려고 안달이었다. 낮은 이율로 더 많은 상품에 가입하라며 내게 썩은 동아줄을 내밀었다.
다음 월급날까지 비상금 삼천 원은 남겨 둬야 했다. 하루아침에 빚을 지고 나니 샴푸에 이어 로션도 떨어졌다. 마침 같은 방 동기가 수분 크림 용량이 너무 커서 1년을 써도 다 못 쓸 것 같다며 같이 쓰자고 말하는데, 그게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눈치가 보여서 저녁에만 손가락 끝에 한 번 찍어 얼굴에 최대한 얇게 펴 발랐다.
빚이라는 단어를 24시간 내내 품고 살았다. 기쁠 때도 슬플 때도 그 단어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당직이 아닌 날에도 숙소에 틀어박혀 있었다. 밖으로 나가는 순간 돈 쓸 일이 자꾸만 생겼기 때문이다.
빚에 짓눌려 가난이라는 단어는 떠올리지도 못했다. 돈이 생기면 오로지 빚을 갚는 데 썼다. 미래를 계획하기는 커녕 그저 하루하루 버텨내기 급급했다. 빚이 얼마가 남았는지도 굳이 생각하지 않았다. 다행히도 시간은 흘렀고 5년 만에 빚을 모두 갚았다.
대부 업체에 전화해 몇 번씩 확인했다. "이제 다 갚은 거 맞죠? 제가 더 해야 할 일은 없는 거죠?" 마지막 통화를 끝내고 나서야 실감이 났다. 이제 다음 달부터 돈을 모을 수 있겠구나. 내게 남은 것은 통장 잔액 삼십만 원과 낮은 신용 점수였다. 그 시간은 내게 깊은 자국을 남기고 지나갔다.
그로부터 9년이 지났다. 주변 친구들과 달리 나는 여전히 번듯한 아파트 한 채 없다. 곧 만기인 일시 상환 대출과 마이너스 통장도 있다. 하지만 이제는 월급날을 기다리지 않고도 샴푸를 미리 사 둘 수 있다. 새 것을 꺼내 선반 위에 올려 두고 내일을 준비할 수 있다. 매일 아침 머리를 감으며, 깊이 팬 그 시절의 자국도 옅어져 간다.
황세원 | 서울시 은평구
아차산 일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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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글 감사 합니다
반갑습니다
동트는아침 님 !
다녀가신 고운 걸음
감사합니다 ~
새로 맞는 한 주도
건강하고 행복한
순간들로 채워지시길
소망합니다 ~^^
안녕 하세요..........망실봉님
감동방에 늘 좋은 글 고맙습니다..
변덕스러운 날씨 건강 조심 하세요
오늘도 수고 많으셨어요^^
반갑습니다
핑크하트 님 !
다녀가신 고운 걸음
감사합니다 ~
일기불순한 환절기
늘 감기 유의하셔서
강건하게 지내시길
소망합니다 ~^^